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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요청으로서의 이야기식 설교(정인교 박사)

작성자김상수|작성시간04.07.09|조회수891 목록 댓글 0
18. 새로운 요청으로서의 이야기식 설교
http://sgti.kehc.org/data/person/ikjung/millenium-sermon/18.htm

정인교 교수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개념적 이해

설교는 스타일과 내용이라는 그 자체의 문제뿐 아니라 변화하는 회중이라는 상황적 요인으로 인해 끊임없이 안주의 틀을 깨고 나올 것을 요청받아 왔다. 즉 기존의 전통적 설교로는 더 이상 말씀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정체성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다는 인식이 편만하게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이야기식 설교(Narrative-Preaching)이다. 이 설교 방식은 매우 다양한 형식상의 폭을 보여주면서도 공히 이야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교훈식, 강의식 설교와는 구별된다. 이야기를 새로운 설교의 대안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와 인간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의사전달에 있어서 이야기의 놀라운 효력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라이스(Charles Rice)에 따르면 성경은 지구 위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인간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하나님의 자기 현현(顯現)의 이야기는 특정한 인간의 경험에 관한 특정한 이야기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서가 이야기를(The Story) 표현하는 이야기들에(stories) 대한 증언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데 이야기의 중요성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라이스가 옳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주석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인간의 삶은 이야기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으며 또 우리 경험을 이해하는 데 좋은 수단이 된다.

이야기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앙의 성격과 그것의 수용 사이의 상관성 때문이기도 하다. 흑인 설교가인 미첼(Henry Mitchell)은 설교자들이 오랜 기간 설교를 사람들과의 이성적인 사안(a matter of reasoning)으로 인식해 왔지만 그러나 이성적 의식은 인간성 가운데 철저한 신앙을 위한 가장 최소한의 측면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성적인 호소를 통해 정보는 제공될 수 있지만 그러나 신앙은 인식과는 다른 것이다. 신앙은 전 인간과 그의 모든 것 일체를 다 포괄한다. 합리성이 할 수 없는 것을 신앙이 일깨우고 준비하는데 이 신앙은 직관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며 직관과 연관될 때 그 신앙은 가장 효과적인 것이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야기가 신학의 주요 주제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이야기신학(Narrative Theology)이 발생하면서부터인데, 이야기식 설교학이 설교학의 한 부분으로 나타나게 된 더 직접적인 원전은 크라이테스(Stephen Crites)의 세미나 원고인 “경험의 이야기 특성”(The Narrative Quality of Experience)이다. 크라이테스로부터 촉발된 이야기와 설교의 만남은 그후 미국 및 서구의 설교학자들간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으며 활발한 논의와 연구를 촉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동조하는 것이 비교적 무리 없이 진행된 데 반해 이야기와 설교의 조합은 그 개념과 성격을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형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당장 이야기인가 이야기식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원래 우리가 택한 ‘이야기식 설교’라는 명칭은 이야기 설교, 이야기체 설교, 설화체 설교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런 용어들은 story preaching, story-telling preaching, narrative preaching 등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처럼 명칭이 다양한 것은 아직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 정리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일차적으로 ‘story’와 ‘narrative’라는 두 단어를 동의어로 볼 것인가의 여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로우리는 내러티브를 특정한 스토리나 특정한 사건을 나타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단어로 보면서 이야기에 있어 공통적인 것 즉 줄거리의 흐름 수수께끼에서 시작하여 반전을 거친 다음 좋은 결과로 맺게 되는 과정은 항상 일정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전혀 다른 두 개의 프로를 보아도 줄거리 진행의 측면에서 변하지 않는 흐름을 갖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내러티브라고 본다. 사실 통상적인 용법에서 내러티브라는 말은 어느 특정한 스토리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또는 어떤 구술용 대본의 기초가 되는 진행의 흐름이나 전형적인 줄거리 전개 양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로우리는 내러티브 내용을 말할 때에는 스토리를, 내러티브의 형식을 말할 때에는 내러티브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야기식 설교라는 것은 인물 사건 배경을 필수적인 요소로 갖는 ‘이야기’를 설교의 중심 축으로 하는 스토리텔링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즉 이야기식 설교는 이야기를 포함하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고 이야기 없이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틀만을 사용한 설교일 수도 있다. 이 설교 방식이 지향하는 것은 회중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나 소설을 보는 것처럼 설교를 들어가면서 줄거리를 파악하게 하고 그 설교의 흐름 속에서 경험을 공감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야기식 설교의 기본 요소로서의 플롯

이야기식 설교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는 플롯(plot)이다. 플롯이란 우리말로는 ‘얽어짜기’로 번역할 수 있는데, 부분과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형성하게 될 때 그 이야기는 일정한 플롯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플롯이란 전체와 부분이 해설자의 의도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조직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롯은 문학 작품뿐 아니라 이야기식 설교에 있어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설교 방식이 일정한 진행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라이켄(Leland Ryken)이 플롯을 이야기의 중심부에 있는 갈등이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장치라고 정의했을 때 그것은 곧 이야기식 설교가 갖는 이야기성(Narrativity)을 충족시키는 필요충분 조건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플롯의 구성은 매우 다양하지만 현재는 마틴(Martin Wallace)이 독일의 프레탁의 이론에서 추출한 4단계를 규범적인 플롯의 모형으로 꼽는다: A―B―C―D. A-B에서는 해설이 제시되고 B에서는 갈등이 소개된다. B-C는 행동의 발생 곧 갈등이 복합 또는 발전되는 단계이며, C는 절정, 행동의 전환을 의미한다. C-D는 갈등이 해결되는 단계이다.

해설은 발단이라고도 불리우는데, 플롯을 제시하기 위한 최초의 상황도입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을 제시해 주는 단계이다. 해설 단계는 최초의 등장인물과 그들의 상호 관계를 제시해 주며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진행을 위해 사건 발생의 원인과 배경을 불완전하게 설명한다. 또한 이야기의 중심 사상이 암시되면서 다음 사건에 대한 지적 흥미를 야기시키는 단계이다. 성서 이야기에서 해설은 보통 배경이나 인물의 소개, 인물의 이름이나 특성 인물의 외관 삶의 양태나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설화를 이해하기 위한 세부적인 필요들을 소개하기 위해 이야기의 서두에 제시된다.

갈등은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어떤 장애가 생겨 갈등이 생기고 복잡해지는 단계이다. 갈등은 주로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를 통해 표출되거나 해설자에 의해 선정된 한 사람의 독백 또는 심리적 요인으로 드러난다. 등장인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관점의 불일치나 등장 인물 사이의 서로 다른 성격에서 비롯된다.

절정은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 위기라고 알려진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을 말한다. 이때 플롯에서 제일 중요시되는 갈등과 문제해결의 순간이 분기점을 이루는 전환점이 나타난다. 이 지점에 이르면 독자와 해설자 모두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

대단원은 갈등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을 보게 되며 새로운 안정 상태를 이루는 토대가 마련된다. 물론 이런 토대는 최종적이거나 확정적이 아니어서 암시적일 수도 있다. 이야기는 절정의 순간에서 세 가지 다른 양상 즉 급반전 발견 그리고 파국을 맞이한다.


이야기식 설교의 형식

이야기식 설교가 기본적으로 내용보다는 형식상의 그리고 구성 방법상의 문제라고 할 때 어떤 방식들이 개발되었고 또 사용되고 있는가? 사실 이 문제는 어느 하나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자 동시에 여전히 열려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 이야기식이고 어느 것이 이야기식이 아닌가에 대한 합의조차 분분한 것이 이야기식 설교라는 장르가 처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플롯이라는 구성 인자는 모든 이야기식 설교의 전제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전제하에 어디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 그리고 어떤 형식으로 배열할 것인가 하는 것에 따른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식들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로 로빈슨이 제안하는 방식이다: ① 쟁점(issue)을 발견하라 ② 쟁점을 탐구하라 ③ 쟁점을 재구성하라 ④ 쟁점을 해결하라. 여기서의 핵심은 쟁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회중이 마음속에 ‘생각하게 하는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아무 생각 없이 단지 ‘들려지는’ 설교가 될 뿐이다. 따라서 설교자의 주 임무는 쟁점을 추출하여 그것을 조합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존스톤(Sara Johnston)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관한 설교를 통해 먼저 긴장 상태를 조성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위 속에서 그릇된 긴장해소의 방법을 파악한 후 더 큰 바른 해결 방법 - 멈추고 도와 주라 - 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지는 또 다른 모순을 분석한 후 진정한 해결 방법 - 가서 이처럼 행하라 - 을 제시한다: 갈등 → 그릇된 해결(방법) → 계속되는 갈등 → 해결 → 새로운 갈등 → 진정한 해결.

좀더 간단한 방식으로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통해 ‘부정 - 부정 - 부정’을 설교 전반부에 배치한 후 결론적으로 긍정을 제시하는 방법을 들 수 있다: ① 이것은 아니다 ② 이것도 아니다 ③ 이것도 아니다 ④ 그러나 이것이다.

이 방법은 일견 이성적 논리가 경험보다 앞선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루시 로즈(Lucy Rose)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야기식 설교와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만일 논리적 끈을 유지한 채 소용되는 소재들을 이야기로 가져간다면 단순하면서도 훌륭한 이야기식 구성의 설교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식 설교의 형식과 관련하여 가장 분명한 유형을 제시한 것을 우리는 유진 로우리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이야기식 설교를 이끌어 가는 형식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분류한다:

① 스토리 진행 - 성경사건의 진행을 그 순서에 따라 그대로 옮겨 설교하기

② 스토리 보류 - 설교본문을 뒤로 미룬 채 현재의 관심사로부터 설교를 시작하고 그 다음 본문을 대입하여 진행하는 방식으로 본문이 익히 알려져 있어 놀라움을 주기 어렵다든지 전달에 어려움 있을 경우에 사용하는 방식

③ 스토리 유예(suspending) - 성경본문으로 시작하여 다른 무엇이 스토리 진행과정에서 돌출하는 방식 즉 스토리 흐름 선상에 있는 해당 본문을 떠나지만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는 방식이다. 그러나 만일 두 본문을 갖고 시작하여 어느 하나를 다루다가 다른 본문으로 가서 다시 돌아옴 없이 끝맺으면 이것은 스토리 보류에 해당한다.

④ 스토리 전환 - 기본적인 줄거리에 다양한 성경 기사 및 다양한 이야기를 줄거리에 맞게 동원하는 기법

로우리는 이야기식 설교의 작성 단계를 다섯 단계로 상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설명한다.

첫째, 평형을 뒤집어라. 이 단계는 청중들을 설교의 주제에 참여시킴으로 그들의 평형감각(늘 갖고 있는 생각)을 뒤집어 놓는 단계이다. 로우리는 회중의 경청태도가 매우 다양하고 준비상태 역시 천차만별이라는 전제하에 존 듀이가 말한 “사고(thinking)는 심각한 문제점을 만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오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한다면 그 다음 회중이 경청하게 하기 위해서는 긴장감(문제)이 전달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도 자주 사랑의 손길을 펼쳐 보지만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는 멍들고 상처 입은 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거부당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갈등이나 문제점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재료이기 때문에 설교 내용 및 설교제목은 항상 모호함과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설교를 열어가는 첫 단계의 목적은 청중의 마음에 모호함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며 끝맺음과 해명이 필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모순을 분석하라. 이 단계는 분석과 진단의 단계로 길이로 보면 가장 긴 단계이다. 로우리는 이 단계의 핵심어는 “왜 그런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 단계는 우리 설교 임무에 핵심적인 진단의 단계인데, 그는 왜 그런가를 물어보는 진단이야 말로 설교 내용뿐 아니라 설교구성을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고 본다.

셋째,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이 단계는 문제화된 이슈를 해결해 주는 어떤 설명을 찾는 단계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논점을 납득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것은 기대하지 않은 곳으로부터(상식적인 기대) 오며 그것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다. 소위 역전의 발생이다.

역전의 원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형태로 가능하다: 원인-결과의 역전; 변화된 원인의 역전; 변화된 가정의 역전; 변화된 논리의 역전

넷째, 복음을 경험하라. 이 단계는 복음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일단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 청중은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다. 로우리는 이 단계에서 특히 설교자가 주의해야 할 사항으로 소위 ‘복음의 누전’(the homiletical short circuit) 현상을 든다. 즉 회중은 해답을 빨리 듣고 싶어하고 설교자 역시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결과를 기대하라. 로우리는 기존 설교의 구성은 모든 단계가 ‘헌신으로의 초청’으로 끌고 가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고 보고 이야기식 설교 역시 이 기능의 일단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조되는 긴장감이 설교의 70% 진행정도에서 깨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클라이맥스가 설교의 종결부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해결의 순간으로 그 위치를 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나서 그 해결의 결과로 인해 문제를 다시 정돈하는 것이 설교의 ‘물음’과 동등한 역할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펴본 다양한 방식들은 설교자들의 경향성, 본문의 구조, 회중의 이해력 등에 따라 자유롭게 채택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다양한 방식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이 어떻든 우리의 설교는 살몬(Bruce C. Salmon)이 말하는 충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설교가 좋은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명확히 제한된 주제, 이야기 전개에서 단 하나의 관점, 발단에서 갈등 해결까지 잘 짜여진 구성, 실제적이고 회화적인 설명의 사용, 감정에의 호소, 소수의 인물, 직접적인 연설에 의존, 반복 사용과 결론 강조라는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19. 이야기식 설교의 다양한 방식
http://sgti.kehc.org/data/person/ikjung/millenium-sermon/19.htm

정인교 교수

최근 새롭게 부각하고 있는 이야기식(Narrative Preaching) 설교는 지금까지 300년 이상 서구 교회 설교의 핵심적인 설교방식으로 자리잡아왔던 대지설교(three points preaching) 방식의 한 대안이라 할 수 있다. 대지설교는 그것이 가진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주지적 설교 방식이라는 점에서 효과적인 전달에 많은 문제를 야기해 온 것이 사실이다. 즉 설교자가 미리 만들어 놓은 원리를 연역적으로 풀어가는 방식이다 보니 원리를 말한 뒤에 이어지는 설명이 설득력을 잃는 경우 회중의 주의를 집중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설교자는 이미 말할 것을 다 말한 상태이고 회중은 이미 들을 것의 핵심을 들은 상태이다 보니 설교의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설교자가 기울여야 하는 수고는 지대한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설교자는 수동적인 경청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이야기식 설교는 그 근본 형태가 귀납적이다. 즉 설교의 전반부에 여러 다양한 상황들이 제시되고 그것들로부터 하나의 원리를 향해 나가는 방식이다 보니 영화와 소설의 전개방식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설교를 들어가면서 메시지의 감을 잡아 나가는 방식, 설교자와 함께 회중이 설교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방식, 설교가 대지별로 끊어지는 조각교훈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작품으로 맥이 흐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내러티브 설교가 소개되기 전에도 대지설교를 하지 않고 이와 유사한 설교를 하는 분들이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곽선희, 김진홍, 옥한흠 목사 등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설교가 본격적인 내러티브 설교라 보기 힘든 것은 비록 형식으로 이들의 설교가 대지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 있지만 설교에 흐르는 기본적인 정서가 주지적이라는 것이다. 즉 설교자가 만들어 놓은 결론을 논리적으로 차분히 풀어 가는 것일 뿐 회중이 문제의식 및 의문을 가지고 설교의 과정에 동참한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식 설교는 여전히 발전해 나가는 진행형의 장르이기 때문에 확정적인 형태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이 방식의 설교가 그만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유진 로우리가 제시한 기본적인 네 가지 방식은 우리가 주목해 볼 만한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스토리 진행(Running the Story) 방식이다. 이것은 이야기 설교(Storytelling)라는 최초 방식에서 한 단계 발전한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야기가 들어 있는 본문을 택해 기록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처음 방식이었다면 이 방식은 화자가 해석 진단 평가를 겸해 가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방식으로 설교하려면 먼저 이야기가 있는 본문을 택해야 하며 그 이야기로부터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추출해 내야 한다. 그런 다음 본문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차례대로 진행시키되 상상력을 통해 행간을 읽어냄으로 그 사건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회중에게 그대로 전달함으로 사건을 함께 경험하도록 한다. 하지만 단지 성경이 전하는 본문의 사건을 진행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의 유비되는 상황을 대입시켜 전개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본문이 갖고 있는 사건의 갈등 구조를 극대화시키고 해석된 핵심 메시지로 해답을 주는 것이 설교의 근간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이 방식은 이미 회중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단순 반복할 수 있다는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화자의 진단과 해석을 곁들이는 것이 필수이고 오늘의 회중이 연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적절한 유비를 사용하여야 한다. 또한 마치 어린이들에게 동화식 구연설교를 하는 것처럼 상황에 대한 사실적이고 극적인 묘사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둘째는 스토리 보류(Delaying the Story) 방식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있는 본문을 선택하지만 설교의 도입부를 본문으로 시작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상황으로부터 시작하여 본문으로 옮아가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 상황으로부터 시작할 때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다음 본문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한번 다루어 주면서(스토리텔링) 도입부에서 제기한 문제를 본문으로부터 다시 한 번 추출해 내도록 한다.

그런 다음 이 문제를 숙성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즉 갈등과 문제를 심화시키는 과정인데 이것은 주로 본문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가져가는 방법을 통해 혹은 또 다른 본문이나 오늘의 상황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 다음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던져 주고 이것을 다른 본문 혹은 예화를 통해 두세 번에 걸쳐 재 강조해 준 다음 다시 간략한 정언적 정리로 끝맺도록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메시지는 결코 길게 가져가서는 안되며 한 단락 정도(6-7문장)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다른 성경이나 예화 등 자료의 변화를 시도해 이 메시지를 다른 각도에서 제삼 제사 취급해 줌으로 설교의 지리함을 극복하도록 하여야 한다. 시간적으로 메시지가 나오는 것은 설교의 70% 정도가 지나간 시점이기 때문에 자칫 회중의 집중력이 이완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소재로 지루하게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론 일차적으로 설교는 그 메시지가 얼마만큼 구태의연함을 벗어나는가가 설교의 성패를 좌우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 운용을 어떻게 가져가는가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데, 특히 이 시점의 운용여부가 하나의 관건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세 번째는 스토리 유예(Suspending the Story)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있는 본문을 택해 설교의 도입을 본문에 대한 이야기로(스토리텔링) 시작하여 오늘의 회중의 상황으로 연결시킨 뒤 다시 핵심적인 메시지를 본문으로부터 추출해 내는 방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스토리 보류 방식의 역순이라 할 수 있는데 처음 도입부에서 성경 본문을 상세히 다루되, 관찰식 진단식 진행을 통해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도록 한다. 그런 다음 오늘의 회중이 살아가는 상황을 취급하면서 본문에서 도출한 문제점과 동일한 것들을 회중의 상황 속에서 추출해 내도록 한다. 이어서 도출된 문제점을 확장시키고 갈등을 성숙시키는 과정을 갖게 되는데 다른 본문이나 예화 등을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심화시켜야 한다.

메시지의 제시는 갈등의 심화 다음에 나오게 되는데 이 때 메시지를 직접 이야기하기보다는 예화를 통해 먼저 인상지우고 그 다음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 경우에도 메시지는 한 단락 정도로 간략하게 제시하는 것이 좋으며 다른 본문이나 예화를 통해 이 메시지를 심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네 번째 방식은 스토리 전환(Alternating the Story)이다. 이 방식의 특징은 앞의 세 경우와 달리 설교 본문이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라 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서신서나 예언서 등과 같이 사건이나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은 본문을 이야기식으로 만드는 데 매우 유리한 방식이다. 스토리 전환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다양한 예화를 수시로 동원하여 설교를 진행하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자료들은 성경 혹은 기타 예화를 망라한다.

예화를 수시로 동원하면서 설교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설교가 아닌 예화의 진열장 식으로 비쳐질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위험을 불식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예화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주제의 명확함이다. 이 주제의 끈이 정확할 경우에만 이런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스토리 전환 역시 처음 도입부에서 한 단락 정도의 짧은 예화 3-6개를 동원하여 설교자가 제기하려는 문제를 집중 부각시킨다. 이 경우에도 사용되는 예화들이 점층적으로 처리되어 강도를 더해 가는 것이 좋은데 예를 들어 어려움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경우 일상 생활의 어려움, 신체의 불편에서 오는 어려움, 가치관의 혼동에서 오는 어려움 등으로 심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마지막 부분에는 본문으로부터 나오는 문제를 다루도록 하며 그것을 풀어가기 위해 즉 메시지를 도출하기 위해 먼저 예화를 들어 인상을 지우고 그 다음 본문으로부터 메시지를 제시하도록 한다.

앞의 두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시지의 제시는 짧게 처리하되, 예화와 다른 성경을 통해 보완하도록 한다. 예화를 많이 쓰게 되면 설교의 깊이 있는 논구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 설교자는 주제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네 가지 방식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설교의 도입부에서 문제 및 갈등 구조를 제시하고 설교의 후반부에서 메시지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문제의 제기 및 메시지의 제시라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가진 설교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봉우리와 두 번째 사이에는 문제와 갈등의 심화라는 산골짜기와 산등성이가 자리잡게 되는데 얼마나 골이 깊은가 산등성이가 가파른가에 따라 설교의 메시지가 - 이것은 결국 반전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 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회중으로 하여금 당연한 설교가 아닌 생각하게 하는 설교가 가능하며 따라서 설교의 진행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이야기식 설교의 장점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하려는 메시지를 가급적 단출하게 지시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 설교의 문제점은 바로 이 메시지의 제시가 설명 일변도로 흐르면서 그 길이가 상당히 길다는 것이다. 이야기식 설교에서는 이것을 가급적 짧게 줄이되 예화와 다른 본문이라는 소재의 변경을 통해 메시지를 다른 각도에서 재 강조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대지설교가 그 메시지의 분명함을 특징으로 갖는다면 이야기식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가 갖는 구성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회중 입장에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이런 문제를 잘 파악하여 전하려는 메시지를 강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결론을 열어 놓고 회중에게 맡기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것은 우리 설교 현장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라 할 수 있다. 또 신언을 인언으로 전달하는 것이 설교이고 보면 메신저인 설교자가 분명한 메시지를 회중에게 전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지금까지 대지설교라는 한 가지 방식에만 너무 안주해 왔다. 만일 그렇게 한 가지 방식만 쓰는 것이 설교자가 설교를 작성하는 데 편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회중에게 전달하는 데 최선의 방식인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만일 전자가 그 이유라면 설교자는 어서 빨리 그 편안함을 벗어버리고 그 구태로부터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대개는 설교자만 만족하고 회중이 외면하는 설교이기 쉽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여, 분명히 기억하시라! 깊이 있는 메시지를 추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라. 그런 다음 그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레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라. 그 심사숙고의 과정에 이야기식 설교 방식을 끼워 줄 수 있다면...













김운용 교수 -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소고
http://www.wpa.or.kr/pass/preaching/preaching-02.htm

현대 설교학의 가장 중심되는 주제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가 "어떻게 들려지게 할 것인가"이다. 아마 이러한 관심은 현대 설교학의 관심 주제일 뿐만 아니라 각 시대의 설교자들의 관심사항이었다. 왜냐하면 들려지는 설교, 전달되지 않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설교의 전달에 깊이 관심 해 온 현대 설교학은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사용에 대해서 깊이 관심 해 왔다. 복음서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달하실 때 주로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어떠한 사람이 좋은 이웃인가에 대해서 질문 받으셨을 때에도 그분은 신학적인 논리나 논지로 그 사실을 전달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가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했는가를 신학적인 논리로 규명하려 하시지 않고,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이야기'를 사용하셨다. 왜 그분은 거의 이야기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일까? 이야기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던(마 13:34) 이유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며(understand),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킨다(attention). 또한 이야기는 오래 기억하게 하며 (remember), 감성적인 부분들을 고양시켜준다(stir up).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택하신 이유이다.

이야기체 설교는 계몽주의 이후 합리주의의 이성에 근거한 설교가 300여년 넘게 지속되어 오는 동안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어지면서 새로운 설교를 찾으려는 시도 속에서 태동된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설교학뿐만 아니라 신학의 다른 분야에서도 이야기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대 신학적인 토양 속에서 형성되어진다.

신학의 다른 분야에서도 깊이 관심하지만 예일 대학의 교수였던 한스 프라이(Hans Frei)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을 개탄하다. 그에 의하면 계몽주의의 영향하에 들어간 18, 19세기 성서신학의 문헌을 두루 관찰하면서 내러티브(narrative)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버렸음을 지적한다.[ Hans Frei, The Eclipse of Biblical Narrative: A Study in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y Hermeneutic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4)를 보라.] 이러한 지적들과 함께 신학계에서는 이야기에 깊이 관심하게 되는데,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이 태동되고 성서해석학에서도 내러티브 비평학(Narrative criticism) 혹은 문헌비평(Literary criticism)과 같은 연구들이 대두되게 되면서 설교에서도 이야기의 사용을 깊이 관심하게 된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목회 상담이나 윤리, 또한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도 이야기는 중요한 자리매김을 해가고 있다.

설교학에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그래디 데이비스(H. Grady Davis)가 그의 책, Design for Preaching을 1958년에 발간하면서 그 관심을 촉발시켰다.)[ H. Grady Davis, Design for Preaching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58).]이러한 움직임들과 함께 꾸준히 설교의 새로운 형태에 대해 관심하게 되고, 1971년 프래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이 그의 기념비적인 책인 As One without Authority를 펴내면서 가속화되었다.[ Fred B.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3rd ed. (Nashville: Abingdon Press, 1979).]그는 설교의 새로운 틀에 대해서 깊이 관심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거의 비슷한 때에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의 교수였던 에드문드 스타이믈(Edmund Steimle)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책이 발간되면서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인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설교의 방법론을 "이야기 설교" (Story sermon)이라고 명명한다.[ Edmund Steimle, Morris Nedenthal, and Charles Rice, Preaching the Stor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과 Charles Rice, Interpretation and Imagination: The Preacher and Contemporary Literatu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0)을 보라.]그러나 그들은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설교에 있어 이야기 사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체계적인 방법론까지는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1980년도에 켄사스 시티의 성 바울 신학대학원의 설교학 교수인 유진 라우리(Eugene L. Lowry)가 이야기식 설교 구성(The Homiletical Plot)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전통적인 설교 형태를 비판하면서 이야기와 같은 구성 혹은 줄거리(plot)를 가진 형태의 설교 형태를 어떻게 준비하고 전달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야기체 설교(Narrative preaching)는 이러한 설교학적인 흐름 속에서 태동된 설교 방법이다. 이러한 일련의 설교학적인 관심과 연구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설교 방법과는 전적으로 다른 설교학적인 틀(paradigm)을 제시하고 있는데, 70년대 이후의 이러한 흐름들을 "새로운 설교학"(the New Homileltics)으로 명명되어진다. 리차드 에슬링거(Richard Eslinger)는 이러한 일련의 설교학적인 연구들을 가리켜 "설교학의 코페루니크스적인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Richard L. Eslinger, A New Hearing: Living Options in Homiletical Method (Nashville: Abingdon Press, 1987), 65.]이러한 설교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여러 갈래로 발전되어왔으며, 이야기체 설교는 그 흐름 가운데 한 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흐름들을 유진 라우리는 그의 최근의 책에서 이러한 흐름들을 6가지의 줄기로 표현한다: 귀납적 설교(the inductive sermon), 이야기 설교(the story sermon), 이야기체 설교(the narrative sermon), 흑인교회의 설교(the transconscious African American Sermon), 전개식(the phenomenological move sermon), 대화체 설교(the conversational - episodal sermon). 그러나 보다 최근의 경향에는 여기에 예일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포스트 리버랄(post-liberal)한 관점에서 설교학을 전개하는 컬럼비아 신학대학의 쳑 캠블(Chuck Campbell)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리버랄 설교(the post-liberal preaching)가 이 흐름에 합류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새로운 설교학"의 흐름과 그 구체적인 주장들에 대해서는 Eugene L. Lowry, The Sermon: Dancing the Edge of Myste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Charles L. Champbell, Preaching Jesus: New Directions for Homiletics in Hans Frei's Postliber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Eslinger, A New Hearing; Unyong Kim, "Faith Comes From Hearing: A Critical Eval‎uation of the Homiletical Paradigm Shift Through the Homiletical Theories of Fred B. Craddock, Eugene L. Lowry, and David Buttrick, and Its Application to the Korean Church" (Ph.D. Diss. Union Theological Seminary and Presbyterian School of Christian Education, 1999)을 참조하라.]여기에서는 지면 관계상 유진 라우리의 이야기식 설교 방법론을 중심으로 이야기체 설교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라우리에게 있어서 설교는 "이야기와 같은 예술의 형태"(narrative art form)이다. 그러나 여기서 라우리가 사용하는 "이야기(narrative)"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이야기 설교(story sermon)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다소 다르게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방법론에서는 설교가 반드시 이야기로 되어져야 한다기 보다는, "이야기와 같은"(story-like), 즉 "이야기체"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야기의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 라우리는 다소의 오해가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라우리의 설교 방법에는 이야기가 하나도 사용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와 같이 줄거리가 있고, 플랏(plot)이 강조된다.

이야기는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움직임을 통해 진행해 간다. 이야기에는 처음 시작이 있고, 중간 과정이 있으며, 나중의 결론을 향하여 계속해서 움직여 간다. 즉 기, 승, 전, 결의 형태를 통해서 움직여 가는 것이 이야기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연속성"(continuity)과 "움직임"(movement)이다. 이러한 연속성과 움직임을 지배하는 것이 플랏이다. 그러므로 라우리에 의하면 설교는 어떤 정지된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event-in-time)이다.

이야기체 설교는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들이 훨씬 심화되고 복잡해지는 과정을 걸쳐, 기대할 수 없었던 역전이 일어나게 되고, 대단원의 종결이 이루어지는 형태를 가진다. 본문을 통해 청중들이 느끼는 어떤 필요가 설교를 구성하는 과제로서 역할을 하게 되며, 설교는 이러한 과제를 딜레마를 형성하여 서술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청중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모호함(ambiguity)이 심화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 방법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모호함을 형성할 것인가" 이다. 예를 들면 "오늘 저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설교를 시작한다면 그 설교는 시작부터 따분함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같은 내용이지만,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면 청중들의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자주 사랑을 베풀고 나서 억울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가슴에 멍이 들고, 깨지고... 사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고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것은 그러한 반대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을 베푸는 손길이 깨지고 멍이 든다? 여기에서 청중들의 마음의 안정은 흔들리고 당혹감을 갖게 되거나, 혹은 그러한 경험을 이미 한 사람들은 깊은 공감대를 가지고서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 모호함이 야기되고,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이 얼마나 제시되느냐가 훌륭한 설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사실 청중들은 그런 모호함으로부터 시작된 설교가 나머지 부분에서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어 가는지를 간절히 보기를 원한다. 따라서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서론에서 제기된 그 모호함을 해결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어떻게 구성(plot)되느냐하는 것은 성공적인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우리는 이야기식 설교 구성을 위한 기본적인 단계들을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라우리의 이야기식 설교 방법에 대해서는 Eugene Lowry, The Homiletical Plot, 이연길 역, 이아기체 설교 구성(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6)과 How to Preach a Parable: Designs for Narrative Sermons (Nashville: Abingdon Press, 1989)을 보라.]그것은 이야기식 설교가 움직임(movement)을 가지고 진행되기 위한 중요한 지침들이다. 물론 이것들은 최근에 발간한 그의 책[ Eugene Lowry, The Sermon: Dancing the Edge of Myste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에서는 다소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그 단계도 축소되었지만, 여기에서는 그의 초기의 이론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1) 모순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 평정을 깨뜨리라! (Upsetting the equilibrium)

이 첫번째 단계에서 설교자는 본문으로부터 청중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문제"를 제기하여 설교의 주제 속으로 참여시키되, 모호함을 야기 시키면서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깨뜨리면서 그들의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청중들은 의혹감과 당혹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중요한 단계를 잘 개발하는 것은 설교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들이 이 단계를 효과적으로 개발해 내기 위해서 극작가들이나 방송작가, 혹은 소설가들의 접근 방식에 주의하는 것이 한가지의 도움을 얻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청중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든지 간에 그들 자신이 만들어 가는 세계로 청중들을 끌어들인다. 이와 같이 선포되는 설교의 첫 번 단계는 마치 여러 종류의 갈증이나 긴장을 소개하고 있는 연극이나 영화의 서두 장면과 유사하다.

이 단계를 준비함에 있어서 몇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먼저 너무 주제와 무관한 모호함을 제시함으로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핵심 줄거리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청중들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면 실패하게 된다는 말이다. 라우리는 그의 실패담을 이야기한다. 요나서의 설교를 통해 "요나의 편협함과 하나님 사랑의 거대함"을 설교하기를 원했다. 그는 서론 부분에서 20세기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요나가 사흘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큰 물고기의 이야기를 과학의 시대에 듣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흥미를 위해서 사용한 그 서두는 모호함과 당혹감을 일으켰지만 청중들을 그의 전하려는 주제로까지 인도하는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그 모호함과 의혹의 늪에서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단계에서 주의할 것은 줄거리의 해결점을 미리 말하지 말아야 하는 반면, 모호함으로 향하는 방향은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중들은 줄거리가 진행될 방향과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지만 그들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단계의 목표는 청중들의 평형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일단 평정이 뒤집어지면 설교는 문제를 엄밀히 탐구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2) 모순점과 불일치를 분석하면서 그 모호함을 심화시키라! (Analyzing the discrepancy)

두번째 단계는 이미 보여진 모순점과 모호함을 분석하는 단계이다. 제기된 문제를 탐구하고 왜 그것이 인간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하면서 그 문제를 진단한다. 전체적인 설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필요한 단계로서, 라우리는 이 단계가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청중들이 그 이후 단계에서 주어질 복음을 심도있게 경험하느냐는 이 단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신학적인 근거도 제시되어질 수 있고,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면서 인간 실존의 상태까지 심층 분석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분석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며, 예화로 대치되어서도 안되며, 깊이 있는 진단이 주어져야 한다. 다음 단계에서 제시될 해결의 실마리를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준비로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통하여 설교자가 깊이 관심해야 할 것은 모호함이 주는 긴박감, 즉 서스펜스가 형성되어지고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라! (Disclosing the clue to resolution)

이 단계는 라우리의 표현에 의하면, "아하!"가 터져 나오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문제 혹은 모호함의 진정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복음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역전되는(reversal) 현상이 일어나고, 단순하게 지적으로 아는 단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청중들은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뒤집어지면서 복음의 세계가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극적인 역전의 원리에 의해서 이끌리는 것처럼, 설교자들은 이 단계에서 역전의 원리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복음을 경험하게 하라(Experiencing the gospel)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 이제 청중들은 복음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진다. 그 이전 단계들은 이 단계를 위해서 존재한다. 모호함을 야기 시키고, 또 그 문제점들을 분석해주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이 보다 효과적으로 경험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복음을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고 연기하였다가 선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라우리는 복음을 경험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 단계에서 모호함이 적절하게 제시되고 또 문제의 실마리가 정확하게 제시되어진다면 복음은 명료하게 경험되어지게 될 것이며, 청중들은 이 단계에서 다시 평정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라우리의 방법에서는 이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2, 3 단계를 준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라우리의 최근의 저서에 의하면 이 단계는 다른 단계와 함께 주어지는 유동적인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즉 복음의 경험 단계인 4단계는 3단계와 함께 주어지기도 하고, 혹은 그 이후에도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우리는 최근의 이론에서는 5단계에서 4단계로 축소해서 설명하는데, 비슷한 용어이지만 단계를 설명하는 용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4단계는 다음과 같다: 1) 모순점 제시 단계(conflict), 2) 모순점의 심화단계(Complication), 3) 갑작스런 변환의 단계(Sudden shift), 4) 들어올리는 단계(Upholding). 라우리에 의하면 갑작스런 변환 그 자체가 복음의 소식이 되어지기도 하고, 설명을 통해서 놀라운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지면서, 즉 3단계(수정안) 이후에 주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중요한 것은 이야기체 설교의 가장 핵심은 청중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고,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5) 결과를 기대하게 하라! (Anticipating the consequences)

지금까지 선포되는 설교를 통하여 청중들은 모순이 분석되었을 것이고,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서 복음의 놀라운 소식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제 설교의 플랏에 있어서 모호함과 팽팽했던 긴장감은 이완되면서 마음의 해답을 얻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렇게 주어진 복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미래로 투사되면서 결론을 이루어가는 단계이다. 경험한 복음을 중심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언급하는 단계이다.

이와 같이 라우리의 이야기식 설교 방법은 이야기의 플랏을 따라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이며, 설교가 진행되어가는 움직임을 강조한다. 플랏된 설교는 전통적인 설교 방법에 비교할 때, 청중들이 기대감과 관심을 가지고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정(the homiletical journey)을 계속해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복음을 강조하는 설교라는 점은 그것이 가지는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 교회의 상황과 설교 현장에 이러한 이야기식 설교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와 미국 교회의 상황에서 설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이 설교 방법이 한국교회의 청중들에게도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인가는 계속적으로 연구하고 주목해야 할 사항이지만, 이러한 설교방법론이 문제 상황에 봉착해 있는 전통적인 설교 방법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 강단에도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기대되어지고 있다.

라우리의 이야기체 설교의 가장 대표적인 설교문으로 알려진 "누가 더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까?"(Who Could Ask for Anything More?)의 전문을 분석하여 싣는다.[ Eugene Lowry, How to Preach a Parable: Designs for Narrative Sermons (Nashiville: Abingdon Press, 1989), 115-121; 이 설교는 놀스 캐롤라이나 주, 덜함(Durham) 시에 위치한 듀크대학의 채플에서 행해진 설교이다 (번역: 김운용).]

"누가 더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까?"(Who Could Ask for Anything More?)

(1단계: 평형을 깨드리는 단계)

포도원 주인이 오늘 그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불러오기 위해 시장터에 나간 것은 아침 7시 15분 경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그날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9시 15분 전쯤 주인은 다시 동네의 시장터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일할 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 주인은 말했습니다. "내가 상당하게 지불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 주인의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역시 12시 15전쯤에 주인은 시장터에 다시 나왔습니다. "왜 이 사람은 처음에 필요한 만큼의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태풍이라도 불어온다는 뉴스를 들었나 보지!" 어떤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이 포도원 주인은 다시 나왔고, 불과 일할 시간이 한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나왔습니다.

드디어 일이 끝나는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임금이 지불될 시간입니다. 주인은 포도원의 살림을 총괄하고 있는 총무과장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제일 늦게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하세요." 임금을 받은 그들은 놀랬습니다. 겨우 한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한 데나리온을 다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흥분이 되었습니다. 7시에 온 사람들의 반절도 일하지 않았는데 한 데나리온이라니... "저 주인은 아마도 시간당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오늘 하루 일하고서 우리는 한달 수입의 반절은 벌게 되었구나!"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오후 3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임금이 지불될 때까지 그들은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3시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저 사람이 무엇인가 실수한 거겠지? 아마도 저 인자한 주인은 총무과장에게 다시 귀에 대고 그가 실수한 것이라고 아마도 일러 줄거야.

그러나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청지기는 12시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아침 7시에 와서 일한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럼,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가는 상관없이 주인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임금을 지불한다는 말인가?"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침 7시에 와서 진종일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만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그들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그대로 실을 수 없어서 점잖은 표현을 쓴 것일 것입니다. "아니, 나중 온 사람하고 동일하게 임금을 주는 것은 말이나 되는거야? 가장 늦게 온 사람은 땀 흘릴 시간도 없이 고작 한 시간 일했는데, 한낮의 뙤약볕에서 진종일 일한 우리와 똑같이 취급할 수 있는 말인가?" 그들의 말은 거칠어졌습니다. "잠깐만," 주인은 대답했습니다. "왜 더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까? 오늘 아침 당신들과 약속한 것을 잊었습니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한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동의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한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셨으면, 당연히 우리는 좀더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우리는 더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주인은 말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게 있습니까? 내가 관대한 것에 대해서 왜 당신들이 불평하는 것입니까? 나는 그들에게도 똑같이 지불하겠다고 마음 먹었소. 그것은 당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요. 내 돈은 내 마음대로 쓰는데 당신들이 왜 소란들이요. 당신들 돈을 받았으면 돌아가시오."

(2단계: 불일치를 분석하는 단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 자신이 아침 7시부터 진종일 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일한 시간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월급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아무리 내 돈이라도 내가 원하는대로 지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시 교육위원회에 속한 위원으로서 새로운 교사를 채용하려고 할 때, 지원자 중 선정된 두 사람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거의 동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한사람은 남자고, 한사람은 여자입니다. 만약 당신이 현재의 구직 시장(job market)의 상황을 고려해서 여자라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남자보다 월급을 덜 지급한다고 합시다. 당신은 바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이고, 당신은 해고감이 될 것이고, 당연히 그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원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 몇 사람의 임시직의 일꾼을 구한다고 합시다. 한사람은 백인이고, 한사람은 흑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돈을 적게 지불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도 약간의 차이가 날 뿐이지, 동일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국노조연합회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참 할 이야기가 많은 내용같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여기에서 충격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왜 이렇게 불공정한 주인의 편을 드시는 것입니까? 사실 늦에 온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한다는 것도 잔인한 것이고, 말문이 막히는 일입니다. 그는 아침 7시부터 와서 일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불의가 행해지고 있는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도록 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먼저 품삯을 지불하고 그들을 보낸 다음에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순으로 지불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내일 아침 7시에 시장터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고, 아마 오후 5시 15분전에 사람을 찾으러가는 시간에 맞추어 몰려들 것이고, 오직 한시간만 일하고 같은 임금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3단계: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시하는 단계)

이 이야기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담겨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무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첫 번째 실마리는 나중에 온 사람에게 먼저 지불되는 장면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태 복음의 한 장을 깊이 관심하지 않고서는 이 이야기의 요점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

바로 19장에 나타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한 젊은 부자 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는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삶이 바로 되어 있었던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모든 것을 팔아라.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과 그 젊은 관원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전에 교회 성장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훌륭한 교인이 될 수 있는 촉망있고 부자인 관원을 돌려보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충격 받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여기서 이 이미지를 비신화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치 바늘귀는 예루살렘 성의 문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의미하신 것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주 살찐 낙타가, 그것도 커다란 혹까지 등에 짊어진 커다란 낙타가 조그만 바늘귀로 들어가는 그것이, 부자가 하늘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겠네요." 제자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 주십니다. "그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요점을 전적으로 다 놓치고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나아와서 실언을 하고 맙니다. "예수님,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들으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속았다(Cheated)!" 그것이 베드로가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너는 속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즈니스 거래가 아니며, 계약(contract)을 체결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언약"(Covenant)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도 그렇게 물으신다면, "결론적으로 내가 얻을 것이 무엇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도 속았다."

이런 설명에 이어서 곧바로 따라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인 포도원 품꾼들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도 어떻게 스스로 속임을 당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나는 나보다 일을 더한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해 본적이 없습니다. 늘 나보다 적게 일한 사람과 비교합니다.

이 "결론적으로"의 멘탈리티는 언제나 교회를 혼란스럽게 해 왔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 캔사스 주의 위치타 시의 어느 작은 감리교회에 다닐 때, 어른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는 늘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의 물질과 시간을 드려서 일평생 교회를 섬겼고, 말씀을 따라 바로 살려고 노력하고 좁은 길을 걸으려고 노력해 온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임종 자리에서 겨우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과 함께 같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을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정말 같은 천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공평한 일이 아닙니다."

가끔 이러한 태도는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느 주일날 오후, 당신이 다양한 경험들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훈련받는 자리에 있었다고 합시다. 참석자들은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져 빙둘러 앉아 모임을 가졌다고 합시다. 인도자가 말하기를 "먼저 우리 자신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간단히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서로 나누도록 합시다." 둘러앉아서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나이가 드신 분이 자신을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아무개이고 한때 연관공이었습니다." "한때?" 도대체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삶은 계약인데, 그의 계약은 이제는 다 끝났다는 말인가? 그는 한때는 돈을 벌어서 집에 가지고 갔던 사람이었고,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지금은 그저 "한때"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한 여자 분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수줍어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단지 주부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는 전혀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는 의미입니까? 이제는 요리를 하고, 그리고 부엌을 정리하고, 그리고 나머지 일을 위해 하루 18시간 이상을 보내는 그저 가정 주부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계약은 희미해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4단계: 복음을 경험하는 단계)

이제 여러분이 3살, 6살, 9살 먹은 세 자녀를 둔 부모라고 상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세 살 먹은 아이보다 9살 먹은 아이를 세배나 더 사랑하십니까? 물론 9살 먹은 큰 아이는 나이는 세배나 더 먹었고, 가장 오랜 시간 부모를 많이 도와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당신이 9살 먹은 아이라면, 당신은 세 살 때 했던 것보다 부모님을 세배나 더 사랑하십니까? "아니,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인 걸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 가족이 되어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ly. This is family. So's the story). 시몬은 이것이 사업의 거래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지금은 가족의 계약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5단계: 결론을 기대하는 단계)

포도원 주인이 지금 이 시간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그분은 지금도 아직도 포도원에 청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아직 그 부르심에 응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시장터로 나가고 계십니다.

그 청함이 아침 7시에 주어졌든, 아니면 9시에 주어졌든, 정오에 주어졌든, 혹은 오후 3시나, 5시에 주어졌든, 혹은 일할 시간이 다 지나버린 새벽 두시에 주어졌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포도원에 초청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본향에 청함받은 것입니다. 누가 더 달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참고문헌

이야기식 설교 방법과 라우리의 설교 방법에 대해서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아래의 도서들을 참조하라.

Eslinger, Richard L., A New Hearing: Living Options in Homiletic Method, Nashville: Abingdon Press, 1987, chapter 3.

Long, Thomas G., The Witness of Preaching, 정장복, 김운용 역, 증언으로서의 설교, 서울: 쿰란출판사, 1997, chapter 5.

Lowry, Eugene L., Doing Time in the Pulpit: the Relationship between Narrative and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________. The Homiletical Plot: The Sermon as Narrative Art Form, 이연길 역, 이야기체 설교 구성, 서울: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6.

________. How to Preaching a Parable: Design for Narrative Sermons. Nashville: Abingdon Press, 1989.

________. The Sermon: Dancing the Edge of Myste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Robinson, Wayne B., ed., Journeys Toward Narrative Preaching, New York: Pilgrim Press,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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