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침체로 부터 회복되기를 원한다면(시42:1-5)
2026.6.7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얼마 전에 “어느 콜센터 화장실에 적힌 충격적인 문구”라는 제목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사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모든 직원은 업무 복귀 전에 반드시 울음을 멈춰야 합니다”
왜 이런 문구가 화장실 세면대에 붙어 있을지는 굳이 설명을 안들어도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이 문구를 보면서 나는 어땠는지를 돌아보면서 착찹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익명이 보장되거나, 특정한 사람이 그 자리에 사람이 없으면 극단적인 비방의 언행들을 쏟아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독한 댓글이나 비방 또는 욕설들 하면서(또는 그것을 들으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잔인함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이중성이다. 왜 인간은 이런 이중성을 보일까? 종교학자들은 그것을 인간 내면에 있는 마성(魔性)이라고 하지만, 좀 더 기독교 교리적인 표현은 죄성 또는 죄의 부패성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한계이자, 연약성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 신진도 바닷가를 걷다가 물이 빠졌을 때, 갯벌 바닥에 드러난 각종 쓰레기와 지저분한 것들을 보았다. 그런데 동일한 장소인데도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화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여전히 쓰레기들이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 다시 흉측한 모습들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 모습들을 유심히 보면서, 사람의 마음의 내면이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흔히 ‘사람의 본성은 안변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 보면, 우리들이 만나는 삶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썰물의 때가 있으면, 밀물의 때도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이 밑바닥이라고 해서 너무 낙심할 필요도 없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도 없다. 반대로 너무 으쓱할 필요도 없다. 멀지 않아서 다시 물이 들어올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과 죄성에 휘둘리지 않고, 평온하고 더 아름다운 그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우리(나)의 내면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물로 가득 차있으면 된다. 이러한 상태를 기독교에서는 ‘성령충만’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나의 죄성과 욕심과 나약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러한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영적 침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노을 같은 삶을 살려면, 우리(나) 내면에 성령의 충만의 수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오늘 설교 말씀의 핵심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42편을 속에서 “고라자손(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음)”이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서, 은혜의 수위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나)들이 영적인 침체에서 회복되는 영적인 방법을 깨달을 수 있다. 시편 42편의 내용을 보면, “고라 자손”이 영적인 침체 속에 빠졌다. 이 사람은 본래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면서 열심을 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그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일 견디기 힘든 독한 음성들(독설, 비웃음, 비난, 정죄 등)을 들었다. 그래서 그의 심령에서 은혜는 썰물처럼 빠져 버렸고, 낙심과 불안의 갯골에 빠져버렸다(시 42:3-5).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시 42:3-5)
일단 이 부분에서 우리들이 우선적으로 깨달아 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열심히 있는 신자나 직분자들이라 할지라도, 갖가지 고난이나 영적침체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을 잘했던 신자라도 몸이 아플 수 있고,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만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는 말이다(물론 이렇게 빠지는 것이 좋다는 말은 아님). 다만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상황이 ‘나에게도’ 온 것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경우에 ‘나에게만’ 그런 것처럼’ 생각하면서 깊은 침체의 갯골 속으로 빠져 드는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언뜻 보면, 고라자손(또는 우리들)이 낙심과 불안의 침체상태에 빠진 것이 외적인 어려운 상황이나 사람의 음성들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더 깊이 관찰하고 묵상해 보면 사실은 그가(고라자손, 우리들) 그렇게 된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원인의 단서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5절)에 있다. 고라 자손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씀은 문맥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라’는 말씀으로 익혀진다. 다시 말하면 고라 자손은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자신이 하나님 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에도 일말의 소망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 일말의 ‘또 다른 무엇인가’ 때문에 그의 마음에서 은혜의 물결이 빠져 나갔고, 그대신 나약한 내면의 밑바닥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고라자손을 영적침체 속에 빠지게 했던 ‘또 다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과 환경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과 환경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의 눈과 귀를 뗀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음성(말, 비난, 눈빛, 체면, 평가 등)에 귀 기울였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기준으로 자신의 상황을 보았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은혜의 물은 빠져나가고, 죄성으로 부터 연유된 낙망과 불안, 두려움 같은 것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우리들도 주님으로부터 나의 귀와 눈을 떼면, 그렇게 되기 쉽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 그가(또는 우리들이) 침체에 빠졌던 원인은 역으로 회복의 단초도 된다. 이 말씀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회복의 방법은 나의 눈과 귀가 다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소망을 두라(호힐리)”는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라는 뜻이다. “여전히(오드)”는 ‘계속하여’, ‘반복하여’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극심한 고통 중에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은혜의 물결로 나를 덮어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내가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라자손이 침체에 빠진 과정과 회복되는 과정을 보면, 마치 사도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를 보는 순간에 물에 빠졌다가 건짐 받은 과정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마태복음14장). 언뜻 보면 사도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 때문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눈을 뗐기 때문이다. 바람과 파도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갈 때도 이미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fixing our eyes on Jesus, fixing-고정, 수리)”(히12:2)
에세이 《지금 행복하세요?》의 저자인 신명진 작가가 있다. 이분은 현직 서울도서관 사서이자, 간증과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집사님이기도 하다. 그는 5살 때 소래포구에서 기차에 치어서 두 다리와 오른팔을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원망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치유되었다. 성령의 은혜의 강물이 그를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감사의 사람으로 변했다. 그 후로 그는 말씀 안에서 자신의 장애를 재해석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장애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축복의 통로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감사”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 신명진 작가/집사의 신앙강증(CGNTV 나침판) : https://www.youtube.com/watch?v=_SLQ0kZUmOw&t=498s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우리들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면, 하나님은 성령의 강물로 우리의 심령을 덮어 주신다. 그렇게 되면 영적회복은 물론이고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귀를 상황이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 향하자.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성령의 위로와 평안을 주신다(요14:27).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이 시간 주님께 마음과 입술의 빗장을 풀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