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아!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 설산
3-1) 바다 속이었던, 히말라야
3-2) 안나푸르나 설산의 테라스, 포카라
3-3) 안나푸르나 & 마르디 히말 트렉킹
3-4) 하늘나라의 붉은 장원(莊園), 랄리구라스 숲길
3-5) 한 송이 붉은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산 사람들
3-6) 설산기슭의 지누단다 노천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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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바다 속이었던, 히말라야 37장
► 히말라야가 바다 속이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티베트 그림들
► 히말라야에서 발견되는 암모나이트 조개화석들
► 사마르가타 Vs 쪼모랑마 Vs 에베레스트
►옴 마니 반메훔
인도대륙과 티베트고원 사이에, 마치 해삼 같이 기다랗게 동서로 늘어져 있는 나라가 네팔인데, 우리 한반도보다도 작은 이 나라가 세계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히말라야라는 대 설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대륙 가운데, 동서로 2천 8백㎞나 뻗어 있는 이 거대한 산맥은 8천m급의 거봉 14좌(座)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중 네팔에만 8봉이 자리 잡고 있다. 서쪽으로부터 꼽아보자면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 마나슬루, 시샤빵마, 초오유, 사마르가타[쪼모랑마:에베레스트], 로체, 마칼루 등의 순서인데, 특히 중앙네팔에는 소위 ‘쿰부히말’이라 하여 5개의 8천m봉과 38개의 군소봉들이 지구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호위하듯 솟아 있다. 그렇기에 세계는 히말라야를 ‘지구의 척추’ 또는 ‘지구의 지붕’으로 부르고 있다.
히말라야는 범어(梵語) ‘히마+말라야’가 합성된 단어로 ‘눈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거대한 ‘눈의 장원(莊園)’의 주인은 신들이다. 인간들이 발걸음을 몇 번 남겼다고 해서 이 신전이 인간의 소유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히말라야는 분명 인간의 영역 밖이다. 그것은 히말라야의 깊이 모를 경이로움 앞에 서 본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인하는 바 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 앞에 서면 ‘옴’이라는 만트라, 일종의 신비로운 파장이 자신도 모르게 전율같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특히 며칠 동안 구름에 덮여 있다가 문득 그 자태를 들어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설산이라 해도 그것은 물론 바위와 흙 그리고 눈과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연물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에서 어떤 성스러운 신의 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졸저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산들 중에는 그냥 산인 것도 있지만 특별한 성격을 지닌 산들도 있다. 그러한 산들의 성격은 단지 다른 산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특이한 용모를 지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마저 특이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한편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조화롭고 지속적이며 뚜렷한 방향이 잡힌 개성에서 비롯된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자질을 자기 속에 가장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면 그는 지도자나 사상가 혹은 성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성스러운 힘을 담고 있는 하나의 통로라고 여기며 성스러운 산이라고까지 부른다.
그러한 산의 힘은 너무나 위대하고 또한 섬세해서 강요하지 않아도 그것을 보는 이는 마치 자력에 이끌리듯 끌리게 된다.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려서 그 성스러운 힘에 중심에 접근하고 숭배하려고 많은 어려움과 손해를 참고 견딘다. 사실 아무도 처음부터 성스럽다고 제목을 붙인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아무도 단체를 조직해서 억지로 산을 숭배하도록 할 필요가 없다. 단지 한번 그 산을 보게 되면 그 산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해서 숭배하는 것 외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볼리비아 출신의 티베트 까귀빠 승려이며, 『구루의 땅(The way of white clouds)』 라는 유명한 순례기를 남긴 고빈다(A. Govinda)는 명상을 통하여 성산에 대한 탁월한 견해를 이처럼 피력하고 있다.
정말 그랬다. 우리의 기철학(氣) 용어로 풀이하면 히말라야는 그냥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으로 하여금 무릎까지 꿇게 하는 기가 뿜어져 나오는 산이다. 그냥 처음부터 성스러운 St Mountain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산을 본 사람의 입이나 글로서 다른 사람으로 퍼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성스러운 산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실증 과학적 또는 고등 종교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전 단계인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원초적 심리상태에서 비롯되었다. 원시상태에서의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자연물이나 동물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나약함을 자극하여 숭배의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른바 토템이즘(Totemism)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자연물에는 나름대로의 영혼이 있다고 믿어서 인간의 영혼과의 교류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른바 애니미즘(Animism)이나 샤머니즘이다. 이런 영적이고 종교적인 마음은 산을 정복하여 에고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 보다는 산을 바라보고 경배함으로써 가슴으로 그 산의 영혼을 받아들여 교감을 통해 자신의 영적 성숙을 꾀하는 쪽에 목적이 있다.
여기에서 시각의 차이가 드러난다. 산을 정복함으로써 얻는 희열보다 산을 받아들여 자기를 완성시키는 기쁨을 얻는 것이 인간 정신의 요체로, 서양적이라기보다는 동양적이다.
“산은 살아있다”는 애니미즘적 인식은, “무생물에는 생명이 없다”고 단정한 서구적 유물론과 대립되어 내려왔지만, 요즘에는 현대물리학이 그 점을 조심스레 인정하는 추세여서 고대동양의 은자들이 까마득한 옛날에 명상을 통해 밝혀낸 것들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고 있다. 파란 눈의 고행승 고빈다는 명상을 통해 이런 점을 생각해 내었다.
“산은 자라기도 하고 쇠하기도 한다. 산은 쉬고 있으며 맥박이 뛰고 있다. 산은 주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끌어 모은다. 대기의 힘, 물의 힘, 전기와 자력 등등을 모아서 물과 구름을 생성시키며 천둥과 번개, 폭우 등을 만들고 또 폭포수, 안개, 시내, 강 등을 만들어 낸다. 산은 주위에 있는 것들에게 생명력을 가득 채워주며, 살아 있는 수 많은 생명체들에게 보금자리와 양식을 제공한다. 그래서 산은 더욱 위대하고 능력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산이 인간에게 지고한 열망의 상징이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대의 종교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이다. 그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에 대한 영원한 대상이 되었으며 세속을 초월해서 우리가 태어나고 속해있는 우주의 무한성을 향하는 지표가 되었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산 밑에 서면 우리는 두려움과 함께 안온함도, 마치 모태에 다시 들어가 앉아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곳에서 우리는 자기의 본래면목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식의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지금의 생활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사실 티끌 같은 세상에서 아옹다옹 살다보면 우리는 해, 달, 별 그리고 자연물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끈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느낀 순간 우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굴레를 벗고 돈, 명예, 쾌락을 추구하는 등등의 이기적인 생활을 벗어나 자연의 끈을 잡으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기에는 쉽지가 않다. 이미 스스로가 단단히 묶여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이미 그렇게 되기로 운명 지어진, 사람들은 그 부름소리를 듣고 성스러운 것에 대한 열망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어남을 깨달아 그 영감의 근원지를 찾아 길을 떠나게 된다. 자연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끈을 자신의 영혼에다 잇기 위하여,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 신과 자아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언제부터 신의 영역이던 설산이 인간의 에고를 드날리는 난장판 경주장으로 변했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1953년 영국 힐라리경의 에베레스트 등반이 기폭제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로서 네팔과 나란히 이웃한 부탄(Buthan)왕국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전자가 신이 자신들의 나라에 내려준 설산을 팔아 돈벌이에 본격적으로 나선 반면 후자 같은 나라는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 설산의 정상에 올라 자신들이 섬겨오던 신을 모독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돈 몇 푼 때문에 그 일에 앞장을 서거나 뒤에서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자신들의 행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자, 국왕이 멋지게 한 말씀 하시기를, "우리에게는 외화를 가져오는 등산객보다 밭에서 일하는 농민이 소중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농민을 포터로 고용하는 일을 금지시키고 외국원정대의 등반자체를 대폭 제한하였다. 그런 조치로 인해 현재까지 부탄에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못한 거봉들이 즐비하게 신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각설하고, ‘옴(唵, Aum)’ 이란 말은 인도의 고대 언어인 범어 산스끄리뜨의 기본음절이며 그들의 문자인 대바가나리(Devaganari)의 시작에 해당되는 글자다. 그래서 만뜨라에서는 ‘옴’을 <개경계진언(開境界盡言)>이라 번역한다. 말하자면 모든 경계의 시작을 뜻하며 우리말의 ‘아!’에 해당되는 ‘영혼의 모음’에 해당된다.
인도철학에 매료되어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단편까지 쓴 대문호 헤르만 헤세(H. Hesse)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후의 일성(一聲)이 바로 최초의 진언 ‘옴(Aum, 唵)’이었다고 못 박고 있다.
“어느덧 싯다르타는 언어 중의 언어인, ‘옴’을 소리 없이 말할 줄 알게 되어 호흡과 더불어 그 말을 통일된 영혼으로 소리 없이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의 이마는 명철하게 사고하는 정신의 광채로 에워싸여 있었다. 어느덧 그는 자기본성의 깊은 곳에서 불멸하는 아트만(Atman)을, 우주와 합일된 존재를 깨달았던 것이다.”
인도의 최고의 고전 《베다》에는 “‘옴’은 활, 영혼은 화살. ‘범(梵, Brahman)’은 우리가 필연코 맞춰야 할 화살의 과녁” 이라는 구절이 있다. 내친 김에 ‘옴’을 좀 더 힌두이즘으로 풀이해보자면 우선 하늘과 땅과 대기의 삼계를 의미하며 또한 힌두의 삼주신(三主神:Trimurthi)인 브라마신과 비슈누신과 시바신의 신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같이 ‘옴’은 한 마디 뿐인 짧은 단어이지만, 우주의 정수를 담고 있는 언어적인 만뜨라(Mantra)이다. 그렇기에 힌두인들은 모든 기도와 찬송과 명상의 시작에서 이 음절을 외우게 된다.
한편 불교도나 자이나교도들의 의례에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옴 마니 빠드마 훔” 이 바로 대표적인 용례이다. 이를 우리불교에서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으로 무엇보다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의 기원이 담겨 있기에 티베트불교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한 만뜨라이기도 하다.
이를 한자 한자 다시 풀이해보면, ‘옴’은 ‘AUM’의 범어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수행자의 몸과 말과 마음의 정화를 상징하여 모든 진언의 시작부분에 사용된다. 다음의 ‘마니’는 보배 같은 자비의 방편의 요소를 상징한다. 보배가 가난함을 없앨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음의 이타심은 윤회의 가난이나 장애를 없앨 수 있는 의미가 들어 있다. 다음은 연꽃을 의미하는 ‘빠드마’ 또는 ‘반메’는 지혜를 상징한다. 연꽃이 진흙에서 자라나더라도 진흙의 허물에 더러워지지 않는 것처럼, 진리를 깨닫는 지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음절 ‘훔’은 청정함으로 방편과 지혜의 불가분한 결합으로 완성시킨다는 회향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짧게 풀이하자면 ‘옴’으로 마음을 청정하게 열어서 연꽃 같은 지혜와 보석 같은 방편인 실천력을 합해 진리의 완성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원한 뒤 ‘훔’으로 회향하는 만뜨라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바위와 흙 그리고 눈과 어름으로 되어 있는 히말라야에서 그런 신성,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느낌은 설산을 가슴으로 받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이렇게 현재 지구촌 최고의 산맥이 까마득한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그 때보다도 더 옛날에는 바다 속이었다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지질학에 의하면, 원래 아시아대륙판[A. Plate]과 분리되어 있었던 인도대륙판[India P.]이 지각변동으로 밀려와 두 판이 부딪히면서 한 대륙판을 들어 올려 히말라야와 티베트고원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어서 매년 히말라야는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학지식 말고도 히말라야의 여행자들은 지금도 그 증거들을- 고대 암모나이트 조개화석과 바닷물에서만 살 수 있는 살아 있는 물고기들과 바다와 관련된 많은 전설들을-도처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무언가 의미심장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과학이 이제 겨우 밝혀내고 있는 이런 사실을 히말라야의 주위의 원주민들이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어 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이미 히말라야가 바다였었다는 사실을 전설로 전해내려 왔고 나아가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에서 변화했다는 ‘윤회론적 진화론’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들의 갈 길과 거리가 먼 것이기에 생략하지만, 하여간 서양과학의 콧대를 꺾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참, 에베레스트의 명칭은 한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근대의 삼각측량법이 발달되기 이전에는 지구의 최고봉은 시킴(Skhim) 왕국 근처의 강쩬중가(8,586m)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855년 정밀측량에 의해 당시 이름조차 없었던 무명봉(Peak XV)이 다크호스로 등장하였다.
이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야한 했는데, 그때 거론된 이름으로는 데바훙가, 샤가르마타, 친고파마리, 가우리산카 등과 같은, 범어로 ‘최고봉’이란 뜻을 가진 이름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콧김에 의해 인도에서 주장한 이름이 임시로 불리게 되었다. 바로 영국왕립측량국장이었던 에베레스트(Sir G. Everest)이다. 그 후 영국의 인도통치 내내 그렇게 불리다가 고착화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즈음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바로 잡아야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름이 없던 무명봉의 경우는 처음 발견한 사람이나 처음 등반 한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있지만, 엄연히 수천 년 동안 불리던 이름이 있는데 강대국이라고 해서 고작 측량국장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은 국제적 관례에 어긋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다시 거론되고 있는 이름이 범어로 ‘최고봉’이란 뜻의 ‘사가르마타’ 또는 티베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란 뜻의 ‘쪼모랑마’라는 이름으로 복권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돌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네팔에서는 오히려 사가르마타보다 에베레스트를 즐겨 쓰고 있어서 씁쓸함을 더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