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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카스 여행 12 ] 사막이 끝내 지우지 못한 기억, 라왁 사리탑

작성자마실정회동|작성시간26.06.20|조회수50 목록 댓글 0

호탄에 가까워질수록 차창 밖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메마른 대지 위로 드문드문 초록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고, 

오아시스 특유의 포플러 나무들이 가끔 시야를 스쳐갔다. 

사막 한가운데 외롭게 박혀 있다는 고대 불교의 유적, 라왁 사리탑(Rawak Stupa).

 

사막공로를 벗어나 가늘게 이어지는 모래바람에 일렁이는 작은 도로를 한동안 달려,

 자연의 장벽 앞에서 인간의 흔적이란 그저 덧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경외감이 밀려들 무렵,

저 멀리뿌연 황사 속에서 기적처럼 거대한 흙 구조물이 그 웅장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저 커다란 모래 언덕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그 윤곽은 점점 뚜렷하고 단호하게 형태를 갖추어 갔다.

수천 년전, 번창했던 우전국(于闐國)의 스님들이 새벽 예불 소리와 함께 우러러보았을,

그리고 실크로드를 오가던상인들이 긴 여정의 등불처럼 바라보았을 라왁 사리탑이 드디어 눈앞에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마주한 사리탑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낸 거칠고 위대한 거인의 모습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사막의 한 조각처럼 굳어버린 흙더미 같았지만, 찬찬히 뜯어볼수록 경이로움이 층층이 밀려왔다. 

유적의 측면에는 흙과 짚, 점토를 겹겹이 다져 올린 고대 ‘판축(版築) 공법’의 가로 줄무늬가 켜켈이 쌓인 나이테처럼 선명했다. 

그것은 단순한 건축 기술이 아니었다. 한 줄 한 줄이 모두 인간의 손길이자 신앙의깊이였으리라. 

수백, 수천 명의 손이 이 흙을 반죽하고 다지고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 오랜 공력이 지금 이순간까지 사막의 바람을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사방으로 당당하게 뻗은 거대한 십자가형 기단과 그 위에 둥글게 솟아오른 탑의 흔적은 

이곳이 과거 간다라예술의 꽃을 피웠던 서역 불교의 중심지였음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한때 이 기단 위를 가득 메웠을 보살상과 불상들의 윤곽을, 나는 텅 빈 벽면의 흔적 속에서 조심스럽게 더듬어 보았다. 

영국의 탐험가 오렐 스타인이 이곳을 발견하고 모래 속에서 찬란한 점토 불상들을 출토해 냈을 때의 전율이, 

텁텁한 사막 바람을 타고지금의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1900년대 초, 스타인이 발굴한 수백 점의 불상들은 당시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헬레니즘 양식이 불교 도상과 녹아든 독특한 조형미는 이곳이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동서 문명이 만나고 섞이던 용광로였음을 말해준다.

 

지금은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불상들도 모두 떠나고 오직 탑의 뼈대만 남았지만, 

텅 빈 공간이 주는 울림은오히려 더 묵직했다. 무언가가 가득 차 있을 때보다, 

그것이 사라진 자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때가있다. 

라왁 사리탑이 바로 그랬다. 남겨진 침묵이 쉼 없이 말을 걸어왔다.

 

탑 주변의 모래 언덕에는 현대인들이 정성스레 심어놓은 짚 격자, 즉 ’방사초방(防沙草方)’이 바둑판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막공로 양옆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함께 달려온 그 익숙한 풍경이 여기서도 이어지고있었다. 

그런데 길 위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도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의 기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1미터 남짓한 격자 칸마다 단단히 박힌 짚 묶음들이 마치 사막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선 파수꾼처럼 보였다.

 사막의 거센 바람이 모래를 삼키고 유적을 파묻으려 할 때마다, 

이 가녀린 밀짚들이스크럼을 짜고 온 힘으로 고대의 기억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몰려오는 모래를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초방과 그 사이를 호젓하게 연결하는 목재 탐방로를 걸으며, 

과거를지키려는 현재의 눈물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유적 보호를 위해 땡볕 아래 이 사막을 오갔을 무수한 이름 없는 손들이 문득 떠올랐다. 

화려한 발굴자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만, 모래 한 삽 한 삽을 걷어내고 짚한 묶음 한 묶음을 꽂아 넣은 사람들의 이름은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손길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마주한 이풍경도 없었을 것이다.

 

탐방로의 난간을 잡고 서서 사리탑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끝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현대의 전신주와 수천 년전의 불탑이 한 프레임에 담기는 풍경은 기묘한 시공간의 괴리감을 자아냈다. 

전기가 흐르는 철제 기둥과 신앙이 새겨진 흙 기둥.

 아라얼에서 호탄까지 사막을 가로지르는 현대 문명의 동맥과 그 문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고대의 탑이,

 같은 하늘 아래 나란히 서 있었다. 그 풍경이 어쩐지 쓸쓸하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웠다.

 

사막의 거친 바람은 여전히 옷깃을 흔들고 입안에 까끌한 모래 먼지를 남겼지만, 

라왁 사리탑 앞에 서 있는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평온했다. 

찬란했던 실크로드의 번영도, 수많은 왕국의 흥망성쇠도 결국 이 붉은모래 속으로 흩어졌다. 

우전국도, 간다라도, 그 길 위를 오갔던 수많은 얼굴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인간의 염원만큼은 이 탑처럼 단단하게 살아남아 오늘의 나를 조용히 위로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리면서 나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황사 속으로 다시 서서히 스러져가는 라왁 사리탑의 실루엣이 눈에 맺혔다. 

오늘 아침 아라얼을 떠나 수백 킬로미터의 모래 바람을 헤치고 이 자리까지 왔건만, 돌아서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사막은 변함없이 모든 것을 지우려 하고 있었지만, 저 탑만은 끝내 지워지지않을 것 같았다. 

아니, 지워지더라도 한번 이 바람을 맞고 이 모래 위에 선 자라면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마실 정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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