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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묵상글 -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 등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20|조회수63 목록 댓글 0

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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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묵상글.
1차(0619. 21:20), 2차(04:45), 3차(10:10)




6월 20일 묵상글, 19일 21시 2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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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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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6,24–34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리고 이어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목숨과 몸을 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시고
들꽃을 보라고 하시며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것들도 기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걱정이 없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걱정이 얼마나 깊은 인간의 본능인지를 아시는 주님께서
그 걱정의 중심을 다시 정돈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모르는 분처럼
무작정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필요한 것을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걱정이 하느님보다 더 큰 주인이 될 때 생깁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복음에서
인간 마음이 무엇에 매여 있는지를 깊이 보도록 초대합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단순히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차원을 넘어
마음의 중심이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재물은 도구일 수 있지만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주인이 되면
사람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비교와 경쟁, 자기보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님이실 때
재물도, 시간도, 삶도
제자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꽃을 말씀하시는 대목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돌보심은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 안에 이미 새겨져 있습니다.


암브로시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장면은 인간에게
자연을 통해 배울 겸손을 가르칩니다.
새와 꽃은
사람처럼 계산하고 쌓아 두지 않아도
하느님 안에서 존재의 리듬을 살아갑니다.
인간만이 불안 속에서
끝없이 더 움켜쥐려 하며
자기 생명을 자기 손으로 완전히 지키려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집착을 풀어 주십니다.
또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은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입는 문제와 무관한 추상적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삶의 중심이
하느님께 맞추어질 때
다른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보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먼저 하느님을 찾는 질서 안에서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친절 / 선행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친절이 불안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불안하면 닫히고
두려우면 움켜쥐며
부족할까 봐 남을 밀어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돌보심을 신뢰하는 사람은
조금 더 열 수 있고
조금 더 나눌 수 있으며
조금 더 친절할 수 있습니다.
선행은 바로 이 신뢰의 열매입니다.
내 몫이 줄어들까 봐 무조건 움켜쥐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으며
필요한 이에게 손을 여는 삶입니다.


이웃종교 / 생태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씀은 생태적 차원에서도 깊습니다.
걱정과 탐욕은
개인만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과도한 소비와 축적의 논리로 몰아갑니다.
에드워드 골드스미스가 말한 전통과 생태의 지혜는
바로 여기서 복음과 만납니다.
자연의 질서를 신뢰하고
절제와 공동체성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도 닿아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는다는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삶보다
더 바르게 관계 맺는 삶을 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크게 걱정하고 있는가?
그 걱정이 하느님보다 더 큰 주인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나는 재물을 도구로 쓰고 있는가,
아니면 재물의 종이 되어 가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고 있는가,
아니면 끝없이 부족함의 공포 속에 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자유로 부르십니다.


주님,
제 마음이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고
재물을 주인처럼 섬기지 않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먼저 찾는 질서를 배우게 하시며
당신 돌보심을 신뢰하는 친절과
나눔으로 이어지는 선행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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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3년 ‘Chat GPT’가 세상에 나왔을 때입니다. 컴퓨터가 사람과 대화하는 기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복잡한 프로그램을 몰라도 친구와 대화하듯이 질문하면 컴퓨터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제 ‘검색의 시대’가 저물고 ‘대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과 함께 어느덧 3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도움을 받은 것은 ‘번역’이었습니다. 한국어 강론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부탁하면 실시간으로 제가 하는 번역보다 더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번역을 보여주었습니다. 교구의 공문이나 영문으로 오는 메일도 실시간으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저는 번역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었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 계획과 일정 정리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여행 계획을 질문하면 교통, 숙박, 장소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사목에도 도움을 받습니다. 성경 말씀을 찾아 주기도 하고, 제가 쓴 글을 요약해 주기도 합니다. 지도 대신 내비게이션, 운전 대신 자율 주행이 있듯이 인공지능은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29년이 되면 ‘에이전트 인공지능’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인공지능이 질문에 응답하는 수준이라면, 앞으로의 인공지능은 ‘비서’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기업의 임원에게는 부속실이 있습니다. 부속실 직원은 임원의 일정을 정리하고 필요한 자료를 준비합니다. 앞으로의 인공지능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병원 예약도 대신해 주고, 건강 관리도 도와주고, 은행 업무도 처리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기 마련입니다.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도 있습니다.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기술은 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해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상속에 대해서 미국은 한국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상대적으로 덜 하는 것 같습니다. 잘 키워주고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들도 부모의 재산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독립하면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재산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이민 2세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재산은 부모님의 것이니 부모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재산을 자녀에게 남길 수도 있고, 기부할 수도 있고, 여행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선택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세상의 재물을 많이 물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더 귀한 것을 물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부모님께서는 말보다 삶으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모님은 건강하게 사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 속에 선종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앙 교육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릇과 같습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고,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됩니다. 돈과 성공만 담으면 불안과 경쟁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담으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먼저 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인공지능은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자동차와 좋은 집도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돈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 삶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편리함이 커질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야 할 것은 단지 재산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붙들어야 할 것도 단지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라는 그릇 안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가장 먼저 담을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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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섬기거나, 물질과 재능이나 기능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자신의 뜻을 섬기지 않고, ‘주님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하는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믿고 섬기는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여, 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섬기는가? 하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둘째>로 신앙인은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신앙인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 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선사되어 와 있는 것을 찾는 일입니다.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 이미 우리 가운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의 삶을 두 주인을 삼기지 않으며, 하느님께 의탁하고 자신을 걱정하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먼저 찾는 삶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누구를 섬기도 있는가? 참된 주님이신 하느님인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생각이나 물질인가? 혹 그렇게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또 나는 지금 무엇을 근심하고 걱정하고 바라고 있는가? 누구에게 의탁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인가?
진정, 나는 모든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찾고 있는가? 대체 누구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가? 자신의 기쁨인가? 하느님의 기쁨인가?


주님! 제 생각과 편리, 이기심과 자애심에 떨어져
한갓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채우느라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의로움이 저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의 주님이시오니,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주님!
제 생각과 편리, 이기심과 자애심에 떨어져
한갓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재물을 섬기느라, 저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 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물로 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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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목숨을 ……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어조로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들추어내십니다.
목숨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구체적 생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이는 단순히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불안으로 삶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삶에 대한 염려는 삶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새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삶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새는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지만하늘의 아버지께서 먹이시지요.
여기서 초점은 노동을 부정하며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먹이고 입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라고 물으십니다.
불안과 걱정은 우리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 삶을 소진할 뿐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제자들은 참된 것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6,33)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이 정확히 알려 줍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신앙은 주어지는 오늘을 건네받는 태도입니다오늘우리 삶은 나의 노력이나 걱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는 문제로 힘들어한다면그것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 서로가 챙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지는 오늘을 걱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야겠습니다.
적어도 먹고 입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게 서로 챙기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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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사목 활동의 활기를 되살리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가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뵈올 수 없다면, 사실 그 누구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뵈올 수 없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초세기 교회의 "길"(The Way)

사목 활동의 활기를 되살리기

2026년 6월 19일 금요일

리처드 신부는 오늘날 교회의 쇄신의 비전을 세우기 위해, 사도 바오로가 초대 교회 공동체에 해준 권고에 주목해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의 중심과 권력의 정상으로 올라가게 된 4세기의 황제 칙령 이전까지, 교회는 여전히 세속 문화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제국적이지 않은, 곧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사회적 운동이었습니다. 불과 이백 년의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주변인이었던 자리에서 공동체의 중심을 이끄는 위치로 옮겨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점차 지배적인 사회 질서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전쟁과 재물, 권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옹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

오늘날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많은 선을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서방에서는 여전히 문화적·정치적 권력과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신앙을 사랑과 공동체적 삶의 방식으로 강조했던 그 정신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자비롭고 치유적인 사목 실천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가르친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직무"(1코린 12,4–11)가 "봉사의 직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에페 4,12–13)을 다시금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자들이 가정과 병원을 방문하고, 호스피스와 교도소 사목에 참여하며, 이주민과 난민을 돕고,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하며, 혼인한 부부들에게 혼인 전과 이후에 혼인과 관련하여 상담을 해 주고, 부모 교육을 가르치며, 정서적·성적·관계적 치유의 직무를 제공하고, 재정 상담을 돕고, 저렴한 주택을 지어 주며, 노인을 돌보고, 중고 물품 센터를 운영하는 등, 사람들과 직접 맞닿는 사도직에 양성되고, 인정받으며, 격려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치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의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우리가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뵈올 수 없다면, 사실 그 누구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뵈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꿈꾸는 미래의 교회는 훨씬 더 평등하고 포용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제도와 형식에 덜 치우쳐야 하고, 분명히 덜 가부장적이며, 주일마다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성명과 같은 니케아 신경을 반복하는 데 머무르기보다, 교회의 사명 선언을 충실히 살아내는 데 더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미래 교회의 어떤 모습이든 반드시 사랑의 과업을 실천하는 데 온전히 헌신하는, 그리고 그 일을 점점 더 잘 해내는 실천적 교회여야 합니다. 수세기 동안 예술과 건축, 성가와 전례, 규정된 직무에 대한 강조는 나름대로 그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우리는 지나치게 위계적이고 장식적인 교회가 되어, 끊임없이 자기 안의 구원에만 몰두하는 공동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대부분은 교회를 하나의 건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회란 "내 이름으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약속된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현존은 성체 안에서, 성경 안에서, 성사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지도자 안에서 보증된 것과 같이, 공동체 안에서도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마태 18,20)는 말씀으로 확실히 보증됩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실제 삶 속에서 발견되는 은사와 직무를 알아보고, 이를 인정하며, 양성하고, 지원하고,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며, 그 가치를 확증해 주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곧 리더십 안에서 사람들은 "군주"가 아니라 "은사를 배가시키는 이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모두가 정상에 오르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랑의 지고한 과업을 함께 뒷받침하게 될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공동체의 탄생(The Birth of a Community)이라는 묵상글은 제 마음에 깊이 울림을 주었고 큰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몇 해 전, 우리 에큐메니컬(교회 일치) 성경 공부 모임에서 ‘탕자의 비유’를 함께 묵상하던 중, 제게는 하나의 깨달음(현현: epiphany)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톨릭 교육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지만, 그 과정에서 제에게 주입되었던 것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며, 그분의 용서는 한계가 없다는 계시를 믿습니다. 아멘!
— Helen D.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Dancing Standing Still: Healing the World from a Place of Prayer (Paulist Press, 2014), 48–50.
[2] Adapted from Richard Rohr, “Powering Down: The Future of Institutions,” ONEING 7, no. 2, The Future of Christianity (2019): 46–47. Available in print or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ice Xerty, untitled (detail), 2023,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나의 나이테처럼, 초대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랑과 기쁨, 친교의 테두리를 넓혀가며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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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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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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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늘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간단한 이유는 해봤자 소용없고 쓸데없기 때문이고,
고통을 줄 뿐이고 행복을 밀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걱정이 한가득하다고 하지요.
걱정이 한가득하면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고,
행복도 밀려나면서 불행감 비슷한 것이 대신 자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야 할 첫째 이유는 쓸데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쓸데없는 것에 밀리어 행복의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인간적인 이유일 뿐이고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신앙적인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표시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지 않기에 걱정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하면 하느님을 믿는다고
걱정할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늘 주님께서 뭘 먹고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사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헐벗고 굶주리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식주와 관련하여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믿어도 헐벗고 굶주림이 있을 수 있다면 믿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지만 안 주실 수도 있으며
주시고 안 주시는 것이 하느님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안 주시는지 모르지만 안 주실지라도
주실 때와 마찬가지로 선의로 안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선의와 사랑을 믿는 것이고,
이렇게 믿을 때 또 그 뜻에 순종할 때 걱정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선의는 믿어도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거나
믿음의 자세가 너무도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엄마가 밥을 안 준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랑의 이유로 곧 나를 위해 안 주는 것인데 굳이 먹겠다는 것은,
그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그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프란치스코도 그렇지만 클라라는 이런 믿음의 모범입니다.
클라라에게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믿었기에
극도의 가난과 고통 중에도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미약하지만
그 어떤 궁핍도가난도수고도 마다하지 않고오히려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주신 것에 감사하는 가난,
주지 않으셔도 걱정하지 않고 기뻐하는 가난이 부럽고,
그런 가난을 살 수 있는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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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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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나라는 그분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걱정의 바탕에 어떤 감정이 존재하는지 묵상해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마실 음료가 없으면 어쩌나?
내 편안한 안식처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내가 더 나이 들어가면서 병고가 찾아오면 어쩌지?
내가 지금 버티고 있는 무대에서 밀려나면 어쩌나? 
 
결국 우리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 그 가장 근저에는 나란 존재의 소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수시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반드시 쌍으로 붙어 다니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항상 함께 하겠다! 
 
정녕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세상 재물이 사라지는 것,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상의 평화와 안녕이 붕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우리 영혼 구원과 관련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근심과 걱정,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포심이나 불안한 마음과 더불어 찾고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재물 자체를 단죄하거나 의식주의 필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과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특별히 경고하시는 바는 목숨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요 탐욕입니다. 
 
매일의 안정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경제적 기반은 더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침입니다.
미래를 위한 재물의 축척도 어느 정도여야지, 너무 지나칠 때 인간은 재물의 노예가 되고,
언젠가 그 지나친 재물이 오히려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진정으로 추구할 보물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요, 그분의 다스림입니다.
내일에 대한 지나친 근심 걱정을 모두 말끔히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두 손에 우리들 인생을 몽땅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자체 해결해 버리고자 기를 쓰면, 그분께서 활동하실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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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24-34).” 
 
1)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을, 하느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이 있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재물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그것을 하느님 위치에 올려놓고, 하느님처럼 섬기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재물을 섬긴다는 말은,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 위치에 올려놓고
섬기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신앙생활보다 세속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마치 시간이 날 때 하는 취미생활처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재물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신앙인으로서 살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2) “걱정하지 마라.”는, “집착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살다보면 어떤 걱정스러운 일이 생길 때가 있고,
그럴 때에 걱정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걱정이 지나쳐서 숨이 막힐 정도라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우리는 어떤 걱정거리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걱정하더라도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걱정되니까 더욱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걱정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나를 걱정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하며 걱정하는 것을, 눈앞에 놓인 많은 음식들 가운데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것과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만일에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이웃이 옆에 있는데도, 그 이웃을 외면한 채, 음식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3) 26절의 “너희는 그것들(새들)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너희는 솔로몬보다 더 귀하다.”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 왕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 라고 믿는 것이 우리 모두의 믿음입니다. 
 
27절의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라는 말씀과 34절의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야고보서에 있는,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에 연결됩니다.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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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강물이 흘러가 바다에 이르듯 우리 삶을 당신께로 이르도록 우리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강이 어디로 가는지,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불안해하며 길을 묻고, 동서남북을 걱정하며 혹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 염려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강은 바다를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흘러갑니다. 방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은 그저 흘러만 가면 바다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강은 불안해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렇습니다.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마비시킵니다. 오늘날을 "불안의 시대"라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anxiety(불안)"라는 영어는 라틴어 angere(안제레)에서 왔는데, 이는 "목을 조르다"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이는 불안의 자기파괴적 본질을 정확히 드러냅니다. 바로 숨을 크게 쉬어야 할 순간에, 오히려 목이 졸린 듯 답답해지는 것인데, 그것이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르는 것이지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목을 움켜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실 같은 것인데, 두려움은 그 두려움에 대한 어떤 대상이 있는 것이고, 불안은 막연하게 오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뚜렷한 이유 없이 막연한 불안이 두려움의 자리를 대신할 때, 사람들은 "두려움"보다 "불안"이라는 말을 선호하여 씁니다. 그리고 불안이 습관처럼 자리 잡으면, 그것은 마치 두 번째 피부처럼 우리 존재에 달라붙어 모든 행위 사이에 끼어듭니다.

우리 삶에 대해서도 한 번 돌이켜 봅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허허~~"하고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것들을 '내'가 얼마나 움켜쥐고 걱정하며 안달하고 불안해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씀이 얼마나 지혜로운 조언인지 모릅니다.

어느 고위 공직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맡은 모든 일에 있어 매우 성실하고 유능했지만, 늘 위궤양과 속쓰림,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여러 약을 써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해외에서 돌아온 친구가 그의 고충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근본 원인은 과도한 근심과 걱정이야. 하루하루 많은 책임과 긴장 속에 살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것이지. 내가 처방을 내려 줄 테니 한 번 해봐. 일주일 중 하루를 정하고 그 주간에 생긴 걱정거리가 있으면 종이에 적어 '걱정함(Worry Box)'을 하나 만들어 놓고 거기에 넣어봐. 그러고는 그것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려.... 그리고 그 상자는 정한 날에만 열어보는 거야."

그 공직자는 이 방법을 실천해 보았다고 합니다. 매일 걱정을 종이에 적어 "걱정함"에 넣고, 주일에만 열어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미 해결되어 있거나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괜히 마음을 소모하며 걱정했던 것이지요.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도 불필요한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던가!"
그리고 그렇게 걱정을 내려놓자, 그의 건강도 점차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제 경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마음은 물론이고 몸까지 아파가면서까지 걱정하며 살아왔던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니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강물이 흘러가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 삶을 당신께로 이르도록 우리를 창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물의 창조주이신 사랑의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우주가 우리 모두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은 참된 진리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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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이중 충실성의 함정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






이중 충실성의 함정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


하느님 나라와 내 왕국, 공존할수 없는 나라 그러므로 이중 충실성은 함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하느님 나라와 내 왕국은 적당히 타협하며 공존할 수 있는 두 체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삶이고, 내 왕국은 내가 통치자가 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만, 내 왕국은 욕망과 두려움과 자기보호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어줌으로 성장하지만, 내 왕국은 움켜쥠으로 유지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관계를 살리지만, 내 왕국은 관계마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둘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이중충실성의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을 섬기고, 입술로는 하느님 나라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왕국의 확장을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것, 이것이 가장 교묘한 함정입니다.


이중충실성의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공동체 생활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내가 인정받기를" "내가 중심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중충실성은 죄보다도 더 알아차리기 어려운 영적 유혹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함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을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누가 내 삶의 주인이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은 내 왕국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삶에서 물러나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관계 안에 선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진리를 찾게 되고, 내가 이기려 하기보다 함께 살아나는 길을 찾게 되며, 내가 높아지려 하기보다 상대가 꽃피기를 바라게 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와 내 왕국의 싸움은 거대한 역사 속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집니다.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가 나보다 더 인정받을 때, 억울함을 느낄 때, 용서해야 할 때, 기다려 주어야 할 때, 그 순간마다 두 나라가 우리 안에서 만납니다. "내가 주인인가?" "하느님이 주인인가?" 그 선택의 순간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순간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라기보다 내 왕국에서 하느님 나라로 시민권을 옮기는 것입니다.
복음적 삶은 내 왕국이 점점 커지는 데 있지 않고, 내 왕국이 사라지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관계 안에 흐르는 것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보물은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나의 보물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내가 빛나기보다 형제가 빛나는 것이 기쁘고, 내 이름이 알려지기보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것이 기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마다 내 왕국은 사라지지만, 바로 그 사라짐 안에서 나는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함께계심 안에서 누리는 자유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1) 또한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묵시 21,3) 하느님 나라의 가장 깊은 실질은 하느님의 함께 계심(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열매가 바로 자유입니다. 내 왕국 안에서는 자유가 없습니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압박, 성공해야 한다는 두려움, 비교와 경쟁,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집착,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불안이 끊임없이 우리를 묶어 둡니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수많은 욕망과 두려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괜찮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고, 결과를 통제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누렸던 자유도 바로 이런 자유였습니다. 가난했지만 가난에 묶이지 않았고, 비난받았지만 비난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병들고 약해졌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쁨은 환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는 확신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자유였고,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해방이었으며, 순명은 억압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신뢰였습니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관계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상대를 통제하려 하지 않는 자유, 상대를 내 뜻대로 만들려 하지 않는 자유, 상대가 나보다 빛나도 기뻐할 수 있는 자유, 용서할 수 있는 자유, 기다려 줄 수 있는 자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이미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향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실질적인 내용은 단순히 평화나 기쁨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뿌리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평화가 있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기쁨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현존 안에서 더 이상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삶입니다. 그 자유 안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기 왕국의 왕좌에서 내려와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삶은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으로 더 이상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 자유 안에서 나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내어줄 수 있으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곳,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를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나를 묶어놓는 다섯가지, 즉 포장, 증명, 자랑, 비교 경쟁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보물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 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증명하려 하고, 조금이라도 높아 보이기 위해 자랑하며, 타인과 비교하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합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는 사실 자유의 모습이 아니라 두려움의 모습입니다.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서 포장하고, 존재 가치가 부족할까 두려워서 증명하며, 열등해 보일까 두려워서 자랑하고, 불안하기에 비교하며, 버려질까 두려워 경쟁합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내 왕국을 지키려는 불안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보물이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미 알고 계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더 이상 포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자녀로 받아들이셨다면 자신을 증명할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이 은총임을 알게 되면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각 사람에게 허락된 길이 다름을 알게 되면 비교할 이유도 없습니다. 형제를 경쟁자가 아니라 선물로 보게 되면 경쟁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에게서 포장은 진실함으로, 증명은 신뢰로, 자랑은 감사로, 비교는 존중으로, 경쟁은 형제애로 바뀌어 갑니다.


성프란치스코가 보여 준 삶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작은 형제로 사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선은 하느님께 속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형제와 자매로 불렀습니다.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빛나는 것을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예전에는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예전에는 늘 비교하며 살았는데..." 그것들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마치 해가 떠오르면 어둠이 사라지듯, 하느님 나라가 마음의 중심에 들어오면 포장, 증명, 자랑, 비교, 경쟁은 애써 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빛 앞에서 저절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됩니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기쁨과 자유. 그리고 그 자유 안에서 나는 나로 충분하고, 형제는 형제로 충분하며, 하느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시는 삶.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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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0.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2:20  추가.



마태 6,24-34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오늘 뭐 먹지?’, ‘내일 뭐 입지?’…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또 자주 하는 고민일 겁니다. 그만큼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고민거리로 여겨지지요. 하지만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이 내 목숨을 좌우할만큼 중요할까요? 또 무엇을 입을지에 대한 고민이 내 몸을 보호하고 지키는데에 꼭 필요할까요?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들을 충분히 심사숙고할 시간이 부족해져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실지를 고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누가’ 우리를 먹여 살리시고 보살피시는지를 제대로 알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지 그 뜻과 마음을 헤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먹이고 보살피시는 분의 뜻에 부합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히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째는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지요.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먹는 것은 다 살기 위해서, 즉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임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명한 ‘맛집’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미리 정보를 찾고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정작 본인의 건강상태를 제대로 알고 또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요?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은 몸을 보호하고 지키며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 몸에 옷을 맞춰서 입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입고 싶은 옷에 자기 몸을 억지로 맞추려고 듭니다. 과도한 다이어트로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일일까요?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알려주셨듯,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적당한 때에 알아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문제는 ‘이따 뭐 먹지?’, ‘내일 뭐 입지?’가 아니라, ‘나를 보살피고 살리시는 하느님 뜻을 충실히 따르려면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지?’입니다. 무엇을 먹고 입을지를 걱정하는 건 재물을 섬기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는 건 하느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 나라에서 살려면 재물에 대한 탐욕을 줄이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한 번 뿐인 삶을 ‘생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사랑의 섭리 안에서 참 생명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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