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그리스도인,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 본문 : 사도행전 13장 1-3절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튀르키예 단기선교를 은혜 가운데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튀르키예 선교사님을 위해 헌금해 주시고, 또 선교팀을 위해 후원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성도님들의 기도와 사랑의 힘으로 팀원 모두 건강하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튀르키예 땅의 영혼들을 만나 교제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기쁨은 물론이거니와, 튀르키예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여 예배하며 그 땅을 위해 기도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특별히 그 가운데 사도행전 11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수리아 안디옥(현재지명은 하타이주의 안타키아)을 방문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타이주는 지난 2023년 2월 튀르키예 대지진 때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가운데 하나인데 복구공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들이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재해민들이 지금까지 임시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지진의 흔적과 잔해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스데반 순교를 계기로 대대적으로 시작된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집니다.(행8:1) 사도행전 11장 20절을 보면 흩어진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에게도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빌립이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또 혈통적으로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예수님을 전했는데,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에서 복음을 들은 헬라인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 말씀입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에서 제자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크리스티아누스’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의 종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로마황제 시저의 군인들을 ‘시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요, 그리스도의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제 시저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던 시저인처럼, 전쟁의 한복판에서 시저의 명령에 생명을 걸고 전진했던 시저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절대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현재 안디옥에는 초대교회의 유적지가 거의 없는데, 그 중의 하나인 베드로 동굴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동굴교회가 베드로의 이름으로 명명된 것은 베드로가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는 전승 때문이라고 합니다.
※ 사진
이 동굴교회는 시내에서 가까운 산 중턱에 있는데, 깊지 않은 동굴의 입구에 벽을 쌓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입니다. 1차 십자군 전쟁 후, 1098~1268년 시기에 동굴의 앞면에 석조 벽이 세워져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에서 사역했을 당시에 모였던 곳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것은 1세기 말부터이기 때문입니다. 1세기 말부터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박해를 겪었는데, 200년 이상 지속된 박해 속에서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이 동굴에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동굴교회는 약 150명 정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전면 중앙에 돌로 만든 단과 베드로 석상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동굴 내부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터널이 여러 개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이 터널을 통해 산등성이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신들과 구별된 사람들이었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고린도처럼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다르게 순결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어떤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습니까? 빛과 어둠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는데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혹시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는데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걱정과 염려의 종으로, 탐심의 종으로, 성공의 종으로, 감정의 종으로, 두려움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는데 그리스도의 군사가 아니라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매번 넘어지는 어린아이는 아닙니까?
※ 제자훈련 교재에 나오는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글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는 내가 ‘만년 갓난아기 신자’ 라고 부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들의 교회 가운데는 수년 동안 설교를 꼬박꼬박 들었는데도 처음과 다를 바가 없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목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그들의 하나하나를 돌봐 주어야 한다.
기저귀가 젖었는지 가끔 들춰 보아야 하고, 토닥토닥 베이비 파우더도 발라 주어야 하며, 우유가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볼에 대보아야 하고 ….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군병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군대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생아들로 가득 찬 산부인과 병원처럼 보인다. 때로는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우리들의 교회를 바라보며 우리는 자신을 속인다. 우리는 그것이 ‘성장’ 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수적 증가가 곧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무덤들도 역시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니까. 사랑이 없는 백 명의 성도들이 여전히 사랑이 없는 성도 2백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뒤룩뒤룩 비곗살이 쪘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옥한흠, 제자훈련Ⅲ, 국제제자훈련원, p.51)
안디옥의 동굴교회를 방문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안디옥교회를 보면서, 치바영광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도행전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오순절 성령강림과 예루살렘교회의 탄생과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및 팔레스타인 지역에 전파되는 1장부터 12장까지. 그리고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로마까지 전파되는 13장부터 28장까지입니다. 1장부터 12장까지의 중심인물이 베드로라면, 13장부터 28장까지의 중심인물은 바울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신약교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12사도가 중심이 되어 세워진 교회입니다. 3천명, 5천명이 회개하며 주님께 돌아오는 부흥이 일어났던 교회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비하여 안디옥교회는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훌륭한 사역자가 있었지만 예수님의 12사도들이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와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예루살렘교회가 아니라 안디옥교회를 통해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십니다.
사도행전 13장은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안디옥교회를 보면서 ‘주님, 우리교회도 이 마지막 시대에 안디옥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1. 하나 된 교회
1절 말씀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에는 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있었는데, ‘니게르’는 ‘검은’이라는 뜻입니다. 아프리카 흑인을 칭하는 영어 ‘니그로(Negro)’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흑인이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도 안디옥교회의 리더였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입니다.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도 있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은 B.C. 4년부터 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했는데,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눅23:11) 보낸 인물입니다. 젖동생이라는 것은 헤롯의 유모의 아들로서 헤롯과 같은 젖을 먹고 자라난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왕궁에서 헤롯과 함께 자라난 헤롯 왕가의 일원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흑인과 백인, 낮은 자와 높은 자의 벽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에베소서 2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담, 세상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담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무너뜨리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인종의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낮은 자와 높은 자,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의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서로 원수였던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무너뜨리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막힌 담이 무너진 것을 믿고, 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귀는 모든 관계에 담을 쌓습니다. 부부사이에 담을 쌓고, 부모와 자녀사이에 담을 쌓고, 성도와 성도사이에 담을 쌓고, 이웃과 이웃사이에 담을 쌓고, 지역과 지역 사이에 담을 쌓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담을 쌓습니다. 무엇보다도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쌓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과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밖으로는 갈등과 비판과 다툼과 깨어짐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 모든 막힌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어쩌면 우리 안에 마귀가 쌓아 놓은 담으로 인하여 안으로는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과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밖으로는 갈등과 비판과 다툼과 깨어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감정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감정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 있습니다. 그래서 슬프고 밉고 화가 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정은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감정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감정이 주인노릇 하도록 방치하지 마십시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고, 이것을 고백하고, 이 믿음의 고백대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 위에 세워진 모든 교회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막힌 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막힌 담이 무너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막힌 담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두 무너졌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진리를 정말 믿고, 이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교회도 안디옥교회가 됩니다.
2.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
2절 말씀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안디옥교회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였습니다. 그럼 언제 안디옥교회가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입니다. ‘섬겨’는 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NIV)에서도, 일본어성경(신개역)에서도 예배로 번역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배할 때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신앙생활의 기쁨과 평안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부어집니다. 순종도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힘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나옵니다. 이렇게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때, 가정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생명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한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 사모함과 기대로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에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예배를 위해 우리가 기본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배시간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성령충만한 예배를 드리는 첫 단추입니다. 지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과 약속한 시간도 지키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겠습니까?
예배시간 10분 전에는 예배당에 앉아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합시다. 감사의 기도, 회개의 기도,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 성령충만한 예배를 위해 기도합시다. 이렇게 기도로 준비하는 예배와 그렇지 않은 예배가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성도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하는 것은 예배 후에 합시다. 예배 전에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준비에만 집중합시다.
무엇보다도 오직 주님께 집중하며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환경과 상황으로, 눈에 보이는 사람들로 우리의 시선을 빼앗습니다. 시선을 빼앗기면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런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예배의 주인공이 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영적전쟁입니다. 이렇게 예배에 승리할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금식하는 교회였습니다. 주석에는 안디옥교회의 금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적 쾌락을 이겨내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감동을 받기 위한 뜨거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금식이었다.”
"肉体的な快楽を克服し、神様から霊的な感動を受けるための熱い心から湧き出た自発的な断食だった。" 안디옥교회는 육체의 정욕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열정이 있었고, 이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금식하게 했습니다.
우리교회는 고난주간에, 그리고 부흥회를 위해 기도하며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있는데, 이런 금식뿐 아니라 육적 쾌락을 이겨내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감동을 받기 위한 뜨거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금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우리교회도 안디옥교회처럼 금식할 수 있을지 기도하며 주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즉각 순종하는 교회
3절 말씀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온 성도가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성령님의 음성에 즉각 순종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성령님,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우리교회 담임목사님입니다. 적어도 후임목사를 세울 시간은 주십시오.’ 이러지 않았습니다.
‘성령님, 알겠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올 해 저희 교회예산에는 선교사 파송에 관한 것이 없습니다. 내년에 예산을 세워서 파송하겠습니다.’ 이러지도 않았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성령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안디옥교회를 통해 사도행전 13장 이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이유였습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안디옥교회처럼 성령님의 음성에 즉각 순종하는 교회를 통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안디옥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안디옥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의 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생명을 걸고 순종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는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단기선교기간 중 아침식사 전에 선교팀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씀시간에는 우리교회 성경읽기표에 따라 신약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5월 28일 목요일에는 고린도전서 15장이었습니다. 15장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43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체를 위해 사는 인생은 욕된 것이요 천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심는다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아름다운 구원의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흔들리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약함을 예수와 복음을 위해 심는다면, 약하지만 예수와 복음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영광이요 강함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이런 그리스도들이 모인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그러면 이런 우리들이 한 몸을 이룬 치바영광교회가 이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