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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말씀은요

[김성섭 목사님]시편(35)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 26년 6월 21일 주일설교

작성자김성섭|작성시간26.06.21|조회수39 목록 댓글 0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본문 : 시편 234-6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시편 23편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입니다. 양은 오직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의의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그 좁은 길에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하며 이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의의 길에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죽음의 그림자또는 죽음의 그늘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만난 고난이 보통 고난이 아닙니다. 극심한 고난입니다. 거의 죽게 될 지경까지 갔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가 어떻게 양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도 종종 이와 같은 고난을 경험합니다. 넓은 길을 가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되면 이해가 됩니다. ‘내가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이런 고난을 만났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좁은 길을 가다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따라가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되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이렇게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왜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야 하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낙심합니다. 그러다가 좁은 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났는데 왜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이제는 넓은 길을 가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예수님만 따라가는 자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일까요? 시편 23편은 의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 이것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욥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갔던 사람입니다. 그런 욥에게 있어서 자신이 만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 더 큰 고통은,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였습니다. 욥은 이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욥의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하느냐고 고통 속에 부르짖던 욥에게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욥에게,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38:4) 피조물인 사람이 대답할 수 있는 차원의 질문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의 질문이 41장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 욥이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무슨 말입니까? 설령 하나님께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셨다고 해도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피조물인 사람이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마치 틀린 것처럼 주장했습니다. 그런 욥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40:8) 좁을 길을 가는 자에게는 항상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만 있어야 하고, 넓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공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공의대로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악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공의를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모두 보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영원한 공의를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 안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판단하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좁은 길을 가는 믿음의 사람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인도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도 오직 목자 되신 예수님만 따라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 분명해 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목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자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얻는 그 무엇이 목자라면, 다른 말로 예수님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지난 월요일 오후부터 화요일 오전까지 감리교신학대학 총장님과 보직 교수님들이 형제교회 목사님들을 위해 세미나를 진행하셨는데, 큰 배움과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상담학교수님이 세미나 중에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한국대형교회의 수석장로님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장로님이 고3이 된 아들에게 일 년 동안은 교회에 나가지 말고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3 가장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에 교회에 나아서 힘과 위로를 얻고 싶었던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목표로 했던 서울대에 합격했습니다. 장로님은 아들에게 서울대에 들어갔으니 이제 다시 교회에 나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하나님 없이도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왜 내가 교회에 나가야 하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만 따라갑니까?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을 얻기 위함입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진짜 목자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보이면, 그 길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확실하다면, 더 이상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미련 없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다른 길을 걸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데 굳이 예수님만 따라갈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면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까? 결코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의 진짜 목자가 누구인지가 분명해 집니다.

사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받을 때는 우리의 진짜 목자가 누구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면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삼았는지, 아니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바로 그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삼았는지가 분명해 집니다.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그 분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목자로 삼은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도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왜 좁은 길을 가는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래도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죽음의 길인데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세상 사람이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 그 분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광신자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지만 저러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번 세미나 때 몇몇 교수님들이 당신이 지나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대해서 나누어주셨습니다. 다윗이 지나갔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고통스러웠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대해서 고백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의지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시간을 통해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예수님 밖에 붙잡을 분이 없고, 예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말로만 오직 예수가 아니라 정말 오직 예수가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 있다 보면 우리는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잘해서,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 나의 열심과 수고로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이런 교만함이 모두 깨어집니다. 내가 양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내가 잘해서,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 나의 열심과 수고가 아니라 모든 것이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붙잡게 되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게 되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 있을 때보다 예수님과 더 친밀해지고, 예수님을 더 알게 되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신비이고, 이것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자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몇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1.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약속하신 첫 번째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지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다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여정에도 다양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으로 인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고통당하는데 예수님은 돈은 주시지 않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만 하십니다. 돈이 있어야 살지 예수님만 있으면 어떻게 삽니까? 돈이 없는데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돈이 없으면 못 삽니다. 돈이 있어야 먹고 마시고 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면서도 돈 걱정하며 삽니다. 양은 먹을 풀 걱정 마실 물 걱정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돈 걱정 하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돈이 많으면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아도 사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돈이 없어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돈이 없는데 예수님이 먹여주시고 입혀 주십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까마귀를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시는 것을,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까지 책임져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살 수 있다는 진리, 정말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진리를 경험합니다.

질병으로 인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문제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식으로가 아니라 삶으로 경험합니다. 예수님 한 분이 충분하다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간증이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 홀로 걸어가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변함없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다닐지라도어떤 길을 걸어갈지라도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보호하시고 위로하십니다. 그 어떤 재앙도 우리를 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안을 누립니다. 평안은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평안을 누립니다. 참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2.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끝에 승리와 축복이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자들을 위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앞에서 다윗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잔치에 온 손님의 머리에 값비싼 기름을 발라주었는데, 이 일은 보통 그 집의 종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상을 차려주신 주님께서 친히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주님께서 다윗을 매우 존귀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에서는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라고 번역했습니다.

학자들은 시편 23편이 다윗이 인생 말년에 지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온 다윗의 신앙의 고백이고 간증인 것입니다. 다윗이 경험했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 하나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반역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사울 왕으로 인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끝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의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나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의의 길이 아니라 불의의 길입니다. 그것은 목자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끝내시는 분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끝에 승리를 예비하셨습니다. 주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판결을 내리십니다. 우리의 의로움을 밝혀 주십니다. 그리고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니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높여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잔은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다윗이 누린 축복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한 사람은 예수님으로 충만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끝에 승리와 축복이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깊은 만큼 주님이 주시는 승리와 축복도 큽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오직 예수님만 붙잡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3.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삽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끝에 승리와 축복이 있습니다. 이 승리와 축복은 이 땅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자에게 약속된 궁극적인 축복, 영원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도 오직 예수님만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좁은 길을 걷는 자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고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디모데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가 우리에게 더 깊이 다가오는 것은,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수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로마 감옥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온 자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하느냐고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지금 바울은 자신이 들어갈 영원한 하늘나라와 자신에게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려움도 낙심도 원망도 아닌 소망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이 누리는 영원한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끝에 놀라운 승리와 축복을 예비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오직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의 마지막은 천국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목자 되신 예수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닙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님만 따라갑시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자기 마음대로 가고 싶은 자아를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 따라갑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도 오직 예수님만 따라갑시다. 그렇게 예수님만 따라가는 가는 이 세상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축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만 따라가는 자는 여호와의 집에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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