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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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TS강의(2001.4.27) 강사 :안애단(성공회, 예수원 신부)
정리 : 김상수목사(서울제일교회)
나름대로 신앙에 대한 연륜과 지식이 있다는 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이것은 내가 너무 잘아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식상해 하는 것이다. 어쩌면 '성령론'이라는 주제도 그런 것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신자들의 말씀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적(敵) 중의 하나는 말씀에 대해서 식상해 하는 마음이다. 즉 자신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들 듣거나 말씀을 읽어도 감격해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강의에 들어가기 앞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는 '성령론' 강의라는 것에 대한 마음에 대한 부담감이나 무거운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들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이며, 마지막으로 셋째는 선입견을 버리고 강의에 임하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
(1) 하나님 은혜의 현재성(現在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기록된 축복의 말씀들은 대부분이 현재나 현제완료시제들로 쓰이고 있다. 예컨데 사도바울은 엡1:3과 고후12:9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과 축복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고후12:9에 있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헬라어 원문 시제로 대로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너는 이미 내게서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는 말이 된다. 원문에서 보듯이 이 문장의 동사(動詞)는 '현재완료시제'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엡1: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신령을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는 말은 곧 '이미 우리는 복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현재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기인한다. 요19:29-30을 보라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29-30)
예수님은 십자가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다. 무엇을 다 이루었는가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하나님의 나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새로운 창조(또는 창조질서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하셨던 축복의 말씀들은 주로 '미래적인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은총의 말씀들은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위에서의 선언 이후에는 우리들에게 항상 '현재적' 또는 '현재완료적'인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의 말씀들이나 바울서신들에 보면 대부분의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들은 '현재'나 '현재완료'등의 형태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고후12:9이나 엡1:3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의 축복들을 받은 사람들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엡1:19에서는 믿는 성도들 가운데 현재적인 능력으로 역사하는 성령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엡1;19을 보라.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이 말씀은 이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현재적(現在的)으로 우리들에게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힘있게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들은 우리 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 은혜의 현재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수 많은 돈을 통장에 두고있음에도 불구하도, 밥을 굷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 고후4:7을 보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여기서 보듯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가졌다. 이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우리 안에 이미 가졌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복음의 권세를 철저하게 깨달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누린 사람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세를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이다(빌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그는 이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라는 사람들의 평가(評價)에 대해서 연연해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마음으로 살았으며, 이러한 자신을 아무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참된 자유(自由)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된 사람이다. 우리들이 이러한 권세를 깨닫고 확신한다면, 우리들도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축복과 권세를 삶 속에서 누려야 한다. 이 놀라운 권세가 우리 삶 가운데에서 실제화(實際化) 될 때, 바울처럼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자신있는 고백을 하게 된다(고후3:3-10).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10)
(2) 희년의 자유함과 예수 그리스도
먼저 누가복음4:18을 보라.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여기서 하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희년을 말하고 있다. 희년은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는 해이다. 하나님께서는 50년 마다 한 번씩 희년을 정하고, 이 희년을 통해서 모든 토지와 노예들이 해방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가 다시 회복되고 확인되었다. 그렇기때문에 희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희망(希望)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 희년을 현실적인 것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해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오시면 참된 하나님의 희년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눅4:18 이하에서 예수님은 그 희년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미 이루어진 것을 선언하고 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감당해 주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에게는 희망을 주셨으며,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 속에 능력으로 확증해 주셨다. 예수님은 과거의 모든 죄와 두려움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며,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들을 우리 가운데 '현재적인 것'으로 확증하여 주셨다. 다시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죄악(罪惡)과 마귀(魔鬼)의 권세에 눌려 있던 우리들에게 참된 희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8:1과 고후6:2에서 이렇게 말했다.
"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2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무슨 말인가?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현재적(現在的)으로 희년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기쁨이 자신의 삶을 '강권하신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울을 강권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많은 고난들을 특권(特權)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실제적인 힘이며, 능력이었다. 바로 이 희년의 힘이 그에게 있어서 선교(宣敎)와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의 목적(目的)과 동력(動力)이 되었다. 그는 이 놀라움과 확신을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선언한다. 심지어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그를 재판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행26;29).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행26:29)
이러한 고백들은 예수로 인해서 온전한 '희년의 자유한 백성'이 되었다는 확신 가운데서 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확신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한다. 내 속에 있는 이 희년의 기쁨과 감격이 삶 속에서 실제화 될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바울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3) 가시(고난)가 주는 은총
고후12장에 보면, 바울은 자기 몸의 질병의 가시를 위해서 세 번이나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은혜가 네가 족하다"고 말씀하셨다(고후12:7-1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7-10)
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은 곧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경험한 뒤에 바울은 바로 그 고통까지도 '교만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그는 그 몸의 가시를 통해서 자신을 겸손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에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 곤고와 고난을 받는 것을 달게 받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좋은 자동차는 잘달리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브레이크가 함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사단의 하수인 같은 가시를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은혜 앞에 이르기 원한다면, 교만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갖가지 종류의 가시들이 있다(사업, 자녀, 질병 등). 그런데 우리들은 그 가시들에게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나 바울은 기시 보다도 가시가 주는 의미에 중요성을 발견하는 영성(靈性)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이런 관점이 우리들이 가져야할 고난에 대한 관점이다.
(4) 바울의 인간관(人間觀)
이러한 바울의 축복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가진 인간관(人間觀)을 이해해야 한다(살전5;23).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축복이 축복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스릴 수 있을 때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물질들이 축복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정작 그것들이 진정으로 축복이 되는 것은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을 때'라는 말이다. 무슨말인가하면, 우리들이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성령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실 때', 비로 우리는 참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이 영혼육으로 되어있다고 했다. 여기서 육적(肉的)인 부분은 오관, 물질적인 부분을 말한다. 혼적(魂的)인 부분은 지정의, 진선미의 부분을 말한다. 그리고 영적(靈的)인 부분은 직관, 영교, 양심,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한다. 바로 영혼육 특히 영혼이 만족될 때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關契)가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한 행복과 감사를 느끼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근원에 계시면서, 그를 다스리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왕은 일찍이 이렇게 고백했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16:2)
(5) 사람들의 2가지 삶의 패턴
1) 자연인(自然人)의 삶
하나님
죄
자연인의 삶의 구조
나 (하나님과 단절, 자기중심적 원심적 구조)
자연인(自然人)의 삶이란, 세상적인 것에 가치의 기준을 두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즉 불신자들을 의미한다. 흔히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권세나 세상적인 위치(직분, 자리)에 둔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직위가 낮아지면, 자신이 가치가 없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평가, 돈, 세상적인 것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상에 의해서 조종되는 삶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삶이 우상을 섬기는 삶이다.
2) 하나님 안에서(중심) 사는 삶
하나님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과 교제, 원심적 삶의 구조)
나
이것은 신자(信者)들을 의미한다. 즉 주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가 된 신자들의 삶이 이것이다(요15장). 이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비로서 내가 나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고난, 기쁨 등)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한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 베푸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가졌던 삶의 구조이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가? 그것은 '나중심의 삶의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구조조정이 되는 것이다. 회개는 가치관(사고체계)가 변화는 일이다. 세상에 의해서 내가 조종되었던 구조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의 구조로의 변화이다(구조조정). 이러한 삶의 구조를 가지고 살아갈 때,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와 기쁨이 있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신 삶의 축복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강원도 황지에 있는 예수원에 가면 "네 축복을 헤아려라"라는 폿말이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날 그날의 축복과 감사의 조건들을 세어보면, 그때마다 우리들은 나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실감하게 된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리면서 사는 삶'이었다(기쁨의 삶).
(6) 창3장에 나타난 마귀의 접근전략
그런데 창3장에 가면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전략에 말려든다. 그때 마귀의 첫째 전략은 하와의 마음을 '한 가지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즉 그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의 중심을 이제는 '먹지말라'고 말한 '한 가지'으로 옮긴 것이다. 마귀의 둘째 전략은 '그 다음에는 그 한 가지 마음에 대해서 집중(集中)하게 만드는 것(메이게 하는 것)'이었다. 죽 '먹지말라'고 하신 말씀에 메이고, 의심, 불평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들은 그것에 메이고, 율법적인 상태가 되이게 되었다. 감사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식상하게 만든 것이다. 감격이 없게 만든 것이다.
헬렌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을 내일이면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보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헬렌켈러의 "내가 삼일동안만 볼 수 있다면"에서)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고통의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마귀의 전략'에 너무 쉽게 말려든다. 그래서 자기연민에 빠지고, 불평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발전해서 하나님의 은헤의 말씀들에 대해서 무감각(無感覺)하고, 식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헤아리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들의 다이어리에 어제 주셨던 하나님의 축복들의 목록을 적어보라. 우리가 기뻐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들이 이 감사와 기쁨의 풍요로움을 누리면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7) 고난이 주는 의미과 감사의 관계
심지어 우리는 바울처럼 내게 있는 약함(고난, 연약함 등)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는 견책의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히 10장을 보라. 그것을 말하고 있다. 견책이 없으면 자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이 왔을 때, 혹시 이것을 통해서 주님이 내게서 견책하시는 것은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둘째는 연단의 의미이다. 즉 혹시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더 강한 도구가 된다(대장간의 철).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5)
셋째로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同參)하는 의미가 있다. 즉 아무 잘못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넷째는 이유를 모르는 고난도 있다. 이때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고난이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너는 이미 내 은혜를 충분히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감사'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고,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오히려 우리는 그 주님의 사역 때문에 짐을 지고 있다고 불평한다. 주님은 오직 그러한 우리들에게 한 가지를 원한다. 그것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질투(嫉妬)할 정도로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원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을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8)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의 믿음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이다라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우리 곁을 그냥 지나가고 만다. 마치 비오는 날 그릇의 뚜껑을 닫으면, 그 빗물을 하나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너무 오랫동안 우리를 짝사랑하셨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에 대해서 믿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 예수전도단 창설자인 오대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믿는 다는 것은 '전부냐, 아니냐'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100이냐 0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나는 누구이고, 하나님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하면, 피조물된 나와 창조자 하나님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質的)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인정하고, 깨달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아는 조그마한 논리와 철학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증명하려고 한다. 이 지적(知的)인 오만을 우리는 하나님께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무지(無知)를 인정해야 한다.
예컨데 오토바이를 운전할 때, 그 기름통에 물을 넣든지, 기름을 넣든지 그것은 자신의 자유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물을 넣는 것은 자유지만, 물을 넣은 이후부터 그 오토바이가 축복이 아니라, 짐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또한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질서를 떠나면, 거기에는 고통과 저주가 있을 뿐이다.
죄(罪)가 무엇인가? 죄는 '고장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모두가 영적으로 고장난 것이다. 성경(聖經)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생에 대한 '사용설명서'와 같은 것이다. 그럼 성령(聖靈)이 누구신가? 성령님은 2000년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이 오늘날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어지게 역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니?'
2.. 성령님이 하시는 일(사역)
(1) 창조와 역사(歷史)를 주관하신다.
성령님은 창조에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하나님의 사역과 다스림 가운데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의 돌같은 마음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라보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외침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자의식(自意識)과 성령님의 역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과정을 거쳐서 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자의식'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모든 고난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의식을 가능케 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자의식(自意識) 속에 사역하도록 하셨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 가운데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역사하였다. 막1:9-11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다.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9-11)
본문은 예수님은 물세례 뿐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받는 모본을 보여 주셨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自意識)을 갖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이 선언이 너무도 중요하다.
예수님의 중심에 있는 영성(靈性)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은 세례받으실 때 주어진 11절의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즉 그들은 1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 속에 예수의 자의식(自意識)의 근거가 있고, 영성(靈性)의 중심이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이 하나님의 선언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의식을 주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시작과 끝(알파와 오메가)가 분명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자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에, 제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구별했다. 요17장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자신과 제자들을 구별하신다("우리의 하나된 것같이 저들도").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삶에 큰 기쁨과 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즉 예수 안에는 바울이 살전 5:16-18에서 말한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자의식은 '안다'는 말과 연관된다. 예수님은 '자신 이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것을 가능케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였다. "아버지"라는 이 칭호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말의 깊이와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 식상하게 지나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3) 말씀을 말씀되게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성령님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신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인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예컨데 어떤 말씀는 남편에게 주셨고, 또 어떤 말씀은 아내에게 주시기도 하셨다. 어떤 말씀은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주었고, 또 어떤 사람은 빚을 진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에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예컨데 남편에게 주신 말씀을 아내가 인용하면서 남편을 향한 몽둥이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들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주신 말씀을 '내가 인용하면서'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굉장히 곡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은혜들을 너무 '값싼 은혜'로 취급해 버린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 속에 더 깊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4)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다(영접과 확신).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5)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본성(本性)의 씨앗'을 주신다.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여기에 "하나님의 씨"라는 말이 있다. 이말을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의 본성(本性)의 씨앗"이라고 번역했다. 이 본성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심겨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게 된다. 히10:15-16을 보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히10:15-16)
이 말씀에서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16)"라고 했다. "마음에 두고"라는 말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내적(內的)인 마음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의 씨앗'이다. 무슨 말인가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은혜를 주실 때, 열매로 주시지 않고, 씨앗으로 주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씨앗에 물주고 자라게 해서,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맺게 하라는 것이다.
4. 성령의 9가지 열매와 우리의 삶
(1) 성령의 9가지 열매들
1) 사랑의 씨앗(열매)
2) 희락의 열매 : 희락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시간(時間)의 개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시간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연적인 시간개념이다. 이것을 '크로노스'라고 한다. 이 속에는 충동적인 삶의 목표는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없는 시간관이다. 이런 시간관을 가진 사람들은 쾌락주의, 염세주의,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둘째는 직선적인 시간개념이다. 이것을 '카이로스'라고 한다. 즉 알파와 오메가(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시간개념이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이 있다해도, 우리에게는 오메가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수있다.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 때문에 우리는 '희락(喜樂)'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3) 화평의 열매 :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그럽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하게 된다. 예컨데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가족에게는 불친절하다. 또한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릇크기의 그릇만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내 그릇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 부터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것이 은혜(恩惠)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이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화평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받아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너그러움을 받았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 지는 것이다. 이것이 화평이다. 성경에서 중요한 단어 중에 하나가 "~같이(처럼)"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을 보여주셨다. 바로 '그와같이'하라는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4) 오래참음의 열매 : 오래참음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영원히' 참으라는 말은 아니다. 오래참음이란 문제를 올바로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5) 자비의 열매 : 죄는 자기(自己) 집중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자기 방어적이 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 중심적 사고'에서 '다른 사람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비(너그러움)이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자비의 열매는 필요하다("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6) 양선의 열매 : 이것은 '내게 있는 좋은 것을 너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초대교회 때는 자기의 것을 모두 함께 나누었다. 양선은 내게 있는 것을 통해서,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흔히 이것은 '구제의 은사'와도 연결이 되기도 한다.
7) 충성의 열매 : 믿음은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예수를 고백하는 믿음, 둘째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사로서의 믿음), 셋째는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믿음이 있다. 충성의 열매는 세 번째를 말한다.
8) 온유의 열매 :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모세를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 한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 참지 않았다.
9) 절제의 열매 : 자기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사명 등)에 대해서 책임치고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2)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가?
1)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라. 이것을 위해서 계속적으로 묵상(默想)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의식(自意識)을 확인해야 한다.
2)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것처럼 적극적인 성도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이 시대의 악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탈피하고,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정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가서 사랑의 도전을 해야 한다.
3)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자. 영을 따라 살아야 이길수 있다. 롬8:6을 보라.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우리 안에는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자아(自我)가 있고, 영을 따라 사는 자아도 있다. 문제는 어떤 것을 따라 사는가?하는 것이다. 만약에 육체를 따라 살면, 성경의 약속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영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영(靈)을 따라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힘을 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을 영적인 것을 향해서 맞추라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안에 영이 강해 진다. 집에 가서 매일 TV만 보면, 우리 안에서 TV를 좋아하는 육체가 살게 된다. 요15장에 있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님은 '내안에 거하라'고 했다. 이말은 주님의 일에 집중하고, 주님의 일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을 말한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육체의 일들)이 어떤 것인지, 갈5:19-21을 보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틈타려는 '육체의 일'을 분별(分別)해야 한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다음의 3가지가 온전히 집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집행, 성례전의 온전한 집행, 치리(治理)의 온전한 집행'이다.
열매는 우리의 신앙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것을 위해서 힘쓰고, 정진해야 한다.
5.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소명과 사역에 대하여)
막1:11을 보라.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11)
앞부분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이 자의식(自意識)에 관한 것이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고, 하나님의 씨앗,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러나 뒷부분의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은 소명(召命)과 사역(使役)에 관한 말이다. 정체성과 사역의 말을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동전 양면성).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복종과 순종의 사역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을 위한 헌신을 기뻐하신다(사역, 소명).
예수님이 말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먼저 구할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을 보내시고, 위임해 주셨다.
로마서 12:1-2을 보라.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그러므로"라고 했다. 즉 우리는 모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2)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미6:8)을 원하신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인자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어려운 이웃'을 먼저 돌보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는 인자와 함께 항상 기억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공의(公義)를 행하는 것이다.
그럼 공의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예수원의 대천덕(토레이) 신부는 공의를 땅과 연관지어서 설명한다. 쉽게말하면, 그는 '공의는 곧 땅(land)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땅이 공의의 기초(基礎)이다. 대천덕 신부는 땅의 문제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경제원칙의 중심이라는 것이라고 본다. 땅은 모든 경제와 삶의 원천이면, 땅에 대한 것에서부터 정의(正義)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런데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공동체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
여기서 잠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가는 천당'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후(死後)의 천당을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처럼 '하늘의 모습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 시대가 썩어간다면,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부모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내가 신포도를 먹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 시대에 대한 책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있어서 전략이 있다. 그것은 그 나라를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순교가 무엇인가? 그것은 제자로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정신과 맞서고, 이 시대의 불의와 악에 대항해서 사는 것이다.
(3)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들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이 성령(聖靈)이다. 성령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패배하지 않고 승리(勝利)하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을 받을 때, 비로서 우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권능을 받고, 사단의 견고한 진(陣)을 파는 힘을 얻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정학한 것이다. 고전12장을 보라. 이 시대 속에 주님은 우리를 보내셨다(직장, 가정, 학교 등). 그 속에 보내면서 주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것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도전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6.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먼저 성령충만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의심없이 믿으라.
둘째는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을 의심없이 믿으라(눅11:13)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셋째는 이미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요일5:14, 롬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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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마지막으로 순종으로 도전하는 사람에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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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TS강의(2001.4.27) 강사 :안애단(성공회, 예수원 신부)
정리 : 김상수목사(서울제일교회)
나름대로 신앙에 대한 연륜과 지식이 있다는 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이것은 내가 너무 잘아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식상해 하는 것이다. 어쩌면 '성령론'이라는 주제도 그런 것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신자들의 말씀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적(敵) 중의 하나는 말씀에 대해서 식상해 하는 마음이다. 즉 자신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들 듣거나 말씀을 읽어도 감격해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강의에 들어가기 앞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는 '성령론' 강의라는 것에 대한 마음에 대한 부담감이나 무거운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들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이며, 마지막으로 셋째는 선입견을 버리고 강의에 임하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
(1) 하나님 은혜의 현재성(現在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기록된 축복의 말씀들은 대부분이 현재나 현제완료시제들로 쓰이고 있다. 예컨데 사도바울은 엡1:3과 고후12:9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과 축복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고후12:9에 있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헬라어 원문 시제로 대로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너는 이미 내게서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는 말이 된다. 원문에서 보듯이 이 문장의 동사(動詞)는 '현재완료시제'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엡1: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신령을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는 말은 곧 '이미 우리는 복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현재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기인한다. 요19:29-30을 보라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29-30)
예수님은 십자가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다. 무엇을 다 이루었는가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하나님의 나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새로운 창조(또는 창조질서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하셨던 축복의 말씀들은 주로 '미래적인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은총의 말씀들은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위에서의 선언 이후에는 우리들에게 항상 '현재적' 또는 '현재완료적'인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의 말씀들이나 바울서신들에 보면 대부분의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들은 '현재'나 '현재완료'등의 형태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고후12:9이나 엡1:3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의 축복들을 받은 사람들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엡1:19에서는 믿는 성도들 가운데 현재적인 능력으로 역사하는 성령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엡1;19을 보라.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이 말씀은 이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현재적(現在的)으로 우리들에게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힘있게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들은 우리 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 은혜의 현재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수 많은 돈을 통장에 두고있음에도 불구하도, 밥을 굷고 있는 사람과도 같다. 고후4:7을 보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여기서 보듯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가졌다. 이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우리 안에 이미 가졌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복음의 권세를 철저하게 깨달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누린 사람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세를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이다(빌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그는 이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라는 사람들의 평가(評價)에 대해서 연연해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마음으로 살았으며, 이러한 자신을 아무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참된 자유(自由)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된 사람이다. 우리들이 이러한 권세를 깨닫고 확신한다면, 우리들도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축복과 권세를 삶 속에서 누려야 한다. 이 놀라운 권세가 우리 삶 가운데에서 실제화(實際化) 될 때, 바울처럼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자신있는 고백을 하게 된다(고후3:3-10).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10)
(2) 희년의 자유함과 예수 그리스도
먼저 누가복음4:18을 보라.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여기서 하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희년을 말하고 있다. 희년은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는 해이다. 하나님께서는 50년 마다 한 번씩 희년을 정하고, 이 희년을 통해서 모든 토지와 노예들이 해방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가 다시 회복되고 확인되었다. 그렇기때문에 희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희망(希望)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 희년을 현실적인 것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해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오시면 참된 하나님의 희년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눅4:18 이하에서 예수님은 그 희년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미 이루어진 것을 선언하고 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감당해 주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에게는 희망을 주셨으며,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 속에 능력으로 확증해 주셨다. 예수님은 과거의 모든 죄와 두려움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며,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들을 우리 가운데 '현재적인 것'으로 확증하여 주셨다. 다시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죄악(罪惡)과 마귀(魔鬼)의 권세에 눌려 있던 우리들에게 참된 희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8:1과 고후6:2에서 이렇게 말했다.
"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2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무슨 말인가?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현재적(現在的)으로 희년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기쁨이 자신의 삶을 '강권하신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울을 강권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많은 고난들을 특권(特權)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실제적인 힘이며, 능력이었다. 바로 이 희년의 힘이 그에게 있어서 선교(宣敎)와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의 목적(目的)과 동력(動力)이 되었다. 그는 이 놀라움과 확신을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선언한다. 심지어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그를 재판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행26;29).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행26:29)
이러한 고백들은 예수로 인해서 온전한 '희년의 자유한 백성'이 되었다는 확신 가운데서 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확신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한다. 내 속에 있는 이 희년의 기쁨과 감격이 삶 속에서 실제화 될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바울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3) 가시(고난)가 주는 은총
고후12장에 보면, 바울은 자기 몸의 질병의 가시를 위해서 세 번이나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은혜가 네가 족하다"고 말씀하셨다(고후12:7-1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7-10)
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은 곧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경험한 뒤에 바울은 바로 그 고통까지도 '교만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그는 그 몸의 가시를 통해서 자신을 겸손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에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 곤고와 고난을 받는 것을 달게 받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좋은 자동차는 잘달리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브레이크가 함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사단의 하수인 같은 가시를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은혜 앞에 이르기 원한다면, 교만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갖가지 종류의 가시들이 있다(사업, 자녀, 질병 등). 그런데 우리들은 그 가시들에게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나 바울은 기시 보다도 가시가 주는 의미에 중요성을 발견하는 영성(靈性)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이런 관점이 우리들이 가져야할 고난에 대한 관점이다.
(4) 바울의 인간관(人間觀)
이러한 바울의 축복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가진 인간관(人間觀)을 이해해야 한다(살전5;23).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축복이 축복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스릴 수 있을 때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물질들이 축복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정작 그것들이 진정으로 축복이 되는 것은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을 때'라는 말이다. 무슨말인가하면, 우리들이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성령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실 때', 비로 우리는 참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이 영혼육으로 되어있다고 했다. 여기서 육적(肉的)인 부분은 오관, 물질적인 부분을 말한다. 혼적(魂的)인 부분은 지정의, 진선미의 부분을 말한다. 그리고 영적(靈的)인 부분은 직관, 영교, 양심,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한다. 바로 영혼육 특히 영혼이 만족될 때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關契)가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한 행복과 감사를 느끼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근원에 계시면서, 그를 다스리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왕은 일찍이 이렇게 고백했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16:2)
(5) 사람들의 2가지 삶의 패턴
1) 자연인(自然人)의 삶
하나님
죄
자연인의 삶의 구조
나 (하나님과 단절, 자기중심적 원심적 구조)
자연인(自然人)의 삶이란, 세상적인 것에 가치의 기준을 두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즉 불신자들을 의미한다. 흔히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권세나 세상적인 위치(직분, 자리)에 둔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직위가 낮아지면, 자신이 가치가 없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평가, 돈, 세상적인 것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상에 의해서 조종되는 삶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삶이 우상을 섬기는 삶이다.
2) 하나님 안에서(중심) 사는 삶
하나님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과 교제, 원심적 삶의 구조)
나
이것은 신자(信者)들을 의미한다. 즉 주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가 된 신자들의 삶이 이것이다(요15장). 이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비로서 내가 나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고난, 기쁨 등)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한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 베푸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가졌던 삶의 구조이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가? 그것은 '나중심의 삶의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구조조정이 되는 것이다. 회개는 가치관(사고체계)가 변화는 일이다. 세상에 의해서 내가 조종되었던 구조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의 구조로의 변화이다(구조조정). 이러한 삶의 구조를 가지고 살아갈 때,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와 기쁨이 있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신 삶의 축복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강원도 황지에 있는 예수원에 가면 "네 축복을 헤아려라"라는 폿말이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날 그날의 축복과 감사의 조건들을 세어보면, 그때마다 우리들은 나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실감하게 된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리면서 사는 삶'이었다(기쁨의 삶).
(6) 창3장에 나타난 마귀의 접근전략
그런데 창3장에 가면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전략에 말려든다. 그때 마귀의 첫째 전략은 하와의 마음을 '한 가지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즉 그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의 중심을 이제는 '먹지말라'고 말한 '한 가지'으로 옮긴 것이다. 마귀의 둘째 전략은 '그 다음에는 그 한 가지 마음에 대해서 집중(集中)하게 만드는 것(메이게 하는 것)'이었다. 죽 '먹지말라'고 하신 말씀에 메이고, 의심, 불평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들은 그것에 메이고, 율법적인 상태가 되이게 되었다. 감사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식상하게 만든 것이다. 감격이 없게 만든 것이다.
헬렌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을 내일이면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보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헬렌켈러의 "내가 삼일동안만 볼 수 있다면"에서)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고통의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마귀의 전략'에 너무 쉽게 말려든다. 그래서 자기연민에 빠지고, 불평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발전해서 하나님의 은헤의 말씀들에 대해서 무감각(無感覺)하고, 식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헤아리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들의 다이어리에 어제 주셨던 하나님의 축복들의 목록을 적어보라. 우리가 기뻐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들이 이 감사와 기쁨의 풍요로움을 누리면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7) 고난이 주는 의미과 감사의 관계
심지어 우리는 바울처럼 내게 있는 약함(고난, 연약함 등)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는 견책의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히 10장을 보라. 그것을 말하고 있다. 견책이 없으면 자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이 왔을 때, 혹시 이것을 통해서 주님이 내게서 견책하시는 것은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둘째는 연단의 의미이다. 즉 혹시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더 강한 도구가 된다(대장간의 철).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5)
셋째로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同參)하는 의미가 있다. 즉 아무 잘못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넷째는 이유를 모르는 고난도 있다. 이때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고난이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너는 이미 내 은혜를 충분히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감사'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고,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오히려 우리는 그 주님의 사역 때문에 짐을 지고 있다고 불평한다. 주님은 오직 그러한 우리들에게 한 가지를 원한다. 그것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질투(嫉妬)할 정도로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원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을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8)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의 믿음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이다라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우리 곁을 그냥 지나가고 만다. 마치 비오는 날 그릇의 뚜껑을 닫으면, 그 빗물을 하나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너무 오랫동안 우리를 짝사랑하셨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에 대해서 믿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 예수전도단 창설자인 오대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믿는 다는 것은 '전부냐, 아니냐'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100이냐 0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나는 누구이고, 하나님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하면, 피조물된 나와 창조자 하나님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質的)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인정하고, 깨달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아는 조그마한 논리와 철학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증명하려고 한다. 이 지적(知的)인 오만을 우리는 하나님께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무지(無知)를 인정해야 한다.
예컨데 오토바이를 운전할 때, 그 기름통에 물을 넣든지, 기름을 넣든지 그것은 자신의 자유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물을 넣는 것은 자유지만, 물을 넣은 이후부터 그 오토바이가 축복이 아니라, 짐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또한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질서를 떠나면, 거기에는 고통과 저주가 있을 뿐이다.
죄(罪)가 무엇인가? 죄는 '고장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모두가 영적으로 고장난 것이다. 성경(聖經)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생에 대한 '사용설명서'와 같은 것이다. 그럼 성령(聖靈)이 누구신가? 성령님은 2000년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이 오늘날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어지게 역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니?'
2.. 성령님이 하시는 일(사역)
(1) 창조와 역사(歷史)를 주관하신다.
성령님은 창조에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하나님의 사역과 다스림 가운데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의 돌같은 마음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라보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외침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자의식(自意識)과 성령님의 역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과정을 거쳐서 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자의식'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모든 고난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의식을 가능케 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자의식(自意識) 속에 사역하도록 하셨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 가운데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역사하였다. 막1:9-11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다.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9-11)
본문은 예수님은 물세례 뿐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받는 모본을 보여 주셨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自意識)을 갖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이 선언이 너무도 중요하다.
예수님의 중심에 있는 영성(靈性)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은 세례받으실 때 주어진 11절의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즉 그들은 1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 속에 예수의 자의식(自意識)의 근거가 있고, 영성(靈性)의 중심이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이 하나님의 선언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의식을 주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시작과 끝(알파와 오메가)가 분명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자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에, 제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구별했다. 요17장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자신과 제자들을 구별하신다("우리의 하나된 것같이 저들도").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삶에 큰 기쁨과 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즉 예수 안에는 바울이 살전 5:16-18에서 말한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자의식은 '안다'는 말과 연관된다. 예수님은 '자신 이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것을 가능케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였다. "아버지"라는 이 칭호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말의 깊이와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 식상하게 지나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3) 말씀을 말씀되게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성령님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신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인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예컨데 어떤 말씀는 남편에게 주셨고, 또 어떤 말씀은 아내에게 주시기도 하셨다. 어떤 말씀은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주었고, 또 어떤 사람은 빚을 진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에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예컨데 남편에게 주신 말씀을 아내가 인용하면서 남편을 향한 몽둥이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들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주신 말씀을 '내가 인용하면서'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굉장히 곡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은혜들을 너무 '값싼 은혜'로 취급해 버린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 속에 더 깊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4)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다(영접과 확신).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5)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본성(本性)의 씨앗'을 주신다.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여기에 "하나님의 씨"라는 말이 있다. 이말을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의 본성(本性)의 씨앗"이라고 번역했다. 이 본성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심겨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게 된다. 히10:15-16을 보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히10:15-16)
이 말씀에서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16)"라고 했다. "마음에 두고"라는 말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내적(內的)인 마음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의 씨앗'이다. 무슨 말인가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은혜를 주실 때, 열매로 주시지 않고, 씨앗으로 주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씨앗에 물주고 자라게 해서,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맺게 하라는 것이다.
4. 성령의 9가지 열매와 우리의 삶
(1) 성령의 9가지 열매들
1) 사랑의 씨앗(열매)
2) 희락의 열매 : 희락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시간(時間)의 개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시간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연적인 시간개념이다. 이것을 '크로노스'라고 한다. 이 속에는 충동적인 삶의 목표는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없는 시간관이다. 이런 시간관을 가진 사람들은 쾌락주의, 염세주의,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둘째는 직선적인 시간개념이다. 이것을 '카이로스'라고 한다. 즉 알파와 오메가(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시간개념이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이 있다해도, 우리에게는 오메가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수있다.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 때문에 우리는 '희락(喜樂)'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3) 화평의 열매 :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그럽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하게 된다. 예컨데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가족에게는 불친절하다. 또한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릇크기의 그릇만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내 그릇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 부터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것이 은혜(恩惠)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이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화평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받아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너그러움을 받았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 지는 것이다. 이것이 화평이다. 성경에서 중요한 단어 중에 하나가 "~같이(처럼)"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을 보여주셨다. 바로 '그와같이'하라는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4) 오래참음의 열매 : 오래참음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영원히' 참으라는 말은 아니다. 오래참음이란 문제를 올바로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5) 자비의 열매 : 죄는 자기(自己) 집중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자기 방어적이 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 중심적 사고'에서 '다른 사람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비(너그러움)이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자비의 열매는 필요하다("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6) 양선의 열매 : 이것은 '내게 있는 좋은 것을 너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초대교회 때는 자기의 것을 모두 함께 나누었다. 양선은 내게 있는 것을 통해서,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흔히 이것은 '구제의 은사'와도 연결이 되기도 한다.
7) 충성의 열매 : 믿음은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예수를 고백하는 믿음, 둘째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사로서의 믿음), 셋째는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믿음이 있다. 충성의 열매는 세 번째를 말한다.
8) 온유의 열매 :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모세를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 한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 참지 않았다.
9) 절제의 열매 : 자기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사명 등)에 대해서 책임치고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2)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가?
1)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라. 이것을 위해서 계속적으로 묵상(默想)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의식(自意識)을 확인해야 한다.
2)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것처럼 적극적인 성도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이 시대의 악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탈피하고,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정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가서 사랑의 도전을 해야 한다.
3)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자. 영을 따라 살아야 이길수 있다. 롬8:6을 보라.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우리 안에는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자아(自我)가 있고, 영을 따라 사는 자아도 있다. 문제는 어떤 것을 따라 사는가?하는 것이다. 만약에 육체를 따라 살면, 성경의 약속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영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영(靈)을 따라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힘을 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을 영적인 것을 향해서 맞추라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안에 영이 강해 진다. 집에 가서 매일 TV만 보면, 우리 안에서 TV를 좋아하는 육체가 살게 된다. 요15장에 있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님은 '내안에 거하라'고 했다. 이말은 주님의 일에 집중하고, 주님의 일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을 말한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육체의 일들)이 어떤 것인지, 갈5:19-21을 보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틈타려는 '육체의 일'을 분별(分別)해야 한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다음의 3가지가 온전히 집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집행, 성례전의 온전한 집행, 치리(治理)의 온전한 집행'이다.
열매는 우리의 신앙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것을 위해서 힘쓰고, 정진해야 한다.
5.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소명과 사역에 대하여)
막1:11을 보라.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11)
앞부분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이 자의식(自意識)에 관한 것이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고, 하나님의 씨앗,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러나 뒷부분의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은 소명(召命)과 사역(使役)에 관한 말이다. 정체성과 사역의 말을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동전 양면성).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복종과 순종의 사역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을 위한 헌신을 기뻐하신다(사역, 소명).
예수님이 말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먼저 구할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을 보내시고, 위임해 주셨다.
로마서 12:1-2을 보라.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그러므로"라고 했다. 즉 우리는 모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2)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미6:8)을 원하신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인자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어려운 이웃'을 먼저 돌보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는 인자와 함께 항상 기억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공의(公義)를 행하는 것이다.
그럼 공의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예수원의 대천덕(토레이) 신부는 공의를 땅과 연관지어서 설명한다. 쉽게말하면, 그는 '공의는 곧 땅(land)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땅이 공의의 기초(基礎)이다. 대천덕 신부는 땅의 문제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경제원칙의 중심이라는 것이라고 본다. 땅은 모든 경제와 삶의 원천이면, 땅에 대한 것에서부터 정의(正義)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런데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공동체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
여기서 잠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가는 천당'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후(死後)의 천당을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처럼 '하늘의 모습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 시대가 썩어간다면,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부모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내가 신포도를 먹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 시대에 대한 책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있어서 전략이 있다. 그것은 그 나라를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순교가 무엇인가? 그것은 제자로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정신과 맞서고, 이 시대의 불의와 악에 대항해서 사는 것이다.
(3)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들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이 성령(聖靈)이다. 성령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패배하지 않고 승리(勝利)하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을 받을 때, 비로서 우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권능을 받고, 사단의 견고한 진(陣)을 파는 힘을 얻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정학한 것이다. 고전12장을 보라. 이 시대 속에 주님은 우리를 보내셨다(직장, 가정, 학교 등). 그 속에 보내면서 주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것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도전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6.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먼저 성령충만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의심없이 믿으라.
둘째는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을 의심없이 믿으라(눅11:13)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셋째는 이미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요일5:14, 롬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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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마지막으로 순종으로 도전하는 사람에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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