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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21. 연중 제12주일. 묵상글. - 좋은 두려움과 나쁜 두려움 등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21|조회수63 목록 댓글 0

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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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묵상글(강론글)
1차(02:20),  2차 (05:02), 3차(21:10)




21일 묵상글, 02시 2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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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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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0,26–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이어
숨겨진 것도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도 알려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또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참새 두 마리가 헐값에 팔리지만
그 하나도 너희 아버지 뜻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하시며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안다고 증언하는 이를
하늘의 아버지 앞에서 당신도 안다고 증언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박해와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깊은 위로입니다.
예수님은 위험이 없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제자의 길에는 오해와 반대, 박해와 손해가 따를 수 있음을 아시면서도
그보다 더 큰 진실,
곧 하느님의 기억과 보호,
하느님 앞에서의 존엄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성 예로니모는
말씀을 사랑한 교부였으며
그 말씀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어디에 뿌리내려야 하는지 깊이 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세상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시선이 더 결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주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누가 나를 인정하는지,
누가 나를 밀어내는지에 크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머리카락까지도 세어 두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지식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예로니모의 관점에서 보면
참새의 비유는 매우 따뜻합니다.
세상에서는 값없어 보이는 존재라도
하느님께는 무의미하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평화는
내가 강해서 생기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께 기억되고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인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드러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며
때로는 억울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인내를 가능하게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날 것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위협인 동시에 위로입니다.
악은 영원히 숨을 수 없고
진실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함과 거짓,
감추어진 눈물과 숨은 충실함도
하느님 안에서는 잊히지 않습니다.


예로니모는
이 말씀 안에서
말씀을 붙드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인내가
끝내 빛 속으로 나온다는 희망을 읽었을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은
우리의 두려움의 질서를 바로잡습니다.
사람은 흔히
당장 잃을 수 있는 것,
평판, 자리, 소유, 안전 때문에 크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깊은 차원을 보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참 중심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 중심은 세상의 힘만으로 완전히 파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뿌리입니다.


평화 / 인내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평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기억 위에 세워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인내는
당장 드러나는 결과가 없더라도
숨은 자리에서 하느님께 충실히 머무는 힘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늦어지고
세상의 평가가 차갑더라도
하느님께서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평화와 인내를 지켜 줍니다.
성체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나는 기억된 존재다”라는 진실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몸을 내어 주시며
내가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 안에서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서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시선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가?
나는 드러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느님께 충실히 머무르고 있는가?
나는 작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참으로 믿고 있는가?
나는 두려움보다 하느님의 기억을 더 크게 붙들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평화와 인내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
세상의 시선에만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저를 깊이 아시고 기억하시는 당신을 더 믿게 하소서.
숨은 자리에서도 충실히 머무는 인내를 주시고
두려움보다 더 큰 평화를 주소서.
많은 참새보다 귀한 존재로 불러 주신 은총 안에
굳게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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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최근에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참례 인원이 늘어난 것입니다. 제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 2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700명이 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900명이 넘는 때가 많았고, 지난 부활 대축일에는 1,155명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교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가대 모임에서도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원이 늘어서 연습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새로운 성가를 배우고 싶은데 연습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포 사목의 현실은 점점 고령화되고, 봉사자는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본당은 오히려 봉사자가 늘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고, 교우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입니다.
 
감사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성당 경계를 이루던 나무 몇 그루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나와서 퇴비를 뿌리고, 죽은 나무를 뽑아내고, 다시 새 나무를 심었습니다. 예전에 ‘마징가 제트’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나타나서 도와주던 정의의 로봇이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그런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묵묵히 나타나서 땀 흘리며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지난 Mother’s Day를 앞두고 형제님들은 어머니들을 위해서 맛있는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형제님들이 모여서 고기를 썰었고, 정성껏 구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님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성모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참 아름답구나.’라고 생각합니다.
 
30년 전인 1996년입니다. 봉성체를 가면 만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 갔다 오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이 큰 병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점점 근육이 약해져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첫영성체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 늘 기뻐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친구는 어느 날 제게 짧은 시 한 편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그 시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몸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맑고 따뜻했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본당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당 청소를 하는 분들,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분들, 주차 안내를 하는 분들, 성가대로 봉사하는 분들, 힘든 교우를 위로하는 분들, 말없이 헌금하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수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도 있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고향을 떠나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사제를 만나기 어려웠고, 미사를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이유는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훌륭한 제도 때문만도 아닙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별처럼 빛나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함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을 맡겼습니다. 시련은 예레미야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굳건한 믿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두려운 일이 많습니다. 오해받을 때도 있고, 손해 보는 일도 있고, 외로운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지는 십자가라면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힘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땀방울입니다. 묵묵히 감당하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교회는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없이 봉사하고, 기쁘게 나누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욱 빛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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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12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예레 20,11)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왜곡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그 속에서 동행하시는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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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이미 피부에 와닿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박해와 거절을 실감하는 제자들에게 건넨 말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10,26).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는 말씀은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뚫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고통 속에서 배운 말상처를 통하여 들은 말은 혼자 듣고서 감내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0,28).
몸은 상처 입고 쓰러질 수 있지만하느님 앞에 선 나의 참된 가치에는 감히 인간의 위력이나 억압이 닿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협보다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립니다이처럼 값싸게 여겨지는 생명의 죽음조차 하느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조차 하느님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버려지는 것잊히는 것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우리를 향하여 거침없이 오셨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침묵하게 하지만신뢰는 우리 입을 열어 주고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에 굴복할 것인지아니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세상을 향하여 끝내 나아갈 것인지.
그 선택이 우리의 슬픔을 다른 빛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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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일치하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은총의 기회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의 사랑의 나라에 대한 굳건하고 타협 없는 비전을 끝까지 붙들며 살아가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초세기 교회의 "길"(The Way)

하느님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일치하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은총의 기회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성공회 사제 스테파니 스펠러스(Stephanie Spellers)는 교회가 인간의 공동체적 갈망에 응답하도록 부름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성장해 가도록 이끄는 공동체에는 본질적이고도 매혹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각 사람은 다른 이의 성장을,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성장을 위해 헌신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위하여, 그리고 함께 나누는 꿈을 위하여 자신의 안락함은 물론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찾는 데 있어 여러분이 반드시 종교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창조될 때 이미 내면 깊숙이 "귀소 본능"과 같은 영적 감각을 부여받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에고가 아니라 자기희생적 사랑에 이끌려 살아가는 개인과 공동체를 볼 때,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지고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라면 "사랑의 공동체"는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교의 가운데 하나여야 합니다. 젊은 구도자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셨고, 이어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2, 37–3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자기희생적 사랑에 기초한 기존의 문화에 역행하는 공동체로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물론 그 이상은 종종 희석되곤 합니다. 그러나 굳건하고 타협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꿈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께는 그것이 곧 현실입니다.

비록 우리가 수천 번 넘어졌을지라도,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다시 한 번 예수님과 예언자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리고 이미 하느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스며들고 있으며, 성령께서 우리를 그 움직임에 참여하도록 힘을 주고 계심을 알아차리십시오. 특히 지금, 제국의 권세와 세속적 질서가 여전히 자기중심적 힘과 목표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와 교회의 깨어진 조각들을 다시 맞추려 애쓰는 이때야말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으로 새롭게 빚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힘써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겠습니까?

References
Stephanie Spellers, The Church Cracked Open: Disruption, Decline, and New Hope for Beloved Community (Church Publishing, 2021), 25–2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ice Xerty, untitled (detail), 2023,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나의 나이테처럼, 초대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랑과 기쁨, 친교의 테두리를 넓혀가며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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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가끔 아주 오랜 전에 찍었던 제 사진을 보고 놀라는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사실 제 머리의 탈모는 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까지는 하느님도 제 머리카락 숫자를 분명히 세어 두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던 제 머리카락 숫자는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스트레스로, 물론 유전적인 요인도 강했지만 더 이상 셀 필요가 없을 만큼 빠지기 시작했고 이젠 거의 포기 상태입니다. 저야 이젠 제 머리카락 숫자에 별 관심도 신경도 쓰지 않은데 설마 무척 분주하실 하느님께서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두시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마!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쏟고 계실까요?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무려 3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예고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는 분명 제자들을 보낼 세상의 현실을 진단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제자들의 내적 상태를 꿰뚫어 보셨기에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고 당부하시면서 위로와 용기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무엇을 말할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약속한 성령이 오면 너희를 대신해서 모든 상황에 적절하게 말씀하시고 이끌어 줄 것이다.”라고 다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린 시절에는 천둥이나 번개, 태풍만 불어와도 놀라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고향 전남 순천엔 한낮부터 엄청난 집중 폭우로 제방이 무너지고, 물이 범람해서 갯가에 있던 집을 피해 높은 빌딩(=국민은행, 당시엔 가장 높은 건물로 기억하지만)으로 피신해서 밤새 내내 두려움으로 떨었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1베3,14)라는 말씀은 체험으로 깨달은 권고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의도는 사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도 요한 역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 4,8)라는 말씀의 요지도 거의 유사합니다. 시편의 노래를 들어 봅시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27,1) 이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짙게 내재해 있다가, 일어난 사건과 생생한 실제 상황에 의해서 우리 의식으로 솟구쳐 오른다고 봅니다. 사람이나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 질병(=건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결혼과 일에 대한 두려움, 취업과 실직에 대한 두려움, 미래와 노후에 대한 두려움 등 어쩌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숱한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의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나약하고 미약한 존재이며 이런 한계상황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어 맡기라”라는 성 아오스딩의 표현으로 위로받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마태10, 28) 하느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곧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앎은 우리를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롭게 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이 진리의 빛으로 비춤으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고, 상대적으로 인간 존재에 비해 하찮은 참새마저 지켜주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두려움은 더 이상 인간을 짓누르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시8, 5) 두려움은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겨울 눈이 따뜻한 봄의 햇살로 녹듯이 사라지라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거룩하신 만군의 주님’은 두려워할 분이 아니라 더러운 우리의 입술과 마음을 씻어 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타는 숯으로 우리의 더러운 입에 대시면서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6, 7)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심판의 두려움에서 일으켜 세워주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에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가톨릭 성가 472번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가사를 마음으로 조용히 불러 보도록 합시다. 『온갖 두려움과 모든 근심 저 멀리에 던져 버리오며 주님 아름다움 생각할 때 내 마음엔 큰 기쁨이 넘치네. 주님은 저 하늘 펼치시고 태양과 바다 꼿 만드셨네. 그러나 주님의 가장 귀한 선물은 생명과 사랑의 은혜 찬미하리.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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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을 알아야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하늘나라를 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일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주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이시고,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마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고, 사랑과 체험 안에서 깊이 깨달아지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마음과 영혼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사람만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밤중에 들려오는 말씀은 멀리서 들리는 외침이 아니라, 함께 가까이 머무는 이에게 건네시는 친밀한 말씀입니다. 귓속말은 마음이 마음에게 전하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이며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함 안에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님의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지붕 위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복음을 모든 이가 듣고 볼 수 있도록 드러내어 전한다는 뜻입니다. 말과 글, 소리와 이미지, 책과 영화, 방송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님의 말씀은 전해질 수 있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 노인과 병든 이, 가까운 이와 멀리 있는 이 모두가 복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담대함이며,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은 육신을 해칠 수는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이 세상에 머물 뿐,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주님의 말씀은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박해 속에서 복음은 더욱 널리 퍼져 갑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주님을 따르는 이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에 머물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담대히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일은 때로 손해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복음의 가치는 언제나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하는 이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잃는 것이 있다 해도, 주님 안에서 얻는 기쁨과 생명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고백하는 삶은 결국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주님을 알아야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친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내 뜻과 욕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삶은 더 이상 두려움에 붙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 자체가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증언이 될 것입니다. 말로만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한없이 어지신 주님,
저희가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주님 안에 머물며,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두려움보다 믿음을 선택하게 하시고, 세상의 가치보다 하늘나라의 기쁨을 따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 용기 있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과의 친밀함을 묵상해 봅시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단순한 지식이나 의무로 듣고 있는지, 아니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 머물며 듣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봅시다.

 
2. 복음을 삶으로 증언하는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나의 말과 행동,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의 태도가 주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 주님의 이름을 전할 수 있을지 묵상해 봅시다.

 
3. 두려움보다 믿음을 선택하는 삶을 성찰해 봅시다.
세상의 시선, 손해, 어려움 때문에 주님을 고백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 지 살펴보고, 오늘 내가 담대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한 가지를 결심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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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 연구팀은 5년 동안 노년 부부를 추적·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타인을 도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 생존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네기 멜런대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혈압이 낮고, 염증 수치가 낮고,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느린 것입니다. 기여는 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운동량이 줄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뇌가 ‘나는 더 이상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부나 기여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할 수 없다고 하고, ‘내 코가 석 자’라면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뜻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더불어 이 세상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세상 권력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은 고작 육신의 죽음뿐이고, 그 권력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결단코 손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영혼과 육신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 즉 영원한 심판권자는 오직 하느님 뿐으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올바로 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참새와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참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 먹는 가장 값싼 고기였습니다. 이렇게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생사조차 하느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머리카락은 약 10만 가닥에 이르며, 우리 자신도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다 세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를 존귀한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때로는 세상의 위협과 조롱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한 우리 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까요?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이 더 큰 이득입니다.




오늘의 명언: 한 인간의 참된 가치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가늠된다. 인생의 행복은 하루를 어떤 생각으로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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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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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21 04:56


- 좋은 두려움과 나쁜 두려움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어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두려워해야 할 한 분 외엔 아무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모든 두려움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나쁜 두려움과
두려워해야 할 좋은 두려움에 대해 오늘은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행복하게 하고 살게 하면 좋은 두려움이고
불행하게 하고 죽게 하면 나쁜 두려움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나쁜 두려움은 불안과 함께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죽게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휩싸이고 사로잡힌다는 말처럼 두려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는 말처럼 아무 자유도 없고
어떤 사랑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사랑,
이 가장 위대한 것들을 허용치 않고 불가능케 하는 두려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 하고 초월해야만 할 두려움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의지로,
신앙적으로는 기도로,
둘을 합쳐 의지와 기도로 극복하고 초월해야 합니다.


내가 살려면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면
자유와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에
행복 의지와 생존 의지가 더해져야 하고,
거기에 간절한 기도가 더 더해져야 하겠지요.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방법입니다.
먼저 애착하던 것들을 다 버림으로써 그것들로부터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싫어하고 그래서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는 계속 두려워했는데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보다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재물을 포기하는 것보다 십자가 지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우린 이 지점에서 이 힘든 것을 거들어 줄 분에게 눈을 돌려야 하고,
이 눈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상과 기도가 시작되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몸소 이 좋은 두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게 해주신 것이지만
그리 피해 다니던 나병환자를 외길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병환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겠다는 의지를 세우고,
그러나 아직 그럴 용기가 없음에 주님께 용기를 주십사 기도하였지요.


그렇게 프란치스코는 두려움을 극복하였고,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통해서 주님을 만났으며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가 곧 주님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병환자가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고,
주님과 주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좋은 두려움은 이렇게 오히려 주님을 만나게 하는 두려움이고,
나쁜 두려움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우리를 사로잡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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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오늘에 집중하기






오늘에 집중하기


마태오 복음서 6장 31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은 종교를 떠나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참 깊은 울림과 위로를 주는 구절입니다.이 말씀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본질적인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이 말씀이 주는 핵심 메시지 는 불안과 걱정의 내려놓음 먹고마시고입는생계에 대한 걱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지만그 걱정에 사로잡히면 삶의 진짜 소중한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우선순위의 재정립 :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라는 말씀은 눈앞의 물질적인 결핍보다 내면의 가치정의그리고 영적인 평화를 먼저 추구하라는 방향성을 제시합니다오늘에 집중하기 :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을 오늘로 가로채 오지 말고현재라는 선물에 충실하라는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이 말씀은 단순히 "걱정하지 말라"는 심리적 위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걱정 없는 삶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하느님 나라를 먼저 선택하는 삶을 가르치십니다사실 인간의 불안은 미래 때문만이 아니라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데서 시작됩니다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하고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오늘의 어깨에 짊어지려 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는다는 것은 내 왕국을 내려놓고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내가 삶의 중심에 앉아 있을 때는 늘 부족함과 불안이 따라다니지만하느님께서 중심에 계실 때는 같은 현실 속에서도 자유가 생겨납니다.


오늘 주어진 관계와 사랑에 충실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늘 찾아옵니다오늘 만나는 형제를 존중하는 일오늘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는 일오늘 감사해야 할 것을 감사하는 일오늘 해야 할 선을 행하는 일하느님 나라는 거대한 계획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충실함 속에서 자라납니다그래서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미래를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오늘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초대입니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언제나 오늘뿐입니다어제는 기억이 되었고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하느님은 늘 현재형으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보물로 발견한 사람은 내일을 붙들려 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 주어진 빵에 감사하고오늘 주어진 사람을 사랑하며오늘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고오늘 주어진 은총 안에 머뭅니다그때 미래에 대한 불안은 조금씩 힘을 잃고우리 안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평화가 자리 잡습니다결국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는다는 것은 내일을 소유하려는 삶에서 벗어나 오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인간은 그 자유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사용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그런데 죄는 내가 받은 생명도내 재능도내 시간도내 성공도내 선행도모두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고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해냈다." "내 뜻이 옳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시작됩니다선악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려는 마음곧 자기 왕국을 세우려는 욕망의 상징입니다.


내 뜻이 절대 기준이 되면 나는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고비교하게 되고경쟁하게 되고자랑하게 됩니다반대로 하느님의 뜻이 중심이 되면 나는 받은 것을 감사하게 되고모든 것을 선물로 여기게 되며형제들을 경쟁자가 아니라 선물로 보게 됩니다가장 깊은 가난은 "나 자신마저도 내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내 생명도내 능력도내 신앙도내 선행도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아는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원죄의 뿌리는 "내가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이며성덕의 시작은 "나는 아무것도 내 것으로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내적 가난입니다그 가난 안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마태오 복음 6장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세 가지 주제가 하나의 진실로 연결됩니다먼저 찾아야 할 하느님 나라(마태 6,33)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음 (마태 6,24)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 (루카 17,21)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죽은 뒤에 들어가는 장소가 아닙니다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통치입니다하느님 나라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입니다내가 중심이 되어 내 뜻과 욕망과 계획을 절대화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느님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순간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사랑이 기준이 되고내 왕국에서는 이익이 기준이 됩니다하느님 나라에서는 관계가 중요하고내 왕국에서는 소유가 중요합니다하느님 나라에서는 감사가 흐르고내 왕국에서는 불평과 비교가 자라납니다그래서 두 나라를 동시에 유지하려는 이중 충실성은 영적인 함정이 됩니다입으로는 하느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실제 삶의 결정권은 내가 붙들고 있다면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려는 모순 속에 살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권고 2에서 말한 "자기의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악"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죄의 뿌리는 어떤 규칙 위반보다 먼저내가 삶의 주인이 되려는 데 있습니다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려는 것입니다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는 사람은 자기 의지의 왕좌에서 내려옵니다그는 성공보다 충실함을소유보다 나눔을지배보다 섬김을경쟁보다 형제애를 선택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서로를 향해 끝없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관계이시듯우리 또한 서로를 살리는 관계 안으로 들어갈 때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결국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는다는 것은 먼 미래의 천국 입장권을 확보하는 일이 아닙니다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내 왕국의 통치를 내려놓고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며하느님께서 다스리시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그때 사람은 비로소 걱정에서 자유로워집니다내일을 지배하려는 삶에서 벗어나 오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이란 바로 이것입니다하느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내가 지금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곳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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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
“두려워하지 마라, 믿으라, 증언하라, 찬양하라”






“주님, 저의 기도가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시편69,14)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이 좋은 격려와 깨우침이 됩니다.
“먼저 목표에 도달한 사람과 나란히 서라. 그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다산>
“순임금의 모범에 비해, 나는 아직도 시골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근심이 깊으니 어찌 해야 할까? 그저 순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소학>
“장인인 작업장에 있음으로써 일을 이루고, 군자는 배움으로써 도를 이룬다.”<논어>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해 한결같은 배움과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직원을 위한 교황의 연설 중 한대목도 마음에 남습니다.
“폭력과 날카로운 수사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참 평화의 장인(artisan)이 되십시오’, 즉 무장하지 않고 무장 해제시키며, 겸손하고 인내하며, 사람들 사이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웃을 위한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어제 고향 친구가 <구암리카페> 제 고향집에서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 시 보내준 노인들이 되어 함께 어울린 무장해제 된 사진 속 모습들이 참 정답고 푸근했습니다. <젊은이만 꽃인가 노인도 꽃이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득 떠오른 <저렇게 사는 거다>란 옛 자작시였습니다.


“저렇게 사는 거다
 함께 어울려!
 인위와 무위, 자연과 문명의 조화는 어디쯤일까?


 뽑고 뽑아도 줄기차게 솟아나는 잡초들
 아예 더불어 살도록 내버려 두니 잔디밭이 잡초밭이 되었다
 저렇게 사는 거다, 자연이 좋다


 제 각기 제 모습 제 색깔로 함께 어울려 사는 거다
 잔디밭이 어디 따로 있나? 잡초가 어디 있나?
 다 고유의 이런저런 모습으로 곱게 폈다지는 풀꽃들이 아닌가?


 볼수록 평화롭고 새롭기가 무궁무진, 하느님도 웃으신다 
 젊은이만 꽃인가 노인도 꽃이다, 꽃향기보다 더 좋은 열매의 향기!
 저렇게 사는 거다, 하느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다.”<2007.6. >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사십시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용기있게 두려움을 떨쳐내고 주님의 빛이 되어 평화의 삶 자체로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위에서 선포하여라.”


주님은 거푸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만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믿을 때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탓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입니다. 믿음도 표현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믿음도 성장하라고 믿음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믿음의 증언입니다. 주님을 증언함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도 굳세어집니다. 바로 사도 바오로가,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은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사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우리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예레미야의 주님 증언도 감동적입니다. 그의 믿음이 얼마나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렸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간절한 기도로 주님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예레미야의 놀라운 믿음입니다. 주님 증언은 주님 찬양과 더불어 절정에 도달하고 예레미야의 주님과 믿음의 일치는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에레미야 예언자처럼 주님 찬양으로 끝나는 찬양의 선포, 찬양의 증언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이겠는지요! 이런 증언의 삶과 더불어 믿음은 깊어지고 이런 믿음의 빛은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참으로 멋진, 품위 있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을 원하십니까?


1.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만 두려워하십시오.
2.주님을 믿으십시오 
3.주님을 증언하십시오.
4.주님을 찬양하십시오.


한결같이 이렇게 주님 사랑으로 살 때 날로 깊어지는 믿음과 더불어 선사되는 주님의 참 평화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시편69,17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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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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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다섯 곳에 모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파견설교’로 마태오 복음 10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두 제자를 발탁하심,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시 말씀,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 가족이 분열되리라는 말씀, 예수님 추종에 따른 보상. 
 
연중 제12주일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파견 설교 가운데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승의 생명은 죽일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만은 죽일 수 없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가지 생명을 다 앗아가실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찮은 미물인 참새의 생명도 아끼고 돌보시는데,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 같으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처럼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작업은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골적인 박해자들과 냉랭한 반대자들,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 주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때로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마태오 복음 10장 26~27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당당한 대세 종교이지, 캥기는 것이 많아 은밀히 집회를 여는 밀교(密敎)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메시지는 태양처럼 밝은 빛,
모든 이의 시선을 끄는 생명이 약동하는 빛 안에서 전해집니다.
우리 집회는 비밀집회도 아니고 지하 운동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자신들 마음 속에만 깊이 간직하거나 은폐시켜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선포되어야 하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쁜 메시지는 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손길 한번 닿지 않는 교회 도서관 먼지 낀 영성 서적 안에 잠자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거리에서 울려퍼져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자신의 뒤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나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열심이었는데, 이런 나를 향해 절대 그게 아니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0~31절)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입니다.
나 같은 인간, 하느님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두셨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만큼 하느님께서 내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허물투성이뿐인 내 일생일지라도 그분께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일상생활,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분의 큰 관심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라고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생활 전체를 무심코 흘려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가 아무리 무의미해보이고 암담해보일지라도 더 이상 막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보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영양가 있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심기일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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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26-33).” 
 
1) 26절의 말씀을 앞의 25절,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에 연결하면, 26절은, “누가 진짜로 하느님 편이고, 누가 사탄 편인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사탄과 그것의 추종자들은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 편에 선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26절을 27절에 연결하면, 26절의 뜻은 “너희가 복음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박해를 받는 일이 생겨도 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하는 활동이고, 이미 확정되어 있는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탄 편에 서 있는 자들의 박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7절의 “내가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는 제자들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셨지만,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가라고 파견하셨습니다(마르 16,15). 
 
2) 여기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무서운 일을 만나면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데, 무서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무서워도 참고 견디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 희망, 간절함의 차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두려움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3-4).”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대한 사명감으로
두려움을 참고 견뎠고, 그런 그를 성령께서 도와주셨습니다.
28절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멸망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3)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지켜주신다.” 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참새보다 더’ 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베드 1,7).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선교활동과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하느님께서 전부 다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니까 힘든 일을 만나도 기죽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는, “그를 구원할 것이다.”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이라는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이 연상되는데,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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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미사의 다른 독서들은 두려움과 극심한 불안에 대해 묘사합니다. 화답송도 같은 맥락을 이어가며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에 수치가 덮였나니다." 하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이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구절은 복음 전체, 나아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후렴처럼 반복되는선언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이 짧은 선언이 성경 전체에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선언이 성경에 365번 나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당신께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나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창세 1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들에게는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전했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바오로에게도 주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예수님은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로 하셨다."(루카 12,32)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은 모든 인간 삶에서 강력한 요소입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없다고 가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두려움은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린이는 어둠을 두려워하고,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 혹은 삶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수줍음, 열등감, 공격성,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불안으로 드러납니다. 불안은 특정 대상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미래, 병이나 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불안인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두려움은 어떤 특정 대상이 있는 것이라면 불안은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를 모른 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서로에게 "걱정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 사람은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깊은 위로를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것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일어난다 해도 너는 결코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막연한 낙관주의와 참된 희망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 잘 될 거야..."라는 확률적인 기대를 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게 있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너는 그 모든 것을 나와 함께 이겨낼 수 있어!"라고 100퍼센트의 확신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결국 모든 것이 진리의 빛 안에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셈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상한 어머니요 아버지로서 우리의 삶과 행위를 세심히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로 하셨다."(루카 12,32)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혹독한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7-58)
그리고 그는 로마의 신자들에게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에 간직하고 새겨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죽음마저도 이겨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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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1. 연중 제12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에 박영희님 이 올리심.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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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 10,26-33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 삶은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갑작스레 터지고, 알 수 없는 미래는 막연하게만 느껴집니다. 불의의 사건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고, 어느 순간 닥쳐온 슬픔과 아픔이 삶을 휘감습니다. 문제는 그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근심 걱정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려움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불안정성과 불확실성 앞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걸까요? ‘두려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에덴동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지요.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그러나 그들이 숨은 이유는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벌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빼앗는 분, 자유를 주시지 않고 속박하시는 분, 용서하기보다 처벌하시는 분으로 왜곡해서 보게 된 겁니다. 그렇기에 두려움의 반대말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습을 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이고, 백성들은 바빌로니아로 귀양가게 되리라는 슬픈 소식을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으로 여겨 그를 ‘매국노’로 낙인찍고 핍박했지요.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깊이 신뢰했던 예레미야는 그들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살아계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굳게 믿으며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할 뿐입니다. 그래서 ‘송사’, 즉 옳고 그름의 심판과 단죄를 모두 하느님 손에 맡깁니다. 자기 기준에 따라 제 손으로 하면 더 큰 폭력을 부르는 ‘복수’가 될 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뜻과 원칙에 따라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힘겨운 삶을 살다보면 예레미야처럼 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당장 얻을 수 있는 큰 이익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부정에 동조하는 우리들입니다. 나에게도 불똥이 튀거나 후환이 닥칠까 두려워 다른 이가 불의를 겪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묵인해버리는 우리들입니다. 당장의 피해나 희생을 두려워하여, 선(善)을 선으로 갚아주시고 악(惡)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주는 피해는 두려워하면서 하느님과 그분이 내리시는 판결은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묻으려고 애를 써도 숨겨진 부정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겁을 주고 윽박질러도 감춰진 불의는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사필귀정’(事必歸正), 즉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결국 그분 뜻에 맞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뜻을 따르는 이들은 결국엔 그 따름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을 참으로 두려워한다는 건 그분께 벌을 받을 게 무서워 마지못해 그분 뜻을 따르는 ‘노예적 복종’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루실 정의와 공정을 희망하며 사랑으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분 뜻을 따르는 ‘자발적 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굳게 믿는다 해도 그것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주어지는 불이익과 희생은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 결국엔 나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이끄심을 신뢰한다 해도 하느님께서 내 앞에 놓인 십자가를 치워주시지는 않기에,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통과 시련은 나 스스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 속에서 ‘망하면 어쩌나’, ‘잘못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게 사실이지요. 그런 우리 마음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새의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러길 원하지 않으셔도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슬픔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생기지만,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에서는 그분께서 심판하시지 않는 한 누구도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고통과 시련은 그 ‘최대치’가 '땅에 떨어지는 것’, 즉 실패와 좌절로 괴로워하고, 죽거나 다치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 모두가 지옥에서 멸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니, 사람도 세상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과 육신 모두를 멸망시킬 권한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당장 멸망시켜야 할 그분의 ‘원수’였다면 굳이 그러지 않으셨겠지요. 그만큼 하느님께서 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보잘 것 없고 허물 투성이인 나라도 하느님께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 하나도 절대 허투루 흘려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시는데, 정작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하루 하루의 삶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요? 앞으로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를 생각하며 삼가야겠습니다. 사소하고 평범한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도저히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더라도 자포자기하지 말고 하느님 뜻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삶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 뜻에 충실히 사는 기쁨과 보람으로 채우는 것이, 그렇게 하여 나를 보시는 하느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된 두려움, 즉 ‘경외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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