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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묵상글. - 내가 바라는 것은? 등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23|조회수40 목록 댓글 0

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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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묵상글
1차(0622. 23:45), 2차(04:35), 3차(08:35)






6월 23일 묵상글, 22일 23시 4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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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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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7,6.12–14
오늘 복음은 짧지만
세 가지 지혜를 한자리에 모아 줍니다.
거룩한 것을 귀히 여기는 분별,
남을 나처럼 대하는 사랑,
그리고 좁은 길을 택하는 용기입니다.
얼핏 서로 다른 말씀 같지만,
모두 ‘함부로 살지 말라’는 한 부르심으로 모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의 시선으로 보면
‘거룩한 것을 함부로 하지 마라’는 말씀은
거룩함 앞에서 마땅한 경외를 잃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실리오는 성령과 거룩한 신비 앞에서
늘 두려움과 존경을 강조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값싸게 다루는 순간
그것은 우리 안에서 진주의 빛을 잃기 때문입니다.
분별이란
무엇을 아끼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성령 안에서 알아보는 지혜입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을
주님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 하십니다.


바실리오는 이 사랑을 관념으로 두지 않고
가난한 이를 위한 집과 병원을 세워
몸으로 살아 낸 목자였습니다.
그에게 이웃 사랑은
좋은 마음가짐이 아니라
빵과 거처와 보살핌으로 드러나는 정의였습니다.
내가 받고 싶은 그 대접을 먼저 내어 줄 때,
평화는 비로소 구체적인 모습을 얻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도
바실리오의 삶과 깊이 닿아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규칙 있는 공동생활을 일구며,
절제와 기도의 좁은 길이
오히려 참 자유와 생명으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넓은 길은 편하지만 사람을 흩어 놓고,
좁은 길은 더디지만 사람을 살립니다.
이 좁은 길을 끝까지 걷게 하는 힘이 바로 인내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평화가 값싼 타협이 아님을 일깨웁니다.
참된 평화는
거룩함을 지키고, 이웃을 나처럼 대하며,
좁은 길을 인내로 걷는 데서 자라납니다.
쉽고 넓은 길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지만,
성령 안에서 택한 좁은 길의 평화는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다루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가 받고 싶은 대접을 남에게 먼저 내어 주는가?
나는 편한 넓은 길과 생명의 좁은 길 가운데 무엇을 택하는가?
나는 그 좁은 길을 인내로 끝까지 걷고 있는가?


주님,
거룩한 것을 경외로 대하게 하시고,
남에게 바라는 그대로 남을 사랑하게 하소서.
넓고 편한 길의 유혹을 이기고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을
성령의 힘으로 인내하며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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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성격이 조금 급한 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배울 때도 기초를 차분히 익히기보다는 빨리 결과를 얻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영어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원래는 기초 영문법부터 차근차근 익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빨리 실력을 얻고 싶어서 곧바로 ‘성문종합영어’를 펼쳤습니다. 문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려운 독해를 하려 했으니 당연히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운동도 비슷했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도 초급 코스에서 기본자세를 익혀야 했는데, 저는 처음부터 중급 코스로 올라갔습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위험한 순간도 많았습니다. 피아노도 그랬습니다. 손가락 연습은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빨리 노래를 연주하고 싶었습니다. 몇 곡은 흉내 낼 수 있었지만 조금만 어려운 곡이 나오면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삶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의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조급한 마음으로 고치를 억지로 열어버리면 날지 못하는 나비가 나온다고 합니다. 기다림과 훈련의 시간은 어쩌면 좁은 문과도 같습니다. 답답하고 느리게 느껴지지만, 그 시간을 통과해야만 진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람들은 넓은 문을 좋아합니다. 쉽고 편한 길을 좋아합니다. 빨리 성공하는 길, 빨리 돈을 버는 길, 빨리 인정받는 길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지라고 말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더 빨리 경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무엇입니까? 희생의 문입니다. 양보의 문입니다. 기다림의 문입니다. 이해와 용서의 문입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다면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넓은 문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더 큰 집, 더 많은 소비, 더 편리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바벨탑은 끝없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문을 통해서 들어온 것도 있습니다. 환경오염이 들어왔습니다. 생태계의 파괴가 들어왔습니다.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이 들어왔습니다. 풍요로운 세상 뒤에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도 있었고, 난민들의 고통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결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연대와 협력의 길입니다. 혼자만 잘 사는 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지하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에는 언제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먼저 물을 부어야 큰물이 올라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먼저 사랑해야 사랑이 돌아옵니다. 먼저 용서해야 용서를 받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좁은 문은 먼저 내가 한 걸음 양보하는 문입니다. 먼저 내가 희생하는 문입니다. 먼저 내가 이해하려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처음에는 불편해 보입니다. 느리고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한 사람만이 생명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욕심과 경쟁의 넓은 문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나눔의 좁은 문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좁은 문 끝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과 평화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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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도,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세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2.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 맺는 나무, 3.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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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으면서도그 전체를 거꾸로 비추는 거울의 구실을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짧은 접속사는 앞서 말한 모든 요구분노와 보복의 중단원수사랑 등을 하나의 문장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 문장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7,12)이라고 선언하는데이는 그 정신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이미 있는 도덕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면서그 가르침을 다른 이들을 향한 무한한 관계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황금률은 인류의 여러 전통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윤리적 경구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 사이의 단순한 계산을 넘어섭니다.
이 말은 다른 이의 자리에 서 보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방식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이지요.
사실 서로를 향한 윤리는 언제나 관점의 문제를 불러옵니다.
황금률은 나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자리를 떠나다른 이의 상처가 보이는 자리로 옮겨 가 보라고 재촉합니다.
그 이동이야말로 산상 설교가 요구하는 핵심이자 실체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른 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오래 바라보아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황금률이 말하는 바는 다른 이를 나와 같다고 단순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름을 인정하며그 다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이 규범은 자기 수양의 기술이 아니라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때로는 행복과 기쁨 앞에 멈추어 서서 그의 삶에 머물러 보는 열린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인간적 격언이라기보다다른 이를 통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초월의 자리입니다.
그 초월의 끝에는 하느님께서 꼭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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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자비와 신비적인 희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희망은 그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우리를 강하게 하는 힘으로 채워 주어 우리가 현재에 머물 수 있게 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고난의 때의 희망

자비와 신비적인 희망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CAC의 명예 교수인 신시아 부르조(Cynthia Bourgeault)는 희망을 하느님의 자비의 특성으로 설명하며,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온전히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 그리고 모든 피조물 안에 깃들어 있는 고향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은총이 지닌 특성입니다. 희망은 행복한 결말 뒤에 오는 감정이 아니라, 시작부터 우리를 파견하는 진리의 맥박으로 존재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이 맥박에 주파수를 맞출 때, 삶의 외적 상황과 상관없이 희망 안에서 나아가게 됩니다. 희망은 우리를 강하게 하여, 어떤 외적 폭풍이 몰아쳐도 자비의 흐름 안에 머물며 "지금 여기"에 현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희망은 언제나, 그리고 오직 "내어 맡김"—곧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의지—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희망 안으로 들어갈 때, 희망 또한 우리 안으로 들어와 그 자체의 생명으로 우리를 채워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고요한 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입니다.

그 힘은 사실 우리 존재 안을 수액처럼 흐르는 하느님 목적성의 한 조각이기에,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의 더 큰 생명의 흐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하며,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그 방향—곧 하느님의 목적의 성취, 더 깊고 더 강렬하며 더 섬세하고 더 친밀한 하느님의 마음의 계시—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1]

관상적 수행과 내어 맡김을 통해, 부르조는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로운 희망을 체험하고 세상 안에서 치유의 현존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관상적 여정 안에서 우리는 희망의 샘을 향해 더 깊은 물속으로 헤엄쳐 내려가며,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일상의 의식 안에 있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체험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희망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진 자비의 샘으로서, 그 자비와의 접촉을 통해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와 하느님의 목적이 행동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우리를 충만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평범한 마음과 지성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신비로운 충만함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자비 안에서 함께 붙들려 있는 깊은 뿌리를 탐구할 때, 우리는 개인적 두려움의 굴레에서 풀려나 참된 자비와 지혜로움의 방식으로 서로가 다시 연결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봉사할 자유를 얻게 됩니다.

희망은 상상이나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로 결속되게 하며 나아갈 길을 찾아가게 해 주는 "영적 음파"와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마음을 내어 맡기고, 그 음파의 소리를 온 존재를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다시금 우리를—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미래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살아 움직이며, 번영하고, 우리를 다정히 품어 참된 소속감 안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몇 해 전,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CAC)는 저를 관상적 삶으로 이끄는 길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카르멘 아비세도 부처(Carmen Acevedo Butcher)의 최근 매일 묵상(recent Daily Meditation)을 통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돌파구가 열렸습니다. 저는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라는 기도를 마음에서 흘러나온 선율에 맞추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을 넘어 완전한 평화의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CAC에 감사드리고, 카르멘(Carmen)에게도 감사드립니다.
—Debbie J.

References
[1] Cynthia Bourgeault, Mystical Hope: Trusting in the Mercy of God (Cowley Publications, 2001), 86–87.
[2] Bourgeault, Mystical Hope, 98–9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yu H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우리는 희망과 우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시간에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손을 뻗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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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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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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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바라는 것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남이 내게 바라는 대로 해 주라는 주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바라는 것은 뭔지 그것도 성찰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찰해 보니 제가 바라는 것이 분명 있을 텐데 뭘 바라며
사는지 언제부터인지 성찰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반성이 먼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성찰해 보니 이것저것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뒤집으며 바라는 것 오직 하나!’가 아니었음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좋은 평가 곧 칭찬도 받고 싶고,
위로와 격려와 지지도 받고 싶고,
사랑과 용서도 받고 싶고 좋다는 것은 다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남이 해주기를 바라면 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남이 다 해주면 이 세상에서 행복은 하겠지만
그것에 만족하고 안주하여 오직 하나이신 하느님을 바라지 않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면 오직 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이라는 시편 노래를 부를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모든 선완전한 선참되시고 으뜸 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선이신 하느님 대신에 온갖 좋은 것을 다 바라는 저는
당연히 그 반대되는 싫은 것들과 십자가가 제게는 없기를 바라며 살겠지요.


그러니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따르라는,
자기마저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그 주님을 제가 따르겠습니까?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겠습니까?


그러니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는데
주옥같은 말씀을 주님께서 주셔도 그걸 뭉개버리는 제가 실은 개와 돼지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옥같은 말씀을 주님께서 아무리 하셔도
저는 그것을 다 뭉개버리고 좋은 것만 제게 있기를 바라고
계속해서 저 좋을 대로 살려고 하다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주라는 주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샛길로 빠져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성찰하는 것으로 끝냈는데
실로 제가 옳은 것을 바라야 남에게도 그대로 해줄 수 있으니
오늘 주님 말씀 묵상을 제가 이 정도로 갈음해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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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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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오 복음 7장 13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이며 친지, 세상의 부귀영화 다 버리고 깊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자들의 삐쩍 마른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초췌한 얼굴, 그러나 깨달음의 기쁨에 빛나는 얼굴! 
 
세상에 살던 그들은 어느 순간 느꼈을 것입니다.
갖은 유혹거리들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한가운데 있다가는 평생 헤매도 진리를 못 찾겠구나, 일생일대의 깊은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그들은 결연히 세상을 등지고 혈혈단신으로 아무도 없는 깊은 사막 어두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선택과 집중이었습니다.
진리 중의 진리이신 하느님을 보다 더 잘 파악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 하느님의 말씀의 핵심을 깨닫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었겠지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에너지의 99퍼센트를 기도와 묵상에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1퍼센트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러니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의 포기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니는 맛집이며, 골프 투어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사막에서의 단독 수도 생활의 필수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섭생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묵상에 묵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취미가 단식이요, 특기가 고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극단적 선택과 집중의 결과가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고 단 것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그들은 이제 하산할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 소중한 깨우침을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과 함께 사막을 걸어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보다 큰 선이요 아름다움이요 절대적 가치관이신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옛날 사막의 교부들처럼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매일의 삶 안에서도 사막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매일 매 순간 ‘좁은 문’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일상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시대 참된 영성가들은 바로 이 선택과 집중을 잘 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좋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빨리 오라고 우리를 손짓합니다.
TV나 컴퓨터를 켜면 즉시 이거 사라 저거 사라 외치는데,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꼭 필요한 물건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영성가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필요한 많은 것들 가운데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그것이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일을 다 할 수도 없고 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영성입니다.
자신이 꼭 서 있을 자리에 반드시, 그것도 항상, 기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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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6.12-14).” 
 
1)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복음, 성사’ 등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인데,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15장에 있는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 숭배자에게 줄 수 없다.”이고, 여자의 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제가 우상 숭배자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 믿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자기가 숭배하는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과 똑같은 마음과 태도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우상 위치로 끌어내린 것과 같은 신성 모독죄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고, 곧바로 우상 숭배를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성사를 집전하지 않는 것은, 자녀들의 빵을 개들에게 주면 안 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2)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스스로 개, 돼지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미신을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개, 돼지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죄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큰 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3) 12절의 ‘황금률’은 앞의 1절에 있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라는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이기도 하고, 뒤의 22장 37절-40절에 있는 ‘가장 큰 두 계명’을 하나로 압축한 계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황금률’의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실제로 좁다는 뜻이 아니라, 세속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재미없고,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의 생활이 재미있고, 편하고, 쉬운 생활이라고 주장하고, 또 자기들처럼 생활하라고 신앙인들을 유혹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탄의 유혹입니다. 
 
“왜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힘들고 어려운 길로만 가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말렸다가 크게 혼난 일이 좋은 예가 됩니다(마태 16,21-23).
충실한 신앙인들에게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재미는 없지만 영적인 기쁨이 충만한 생활입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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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영적인 길은 처음에는 좁지만 결국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넓은 길로 열립니다. 그는 특유의 신비로운 언어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더 깊이 집중하고 갈림 없는 상태로 모아질수록 그 영혼은 더 좁아지는 듯하지만, 이렇게 영혼이 더 좁아질수록 그 영혼은 더 넓어지는 것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마담 귀용도 같은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느님 안의 삶으로 들어가는 문은 얼마나 좁은가요! 그 문을 통과하려면 자신을 죽이는 만큼 작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문을 지나면 얼마나 대단한 드넓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주님께서 넓은 곳으로 이끌어 내시어 나를 구하셨네...'(시편 18:19)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넓은 곳으로 이끌린 것은 그의 낮아짐과 겸손을 통해서였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 주님을 거슬러 못된 짓을 저지르고 난 후에야 참된 겸솜과 낮아짐을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다윗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하해 같은 자비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렇듯이 다윗처럼 우리가 좁은 문을 거치게 되는 것도 우리의 잘못된 삶, 주님을 거스르는 삶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당신께 대한 더 큰 믿음 안에서 살아갈 힘을 축적해 주시는것이고요...!

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좁은 틈을 지나면 압력이 생기고, 그 압력이 물을 강하게 밀어내어 "분출력"이 생기게 합니다. 즉, 제한이 있을 때 에너지가 모이고 방향성이 생깁니다. 반대로 아무런 제약이 없으면 물은 흘러가지 않고 고여 버립니다. 고인 물은 힘도 없고, 결국 썩거나 정체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한계와 제약, 심지어 장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실수나 잘못까지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약이나 부족함 혹은 잘못된 삶을 전혀 인식해 보지 못했던 사람은 종종 정체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한계와 제약은 단순히 불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집중시키고 힘을 길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복권에 당첨되거나 갑자기 제약이 사라진 사람들은 오히려 삶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완전한 자유는 값없이 주어지면 우리를 파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완전한 자유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성숙에 이르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할 필요가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함"은 우리가 일상 안에서 겪는 여러 가지 제약이나 이로 인해 깨닫게 되는 '나'의 연약함과 턱없이 부족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삶이겠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연약함이나 한계 혹은 제약이 우리의 영적 여정에 있어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우리를 성장시켜 주는 박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이렇게 말했는가 봅니다. "죄는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다!"(Sin is behovely!)라고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안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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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15:30 현재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묵상글 올리지 안하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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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5:25  추가.



마태 7,6.12-14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규칙을 세상 사람들은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경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가 이 말씀을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금으로 글씨를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여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그만큼 특별하고 대단한 말씀인가 싶지만, 사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들도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예수님 시대에 살던 유다인들에게도 이 말씀이 이미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내용을 실천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리라고 해도 막상 그 진리대로 사는 게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니 어떻게든 노력해봐야겠지요. 그러기 위해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를 살펴봅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싫어해서 남이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나 좋아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긍정적인 것인지로 말이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때에는 그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수준에 머무르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때에는 그런 소극적인 수준은 당연히 포함이고 이에 더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기까지 바란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중잣대’를 적용하다보니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실망하고 상처받게 되지요. 나는 ‘최소’만 하려고 들면서 상대방에게는 ‘최대’를 바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소의 사랑에 머무르지 말고 최대의 사랑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정도로는 사랑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뿐이며, 그건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함이라기보다 나 스스로가 상대에게 민폐를 끼쳐 그와 불편한 관계로 엮이고 싶지 않아서이니, 어찌보면 사랑의 반대개념인 ‘무관심’에 해당하는 모습인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사는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는 뭐가 나아도 나은 사람이 되어야,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고 편한 길 놔두고 굳이 ‘고생길’로 가는 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아무렇게나 살아도 다 통과할 수 있는 ‘널찍한 대문’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끈다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최고’는 못되더라도 ‘최선’은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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