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40
|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0621. 21:40), 2차(05:25), 3차(09:40) 6월 22일 묵상글, 21일 21시 4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 ++++++++++++++++++++++++++++++++++++ ======== < 1 차 >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그 됫박으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서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을 비춰 줍니다. 남을 판단하는 일은 쉽고 빠르지만,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렵고 더딥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형제의 작은 티는 또렷이 보면서 제 눈을 가린 들보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리게네스의 시선으로 보면 이 말씀은 ‘영혼의 눈’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사람 안에 ‘속사람의 눈’이 있어, 그것이 맑아야 진리를 바로 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들보, 곧 깨닫지 못한 자기 죄와 교만이 그 눈을 가리고 있으면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자기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바로 보려면 먼저 자기 눈을 씻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하신 것은 형제를 돕는 일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순서에 주목합니다. ‘먼저’ 자신을 정화한 사람만이 비로소 ‘뚜렷이 보고’ 형제의 티를 빼 줄 수 있습니다. 자기 들보를 안고서 남을 고치려 들면 그것은 도움이 아니라 또 하나의 폭력이 됩니다. 정화된 사람의 도움만이 부드럽고 겸손하여 사람을 살립니다. ‘위선자’라는 말도 깊이 새겨 둘 만합니다. 위선이란 본디 ‘배우가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는 뜻입니다. 남을 심판할 때 우리는 종종 의로운 재판관의 가면을 씁니다. 그러나 가면을 벗고 침묵 속에서 자신을 보면, 우리도 똑같이 용서가 필요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 깨달음에서 비로소 심판 대신 자비가 자라납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평화의 가장 깊은 뿌리를 보여 줍니다. 많은 다툼은 남을 고치려는 조급함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제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 사람은 타인의 허물 앞에서 너그러워지고, 판단을 미루며 인내할 줄 알게 됩니다. 이 너그러움과 참을성이 곧 평화의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남의 티를 보는 데 더 빠르지 않은가? 나는 내 눈의 들보를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있는가? 나는 의로운 재판관의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판단을 내려놓고 침묵 속에서 자비를 배우는가? 주님, 남을 심판하기 전에 제 눈의 들보를 먼저 보게 하소서. 의로운 척하는 가면을 벗게 하시고 침묵 속에서 저의 진실을 마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심판이 아니라 자비로 형제를 대하게 하소서. 아멘.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운이 좋다.” 혹은 “운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기회를 얻고, 뜻밖의 도움을 받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말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운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운은 찾아옵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행운은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道)’라는 말도 있습니다.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걷고, 또 걷고, 사람들이 함께 다니면서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작은 오솔길이 되고, 큰 신작로가 되고, 마침내 고속도로가 됩니다. 신앙의 길도 그렇습니다. 사랑과 희생, 용서와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신앙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길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적지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몸소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라는 혹독한 시간을 겪었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성전을 잃었고, 자유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왕을 원망했고, 시대를 탓했고, 심지어 하느님까지 원망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예배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은 무너졌고, 희망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배의 시간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성찰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상을 따르며 세상의 욕심에 흔들렸음을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비록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느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눈물의 자리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목적지 하나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은 과정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릅니다. 서울에 있어도, 달라스에 있어도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아플 때도, 기쁠 때도, 외로울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도착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는가입니다. 저는 신학생 때 산악반 활동을 했습니다. 산행을 가면 저는 늘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먼저 가서 텐트를 쳐야 했고, 식사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돌로미테 산행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산장에 도착했고, 누구보다 먼저 쉼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들꽃의 향기를 맡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뒤처지는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형제님 한 분은 달랐습니다. 지친 사람의 짐을 대신 들어주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산 아래까지 내려가 약을 사 왔습니다. 저 역시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난처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형제님은 아무 불평 없이 저와 함께 산 아래까지 내려가 새 신발을 사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해 다른 산장으로 옮겨야 할 때도 기꺼이 자원했습니다. 그 형제님에게 산장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이 이미 목적지였습니다. 걷다 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성공이라는 산장에 가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명예와 권력이라는 산장만 바라보며 앞만 보고 걷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도 보지 못하고, 뒤처진 사람의 손도 잡아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적할 때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밉니다. 그러나 나머지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신앙의 길은 남을 판단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는 길입니다. 원망과 비난 속에서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이미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때로는 험하고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서로 손을 잡아주고, 기다려 주고, 함께 걸어간다면 그 길은 이미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성공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목적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걷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길 위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 이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고 하신 것이지, 죄를 바로잡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마지막 구절에서 보여주듯이,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데’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들 타일러라.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다른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마태 18,15-16)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1티모 5,20 참조)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단지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하시면서, 자신의 죄를 먼저 보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이웃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난하고 심판하면서, 자신의 ‘큰 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4) 또한, 단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고 하십니다. 그래야 ‘심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는 대체 어떻게 빼낼 수 가 있을까? 그것은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하느님의 눈과 마음”을 지니는 것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호의와 자비의 마음’, 곧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 입니다. “그래야 네가(우리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입니다.”(마태 7,5 참조) 그렇습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그보다 적극적으로 ‘호의로 선을 베푸는 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가복음>의 병행구문에서, “용서”를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 명령은 산상 설교에서 “걱정하지 마라.”(6,25)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미래를 향한 불안이라면, 심판은 다른 이를 향한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심판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크리노’는 법정의 판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하여 성급히 결론 내리는 가벼운 태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심판을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행위로 보고 꾸짖습니다(4,11-12 참조).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고대 유다 전승에도 “사람이 헤아린 그 잣대로 그 또한 헤아림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판의 저울이 인간의 손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그 저울을 가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심판하는 그 잣대는 사실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냅니다. 심판의 시작은 나의 밖을 겨누지만, 그 끝은 결국 제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티와 들보의 비유는 남을 판단하는 우리의 옹졸함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교정하는 자의 어설픈 폭력성을 향합니다. 훈계는 사랑의 행위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훈계는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이르십니다. 다른 이의 흠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자기 안의 갈라진 틈은 어둠 속에 숨기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지요. 다른 이를 판단하고 심판할수록 우리의 어둠은 더욱 짙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의 어둠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형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사랑은 희망의 토대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희망은 우리가 믿는 바가 삶 속에서 실천으로 드러나는 전환점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랑은 희망의 토대입니다.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Richard Rohr) 신부는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졌다는 믿음 안에서 위로와 힘을 발견합니다: 예수회 사제이자 과학자인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우주의 물리적 구조이다." [1] 우리의 신학적·성서적 언어로 같은 진리를 표현하면, 창세기 1장 26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모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가 됩니다. 곧, 우주 전체와 우리 각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졌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끝없는 내어줌과 끝없는 받아들임의 역동적 순환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육화하시고 또한 우리 안에 심겨 계시는 그리스도이기도 하시고 성령이기도 하신 분이라면, 모든 창조 안에서 펼쳐지는 내적 역동성은 확실할 뿐 아니라 선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근본적인 희망을 가지려면, 세상이 언제나 더 나은 것을 향해 펼쳐지고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덕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온 우주가 선을 향해 나아가는 궤적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개인이나 공동체가 장기적으로 치유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고통과 불의는 사랑의 궤적을 믿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의 큰 실패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 서구 문명에 우리 "복음"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우주적인 관점으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 촉토 족 원로이자 성공회 주교인 스티븐 찰스턴은 이 사랑과 근본적인 희망이 언제나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믿음의 전환점은 영적 에너지의 문턱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가 삶 속에서 실천으로 드러나는 자리이지요. 그 힘이 풀려날 때는 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결코 가둘 수 없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촉매이며, 우리가 믿는 바가 우리가 행하는 바로 드러나는 영적 전환점입니다…. 희망은 우리 일상의 한가운데서 거룩한 현존과 활동을 실제로 보게 합니다. 이는 단순히 장밋빛 환상으로 바라보는 상상이 아니라, 사랑의 힘이 풍성히 드러나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때로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다른 이들을 부정적으로 상상하며 스스로의 껍질 속으로 숨어버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주 단순한 시험을 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바라보면, 곧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와 대화하는 젊은 어머니, 함께 웃으며 걸어가는 부부, 낯선 이를 위해 문을 잡아주는 노인—작은 사랑의 징표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더 바라볼수록 더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희망은 세상 안에 사랑이 자리할 공간을 마련해 줍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몇 해 전,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CAC)는 저를 관상적 삶으로 이끄는 길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카르멘 아비세도 부처(Carmen Acevedo Butcher)의 최근 매일 묵상(recent Daily Meditation)을 통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돌파구가 열렸습니다. 저는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라는 기도를 마음에서 흘러나온 선율에 맞추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을 넘어 완전한 평화의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CAC에 감사드리고, Carmen에게도 감사드립니다. —Debbie J. References [1] Pierre Teilhard de Chardin, Human Energy, trans. J. M. Cohen (Harcourt Brace Jovanovich, 1969), 72. [2] Adapted from Richard Rohr, with Brie Stoner and Paul Swanson, Another Name for Every Thing, podcast, season 1, ep. 4, “Love Evolves,” March 9, 2019.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3] Steven Charleston, Ladder to the Light: An Indigenous Elder’s Meditations on Hope and Courage (Broadleaf Books, 2021), 60–61, 6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yu H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희망과 우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시간에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손을 뻗습니다. ---------------------------------------------------- ++++++++++++++++++++++++++++++++++++ ======== < 2차 >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22 04:56 - 겸손이 깔리고 사랑이 차오를 때까지 오늘 주님께서는 심판하지 말라고도 하시고, 남의 눈의 티를 빼 주기 전에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빼어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 때문에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도 말고 남의 잘못을 고쳐주지도 말라고 잘못 이해할 수 있는데 심판은 하지 않더라도 잘못은 고쳐줘야 한다고 저는 말하겠습니다. 먼저 심판에 대해서 보려고 하는데 제 생각에 심판은 어떤 경우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재판관이 실수로 잘못 심판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잘못 심판할까 봐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옳게 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심판자의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심판자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선 자가 남을 심판할 수 없듯이 언젠가 하느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인간은 누구나 남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언젠가 하느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존재라고 얘기했는데 전에는 그 ‘언젠가’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제가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하느님이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비의 하느님이시지만 심판도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비의 하느님이시기에 심판도 자비롭게 하시겠지만 심판 자체를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거절하는 자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으시고, 결국 자비를 거두시는 분이 되고 무자비한 분처럼 되겠지요 어쨌거나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설 사람이기에 남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남의 잘못을 고쳐주는 것까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의 포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웃의 잘못을 고쳐줘야 하는데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고쳐줄 것이며 나도 잘못이 있기에 서로서로 고쳐주는 자세로 고쳐줘야 할 것입니다. 사실 자기 눈의 티를 자기가 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 남이나 의사의 도움을 받듯 영혼에 티가 있을 때도 우리는 서로 도움받을 자세로 도움을 줄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천이 어려운 상호 교정, 이것은 겸손이 바탕이 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겸손이 깔리고 사랑이 차오를 때까지 서로를 위해 기도한 다음 충고해야겠습니다. ---------------------------------------------------- ++++++++++++++++++++++++++++++++++++ ======== < 3차 >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오래전 학생 수도자들을 양성 책임자로 살 때였습니다. 당시 공동체에는 신학교와 신학원에 다니던 젊은 형제들로 북적였습니다. 당시 젊은 형제들은 막 운전면허를 취득한 초보운전자들이었는데, 소년원이며 분류 심사원, 법원 등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접촉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과속, 신호 위반 등으로 딱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보들이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한번은 일주일 사이에 세 장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날을 잡아, 모두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습니다. “우리가 수도자로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데다 과도한 지출을 한다는 것,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제발 시간 넉넉하게 출발하고, 양보 운전, 방어 운전 잘하면서 앞으로 제발 딱지 안 날아오도록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공동체 분위기가 싸해졌겠지요.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 저녁 식사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조심하겠지 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또 하나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는 제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뜯어보니 과속에 신호 위반에 법칙금이 7만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또 이렇게 날아오는구나, 하는 마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범인이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날짜와 시간, 장소를 확인해보니, 범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황급히 수녀원 새벽 미사를 가던 중에 찍힌 것입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은행에 가서 범칙금을 납부했습니다. 지난 시절 돌아보니, 그런 부끄러운 케이스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그 시절,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실수에는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내 부족이나 실수 앞에는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참 인간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3-5)”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7.9).” ‘하느님의 뜻’은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입니다(요한 3,17). 만일에 죄인 자신이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심판을 받고 멸망하겠지만, 그 심판과 멸망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여자를 붙잡아 끌고 오긴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간 사람들은 그래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4,4).”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12).”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1요한 5,16-17).” <이 말에서 ‘죽을죄’는 ‘죄인 자신이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ㄱ.17).” 죄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형제애 실천’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라는 뜻인데, ‘파문’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파문당한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형제애 실천’은 ‘함께 가는 일’입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형제와 함께 가기 위해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티’와 ‘들보’는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주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일 뿐이고, 누구의 눈에 무엇이 있는지, 즉 누구의 죄가 더 큰 죄인지, 그것은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들보’와 ‘티’ 라는 표현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말씀은, “너나 잘해라.”가 아니라, “너부터 잘해라.”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인데, 내가 회개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 없는 일, 이기적인 일이 됩니다. 우리는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 다음에는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어라.”로 읽어야 합니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순서는 ‘나의 회개가 먼저’입니다.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 자비와 사랑과 동정심의 눈으로!" 우리의 모든 판단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국 자기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심리학이 발전하면서 꿈을 해석할 때 꿈의 모든 요소가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는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원리를 우리의 깨어 있는 삶에도 적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13세기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이자 시인인 젤랄루딘 루미(Jelaluddin Rumi:1207–1273)의 다음 시는 이런 사실을 잘 드러내 줍니다. 칭찬하는 사람이 실제로 칭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눈은 맑다." 마찬가지로,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눈이 염증으로 부어 잘 보지 못한다." — 잘랄루딘 루미 이 말이 모든 경우에 참된 것은 아닐지라도, 항상 참이거나 완전히 참이 아니라고 해서 그 진리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절반의 경우, 혹은 그보다 훨씬 더 큰 퍼센티지의 경우에 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내 안의 판단 성향을 점검하는 데 유용한 통찰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판단"이라는 것은 조금 더 공격적인 의미, 즉 단죄하고 벌하려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주는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안의 "판단자"에게 초점을 맞추며, 루미처럼 우리의 판단이 사물의 진리보다 자기 자신과 더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그 "되"는 내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나'를 인색하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인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혹은 누구를 미워합니까? 다시 한번 잘 봅시다! 이번에는 미워하는 대상이나 사람을 보지 말고, 그 "미움" 자체를 봅시다. 그것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또한 우리가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들을 보십시오. 어떤 것, 어떤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합니까?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인정하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우리는 거의 모든 곳에서 자기 자아의 흔적을 엿볼 가능성이 큽니다. … 복음서들에 나오는 죄인들과 병자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이들을 한 번 잘 바라봅시다. 그들은 대개 예수님에게서 용서와 치유, 구원의 선언을 받았던 이들입니다. 잠시 그들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그들은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이고, 그들 삶의 여정에는 걸림돌과 갈등이 늘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인간적인 기준과 잣대로만 심판을 받는다면… 아마 대부분은 "유죄" 판결을 받거나 무시되거나 경멸되었을 사람들일 겁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들의 삶은 단순한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안에서 이해되고 품어져야 할 여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자, "하느님 자비와 사랑과 동정심의 눈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바라보신 눈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이셨기에 당연히 그러하셨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을 하느님과 하나 된 존재로서 의식하고 인식하고자 노력하지 않으셨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복음의 이야기가 될 수도 없었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심판주이시지만, 그분의 심판은 단순한 "단죄"가 아니라 자비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삶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안에서 은총의 가능성을 보시고, 회개와 성화를 향한 길을 열어주십니다. 즉, 인간의 심판은 종종 과거의 잘못에 매여 있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미래의 희망과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잣대와 하느님의 잣대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말로 큰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성적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은총의 가능성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보고자 할 때 우리에게도 같은 동정심과 자비의 마음을 키워갈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마음으로 이 진리를 더 깊이 묵상하고 새겨 봅시다.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내 눈의 들보를 빼내려면? 내 눈의 들보를 빼내려면?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덮어두었던 '내 눈 속 들보'의 구체적 진실은, 결국 나를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쌓아 올린 ‘위선과 아집의 총합’입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거대한 악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로남불’의 이중잣대 들보의 가장 구체적인 실체는 ‘나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한’ 이중 기준입니다.내가 바쁘고 힘들어서 낸 짜증은 ‘인간적인 실수’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합리화합니다. 반면, 타인이 보여준 거친 감정이나 실수는 ‘인간성 자체가 덜된 것’이라며 본질적인 결함으로 낙인찍습니다. 나의 허물은 사정(事情)으로 덮고, 남의 허물은 성품(性品)으로 심판하는 왜곡된 시선이 바로 들보의 진실입니다. 옳음에 대한 중독 (아집) 내가 살아온 경험,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독선입니다. 내 생각과 다른 타인의 의견을 ‘틀린 것’이자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내가 다 겪어봐서 아는데",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는 말 뒤에 숨어, 상대방의 맥락과 삶의 무게를 지워버리는 영적·정신적 오만함이 내 눈을 가린 가장 두꺼운 나무둥치입니다. 타인이 준 상처는 기억하고, 내가 준 상처는 망각하는 것 우리는 타인이 나에게 준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무례함은 마음의 일기장에 깊이 새겨두고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비수 같은 말, 나의 방관으로 인해 누군가 흘렸을 눈물에는 철저히 맹인이 됩니다. 내가 피해자일 때의 기억은 선명하고, 가해자일 때의 기억은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기억의 비대칭성, 이것이 들보가 숨어 있는 방식입니다. 내면의 결핍을 감추기 위한 투사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타인에게서 가장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티끌'은, 사실 내 안 깊은 곳에 숨겨둔 ‘들보(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나의 약점이나 콤플렉스)’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 안의 이기심이 부끄럽기 때문에 타인의 이기적인 행동에 격분하고, 내 안의 불안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타인의 부족함을 먼저 찾아내어 목소리를 높입니다. 타인을 향한 격렬한 비난은, 사실 내 안의 들보를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입니다. 결국 들보의 진실은… 외부를 향한 시선은 100배 줌렌즈처럼 확대하면서, 나를 향한 시선은 아예 꺼두는 ‘시선의 불균형’에 있습니다. 이 무거운 나무둥치를 꺼낸다는 것은, 내가 결코 '무결한 피해자'나 '언제나 옳은 관찰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부끄러운 고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 안의 추함과 가식, 옹졸함을 온전히 직시할 때 비로소 들보는 눈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악습을 몰아내는 덕」과 예수님의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1-5)는 사실 같은 영적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들보를 보라고 하시고, 프란치스코는 그 들보를 빼낼 수 있는 덕을 말합니다. 즉, 들보는 제거해야 할 악습이고, 덕은 그 자리를 채우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들보는 악습의 집합체입니다. 내 눈의 들보는 단순히 죄 하나가 아닙니다. 교만, 독선, 자기중심성, 비교의식, 판단, 두려움, 탐욕, 불안, 상처받은 자아가 얽혀 있는 거대한 나무둥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의 티끌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들보를 가진 사람의 특징은 언제나 밖을 봅니다. 누가 틀렸는지, 누가 부족한지,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나를 힘들게 하는지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들보를 빼내는 사람은 시선이 밖에서 안으로 옮겨집니다. 사랑과 지혜는 판단의 들보를 빼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평가하게 됩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부분만 보고 전체를 안다고 착각합니다. 들보를 가진 사람은 형제의 행동만 보지만, 사랑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 행동 뒤에 있는 아픔과 두려움과 상처까지 봅니다. 그래서 사랑은 판단을 자비로 바꾸고, 지혜는 단죄를 이해로 바꿉니다. 인내와 겸손은 옳음의 들보를 빼냅니다, 들보의 가장 두꺼운 부분은 "내가 옳다"는 확신입니다. 내 경험, 내 가치관, 내 신념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순간 들보는 자라기 시작합니다. 겸손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인내는 상대가 나와 다를 수 있음을 허락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심판자가 아니라 동반자가 됩니다. 기쁨과 가난은 탐욕의 들보를 빼냅니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우위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남의 티끌을 찾아내며 은근히 자신을 높입니다. 그러나 내적 가난은 자신을 증명하려는 강박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충분한 사람은 비교할 이유도 경쟁할 이유도 없습니다. 기쁨은 우월감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선물임을 아는 데서 옵니다. 고요와 묵상은 불안의 들보를 빼냅니다 들보를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바쁩니다. 남을 판단하느라, 자신을 방어하느라, 인정받으려 애쓰느라 쉼이 없습니다. 그러나 묵상은 시선을 타인에게서 하느님께로 돌려놓습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가 남을 고치려 하기 전에 먼저 치유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자비와 신중함은 심판의 들보를 빼냅니다 자비 없는 사람은 사람보다 잘못을 먼저 봅니다. 신중함 없는 사람은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는 말은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비는 사람을 품게 하고, 신중함은 섣부른 판단을 멈추게 합니다. 결국 들보를 빼내는 길은 덕을 살아내는 길입니다 들보를 빼내려 애쓴다고 들보가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을 억누르려 하기보다 겸손을 배우고, 탐욕을 없애려 하기보다 가난을 살아가고, 분노를 참으려 하기보다 인내를 익히고, 판단을 멈추려 하기보다 자비를 실천할 때, 들보는 어느새 힘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말한 덕은 악습과 싸우는 무기가 아니라 악습이 머물 수 없게 만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들보를 빼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들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키우고, 겸손을 배우고, 가난을 선택하고, 묵상 안에 머물고, 관계 안에 선이 흐르도록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형제의 티끌을 비난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같은 은총으로 살아가는 죄인임을 아는 사람, 곧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작은 형제가 됩니다. 들보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비난이 아니라 연민이, 심판이 아니라 형제성이, 내 왕국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들보 비유와 성 프란치스코의 악습을 몰아내는 덕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 2606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8:00 추가. 마태 7,1-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면에 자기만의 가치관과 신념이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과 신념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단단히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지요. 이를 집의 구조에 비유하면 지붕 전체를 단단히 떠받치는 ‘들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들보가 늘 고정불변인 채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둘러싼 세상도 변하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도 변하고, 나 자신도 변하는데 내가 마음 속에 한 번 설치해 둔 들보에만 계속 집착하고 의존하면 내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가 경직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를 ‘심판’이라도 하게 된다면 잘못된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게 될 뿐만 아니라, 소중한 인간관계마저 깨지고 말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마음에 박혀 단단히 굳어져 버린 ‘들보’를 기준 삼아 다른 이를 판단하려는 마음이 들면, 먼저 내 마음 속에 박힌 들보부터 빼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집에서 들보를 갑자기 빼버리면 집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내 마음 속에서 나의 고유한 가치관과 신념이라는 들보를 빼버리면 나라는 존재 전체가 무너져내릴 것 같아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온 지난 날들의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화도 나고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때는 그 들보가 나로하여금 외부의 요인에 휘둘리지 않고 굳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단단히 지탱해주던 시절도 있었지만, 내가 그 들보에만 집착하고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충분한 이해와 고민 없이 세상과 사람을 섣불리 단정지어 오해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형제를 심판하고 단죄하려 든다면, 내가 내린 잘못된 판단과 실행으로 인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요. 누군가의 작은 ‘티’가 내 눈에 거슬려 나를 불편하고 화나게 만든다면, 내 마음 속에 커다란 들보가 박혀있을 확률이 100%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 마음 속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건 주님께서 내 마음에 넣어주신 신앙의 등경에 사랑으로 불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거대한 들보가 내 마음의 창을 막아버려 초래된 오해와 편견, 미움과 갈등이라는 어둠은 오직 사랑이라는 밝은 불빛으로만 몰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마음으로, 그분을 닮은 사랑과 인내와 호의로 내 이웃, 형제를 바라보고 대해야겠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길은 단지 판단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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