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 토번제국의 체취가 서려있는 랑가르의 라틈고성
여러 번 되풀이 되는 이야기이지만, 와칸주랑은 북쪽으로는 와칸 산맥 또는 알리추 산맥이라는, 6천m급의 고봉들이, 남으로는 힌두쿠시 산맥이 동서로 가로지른 사이에 동서로 긴 분지이다. 그 사이로 고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이룬 파미르천과 와칸천이 합쳐진 강이 흐르고 있는 지형이어서 옛부터 파미르고원을 횡단하는 유일한 길로 이용되어 왔는데, 복도처럼 좁고 긴 생김새 때문에 와칸주랑(鑊侃走廊,Wakhan Corridor)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종’마을을 떠나 남쪽으로 판지강을 바라보며 달리니 얼마 되지 않아 랑가르(Lyangar)의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협곡이 아니라 시야가 확 트이는 게 지금까지 지난 온 풍경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다. 여기가 자료에서 기록한 바 있는, 가장 넓은 곳인 ‘4~5리’ 정도 되는 곳으로 보인다. 내려다보이는 판지강도 여러 갈레로 갈라져 마치 부채꼴 모양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이스카심에서 1백Km 정도 좁고 길게 형성되어 뻗어 있던 와칸계곡이 협곡에서 벗어나 드넓은 부채꼴의 삼각지로 변하는 지점이다.
[와칸은] 동서로 1천5백~1천6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넓은 곳이 4∼5리, 좁은 곳은 1리도 넘지 못한다. 판지강에 임해 있으며 구불구불 굽어져 있다.
이곳에서부터 아비판자 강은 두 갈레로 갈라진다. 동북쪽으로는 파미르천으로 동쪽으로는 와칸천으로 이름이 변한다. 따라서 우리의 주된 키워드인, ‘와칸주랑로’가 남북으로 갈라진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파미르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발원지인 대용지, 빅토리아호수가 나오고 다시 동쪽으로 총령을 넘으면 총령진, 즉 중국령 타쉬쿠르간이 나온다. 이름하여 ‘와칸북로’로 혜초사문과 현장법사가 귀국한 길이다. 1)
▼ 랑가르의 마을 입구의 전원적인 풍경
▼ 랑가르 앞으로 와칸분지가 부체꼴모양으로 넓게 퍼져나간다. 고선지군과 토번군이 사투를 벌리던 격전지이다.
한편 ‘와칸남로’는 랑가르에서 판지강을 건너 동쪽으로 와칸천을 따라 길을 재촉하여 와칸계곡 북쪽의 최대마을인 사르하드를 지나 곧장 와키지르 고개길을 올라 와크지르 고개를 넘어서 중국령 밍티카 마을을 거처 역시 총령진으로 나아간다. 혜초와 현장을 제외한 나머지 수많은 구법승들과 대상들이 주로 넘나들었던 루트이다. 2)
랑가르는 인구 2천명도 안 되는 조그만 마을이어서 상가는 별도로 형성되어 있지 않고 다만 길을 따라 길게 띄엄띄엄 민가들이 늘어선 것이 전부여서 어디서 차를 내려야할지 모를 정도였다. 해떨어지기 전에 허겁지겁 숙소를 잡고 고단한 일정을 마무리하고 피곤에 겨워 골아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하늘은 전날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청명하였다. 눈을 부비고 마당에 나오니 북쪽으로 하늘을 반쯤 가릴 듯한 만년설에 쌓인 눈부신 설봉들이 눈을 찌르듯 파고 들어왔는데, 마치 그 느낌은 온몸으로 전기가 흐르는 것은 일종의 전율이었다. 바로 눈앞에 파미르고원에서 한두 번째를 다투는 칼마르크스(Kal Marx, 6723m)와 엥겔스(Engels, 6470m) 산이 나타나 있던 것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공짜로 주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길가로 나왔더니 목가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린 목동들이 방목장으로 가는지 작은 노새를 타고 수십 마리 정도의 소규모 양떼를 거느리고 길을 따라 가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참으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어서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나그네라면 그냥 며칠 동안 랑가르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
대개 꼭 필요한 경비만 지니고 떠나는 개별 ‘백 페커(backpacker)’들에게 낯선 나라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하루 밤 비와 이슬을 피할 숙소이다. 이들에게 차비는 필수적인 지출사항이기에 아낄 수 없지만 대신 식비나 숙박비에서 짠돌이 노릇을 해야 한다. 대신 입과 몸이 좀 고생을 하지만, 어느 정도의 고행은 즐겁게 넘길 수 있어서 진정한 고수이다. 하기야 이 대목에서 “집나가면 개고생” 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하겠지만…
▼ 랑가르의 홈 스테이 안내판
▼ 랑가르의 홈 스테이 안마당
그래서 나그네들은 집 떠나기 전부터 온갖 정보를 동원하여 싸고 편한 숙소를 찾아내어 메모를 하여서 신주단지 지니고 다닌다. 왜냐하면 이 정보의 질량에 따라서 여행의 성과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파미르를 중심으로 한 타지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는 큰 도시 외에는 호텔은 보기 드물다. 물론 비싼 호텔은 걸망을 등에 맨 ‘백페커’에겐 그림의 떡이기에 ‘게스트하우스(G.H)’가 주로 이들의 하루밤 숙소가 되지만, 시골에서는 ‘홈스테이’라는 곳이 괜찮다. 그냥 민박 개념의 숙소인데, 랑가르에만 3-4군데가 문을 열고 있다. 하루 숙박비는 대략 10여$ 정도인데, 근처에 식당이나 카페가 없기에 대개 아침, 저녁식사까지 챙겨주게 마련이다. 빵과 스프와 차 등의 기본적인 소박한 식단이지만, 가격대비 나무랄 데 없는 한 끼이기에 나그네들은 주인의 마음씨나 말솜씨에 따라서 며칠 동안 한 집에 머물기도 한다.
평화로운 랑가르에서 며칠 머물며 조랑말이나 타면서 목가적인 흥취를 맛보고 싶었지만, 길 떠나지 않으면 어찌 나그네일까? 하여서 뒤돌아보며 다시 길 위에 오른다. 방랑의 나그네라도 그러할지언정, 하물며 먼 옛날 조국과 민족을 잃은 망국의 유민이 되어 천리타향 이곳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쓸어져 간, 이른바 단결병(團結兵)3)이란 이름의 해동의 혼령들이 깃들어있는 옛 전쟁터를 찾아가서 분향재배해야 하는 필자 같은 나그네야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을까보냐?
어렵게 대절한 사륜구동차를 타고 마을 뒷산의 급경사 길을 5km쯤 지그재그로 올라가다가 시야가 시원하게 트이는 곳에서 차가 선다. 무슨 일? 하고 운전기사를 처다보니, 그는 ‘라틈!, 라틈 콸라!’하면서 무언가를 향해 손짓을 해댄다. 아, 벌써 목적지에 다 왔나보다… 혼자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려 그쪽을 바라보니, 정말 저 멀리 야성이 살아있는 고산지대의 찬란한 햇발 아래 고풍스런 고성이 듬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다 보이는 게 아닌가?
과연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삼면이 온통 깊은 협곡에 둘러싸이고 한쪽 면만이 겨우 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벼랑 끝에 외로운 고성은 자리 잡고 있었다. 칼 마르크스산(Karl Marx, 6,723m)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맑고 차가운 물이 가득 넘쳐흐르는 수로(水路)가 그 성안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물 흐르는 소리만 들어보아도 그 수량을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나그네 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전략적으로 방어하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易守难攻] 일당백의 천혜의 요새였다.
이 라틈콸라[城]는 역시 기원 전후 시기인, 쿠샨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는데, 그 이름은 ‘첫째’라는 뜻을 가진 페르시아어의 ‘후라탐(Fratam)’에서 파생되었다 한다. 와칸주랑 길목을 지키는 ‘첫 번째 성루’ 또는 와칸에서 ‘가장 큰 성’ 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이름이라니 그것부터가 무언가 기대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런데, 해동의 나그네가 어렵게 구해 가이드북 삼아 보는 역사책[The Pamirs-History]4)에는 이 성에 대해 무척 흥미로운 기록이 눈에 띤다. 그 기록으로 말미암아 내가 랑가르 답사를 오매불망 벼르고 별렀었는데, 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고선지(高仙芝,?~756)장군에 대해서 비록 간략하지만, 무척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여기서 먼저 이 부분을 번역해보자.
[라틈요새]는 아마도 747년 코리안-중국의 장군[Korean-Chinese General] 고선지[Kao Hsien-chih]가 와칸에서 티베트군5)을 공격하려고 그리고 그들을 파미르에서 축출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그의 진지중의 하나이다.6)
고선지에 대한 원초적인 사료는『신,구당서』의「고선지열전」같은 중국 쪽의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린 또 다른 방계자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둔황석굴을 세계에 알린 유명한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Sir M.A. Stein, 1862년~1943년)7)의 글이 그것인데, 그는 고선지의 서역원정 루트를 3회에 걸쳐 실지답사한 뒤『고대의 호탄(Ancient Khotan)』이란 책에서 다음과 논평을 하고 있다.
한니발과 (중략) 나폴레옹의 군대가 1796년에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알프스 산맥을 돌파한 것은 747년 고선지의 군대가 힌두쿠시 산맥을 넘은 것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하다
이렇게 스타인은 고선지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선지가 알프스보다 더 높고 험한 힌두쿠시 산맥을 넘나들면서 길깃트를 기습하는 작전을 펴서 당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중국으로 돌려놓았다는데 있다.
▲ 남쪽으로 판지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랑가르 북쪽 산기슭, 삼면이 협곡인 곳에 라틈고성이 자리 잡고 있다.
▼ 라틈요새의 원경 왼쪽으로 깊은 계곡이, 앞쪽으로는 와칸분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절벽위에 자리잡고 있는, 천헤의 요새이다.
▼ 이름모를 야생화가 듬성듬성 피어 있는 라틈고성
삭막한 폐허의 고성에서 바쁘게 옛 전쟁터의 구석구석을 기웃대다보니 벌써 해는 설산 뒤로 넘어 가려고 서쪽으로 기울고 이윽고 성벽의 그림자도 점차로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 때 문득 돌담 밑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나그네의 눈 속으로 들어온다. 기우는 햇살을 받아 더욱 검붉게 빛나고 있었다. 아, 어느 이름 모를 해동의 단결병사의 피우지 못한 꿈이 송이송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 아닐까?
1) 본서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 부록의 파미르횡단도의 # 9-2이고,
2) 본서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 부록의 파미르횡단도의 # 9-3이다.
3) 단결병(團結兵)에 대해서는 “「舊唐書」卷43 職官二 『관내에 團結兵이 있었다. 秦,成,岷,渭,河,蘭 6주에 살고 있는 고려와 羌兵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고선지 휘하에 많은 고구려유민이 있었다고 한다.
4) The Pamirs-History』, Archaeology and Culture, by Robert Middleton, 2010
5) 당시의 상황은 졸저『티베트 역사산책』176에 자세하다. “토번과 당나라는 730년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효력은 7년을 넘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당시 토번은 37대왕 티데줍쩬 때였는데 당이 이 조약을 어기고 운남(云南)의 토번의 영토를 침공하자, 다음 해인 735년 동맹국 돌궐이 당의 영토였던 안서(安西)와 북정(北庭)을 공격하자, 이에 토번도 행동을 같이하고자 게쌍돈줍이 출정하여 대발률[현 Scardo]을 거처 인더스 계곡을 따라 실크로드의 최대의 요충지인 소발률[현, Gilgit]에 도착하자 수실리디 왕은 투항하고, 이에 주위 20여 서역 제국도 연이어 항복하여 토번은 실크로드의 요충지를 거의 장악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후 토번은 소발률국의 국왕에게 토번공주를 시집보내는 정략적인 결혼을 맺어 힌두쿠시 산맥 이남의 맹주국이 되면서 서역의 주도권을 차지했고,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서 사라센 제국과 연합하는데 성공하여 서역의 국가들은 조공을 당나라 대신 토번에 바치기 시작했다.
6) and probably used by the Korean-Chinese General Kao Hsien-chih in 747CE as one of his bases for attacking the Tibetans in the Wakhan and ousting them from the Pamirs.
7) 그는 영국과 인도 정부의 지원으로 중앙아시아를 3번 탐사하여 많은 유물을 발굴했으며, 중국 간쑤 성 둔황의 막고굴 제17굴 장경동의 유물을 연구해 이를 유럽의 학계에 알려 '돈황학)'을 정립한 인물로 현재도 아프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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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다정/김규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3.22 와흐한! 와흐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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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길동이 작성시간 15.03.19 감사히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천산 작성시간 15.03.21 요즘은 정확하게 3일만에 새글이 올라오네요. 부지런하시기는~~한 편 쓰시는게 보통 힘든게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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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다정/김규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3.22 네 단행본은 이미 5월 초 발간확정으로, 현재 마지막 교정 및 사진 편집중에 있습니다만. 그래도 본 카패의 연재는 당분간 3일에 한번 씩 올릴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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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식쿨 작성시간 15.03.25 출간기대만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