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다정 김규현 갤러리

보리수 나무 아래의 깨달음

작성자수리|작성시간10.07.04|조회수447 목록 댓글 2

 

 

새벽 별빛

 

싯다르타는 고통과 번민뿐만이 아니라 즐거움과 환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스스로와 세상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머릿속에 그려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감정을 느꼈지만 사로잡히지 않았고 생각을 했지만 얽매이지 않았다.

 

먼저 세상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아 있는 것은 날마다 자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늙어간다. 강물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아니다.

거대한 바위는 어떤가? 거대한 바위는 앞으로 수 천 년, 수 만 년 동안 햇빛과 바람과 비를 맞으며 점점 푸석푸석해지고 여러 조각으로 쪼개졌다 마침내 돌멩이나 모래가 될 것이다. 돌멩이나 모래는 흙먼지처럼 더 작아질 수도 있고 다시 바위나 암벽이 될지도 모른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히말라야 산맥도, 하늘도, 땅도, 이 세상 자체도 우리의 눈엔 영원할 것 같지만 끝없는 변화를 되풀이할 것이다. 세상에 영원히 그대로인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엔 집착할 것도, 마음을 둘 것도 없다. 나도 변화하고 내가 마주하는 사람, 짐승, 세상의 모든 존재도 끝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기 때문에 그것이 내 품이나 마음속에 있다고 즐거워하고 내 품이나 마음속을 떠났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 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이 언제나 그대로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고통을 만드는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변화한다는 것을 항상 유념한다면 즐거움에 들뜨지 않고 슬픔에 괴로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즐거움과 슬픔을 넘어 언제나 평화롭고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 짐승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 오로지 혼자서 태어나거나 살 수 있는 것은 없다.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 그 부모님은 또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태어났고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 역시 무수한 조상을 갖고 있다.

나는 태어나서 햇빛과 달빛을 받고 식물이나 동물 같은 무수한 생명과 물, 공기를 먹고 살았다. 그 식물과 동물 역시 햇빛과 달빛을 받고 흙과 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먹어야 살 수 있다. 내가 죽으면 벌레나 나무 같은 다른 생명의 양식이 된다.

누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명의 사슬 속에 한 부분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엮이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면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나’가 세상이고 세상이 ‘나’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엮이어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아니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나’가 아니다.

사람은 강물 위의 거품과 같다.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실체가 없다. 사람은 물질, 느낌, 지각, 의지, 인식 다섯 가지의 무더기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느낌은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 일어나는 물거품과 같다. 지각은 이른 봄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와 같다. 의지는 속이 비어 있는 양파와 같다. 인식은 마술의 속임수와 같다.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면 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열반에 이른다. 열반은 우리가 생각하는 느낌과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본 것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마음과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열반에 이르게 되면 고통도 없고 다툼도 사라진다. 세상에 내가 괴로워 할 일도, 남을 괴롭힐 일도 없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 큰 풀과 작은 풀, 덩굴식물과 기생식물, 이끼류와 양치류, 갖가지 버섯과 곰팡이, 벌레와 짐승, 새와 나비가 숲에서 어울려 살 듯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훗날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 사법인이라고 부르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싯다르타는 쉬지 않고 다시 깊은 명상을 이어갔다. 고통의 근원을 남김없이 찾아내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완전하게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싯다르타는 자신을 출가에 이르게 한 고통의 실체인 늙음과 죽음, 헤어짐과 슬픔을 떠올렸다. 왜 늙음과 죽음, 헤어짐과 슬픔이 있는가? 그것은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왜 태어났는가? 존재가 있었고 그 존재들 사이에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왜 있는가? 마음의 집착 때문이다.

 

마음의 집착은 왜 생기는가? 욕망 때문이다. 욕망은 여섯 가지 느낌 때문에 생긴다. 보는 형상, 듣는 소리, 맡는 냄새, 맛보는 맛, 살갗에 닿는 촉감, 마음에 떠올리는 인식을 통해 얻어지는 느낌이 그것들이다. 이 여섯 가지 느낌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세상의 여러 가지와 접촉을 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 접촉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세상의 여러 가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집중이라는 특징을 가진 관념과 이 세상의 물질을 구성하는 실체들에 의해 생긴 것이다. 이 관념과 실체는 세상을 가르고 나누는 생각 때문에 생기고, 세상을 가르고 나누는 생각은 억지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 작용에 따라 생긴다. 의지 작용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억지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 작용이 사라지고 세상을 가르고 나누는 생각도 사라진다. 그러면 관념과 실체가 사라지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여러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라지고 접촉과 느낌도 사라진다.

 

결국 접촉과 느낌이 사라지면 욕망이 사라지고, 욕망을 갖지 않으니 마음이 어떤 것에 얽매이거나 사로잡히지 않는다. 결국 세상을 떠도는 존재도 사라지고 태어나는 일도 없다.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 헤어짐과 슬픔이라는 고통의 뿌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등불은 기름과 심지가 있기 때문에 타오르고 빛나는 것이다. 고통은 욕망과 집착, 어리석음 때문에 꺼지지 않는다. 기름과 심지를 없애면 등불이 꺼지듯 욕망과 집착, 어리석음을 없애면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훗날 십이연기라 부르는 진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깨달은 사람이 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과 행복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기원전 531년 싯다르타의 나이 서른다섯, 출가의 길을 나선 지 여섯 해만에 깨달은 자, 길을 찾은 자인 붓다가 된 것이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네란자라 강가의 마을을 나중 사람들은 깨달은 곳이라는 뜻을 가진 붓다가야라고 불렀다. 싯다르타가 머물렀던 핍팔라 나무는 깨달음의 나무라는 뜻을 가진 보리수라 불렀다.

붓다가 세상을 떠난 이후, 붓다의 가르침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던 아쇼카 왕은 부다가야에 붓다의 깨달음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기도 했다.

 

붓다의 주변은 한층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어둠은 항상 날이 새기 전에 더욱 짙어지는 법이었다. 캄캄한 하늘 위로 샛별이 반짝였다. 곧 새벽이 오리라는 것을 알리는 별빛이었다. 새벽이 오면 짙은 어둠은 물러나고 온 세상에 밝은 태양이 솟아오를 것이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베로니카 | 작성시간 10.07.05 _()()()_
  • 작성자은행나무 | 작성시간 10.07.09 "어둠은 항상 날이 새기전에 더욱 짙너진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