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잠23:22-25)
2021.5.9 어버이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사랑하면 뭐라도 주고 싶어진다. 그것이 사랑의 특징이고, 부모의 마음이고, 더 나아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셀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라는 유명한 동화가 있다. 이 동화에는 사랑하는 소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 나무가 나온다. 어느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와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사과도 따먹고, 때로 나무그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소년이 다시 와서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무는 자신의 사과를 따다 시장에 팔라고 했다. 그래서 소년은 사과를 딴 후에 다시 가버렸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서 중년이 된 소년이 다시 돌아왔다. “내게는 집이 필요해” 그러자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베어다 집을 집으라고 했다. 그래서 소년은 나뭇가지들을 베어서 가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소년은 다시 와서 말했다. “여행을 가려는데 배를 한척 마련해 줄 수 없겠니?” 그래서 나무는 아낌없이 자신의 몸통을 내어줬다. 이제 나무는 밑동만 남았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에 노인이 된 소년이 돌아왔다. 소년은 자신이 앉을 의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변함없이 나무는 자신의 밑동에 소년을 앉혔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하기만 했다.
이 동화 속에 나오는 나무의 마음이 마치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사실 효(孝)라는 주제는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자유로울 수 없는 주제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부모의 소중함을 미처 다 깨닫지 못한 자녀들 중에는 마치 친구나 애들 대하듯이 불친절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싸우듯이 큰 소리로 야단치는 자녀 때문에 마음이 상한 어떤 할머니가 슬픈 얼굴로 이렇게 탄식하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00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줍니다…….”
그때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준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문득 머릿속에 번쩍하면서 효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깨달아졌다. 효는 다른 것이 아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효란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는(또는 알아주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부모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육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우리들은 그분의 자녀라면, 당연히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이를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효다. 말씀을 더 가까이 읽고 묵상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잠언 23장 25절은 효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다 같이 읽어 보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이 짧은 한 구절이 효가 무엇인지를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 말씀을 역으로 말하면, 불효(不孝)는 부모를 즐겁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괴롭게 만들고, 상처를 주고, 웃음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언제 부모의 마음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가 하면, 그 마음을 몰라줄 때이다. 예전에 성공하기(돈 벌기) 전에는 집에 연락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 부모는 아들 걱정에 한 없이 힘든 시간들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돈 많이 벌고 성공하면 그것이 효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부모님이 나 때문에 그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 사람은 지금 효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을 가장 많이 즐겁게 해드리는 사람이 가장 많이 효도하는 사람이다. 만약 부모님을 전도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비길 것이 없는 최고의 효도를 한 것이다. 만약 부모님이 나 때문에 힘들고, 상처받고, 웃음을 잃어 버렸다면, 그 사람은 속히 부모님의 입가에 웃음을 회복시켜 드려야 한다. 만약 지금 나의 불신앙의 모습이 부모님의 평생 눈물의 기도제목이 되고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지금 주님께 돌아와야 한다.
우리들 중에는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난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런 분들은 그분들의 영혼이 이 땅에 남은 후손들에게 정말 간절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 잘하다가 낙오자 없이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사는 것이 진짜 효도가 아니겠는가?
특별히 어버이주일인 오늘 이 시간에는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는 여러 가지 모습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부모님(또는 웃어른)의 말을 청종하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부모님을 즐겁게 만든다.
잠언 23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23:22)
여기서 쓰인 “청종(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마”라는 동사는 말씀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며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의 명령형이 쉐마(“들으라”, 신6:4)이다. 부모의 말을 대충 건성으로 듣지 말고, 집중해서 유심히 귀담아 듣고 순종하라는 뜻이다. 경히 여긴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는 “타부즈”인데, 이는 ‘멸시하며 함부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
가끔 우리 주변에는 입으로는 효를 말하고, 마음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부모의 소원을 안 들어 주는 경우가 꾀 많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는 그렇게 못하면서 자기 부모에게는 불친절하게 다구치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꺼니까 상관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말의 내용은 좋은데, 말투는 싸우듯이 공격적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태도들은 효도 아니고, 부모님이나 웃어른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얼마 전에도 언급했듯이 허물없는 것과 무례한 것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식에게 부모는 허물없는 분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무례하게 대해도 괜찮은 존재는 결코 아니다.
그대신 우리 모든 성도들은 미소 지으면서 친절하게 부모님(웃어른이나 서로에게)을 칭찬의 말을 하자. 일부러 칭찬꺼리를 만들어서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드리자. 그러면 1초 안에 환하게 웃으시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서로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미고사축”이라는 찬송이 있다(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가끔 교회에서 이 찬송을 부를 때, 얼굴을 보면 모두가 행복한 모습이다.
“쓰디쓴 말 한마디 증오의 씨를 뿌리고, 잔인한 말 한마디 영혼을 파괴합니다. 격려의 말 한마디 새 소망 심어주고, 지혜의 말 한마디 인격의 향기입니다. 무례한 말 한마디 다툼을 일으키고, 저주의 말 한마디 축복을 거둬갑니다. 사랑의 말 한마디 생명을 불러오고, 생명의 말 한마디 사랑을 키워줍니다. 가장 아름다운 말 미.고.사.축 미안해요 고마와요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당신을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이 찬송의 가사처럼 우리의 불친절한 말 한마디가 부모님와 서로에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웃음과 기쁨과 인생의 보람을 안겨 드린다. 그러므로 효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늘 당장 이렇게 작은 말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그래서 다른 어떤 것 보다도 우선 더 친절하고 고운 말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자. 그것이 또한 우리들 자신이 행복해 지는 길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