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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설교]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18:21-22)

작성자김상수|작성시간14.10.24|조회수259 목록 댓글 0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18:21-22)

 

2014.10.26낮(김상수목사)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몇 해 전 어떤 청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목사님, 00자매는 저와 비슷한 아픈 상처를 갖고 있어서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같습니다. 그러니 그 자매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어린시절부터 가정적으로 용서하지 못할 유사한 상처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결혼 후에 얼마가지 않아서 헤어지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런저런 사정들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두 사람의 상황은 비슷했지만 상황만 유사할 뿐 서로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처와 상처를 비비는 것같은 만남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교회 안과 밖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얼마 전, 몇 년 전 또는 아주 오래 전 어린시절의 상처들에 묶여서,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들을 덧칠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더 넓은 바다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둣가에 배를 묶고 있는 밧줄을 풀러야 하듯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된 계획을 이루는 위해서는 나를 묶고 있는 줄들을 풀러야 한다. 그러면 나를 얽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이 줄들을 푸는 방법이 뭐겠는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福音)이다. 십자가는 용서의 복음이다.

 

용서가 뭔가? 용서란 이처럼 나를 얽매고 있는 모든 끈들을 십자가 앞에서 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것들을 가지고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일은 없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8장 21-22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라는 말씀은 곧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용서했듯이 말이다. 십자가는 내가 용서해야할 근거와 이유다.

 

또한 마태복음 6장12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어린시절 주일학교에 다닐 때,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부담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 만큼 용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들에 대한 복수(원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마서12장 19절에 보면,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다. 우리가 원수갚으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이 갚아주시면 순식간에 해결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만약 용서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살아갈 때에는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지어 육신적으로 여러 가지의 부정적인 손해들이 찾아 올 수 있다. 용서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극심한 충격과 분노다. 나에게 상처주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 속에 빠뜨린 대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또한 그것에 대해서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자신에 대해서 분노한다. 자기 자신이 미워지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분노의 사람,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사람, 못난 사람이 되어 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더욱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마귀를 이를 이용해서 공격한다.

 

이러한 분노를 신앙 안에서 해결하지 못할 때, 그 다음단계로 찾아오는 것은 책임전가와 무가치하다는 느낌이다. 사단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게 하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자신의 인격과 가치에 대해서 부당한 질책을 하게 유도한다. 이러한 방법들을 사단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다.

 

“그래 맞아! 나같은 놈이 무얼하겠어! 난 원래 그래”

“내가 공부 못하는 것은 부모님 탓이야”

“그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거야”

“하나님은 왜 나만 미워해?”

 

마귀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내 책임은 없고, 다른 사람 책임’이라고 속삭인다. 심지어는 하나님에게 까지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파멸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용서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마귀 사단의 최종목적이다.

 

사람들은 마음의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약물이나, 술, 성행위, 폭력, 가출 등과 같은 자포자기와 자기박탈 등의 방법을 통하여 극복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시적일뿐이고, 오히려 더 극단적인 괴로움과 자살같은 파멸의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 뿐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가족, 친한 친구들 등)의 평가에 대해서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인간 발달의 초기(아동기)로 갈 수록 더욱 그러하고, 신앙적으로도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의 신앙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어린이는 부모가 좋아하는 행동들을 하고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또는 직분자나 리더가) 아이의 인격을 인정해 주지 않는 비인격적인 언어나 분위기로 가정을 이끌 경우 아이들은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된다.

 

특히 실수한 행동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계기로 해서 아이의 인격을 격멸하고 공격할 때, 아이의 마음에 극단적인 상처를 주고,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유발시키는 예가 된다. 그래서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과 자기비하의 마음을 갖게 되고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이놈의 자식,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넌 싹수가 노란해!”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때 이 말을 들은 그 아이는 이렇게 해석하고 행동 하게 된다. “아! 난 쓸모없는 사람이었구나... 난 원래부터 싹수가 노란 아이구나! 맞아 난 쓸모없는 놈이야... 난 원래부터 될 놈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안되는거야... 그러니 공부는 해서 뭘하겠어... 어차피 안될텐데..” 그래서 부정적이고 실패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자녀를 향해서 “자식 부모의 좋은 점은 갖지 않고 못된 점만 타고났구나! 도데체 넌 누굴 닮아서 그래?”라고 말한다. 이때도 역시 아이는 “아! 나는 아빠엄마의 못된 점만 가지고 태어난 아이구나... 맞아! 난 본래부터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뭘 못하는거야”라고 해석하고, 그 잘못된 해석에 맞춰서 낮은 자존감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외에도 흔히 어른들이 생각없이 내밷는 다음과 같은 말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서 부정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

 

“ 좋은 말을 할 수 없거든 아예 말하지말아!”

“ 임마! 한 번이라도 머리 좀 써봐라!”

“ 너 앞으로 뭐가 될려고 그래!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이런 자식을 낳았는지원!”

“ 넌 안되, 넌 몸도 온전치 못하잖아.. 넌 쓸모없는 아이야,

너는 나쁜 아이야, 너같은 녀석은 평생가도 안돼!’

 

이러한 인격적인 비난을 듣고 자란 어린이들은 “그래 난 안되, 난 할 수 없어!”라는 잘못된 해석이 마음 속에 고착되어서 그 사람의 사고체계를 지배하게 되고, 그 잘못된 해석과 사고체계에 의해서 행동이 결정된다. 사람의 행동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도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고 가까이 다가와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해 주는 말도 잘 믿지를 못한다.

 

“ 사람들은 나를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하는것이야!”

“ 아마 나라고 하는 존재를 좀 더 안다면 그때는 저렇게 말하지 않을걸”

“ 저 사람이 나를 깊이 알면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할꺼야”


만약 교회에서 충격을 받는 경우에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리더가 되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가 있어?”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이러한 내가 무슨 하나님의 일군이란 말인가?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결국은 신경질적이고 비참한 자기박탈이라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

“난 이제 신앙을 포기하겠어!”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자포자기와 낮은 자존감 그리고 자기 박탈같은 것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용서함으로 자유로와 지는 것인데, 어떻게 우리들이 용서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이나 과정에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눈에 띠는 몇 가지의 과정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깨닫는 것이다. 뭘 깨닫는가하면 가장 먼저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내가 그동안 나의 존재와 상처와 내 자신의 문제들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했고, 그로 인해서 생겨난 잘못된 습관과 가치관에 속아서 살아왔구나’,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 앞에 나가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구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주님께 나아와서 고백해야 한다. 만약 병원에 찾아간 환자가 의사 앞에서 환부를 드러내기를 꺼려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창피해도 의사 앞에서 드러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우리의 문제와 상황을 그대로 주님께 고백하는 것은 곧 주님께 나를 개방하여 보여드리는 것이다. 그렇게하면 주님께 개방했기 때문에, 이제 그 문제는 주님의 문제가 되고, 주님이 풀어 가신다. 주님이 풀어줘야 풀린다. 고백은 바로 푸는 방법이다.

 

이처럼 주님께 드리는 고백에는 우리들이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부자집에 아들이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 아버지방을 청소하다가 실수로 아버지가 아끼는 비싼 도자기를 깨뜨리고 말았다. 아들은 마음을 졸이면서 도자기를 치워놓고 방을 슬쩍 빠져나왔다. 그날 오후 그집의 하녀가 이 아들을 부르며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오라고 말했다. 아들은 하녀에게 화를 내려하자, 하녀는 ‘그런데 그 도자기 말야...’라면서 도자기를 언급했다. 아무도 못본줄 알았는데 그 하녀가 본 것이다. 그후는 몇 일동안 아들은 꼼짝없이 하녀가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들은 아버지에게 고백해서 용서를 받았다. 이제 모든 부담에서 자유로와 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하녀는 또 물을 길어오라고 요구했다. 이제 그 아들은 물을 길으러 가야할까? 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자유로와 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녀에게 큰 소리로 명령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고백의 자유다. 우리들이 나의 문제를 주님께 고백하고 십자가 앞에 내려 놓을 때, 그 고백이 주는 자유함과 우리를 참소하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비로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선포와 찬양이다. 십자가 앞에 고백하고 맡겼다면, 이제 믿음으로 나를 묶고 있는, 과거의 상처와 저주의 사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끊는 선포의 기도를 드려라. 그리고 응답하심을 믿고 찬양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용서의 복음이다. 주님이 나를 용서했듯이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고, 회복하는 길이고, 치유되는 길이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의 손을 내밀고 계신 주님의 손을 붙잡으라. 십자가 앞에서 고백의 능력과 자유를 경험하라. 그래서 우리 영혼육의 작은 죄악까지도 흰눈 보다 더 희게 만드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라. 이 시간 그렇게 되기 원하시는 분들은 조용히 두 손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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