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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설교]먼저 손을 내미신 예수님(요21:15-17)

작성자김상수|작성시간21.04.16|조회수774 목록 댓글 0

먼저 손을 내미신 예수님(요21:15-17)

 

2021.4.1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예전에 “나는 청개구리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나는 믿는다고 하면서 의심도 합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잘난 체도 합니다. 나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하면서 닫기도 합니다. 나는 정직하자고 다짐하면서 꾀를 내기도 합니다. 나는 참아야 한다고 하면서 화를 내고 시원해 합니다. 나는 외로울수록 바쁜 척합니다. 나는 쉬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계속 일만 합니다. 나는 절약하자고 하지만 낭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남의 성공에 박수를 치지만 속으로는 질투도 합니다. 나는 너그러운 척하지만 까다롭습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불평도 털어놓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하지만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청개구리로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글속의 모습들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가 뭘까?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더 많은 청개구리 같은 우리의 모습을 나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는 이런 청개구리 같은 요소들은 없는지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주님의 음성은 듣기 원하면서 말씀은 멀리했고, 축복은 바라면서 기도는 하지 않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생각을 앞세웠던 것들이 그런 모습들이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청개구리 같은 모습이 지금의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가장 선두에 서서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같은 분들도 알고 보면 우리보다 더한 시절이 있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경력이 있고, 심지어 다른 제자들을 꼬드겨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가 버리기까지 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이 둘 중에 누가 더 심각했을까? 굳이 따지자면베드로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과거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핍박했지만(딤전1:13),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누구보다 주님을 잘 알면서도(마16:16) 그런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베드로가 어떻게 변해서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게 되었을까? 바로 이 점이 이 시간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특히 영적침체에 빠져 있는 분들이나 임직을 앞둔 분들에게는 더욱 더) 하고 싶어 하시는 말씀이라고 확신한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있었던 행적을 가장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곳은 요한복음 21장이다.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변화될 수 있었던 열쇠는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용서와 사랑이다. 이것은 베드로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이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변화되는 것에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은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가 버린 제자들을 찾아 갈릴리 호숫가로 가셨다. 주님은 조반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는 제자들에게 생선과 떡을 주셨다. 이 순간 주님이 내밀었던 손은 그냥 손이 아니다. 그 손은 용서와 치유의 손이다. 지금 이 시간에 은혜에 목마른 우리들을 향해 내미시는 주님의 손이 바로 그 손이다. 주님이 그들을 위해 베풀었던 바위가 지금도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데, 그 이름을 멘사 크리스티(MENSA CHRISTI, 그리스도의 식탁)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용서에 대한 매우 중요한 성경적인 개념을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용서는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누구처럼? 주님처럼 이다. 주님의 용서가 베드로의 마음을 녹였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용서의 마음으로 손을 내밀 때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열린다. 만약 지금 꽉 막힌 인간관계나 어떤 사람 때문에 괴롭다면, 내가 먼저 용서의 손을 내밀기 바란다. 역으로 지금 자신이 베드로 같은 상태에 있다면, 이 시간 다시 주님의 용서의 손을 굳게 붙잡기 바란다.

 

그러면 왜 우리들이 용서해야 할까? 내 인생의 가시 같고, 청개구리 같은 사람을 엄청 사랑해서? 물론 이렇게 사랑하면 너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손을 내밀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내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질문은 모두 현재형 동사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베드로야, 너는 지금도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 “네가 전에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지? 그러면 다른 조건이나 비교대상이 일체 없이 여전히 나를 사랑할 수 있니?”, “너는 지금도 나의 친구니? 라는 질문이다. 진정한 친구는 목숨까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들은 바꿔 말하면 ‘베드로야, 과거에 네가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다 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들을 문제 삼지 않겠다. 그러니 지금부터 나만 사랑할 수 있겠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에 남아있는 사랑의 불씨를 확인한 후에 비로소 양들을 위임하셨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오순절 날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주셨다(행2장).

 

이것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시간 주님은 무늬만 성도였고, 이름만 직분자였던 우리들의 과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용서의 손을 내밀면서 현재형으로 물으신다.

 

“내 아들아! 너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겠다. 다만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니?”

“내 딸아! 만약 아직 너에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는 충성할 수 있겠니?”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성품이고, 주님의 은혜다. 이런 주님의 사랑에 말문이 막히고, 눈물만 난다. 구약시대처럼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몽둥이로 치셨다면, 우리는 여기 남아있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주님의 용서와 사랑과 강력한 성령충만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오래전 전남 순천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형편에 재수까지 했는데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할 때, 또다시 도전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고, 실패감은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그 학생은 자살을 결심하고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 순천 시내에 있는 한 극장에 들어갔다. 그는 늦은 밤 극장의 허름한 화장실에서 자살을 하려고 끈을 매달았다.

 

하지만 막상 목을 넣으려고 할 때, 자신을 위해서 고생하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서 차마 넣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용히 집에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잠자는 어머니 얼굴을 살짝만 보고, 죽기로 결심하고, 그 새벽에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는 그 눈보라를 맞으면서 그때까지 골목길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는 손을 내밀어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면 ‘어째 그러냐? 다음에 들어가면 되지…….’라고 말했다. 그날 밤 어머니의 그 사랑 때문에 그 학생은 죽지 않고, 용기를 내어 결국은 대학에 합격했고, 후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신실한 목사님이 되었다.

 

눈보라가 치던 새벽에 아무 조건 없이 아들을 안아주던 어머니의 손길, 그 음성이 바로 배신자였던 베드로에게 베풀었던 주님의 멘사 크리스티(그리스도의 식탁)였고,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왔던 그리고 지금도 지탱하기 힘든 삶의 무게로 주저앉고 싶은 우리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손길이고, 주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한다(“내 아들아, 내 딸아, 어째 그러냐 지금부터 잘하면 되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베드로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아니고, 주님이 먼저 용서와 사랑의 손을 내미셨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보신 것은 과거의 언행이 아니라, 작지만 그의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사랑의 불씨였다. 사명감 보다, 사역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사랑의 손을 내밀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청개구리 인생을 청산하고 주님의 손을 굳게 붙들기로 결심하자. 만약 나에게 청개구리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먼저 용서와 사랑의 손을 내밀겠다고 주님께 고백하자. 주님이 우리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변명이나 부인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고백이다(임직을 앞두신 분들에게는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사명과 함께 성령의 권능도 주신다. 이 시간 주님께 사랑의 고백을 올려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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