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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말씀은요

[김성섭 목사님]시편(3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26년 6월 14일 주일설교

작성자김성섭|작성시간26.06.14|조회수43 목록 댓글 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본문 : 시편 231-3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시편 23편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 23편은 시편 150편중에서, 아니 성경 중에서 가장 많이 애송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시편 23편이 우리 삶의 노래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 제가 시편 23편의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이런 사모함으로 말씀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이 우리 삶의 노래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은, 내가 양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00:3)

 

양은 연약합니다. 맹수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양은 어리석습니다. 어디에 먹을 풀이 있고, 어디에 마실 물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먹고 마실 것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양은 길을 잃기 쉽습니다. 늘 다니던 길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눈도 나쁘고 머리도 나쁩니다. 그래서 길 아닌 길을 가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기도 합니다.

 

양의 특징을 간단하게 말씀드렸는데 이 정도만 가지고도 우리는 양에게 있어서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는 절대적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마귀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성공하고, 건강하고, 힘이 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어도 마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육적인 것입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육의 것으로는 영의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공하고, 건강하고, 힘이 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이 자살하는 소식을 듣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데, 그가 가지고 누리는 것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만 있어도 너무너무 행복할 것 같은데, 도대체 세상 좋은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왜 자살할까 하고 말입니다.

마음을 빼앗기면 그렇게 됩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건강하고, 아무리 지식이 많고 돈이 많고, 아무리 인기와 명예가 있어도 마음을 빼앗는 마귀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 하나 빼앗기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적인 모든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울합니다. 허무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빼앗기면 이런 것이 다른 사람을 해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자기 인생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망하게 합니다. 마음 하나 빼앗기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와 같이 육의 것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양 맞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습니다. , 당연히 필요합니다. , 당연히 필요합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풀과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풀과 물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육신의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항상 배가 고픕니다. 목이 마릅니다. 그런데도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육신의 배를 채우며 살아갑니다.

영혼이 배가 고픈데 먹고 마신다고 해결 됩니까? 영혼이 목마른데 육신의 쾌락으로, 세상 즐거움으로 해결 됩니까? 영혼이 허무한데, 우리 영혼의 허무함을 채워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데, 사람을 만난다고 영혼의 허무함이 채워집니까? 영혼이 배부르지 않으면 참된 만족,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육적인 것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찾으려고 애쓰고 수고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양 맞습니다.

 

양은 길을 잃기 쉽습니다. 이사야 53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길을 걸어갑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 옳은 길을 걸어갑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전문가의 조언까지 들어가면서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니 눈도 나쁘고 머리도 나쁜 양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이, 사람이 보기에 좋은 길이, 사람이 보기에 최선의 길이 사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는 그것이 바른 길, 좋은 길, 최선의 길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사망의 길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영원한 심판의 길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리석어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영원한 세계를 말하면 무식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눈에는 영원한 세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에 좋은 길, 바른 길을 걸어가다가 결국은 영원한 죽음,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양 맞습니다.

 

입술로는 얼마든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여호와를 목자로 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리고 얼마나 길을 잃기 쉬운 존재인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도둑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도둑질 합니다. 우리 마음을 도둑질합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멸망시킵니다.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게 합니다. 도둑질 하는 마귀, 마음을 빼앗고, 육신의 생명을 빼앗고, 영원한 생명까지 멸망시키는 마귀를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목자는 양을 먹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6:55,56)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자는 그 영혼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습니다.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을 때,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실 때, 우리가 그렇게 갈망했던 참된 만족과 안식을 얻습니다. 내 영혼이 가득 차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입니다. 아무리 배부르게 풀을 먹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픕니다. 아무리 흡족하게 물을 마셨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이 마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을 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의 영혼이 가득 찹니다. 이 세상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행복을 누립니다. 지금 죽어도 조금의 미련도 없을 만큼 예수님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충만한 상태는 자연스럽게 지속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프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동작의 계속을 의미하는 현재시제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날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영혼이 배고픕니까? 영혼이 목마릅니까? 그렇다면 목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영혼이 배고픈데 육신의 것을 먹고 마신다고 영혼이 만족하겠습니까? 영혼이 목마른데 세상 즐거움으로 해갈되겠습니까? 영혼이 허전한데 사람이, 물질이, 세상 그 무엇이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영혼의 배고픔을 육신의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욱 곤고해 집니다. 방황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쓰러지고 맙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구합시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영혼에 만족을 주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안식을 주십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풀밭은 단지 먹을 풀이 많은 곳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쉴 만한 물가도 단지 마실 물이 많은 곳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광야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그늘 아래에서 평안하게, 그리고 목자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그러나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로 우리는 평안하고 안전합니다. 그리고 목자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갔던 우리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멸망의 길, 사망의 길, 영원한 심판의 길인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 눈에는 그것이 바른 길, 좋은 길, 행복의 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길을 걸어갔을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씩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내가 보기에 바른 길, 좋은 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성공의 종이 되어, 물질의 종이 되어, 쾌락의 종이 되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갔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좋은 사람, 성실한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교만하고 음란하고 탐심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영혼의 배고픔, 영혼의 목마름을 느낄 때마다 더욱 육신의 일에 매달리며 육신의 배를 채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현 듯 인생의 허무함이 찾아오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정말 이 세상이 전부일까?’ 하는 음성이 들려오면, 애써 외면하며 무시했겠지요. ‘죽으면 끝이야. 저 세상이 어디 있어? 천국과 지옥, 그건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앞에서 죽으면 끝이야. 저 세상이 어디 있어? 천국과 지옥, 그건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야.’라고 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영원한 심판을 직감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으로 울부짖을 것입니다. 영원토록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모든 불평과 원망이 사라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것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찌하여야 그 크신 은혜 갚으리

무슨 말로써 그 사랑 참 감사하리요

하늘의 천군천사라도 나의 마음 모르리라

나 이제 새 소망이 있음은 당신의 은혜라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그 피로 날 구하사 죄에서 건지셨네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바치리라 모두 나의 일생을 당신께

세상 영광 명예도 갈보리로 돌려보내리

그 피로 날 구하사 죄에서 건지셨네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있어야 감사하겠습니까? 어떻게 되어야 감사하겠습니까?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사망의 길, 영원한 심판의 길을 걸어가고 있던 우리를 생명의 길,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선한 목자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양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늘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10:27)

 

어떻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6, 27)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이 곧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님께 물어보십시오. 시간마다 순간마다 성령님께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해주십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의 평안이 임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근심이 떠나갑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때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오늘 예배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모두 예수님의 평안으로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3절 말씀에서 세 가지 단어를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소생시키시고의 원어 슈브돌이키다는 뜻으로, 죄를 지은 인간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는 의미로 자주 쓰입니다. 그리고 슈브회복시키다’ ‘새롭게 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자기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적이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의의 길에서 의 원어 마으깔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길입니다. 이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시편 233절 말씀하는 의의 길은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입니다.

 

1)우리는 때때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가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인생의 고통은 내 생각대로, 내 감정대로, 내가 보기 좋은 대로 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무엇이 그 누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유일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가려고 하는 자아입니다. 이 자아로 인하여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를 잃어버리고 미움과 분노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슈브입니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곳에서 슈브’,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예배가 바로 이런 시간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슈브’, 돌이키시고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2)예수님은 우리를 의의 길, 좁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원합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승리의 길, 형통의 길,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쉬운 길, 편한 길, 세상 즐거움을 누리는 길을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면서 실재로는 넓은 길을 걸어갑니다.

그럼 좁은 길과 넓은 길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말씀 길이 좁은 길입니다. 말씀 길 아닌 것은 모두 넓은 길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만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좁은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음성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음성과 함께 자아의 소리도 들립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음성보다 자아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자아의 소리가 편하고, 자아의 소리대로 사는 것이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소리를 따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 전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소리를 따라가는 길, 이것이 넓은 길입니다.

넓은 길을 걷는 자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 자아를 내려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희생도 없고 헌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편합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그러나 넓은 길을 걷는 자에게는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육신의 배는 가득 찼는데, 영혼은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그리고 넓은 길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사망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좁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걷는 길입니다. 문제가 있어서, 환경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평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를 내려놓지 않아서 평안이 없고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좁은 길에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희생하고 손해보고 헌신하는데 넓은 길을 걷는 자가 결코 알 수 없는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생명입니다. 영원한 천국입니다.

 

3)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슈브’,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십니다. ‘슈브’,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께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날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 좁은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말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내려놓고 날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며,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인생은 날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백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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