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A. 문제제기와 연구 목적
최근 국내에서 발행되는 한 영자(英字) 일간지에 흥미있는 기사가 실렸었다. 그 내용은 천문학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컴퓨터 중의 하나를 사용하여 우주의 기원에 관한 천체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성경이 말하는 혼돈(Chaos)에서부터 형태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내용을 굳게 믿고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내용이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바로 위에서 말한 창조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는 구약성경은 그 책이 저작 집필된 이후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읽혀져 왔으며 또한 읽혀지고 있다. 동시에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하여 많은 정의를 내려왔다. 그리고 그 많은 정의 중 그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이 한 권의 역사책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이 책에는 창조는 물론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의 기원과 역사가 담겨져 있고, 그들의 주변 민족의 역사와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구약성경은 그 역사성에 회의를 가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당해야 했다. 특히 구약성경의 상황적 배경이 되고있는 모세오경의 고대성에 대한 회의와 그에 따른 비평은 구약성경을 수난으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세기에 출현했던 종교사학파의 태두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의 연구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헤겔(G.W.F.Hegel)의 변증법철학과 다윈(C.Darwin)의 진화론에 의거한 역사비평적 방법을 구약연구에 적용한 학자로서 오경의 네가지 자료(J.E.D.P)를 구체화시켜 연대 결정을 확립한 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성서 연구 방법에 있어서 신의 계시나 신학적인 해석은 완전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고, 단지 역사의 발전과정에 토대를 가지고 역사적 원인 요소를 강조 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은 그 고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19세기의 역사주의적인 성서비평에 대한 반동적인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 반응은 언어학(Philology), 인류학(Anthropology), 고고학(Archaeology) 등에서 일어났다. 특히 고고학의 경우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성서 고고학(Biblical Achaeology)'이라는 새 학문을 탄생시킴으로서 당시 팽배해 있던 구약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으로부터 구약성경의 고대성과 역사성을 수호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본 논문에서 논의될 출애굽 사건 역시 일차적으로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으며, 고고학과 그 외의 주변 역사가 증명하는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주장하는 입장이 다르고 이에 따라서 얼마간의 혼동이 있는 듯 하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국내에서 발행된 대부분의 주석 성경들은 출애굽 연대에 대해 전기설을 따르는 반면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평신도들은 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저서들로 인해 전기설과 후기설 사이에서 많은 혼동을 겪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출애굽 전기설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 학설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나아가서는 후기설의 입장을 전기설의 입장에서 비평하고자 한다. 동시에 전기설에서 주장하는 출애굽 시기의 주변국가 들의 정세를 살펴봄으로서 출애굽이 어떠한 상황에서 일어났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B. 연구방법과 범위
본 논문에서는 출애굽의 연대에 대해 연구된 국내외 학자들의 저서들을 바탕으로 각 학설의 정당성에 대한 증명을 소개하고 그 위에 본 논문의 논지를 세우고자 한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기초하여 이들을 종합 정리하여 본 논문의 논지를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자료들은 지금까지 발견되고 연구되어 온 것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완전하게 확증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앞으로 또다른 자료들이 발굴되고 그에 따른 연구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자료들은 지금까지 소개된 자료에 국한된 것임을 밝혀둔다.
본 논문의 범위는 출애굽 사건과 그에 따른 가나안 정복에 중점을 둘 것이다. 즉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사이의 40년의 광야 생활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 까닭은 출애굽 연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경적, 성경 외적 증거들이 출애굽 사건 당시와 약 40년 뒤에 일어난 가나안 정복 당시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전개할 것이다.
제I장 서론에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이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한다는 전제하에 출애굽 연대를 다루고자 하는 목적과 연구방법을 소개하였다.
제II장 출애굽 사건의 연대에서는 신학계에서 쟁점이 되고있는 출애굽 전기설과 후기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양자의 정당성에 대한 증명들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동시에 양측의 주장들이 서로 상충된 부분들을 소개하면서 전기설의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이다.
제III장 출애굽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에서는 제2장의 연구를 통해 선택된 전기설의 입장에 서서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에 영향을 끼친 이집트, 힛타이트, 미탄니 등 세 나라의 당시 역사를 정치적 상황을 중심으로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나서 이들의 정세를 종합 정리하여 이들의 상황이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제IV장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앞으로의 전망과 그에 대한 연구자의 제안을 첨가함으로 본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II. 출애굽 사건의 연대
지금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출애굽 연대에 대한 학설 들은 모두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주전 16세기 설이다. 이 학설은 주전 250년 경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Manetho)의 진술에 근거를 둔 것인데, 그는 반(反) 유대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이 힉소스 족속들과 함께 축출되었으며 그 시기는 주전 1550년 경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성경적, 고고학적 증거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둘째는 주전 15세기 설로서 학자들이 전기설이라고 명칭하는 학설이며, 셋째는 주전 13세기 설로서 후기설이라고 명칭하는 학설이다. 이 두 가지의 학설들이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A. 출애굽 전기설 - 주전 15세기 설
근래에 이 학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엉거(M.F.Unger)이며, 국내에서는 김희보와 안영복이 이 학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각 학자들이 생각하는 출애굽 연대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엉거는 주전 1441년 또한 김희보와 안영복은 주전 1446년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출애굽 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들은 무엇인가?
1. 성경적 근거(1) - 열왕기상 6:1과 사사기 11:26
김희보는 출애굽 사건이 주전 1446년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성경이 증명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열왕기상 6장 1절을 제시하였다. 이 구절의 내용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지 480년" 그리고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 즉 주전 966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주전 966년에 480년을 더하면 주전 1446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안영복은 사사기 11장 26절을 근거로 출애굽 전기설의 성경적 근거를 삼고 있다. 이 구절의 내용은 사사 입다가 암몬왕 에게 "이스라엘이 암몬에 거한지 300년이 되었다"고 말한 것인데, 여기에서 입다는 주전 1,100년 경의 사람이며 이스라엘이 요르단 동편(Transjordan)에 주전 1,400년 경에 도착한 것으로 전제한다면 열왕기상 6장 1절과 잘 일치된다는 것이다.
2. 성경적 근거(2) - 사사시대의 길이
우드(Leon Wood)는 사사시대의 길이를 분석해 보면 후기 연대에서 계산된 것보다 더 많은 길이가 요구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서 출애굽 사건의 전기설의 증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출애굽 사건과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는 사이의 대부분은 사사기가 차지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광야시대, 여호수아 시대, 삼손의 죽음에서 사울의 즉위라는 총 약 61년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초기 연대를 근거로 하면 사사기 기간은 300년하고도 1/3세기가 되지만, 후기 연대를 근거로 하면 1.5세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애굽 연도를 주전 1446년이라고 할 때에 왕국이 세워진 주전 1050년 경까지는 396년이라는 중간기가 생긴다. 여기에 우드가 언급한 61년을 감하면 335년이 된다. 그러나 출애굽 후기설에 따라 주전 1300년에서 1240년 경으로 그 시기를 잡는다면 왕국의 형성까지 250년에서 190년이라는 중간기가 생긴다. 여기에서 61년을 감한다면 더 짧은 기간이 될 수밖에 없다. 우드는 바로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사사기에 나타난 그 많은 사건들이 벌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견해이다.
3. 모세의 이야기와 제18왕조 초기의 역사적 상황
출애굽기 초반에 언급된 모든 히브리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출 1:16)은 이집트의 파라오 아모시스(Amosis)와 아멘호텝 1세(Amen-
hotep I) 하에서 힉소스족이 추방된 직후와 일치한다고 본다.
또한 모세를 거두어들인 파라오의 딸(출 2:5)은 투트모세 1세(Thutmose I)의 딸인 핫셒수트(Hatshepst) 이 외의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안영복은 이미 알려진 이집트의 모든 공주들 중에 오직 그 녀만이 자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이집트의 궁전에서 히브리 아기를 키울 정도의 대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안영복은 또한 모세의 미디안 체류기간 40년은 자신이 도망 나왔던 때의 파라오가 죽기를 기다리는 기간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출 7:7; cf.행 7:23), 후기설에서 출애굽 사건 당시의 파라오라고 주장하는 람세스 2세(Rameses II) 이전에 40년 이상을 통치한 왕은 오직 투트모세 3세라는 점을 들어 이 파라오의 통치 기간동안 모세가 미디안에서 체류했으며, 다음 파라오인 아멘호텝 2세 때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다.
엉거는 출애굽 사건 당시의 파라오가 아멘호텝 2세라는 전제하에 색다른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멘호텝 2세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장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투트모세 4세(Thutmose IV, 주전 1424-1414 경)이며, 유명한 스핑크스의 발 사이에서 발견된 꿈비석(Dream Stele)을 남긴 자이다. 엉거는 이것을 증거로 아멘호텝 2세의 장남이 출애굽기에 나타난 10번째 재앙으로 죽었을 것이며(출 12:29-30), 그 자리를 투트모세 4세가 차지한 것이라고 보았다.
4. 여리고 발굴 - 죤 가스탕(John Garstang)의 연구 결과
죤 가스탕은 그가 리버풀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1930년에서 1936년까지 구(舊) 여리고(Tell `es Sultan)을 발굴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로 여리고성은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주전 1414-13
78 경) 때에 무너졌다. 그 근거는 자기류와 부적들이 그의 시대에는 있었으나, 그의 후계자 아케나톤(Akhenaton, 주전 1378-1367 경) 때에는 없었다.
둘째로 주전 14세기말 경의 한 건물에서 발견된 자기류들은 모암왕 에글론(삿 3:12-14)이 잠시 점령했을 때의 것이다. 이 견해는 이와 똑같은 자기류가 근처의 무덤에는 없다는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이는 당시 그 곳에 살았던 사람은 누구나 여리고 묘지에 매장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로 제2 후기 청동기(The Late Bronze Age II)와 제1 초기 철기(The Early Iron Age I) 때로 여겨지는 그 이후의 몇몇 사기 조각들(미케네식을 포함)은 숫자가 얼마 되지않는 거류민들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이 조각들의 수가 매우 적었으며 침략 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사한 43개의 무덤 중에 오직 두 군데에서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리고성 자체에 대한 발굴에서 가스탕은 주전 15세기 경의 거주지-D도시라고 명명됨-를 발견했다. 그는 그 곳을 거대한 이중 벽돌 성벽을 가진 요새로 설명했는데, 그 성벽의 외곽은 높이가 300피트이며 두께는 6피트였다. 내벽은 두께가 외벽에 비해 2배나 더 두꺼웠다. 이 요새는 거대한 석조 축조물로서 이전 청동기 시대(주전 1700 경)에 벽돌 성벽으로 대치되었다고 보았다. 가스탕은 이 지대가 대재난-지진같은-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추측하였다(수 6:20).
가스탕은 또다른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 증거는 수입된 Cypriot 자기인데 특히 주전 14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창사골(Wishbone) 모양의 우유 주발과 목이 긴 Bilbis에 관한 것이다. 이것과 똑같은 자기가 케년(Kathleen M.Kenyon)이 중요한 곳으로 여겼던 므깃도의 적토층 X과 VII에서 발굴되었는데, 특히 주전 1479년에서 1150년으로 추정되는 적토층 VIII과 VII에서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그런데 여리고는 므깃도에 비해 더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 수입품 들은 므깃도에서 이 물건들이 풍부해진 이후에 여리고에 도착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전 1479년 이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자기가 실제로 주전 1400년까지 연장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가스탕은 이것을 사실로 가정할 때에 이 자기밑에 있는 재의 층은 여호수아 때의 완전한 도시함락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5. 아마르나 서신에 나타난 '아피루'(`Apiru)
아마르나 서신(The Amarna Letters)은 주전 1400년에서 1367년 사이에 팔레스틴에 있는 도시들의 왕들이 아멘호텝 3세 혹은 아케나톤의 이집트 법정에 보낸 편지들이다. 이 편지에는 팔레스타인 통치자 사이의 계략, 대항책, 반박의 고소문 등 당시의 혼란한 상황들을 나타내주고 있다.
문제는 이 서신들 중에서 팔레스틴 지방의 왕들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구원을 요하는 내용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편지에서 침략자로 나타나는 '아피루(`Apiru/`Aperu)'에 관한 것이다. 엉거는 '아피루'와 이스라엘인들을 동일시하면서 그 당시에 가나안을 공격한 자가 이스라엘인들이 아니라면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또한 데이비스(John J.Davies) 역시 엉거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몇몇 경우에 있어서 이들의 침략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행동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B. 출애굽 후기설 - 주전 13세기설
근래에 후기설을 지지하는 많은 학자들 가운데에서 B.W.앤더슨과 죤 브라이트(John Bright)등이 대표적이며, 국내에서는 문희석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1. 성서적 근거(1) -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출 1:11)
라암셋성은 현재의 타니스(Thanis)라고 추정되는데, 이는 몽테(Montet)가 1912년부터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을 하고나서부터 거의 모든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힉소스 지도자들이 한때 이 성을 사용했으며, 그 이후 아모시스(주전 1580-1557 경)가 힉소스족을 축출한 이후 세토스 1세(주전 1313-1292 경)가 이 성을 다시 재건할 때까지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인 들이 주전 15세기 경에 이 성을 다시 건축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문희석은 출애굽기 1장 11절의 '건축하다'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에 대한 설명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증명하고 있다. 즉 '건축 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bnh'는 '재건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이 곳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브라이트는 이 당시(주전 13세기 경) 문서에 나타난 '아피루'들이 왕의 계획을 위해 일하는 국가 노예로서 언급됨을 밝히면서 이들과 이스라엘인들의 관계를 언급하였다.
2. 고고학적 근거 - 에돔과 모압의 우회로(민 20:-21:)
민수기 20장 21절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에돔과 모압을 피해 그들의 땅을 돌아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주전 13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도 않았다. 또한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에 사람들이 살고 있던 많은 도시들의 이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목생활이 끝나버린 시대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한 넬슨 글뤽(Nelson Glueck)은 요르단 동편 (Transjordan)과 아라바(Araba) 지역을 조사한 결과, 주전 1900년에서 1300년 경까지는 인구가 희소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주전 1400년 경에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입성했다면 에돔, 모압, 암몬인들의 정항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글뤽의 연구에 대해 올브라이트(W.F.Albright)는 에돔과 모압이 최소한 청동기 후기에서 철기 시대(주전 13-12세기)까지에는 전혀 사람이 살고있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더욱이 아마르나 서판과 이집트의 목록 그리고 다른 역사 기록들 가운데 요르단 건너편 남쪽 지역에서 도시들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사실은 글뤽의 연구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또한 구약의 광야 방랑 전승들에서는 에돔과 모압이 국가로 나타나있다고 주장하였다.
또다른 한편으로 피네간(Jack Finegan0 역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요단강 건너편의 초기 청동기 문명은 주전 1900년 경에 사라져 버렸으며, 그 때부터 철기시대의 전까지는 그 지역에 영구적 정착 역사에 약간의 간격이 있다고 보았다. 이후 주전 13세기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새로운 농경 문화가 에돔 족속, 암몬 족속, 아모리 족속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수기 20장 14절에서 17절에 전제되어 있는 상황은 주전 13세기까지는 실재하지 않던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이스라엘인들이 그 이전 600년 동안의 어느 시기에 요단강 건너편 남부지역을 통과하였다면, 그것은 다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유목민들이 그들의 통과에 대해 저항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아이, 벧엘, 라기스, 드빌 지역에 대한 발굴
아이(Ai: et-Tell)성은 여리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13마일에 위치하고 있으며, 1933년 마르케-크라우제(Marquet-Krause) 부인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발굴을 통해 이 곳이 주전 3200년과 2400년 사이에 가나안의 주요 요새들 가운데 하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지역은 주전 2300년 경에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주전 1100년 경에 몇몇 촌락이 정착했던 것을 제외하면 계속 미정착 상태로 남아있었음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가나안 정착 당시에 이 지역은 폐허였으며, "아이" 혹은 "폐허"라는 명칭이 이 시기에 붙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아이성의 정복 기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아이성에서 1.5마일 정도 떨어진 벧엘의 주민들이 침략자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자신들의 기지로써 아이성에서 농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벧엘(Bethel) 지역은 1934년 올브라이트(W.F.Albright)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그 결과 이 지역은 중기 및 후기 청동기 시대에 매우 번영했었음이 드러났다. 주전 13세기 동안 이 지역은 엄청난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그 증거로서는 그 지역에 남아있는 딱딱한 덩어리의 재와 파편들을 들고 있다. 문희석은 벧엘의 멸망과 아이성의 정복 사이의 관련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라기스(Tell ed-Duweir)는 1933년 스타키(J.L.Starkey)에 의해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발굴의 결과 그는 이 곳의 역사가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결정적으로 이 지역이 주전 13세기 경에 멸망했다는 증거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한 주발 단편을 개조한 결과에서 나타났다. 이 단편에는 이집트의 세리가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숫자 기호가 새겨져 있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있는 한 연대는 어느 한 파라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 단지 그의 통치 4년이라고만 밝히고 있었다. 그 글씨체를 감정한 결과 주전 1224년 경의 메르넵타와 동시대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지역이 멸망할 때에 그 주발이 깨진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 곳은 주전 1220년과 1200년 사이에 멸망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드빌(Tell Beit Misrim)은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13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1926년 카일(Kyle)과 올브라이트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발굴에서 약 3피트 정도 두께의 검게 그을린 암설층(岩屑層)이 그대로 밑에 남아있었으며, 여기에서 후대 히브리인의 정착 지층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와 구별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이 지역이 주전 1200년 경에 파괴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멘호텝 3세가 사용하던 갑충석(딱정벌레 모양의 부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고고학적 발굴들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출애굽 후기설을 증명하는 견고한 고고학적 증거들로 인정되고 있다.
4. 메르넵타 석비
이 석비는 1896년 페트리(Petrie)가 테베(Thebes)에 있는 메르넵타의 큰 시체 보관 신전 마당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이집트에서 발견된 기념비들 중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기록된 유일한 비석이란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이 비문의 내용은 리비아인들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 대한 메르넵타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팔레스틴에서 거둔 그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었다.
문희석은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히 이집트를 떠났으며 이미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있었다고 주장 한다. 또한 메르넵타가 통치했던 기간이 주전 1224년에서 1216년 까지이며, 이 비석이 그의 통치 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때에 출애굽 사건의 연대를 주전 1220년 이후로 볼 수는 없다고 본다.
한편 로빈슨(H.W.Robinson)은 이 석비가 출애굽 후기설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이 석비에서 언급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특별한 어떤 지명이 없이- 팔레스틴 어딘가에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집단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네벡(A.H.J.Gunneweg)은 구체적으로 이 비문에서 이스라엘은 사람의 집단이나 민족으로 표현되어 다른 이름들과는 대조를 이룬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고정된 땅을 의미한 것이 아닌 사람의 집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출애굽 후기설을 증명하였다.
C. 출애굽 연대의 선택
여기에서는 이미 언급했던 출애굽 연대에 관한 전기설과 후기설의 주장들을 다시금 살펴보면서 이들 사이에서 상충되는 부분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들을 살펴볼 것이다.
1. 열왕기상 6:1의 480년에 관한 논쟁
출애굽 전기설 지지자들이 출애굽 시기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된 열왕기상 6장 1절의 내용에 대해 후기설 지지자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브라이트의 설명에 동의하고 있는 듯 하다. 브라이트에 따르면 40이라는 숫자는 즐겨 사용된 어림숫자로서 흔히 한 세대를 나타내곤 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480년 역시 12세대를 나타내는 어림숫자일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실제 한 세대는 대략 25년 쯤 될 것이며, 이렇게 계산한다면 12 세대는 480년이 아닌 약 300년이 되고 출애굽의 연대는 13세기 중엽으로 추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브라이트의 주장에 대해 우드는 원문에서 12세대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였다. 즉 원문 에서는 오직 480년이라는 숫자를 말하고 있을 뿐이므로 세대에 대한 착상은 원문에 나와있는 것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비돔과 라암셋에 관한 논쟁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의 건축과 여기에 관련된 강제노역에 대한 출애굽기 1장 11절의 기록은 출애굽 후기설 지지자들에게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 체류하던 연대와 장소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혹은 그의 선왕 세토스 1세)는 주전 13세기에 자신의 거주지를 이집트 북동쪽에 있는 변두리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 수도 명칭을 "람세스의 집"이라고 칭하였다. 바로 이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사현장에 이스라엘인들이 강제동원 되었으며, 출애굽기 초반의 상황이 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출애굽 후기설 지지자들의 주장에 대해 김희보는 람세스 2세는 이미 건설되어 있던 비돔과 라암셋을 확장하고 수축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그는 여기에 고고학적 견해를 덧붙이고 있는데, 투트모세 3세가 델타 지역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 있는 라(Ra)신의 신전 전면에 두 개의 비석을 세운 것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왕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 '헬리오폴리스의 주'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에 투트모세 3세는 그 곳을 자신의 군사기지로서 성을 쌓아 요새화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헬리오폴리스는 라암셋의 고대 명칭이다.
또한 출애굽 전기설의 배경인 이집트 제18왕조의 수도는 테베(Thebes: Upper Egypt)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버려진 모세를 줏어서 양육한 공주가 핫셒수트라고 할 때에 당시 이집트에 그 녀가 끼친 공적은 매우 크고 또한 그 녀는 아모시스가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릴 때 파괴된 것을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중에 아바리스(라암셋)가 있었던 것 같다는 주장을 통해 후기설 지지자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설 지지자들은 투트모세 3세의 엄청난 건축사업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건축사업이 주로 이집트 고원에 집중되었으며, 제 19왕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파라오들이 삼각주 지역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의 건축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양측이 서로 유리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가지고 맞서고 있으므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물론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비돔"과 "라암셋"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 기사에 관한 역사적 정황이 더 비슷한 후기설이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당시에 이집트를 통치하던 파라오의 정확한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시기를 딱 잘라 언급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3. 여리고 발굴
죤 가스탕의 발굴 결과, 여리고의 멸망이 주전 1400년 경이며 그 원인은 대재난-지진같은-이라는 결론은 출애굽 전기설을 위한 가장 큰 증거자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여리고에 대한 새로운 발굴과 연구들은 가스탕의 연구 결과들에 도전을 가했다. 출애굽 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가스탕의 연구 결과에 타격을 가하는 근래의 연구들을 가지고 전기설을 반박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K.M.케년의 연구 결과를 주로 인용하고 있다.
케년은 영국 고고학 연구소 소속으로 1952년에서 1958년까지 여리고 탐사를 지휘하였으며 그 발굴의 결과는 다음과같다.
첫째로 가스탕은 여호수아 앞에서 무너진 성이 "이중벽"으로 믿고 있었지만, 그 성은 이중벽이 아니라 시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성이었으며, 이 두 성은 여호수아보다 500년전 시대의 것이었다.
둘째로 구릉으로 된 이 도시는 심하게 폐허가 되어 "샘 위의" 구릉을 제외하고는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00 경 이후)의 모든 유적이 없어졌다. 케년은 이에 대해 이 기간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한 것으로 본다.
셋째로 가스탕은 이 구릉지대에서나 또는 무덤에서 발견한 자기들을 주전 1400년 경의 아멘호텝 집권 때로 계속 이어진다고 보고 있으나, 실제로 주전 1550년 경의 제2 중간 청동기(The Mid-
dle Bronze Age II) 때에 중단되었다. 이는 자기류에서 가스탕이 발견했던 재의 층이 여호수아의 파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힉소스 추방 직후에 이집트 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넷째로 가스탕은 샘 위에 있는 한 건물에서 발견한 몇 개의 자기 조각들을 모압왕 에글론의 정복 시기로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것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도시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 따라서 이 도시는 주전 1325년에 파괴된 것이다.
다섯째로 두 개의 무덤에서 가스탕이 발견한 몇 개의 조각들은 여호수아가 함락시킨 도시의 자기들과 똑같은 시기의 것이다. 가스탕이 생각하듯 제2 후기 청동기(The Late Bronze Age II) 때나 제1 초기 철기(The Early Iron Age I) 때의 것이 아니다.
우드는 이렇듯 맞서고 있는 가스탕과 케년의 견해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케년의 연구 결과가 후기설 지지자들에게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우드의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드는 앞서 언급한 케년의 세 번째 결론이 가스탕보다 더 후기설 지지자들과 맞선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서는 43개의 무덤 가운데 두 군데에서 발견한 몇 개의 자기 조각들의 연대를 주전 14세기로 추정하면서 주전 13세기에 대한 유일한 증거를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가스탕은 주전 1400년 경으로 본 자기류들과 함께 부적들을 발견하였는데, 이 부적들은 주전 1400년 경의 아멘호텝 4세 때의 것이며 이 때가 마지막 시기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케년은 부적들은 가보가 될 수 있는 것이기에 형태를 가리킬만한 충분한 증거가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우드는 이러한 부적들이 초기 연대를 기초로 한 여리고 함락 바로 그 때에 끝이 났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여기에 만일 부적이 가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전 1400년 이후이어야 할텐데 여기에서 발견된 것들은 주전 1400년 이전 자기에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후기설 지지자들이 더 이상 여리고의 발굴에 관해 케년의 발굴과 연구를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케년 자신의 발언에서 비롯된다. 케년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여리고에 거주했던 사실은 주전 14세기의 3.4분기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출애굽 후기설에서 주장하는 견해를 설명하면서 여리고 함락을 주전 13세기와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따라서 출애굽 후기설 주장자들은 여리고에 관한 한 그들의 고고학적 입지를 상실한 셈이다. 그렇지만 가스탕의 발굴은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지 않으며, 어떤 부분들은 그 신빙성을 인정받고 있다.
4. 요르단 동편지역의 발굴 상황
요르단 동편지역(Transjordan)에 대한 넬슨 글뤽의 연구 결과 주전 1900년에서 1300년 경까지 이 지역은 인구가 매우 적었으며, 따라서 주전 1400년 경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에돔과 모압 혹은 암몬인들의 저항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은 많은 저항을 받았었다(민 20:-21:). 그러므로 이들의 가나안 입성은 주전 1300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출애굽 후기설 지지자들을 위한 좋은 증거자료가 되었다.
안영복은 글뤽의 연구 결과를 부정하면서, 모세는 페트라성(Petra, Sela)을 통과하는 극히 좁은 산길인 왕도(King's Highway)로 가기를 원하였으며, 이 길은 잘 훈련된 수백명의 군사로서도 쉽게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반드시 정주민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유목민 혹은 반유목민(Semi nomads)들은 이스라엘이 그 힘든 지역을 통과함을 막기에 충분한 숫자로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을 것이며, 더욱이 이들의 생활 양식은 항구적인 건물과 같은 어떤 유물들을 왜 거의 남기지 않았는가를 설명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드는 좀더 설득력있게 글뤽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글뤽의 발굴 결과에 대한 랭카스터 하딩(Langcarster Harding0의 이의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힉소스 통치 기간 중 암몬 지역에 정착민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 곳에서 발견된 무덤 속의 매장 물질이 그 당시 때부터 잘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딩은 이러한 무덤이 유목민의 것이라고 본다.
둘째로 암만(Amman) 비행장이 건설되는 동안 발견된 작은 신전에 관한 것인데, 이 신전에는 상당한 자기류와 다른 물품들이 들어있었으며 주전 1600년에서 1399년의 전형적인 이집트 돌항아리와 수입된 미케네식 Cypriot 자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로 마다바(Madaba)에서 발견된 후기 청동기 말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로 추정되는 큰 무덤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딩은 이 비정착 세기 중에 요르단 동편 지역의 자기가 팔레스틴 본토의 자기와 사뭇 다르다는 것이 알려졌으므로 글뤽의 표면 탐사에서 발견된 파편들을 재검토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요르단 동편에 대한 보다 정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정확한 진상을 밝혀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 아마르나 서판에 언급된 '아피루'에 관한 논쟁
아마르나 서판들 가운데 몇 개의 서판에 기록된 '아피루'라는 명칭과 가나안을 침공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인(히브리인)들과 동일시하여 출애굽 전기설을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출애굽 후기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아마르나 서판에서 언급한 '아피루'와 이스라엘인들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들 중에 프랑크(Frank)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 아피루와 이스라엘인들 사이의 무관성을 주장하였다.
첫째로 다른 고고학적 증거들은 히브리인들의 침략으로 보기 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로 하비루(habiru/`Apiru)에 관한 질문은 아직도 미궁으로 남아있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기록들에 따르면 그들은 민족적 으로 혼합된 집단이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그들의 용무에 의해 결속되어 있다. 만약 이들 가운데 이스라엘인(히브리인)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히브리인 심지어 유목민들도 아니라는 것이 프랑크의 견해이다.
리빙스톤(Livingstone)은 하비루(아피루)에 대해 설명하면서 히브리인들(후의 이스라엘인들)과 하비루(habiru/hapiru: 아카드식 명칭) 혹은 아피루(`Apiru/`Aperu: 이집트식 명칭) 사이의 고대의 관련은 학자들이 풀기에 매우 어려운 문제였음을 밝히고, 음성학적으로 이 명칭이 '히브리'라는 말과 동등하다고 밝혔다. 사실 모세오경에서 히브리인의 조상은 'Eber'(창 10:21-25;11:14) 그리고 'Heber'(창 46:17; 민 26:45)라고 명명되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4:장 13절에서 '히브리인'이라고 호칭되었고, 그의 후손들도 같은 명칭을 부여받았다(창 39:14;40:15;43:32; 촐 2:6; 신 15:12).
그렇지만 한 가지 명확히 해야할 부분은 아카드식 명칭으로 서의 하비루와 이집트식 명칭인 아피루 사이에는 그 의미상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아카드식 의미에 있어서 하비루라는 집단이 강도, 부랑자 등과 같은 사회 하류층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이집트식 명칭은 아피루는 역시 같은 사회 하류층을 의미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전쟁 포로' 혹은 '국가 건축사업을 위해 동원된 포로들'에 해당되는 집단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인들을 아피루로 간주 한다면 그들은 '국가 건축사업에 동원된 포로들'에 해당된다.
따라서 아마르나 서신에 언급된 아피루들을 리빙스톤이 진술한대로 주전 2000년 경 고대 근동 전역에 걸쳐 나타난 하비루들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프랑크의 반박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즉 이 말은 아마르나 서판에서 파라오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가나안 지역의 왕들이 언급했던 것은 아카드식의 하비루가 아닌 이집트식 아피루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군네벡의 진술을 참조하고자 한다.
군네벡은 가나안 내부의 이집트 세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사사기 1장 27절 이하의 내용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므낫세 지파가 벧세안, 다아낙, 도르, 이블로암과 거기에 속한 이웃 촌락들을 차지할 수 없었으며, 이 지역들에 거주하던 가나안인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는 확인으로 시작하고 있다. 모든 이런 촌락들은 하나의 연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바닷가의 도르에서 동쪽으로 므깃도 평지의 남쪽 주변 그리고 요르단의 벧 세안 지대에 이르고 있다. 물론 군네벡은 전기설 지지자는 아니기 때문에 주전 13세기의 상황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촌락들이 지방을 가로지르는 연결이며, 이미 주전 1500년 경 이집트인들의 수중에 있던 요새들이었던 옛 도시의 건설을 다룬다는 점이다. 또한 카르낙의 아몬(Amon) 성전의 사원 탑문에 새겨진 투트모세 3세 때의 팔레스틴 명단에는 므깃도, 다이낙, 이블르암, 벧 세안, 수냄, 욕네암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르나 서신에서 아피루의 침략에 대해 구원을 요청하던 가나안 지역의 왕들이 이집트의 세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이 아카드식 하비루보다는 이집트식 아피루와 더 관련이 있음을 증거해준다.
결론적으로 아마르나 서신에 나타난 아피루라는 집단을 반드시 메소포타미아적 의미로 해석하여 이들을 이스라엘인들과 별개의 집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의 그 지역 상황을 무시한 데에서 나타난 오류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확한 상황 조명을 통해 사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6. 메르넵타 석비에 관한 문제
메르넵타 석비가 과연 출애굽 후기설을 증명하는 자료가 될 것인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고 본다. 본 연구에서는 한 고고학적 발굴보고를 통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성서고고학 학술지인 Biblical Archaeology Review의 편집자인 허셀 섕크스(Hershel Shanks)는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인 맨프레드 비탁(Manfred Bietak)의 흥미로운 발굴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양식의 가옥이 한때 이집트의 수도였던 테베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옥은 주전 1.200년에서 1.100년 경(제1 철기시대)의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문제는 비탁이 동부 나일 삼각주안에 위치한 텔 엘 다바(Tell el Daba: 성경의 라메세스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발굴을 지도할 때에 이러한 형태의 이스라엘 주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탁이 이 가옥을 발견한 것은 1930년대에 시카고 대학 동양 연구소에 의해 진행되었던 테베 발굴에 관한 리포트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서 그는 당시 이집트 가옥과는 전혀 다른 한 가옥의 설계도를 발견하였는데, 그 집의 형태는 방의 배열 형식에 있어서 철기시대의 팔레스틴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택(four-room house)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가옥의 형태는 당시 팔레스틴의 중앙 고원지대에 있었던 수백개의 작은 마을에 널리 퍼졌던 것이었다고 비탁은 밝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메르넵타 석비에서 나타난 이스 라엘은 결코 출애굽 사건을 지나 가나안을 정복하던 시기의 이스 라엘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전 1.200년에서 1.100년경의 팔레스틴 에서 유행하던 이스라엘 양식의 가옥구조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 다는 것은 분명히 메르넵타의 원정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가옥구조를 생각할 만큼 이미 팔레스틴에서의 정착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메르넵타 석비는 출애굽 후기설을 위한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팔레스틴에서의 이스라엘의 정착을 알려주는 단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7. 이집트의 팔레스틴 명단과 출애굽 사건
미국 미시간(Michigan) 대학의 교수인 크라말로프(Charles R. Krahmalov)는 구약성서의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디본(민33:45-46), 헤브론(민13:22; 수10:36-37,11:12; 삿1:10), 기손(삿4:-5:) 등 지역에 대해 이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출애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고스타 알스트룀(Gosta Ahlstrom)과 토마스 L. 톰슨(Thomas L. Thompson)에 대해 자신의 아티클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특히 디본(Dibon)의 경우에 있어서 구약성서의 진술에 반박하는 학자들은 요르단 동편을 침략한 이스라엘인들이 진을 쳤던 그 지역의 도시들 가운데 디본이 속해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 까닭은 디본의 현재 명칭인 텔 엘 디반(Tell el Dhiban)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에 관한 아무런 고고학적인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텔의 가장 윗층에서 주전 1.200년에서 1.100년경의 유적이 발굴되기는 했지만, 도시는 주전 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이다. 이런 고고학적 조사는 주로 1950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후기 청동기 시대의 흔적을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 이에 따라 반박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승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크라말로프는 민수기 33장 45b절에서 50절에 언급된 아라바(Arabah: 사해 남쪽의 황량한 지대)에서 모압 평지(요르단 계곡 아랫쪽)에 이르는 도로에 위치한 이임(Iyyim)-디본(Dibon)- 알몬디블라다임(Almon Diblathaim)-느보(Nebo)-아벨싯딤(Abel Shi
ttim)-요단강 등의 지명을 이집트의 팔레스틴 명단에 나타난 지명들과 비교하면서 출애굽의 역사성을 증명하였다.
크라말로프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있어서 이집트는 팔레스틴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을 통괄하는 지도를 작성하였다. 이 지도에는 팔레스틴의 주요 도로는 물론 아라바에서 모압 평지를 연결하는 요르단 동편 지역을 관통한 중요 도로들 역시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들 지도에는 도로 외에도 그 도로상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들도 언급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모두 3개인데, 본 연구에 있어서 특히 주목할 만한 지도는 투트모세 3세 통치하에서 작성된 가장 초기의 것과 람세스 2세 때에 작성된 가장 후기의 것이다. 전자는 카르낙(Karnak)에 위치한 아몬 신전에 새겨진 소위 '팔레스틴 명단(Palestine Lists)' 이라 명칭되며, 이집트의 지형학적 명단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팔레스틴, 요르단 동편 지역, 레바논과 시리아와 관련된 119개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아라바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는 4군데의 지명을 신명기 33장 45b절에서 50절에 나타난 지명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투트모세 3세의 명단 민수기 33장
이인(Iyyin) 이임(Iyyim)
디본(Dibon) 디본(Dibon)
알몬디블라다임
(Almon Diblathaim)
느보(Nebo)
아벨(Abel) 아벨싯딤
(Abel Shittim)
요르단(Jordan) 요르단(Jordan)
한편 람세스 2세 때의 명단은 카르낙(Karnak)에 있는 아몬 신전의 거대한 홀 입구 좌측면에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49개의 명단이 있다. 이 명단을 민수기 33장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람세스 2세의 명단 민수기 33장
이임(Iyyim)
헤레스(Heres)
카로(Qarho) 디본(Dibon)
알몬디블라다임
(Almon Diblathaim)
느보(Nebo)
익타누(Iktanu)
아벨(Abel) 아벨싯딤
(Abel Shittim)
요르단(Jordan)
투트모세 3세와 람세스 2세의 팔레스틴 명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민수기에 나타난 '디본'이라는 지명이 출애굽 전기설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투트모세 3세의 명단에서 나타난 지명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만일 출애굽 사건이 후기설의 주장에 따라 람세스 2세의 통치 하에서 일어났다면 옛 지명 '디본' 대신 '카로'가 민수기에 나타났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 사건이 전기설의 주장대로 이집트 제18왕조 초기에 일어났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III. 출애굽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이 일어나던 당시의 상황은 비단 이집트 뿐만 아니라 이집트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매우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오랜동안 힉소스족에 의해 압제를 당하던 이집트의 세력 확장과 이에 맞서는 팔레스틴 북부 세력 사이에서 팔레스틴은 이집트 본토와 이집트 적대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본 장에서는 출애굽 전기설의 입장에서 당시 주변 국제정세에 영향을 끼친 이집트, 힛타이트, 미타니의 상황에 대하여 언급할 것이다.
A. 이집트 - 제18왕조와 아마르나 시대
이집트 제18왕조는 아모시스 1세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그는 세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팔레스틴으로 진출 하여 힉소스족의 최후 보루인 샤루헨(Sharuhen)성을 3년만에 함락시켰다. 이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나일강에서 배로 항해하는 한 선장의 자서전적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은 아모시스 1세와 투트모세 1세 때의 전쟁에 참여한 에벤(Eben)의 아들 아모시스가 자신의 참전 기록인데, 이집트 북부 엘 카브(El-Kab)에 있는 그의 무덤에 새겨둔 것이다. 그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그 후 아바리스성 남쪽 에집트 땅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나는 포로를 한 명 끌고 왔다.... 그리고는 아바리스가 함락
되었다.... 샤루헨성을 3년간 포위하였다. 왕은 드디어 그 성
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제18왕국의 초기에 있어서 이들 힉소스족에 대한 축출이 있은 이후로 큰 전쟁은 없었으며, 왕국 내부의 정치적인 재조직으로 인해 팔레스틴과 수리아를 침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힉소스족들에 의한 통치는 이집트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으며, 그들내에서 제국주의적인 애국주의 감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모시스 1세 이후 이집트인들 사이에서는 아시아에 있는 원수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주전 1490년 경에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정치적 논쟁은 핫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 사이에서 벌어졌는데, 논쟁의 초기에 있어서는 핫셉수트의 비군사적 정책이 우세하였으며 상대적으로 투트모세 3세는 열세에 놓여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었다. 핫셉수트는 권력을 잡은 이후 이집트의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재건, 건축, 사업, 평화로운 외국과의 교역에 힘을 기울였다. 핫셉수트의 정책을 지지하던 여당의 관심은 이집트의 고왕국(古王國)과 중왕국(中王國)이 누렸던 외국에 대한 경제, 문화적지배권을 재확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핫셉수트는 갑자기 권력을 읽고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1.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핫셉수트 이후 그의 친척 투트모세 3세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부터 평화와 자유무역을 옹호하던 핫셉수트의 여당이 몰락하고 대신에 호전적이며 제국주의적인 당파가 득세한 것이 분명 하다. 투트모세 3세는 군사적이며 행정적인 능력을 겸비한 위대한 인물로서, 아시아 방면으로 17차례에 걸친 전쟁을 일으켜 수리아 북방까지 이르는 이집트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이 지역의 장악을 위해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파견하여 지배하도록 하였다.
그가 일으킨 아시아에 대한 최초의 침공은 "자신을 공격했던 외국 통치자들(Hyksos)에 대한 징벌자"로서 반역에 대한 형벌이 그 구실이었다. 실제로 이 반란은 주전 1468년 5월에 가데스(Kadesh)의 군주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틴과 수리아의 330명의 군주들이 연합하여 일으켰다. 이 사건에 관한 이집트의 기록은 그들의 신 아몬-레(Amon-Re)가 투트모세 3세에게 승리를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카르나트(Karnat) 신전 벽에 새긴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3년 세 번째 계절 첫째 달 제16일. 예헴(Yehem)성까지
도착했다. 왕은 그의 군대에게 아래와 같이 명하였다. "저
추악한 가데스의 원수가 와서 므깃도성에 들어갔다. 그는
지금 그 곳에 있다. 그는 이집트에 신실했던 [모든] 이방
나라의 영주들을 자기 곁에 모으고 그 뿐 아니라 멀리 나
하린과 미탄니 나라들의 왕, 후루, 코데의 왕, 그들의 말들
과 군대 등도 모으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여기 므깃도에서 [왕과 싸우기 위해]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집트에 대항하는 반란군들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반대로 이집트인들은 전쟁에서의 승리와 함께 엄청나게 많은 전리품들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집트인들의 기록이 언급하는 전리품들은 다음과 같다.
므깃도 [성읍에서 왕의 군대가 가져간 전리품의 목록] :
포로 340명, 자른 손 83개, 말 2041필, 망아지 191마리,
준마 6필.... 야노암(Yanoam), 누게스(Nuges), 헤렌케루
(Herenkeru)에 있는 원수들의 가구와 기타 황복한 도성
에 있는 재산 중 왕이 가져간 물품목록 : ...어린이 84명
과 영주들, 1796명의 남녀 노예와 그들의 자녀들, 굶주림
때문에 적병에게서 뛰쳐 나와 사함을 받은 103명, 모두
2503명....
투트모세 3세에 의한 아시아 원정은 이미 언급한 최초의 원정 이후로 그의 통치 제42년에 제16차와 17차 원정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그의 원정을 통해 새로 편입된 이집트의 영토에는 주둔병들은 물론 이집트의 고위 감독관 그리고 시종드는 종으로 조직화 되었다. 또한 지중해 항구들을 장악하여 이집트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지방군주들을 그대로 그들 보좌에 놓아두었으나, 그들의 아들과 형제들을 이집트에 인질로 데려갔다. 이집트의 인질이 된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죽어서 왕위를 계승 하게 될 때까지 이집트의 궁중에서 길러졌다.
한편 앞에서 언급했듯이 투트모세 3세는 모세의 미디안으로의 피신 그리고 체류기간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그의 기나긴 통치기간이 그 열쇠인데, 그는 주전 1504년에서 1448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듯이 모세가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을 은둔했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토록 기나긴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는 투트모세 3세 외에는 없다.
2.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
투트모세 3세가 죽은 후 그 자리를 계승한 아멘호텝 2세는 그의 통치기간 중 두 차례에 걸쳐 아시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특히 투트모세 3세의 죽음과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의 즉위라는 상황 변화를 틈타 아시아-특히 북부 팔레스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그의 아버지 때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여 북부 팔레스틴으로 진격하여 세메스-에돔(Shemesh-Edom)에서 반란군과 접전하였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제7년 세 번째 계절 첫째 달 제25일.... 왕은 세메스-에돔
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분노에 찬 사자처럼 이방 땅을 짓
밟고 순식간에 그 도성을 파괴시켰다. 왕은 '승리자 아몬'
이라고 불리우는 수레에 올라탔다. 그가 거두어들인 노획
물의 목록 : 아시아인 35명, 가축 22마리.....
아멘호텝 2세는 반란군들을 섬멸시킨 후, 유브라데스 강쪽으로 올라가서 티크시(Tikhsi)에 있던 일곱명의 반역 군주들을 사로잡아 이들을 이집트로 끌고가서 아멘(Amen)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한편 이집트인들의 아시아 원정을 통해 이집트의 종교들이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고, 아시아 지역의 종교들이 이집트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그 한 예로서 나일 계곡에 있던 신들의 사당들이 아시아에서도 세워졌으며, 해외에 거주하는 이집트인들도 바알과 아낫(Anath)같은 아시아의 신들을 위해 헌납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집트 내에는 바알과 아스토렛(Ashtoreth)을 섬기는 제사장들도 있었다.
전기설 주장자들은 아멘호텝 2세를 출애굽 사건 당시의 파라오라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3. 투트모세 4세(Thutmose IV)
투트모세 4세 역시 그의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벌에 나선 것은 분명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문서 자료는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때문에 별로 알려진 바도 없다. 그의 원정이 선왕과 같이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장일선은 투트 모세 4세는 그의 선왕들인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텝 2세의 노력 으로 인해 그가 군대를 동원하여 큰 원정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벧 세안 제8 지층에서 나타난 배수로 구멍에서 발굴된 그의 이름이 새겨진 파양스 도자기로 제작된 갑충석의 내용으로 볼 때에 장일선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내용은 투트모세 4세가 미탄니의 왕 '아르타타마(Artatama)'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딸과의 결혼을 청했 다는 것이다. 그리고 투트모세 4세는 미탄니 국왕의 허락을 얻어 공주와 결혼하였다. 문희석은 이에 대해 브레스테드(Breasted)의 견해를 빌어서 투트모세 4세가 북부 지역에 친구를 두기 원했던 것으로 보고있다. 물론 두 나라 사이에 어떤 조약이 맺어졌을 것이며, 그 결과 투트모세 4세가 이집트를 다스리는 동안에는 더 이상 아시아 지역들을 침공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의 의문점들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자존심 강한 이집트의 파라오가 미탄니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맺은 조약의 내용과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조약이 맺어진 이후에 단 한 번도 아시아 지역에 대한 원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투트모세 4세의 통치 기간에 아마르나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4.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Akhenaten)
아멘호텝 4세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이집트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한 권력 투쟁이라고 하겠다. 이집트 제18왕조 초기에는 신전과 국가 사이의 실제적인 경계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의 개인이 고위 행정 관리, 제사장, 군대 지휘관의 자리를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왕국 후기에 들어서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직책이 요구 되었다. 따라서 직책들이 전문화되고 직업화하게 되었다. 이전 선왕들의 활발한 정복사업은 크고 광법위한 행정부를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민간인의 직책들이 확대되고 강조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학교에서는 소년들에게 제사장 교육보다는 사무원 교육을 시키게 되었으며, 특정한 기간이 없이 해외에 주둔하는-그 중 일부는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됨-군대는 직업적인 관리와 군인 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신전의 경우에 있어서 국가의 신들은 승리를 보장해주는 신들이었으며, 그 대가로 전리품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받았다. 특히 아몬-레(Amon-Re)는 제국의 신으로서 거대한 토지와 수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해마다 풍부한 수입을 거두어 들였다. 이처럼 당시 이집트는 관리, 군인, 사제의 세 계급으로 구분되어 서로 경쟁하는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파라오는 자신의 신적 권위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왕, 관리, 군인, 사제 사이에서 계급간의 권력 투쟁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권력 투쟁이 아마르나 혁명의 전조가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아멘호텝 4세는 자신이 점차로 최고의 행정 관리들과 사제들에게 눌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이 이전에 누리던 절대 권력을 다시금 확보하기 위해 이미 언급한 당시의 새로운 경향들을 혁명의 자료로 포착하였다.
아멘호텝 4세의 개혁 정책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변경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멘호텝(Amen-hotep : 아몬신이 만족하였다)에서 아케나톤(Ahken-Aton : 아톤신은 무사하다)으로 바꾸었다. 또한 기존의 수도였던 테베(Thebe)를 버리고 북쪽으로 약 320Km 떨어진 아켓-아톤(Akhet-Aton : 지금의 Tell el Amarna 근처)으로 천도하면서 이 곳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가 열정적으로 숭배하기 시작한 아톤신은 태양 표면의 생명 부여 능력이라고 믿어진 신으로서, 아케나톤은 이집트와 제국 전역에 사람을 파견하여 모든 비문들에서 신들의 이름 특히 아몬 신의 이름을 지우도록 하였다. 이것은 혁명적인 격변이었다.
이 파라오는 신체적으로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따라서 선왕들의 관례를 따라 정복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무리였다. 반대로 그는 영적이고, 예술적이며, 지적인 분야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 시대의 행정가들 역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갑자기 지위에 오른 이들은 파라오에 대해서 온갖 충성을 다바쳤다. 대신 전에 제국과 신전을 다스리던 사람들은 모든 권력에서 축출되었다. 그리고 외국과 관련되는 문제들에 있어서 새로운 행정가들은 아무런 외교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내적으로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나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데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아울러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집트에 속해 있던 아시아 제국들은 붕괴되고 말았다. 제국의 약화를 틈타 팔레스틴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집트에 대한 반란과 외적의 침입이 그 주된 요인이었다. 다음의 아마르나 서신은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왕의 충실한 신복 비리디야(Biridiya)로부터, 나의 주, 나의 태양신, 대왕의 두 발 앞에 종은 일곱 번씩 일곱 번 엎드립니다. 궁수들 이 (이집트로) 돌아간 다음부터 라바이우(Labayu)는 종에게 대해 적대 행 위를 감행해 와서 털을 뽑을 수도 없고 라바이우 앞에서는 성대문을 나 갈 수도 없다는 것을 대왕께서는 아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제 므깃도 를 점령하려고 합니다. 대왕께서는 대왕의 도성을 방어하사 라바이우가 취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당신 발 밑에 있는 먼지, 밀킬루로부터.... 대왕이시여, 종과 수와르다타 (Shuwardata)를 괴롭히는 세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아시옵소서. 나의 주 대왕께서는 아피루의 손에서 대왕의 땅을 방어하소서. 그렇지 않으시 면 대왕께서는 수레를 보내시어 종들이 우리를 치기 전에 우리를 데려 가소서....
문제는 이렇듯 이집트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켓아톤에서도 문제는 있었다. 파라오의 신병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갔으며, 그를 도와 통치할 만한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딸을 '스멘크케레(Smenkhkere)'라는 청년과 결혼시키고 그를 자신의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스멘크케레는 테베로 돌아와 아몬신 숭배를 계속 하였다. 비록 아케나톤은 그의 수도 아켓아톤을 떠나거나 자신이 섬기던 아톤신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통치권을 지속시키기 위해 사실상 항복과 다름없는 타협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아케나톤이 죽고나자 그가 이끌었던 개혁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또다른 사위 '투트-안크-아톤(Thut-ankh-Aton)'은 자신의 이름을 '투트-안크-아몬(Thut-ankh-Amon)'으로 바꾸고, 반동 세력들에 대한 충성에 항거하면서 수도를 다시금 테베로 옮기고 선왕 이전 형태의 종교와 정부에 열심을 보였다. 다음의 기록은 카나크(Karnak)에 있는 아몬 신전에 세워진 기념비에 새겨진 것으로 새 파라오가 아마르나 종교 개혁을 청산하고 아몬 종교로 원상 복귀한 업적을 적고 있다.
...훌륭한 통치자, 그의 아버지 아몬과 모든 다른 신들을
위해 파괴된 것을 다시 수축하여 영원토록 지속토록 하
였다. 그는 두 땅에서 거짓을 축출하고 공의를 세워 거
짓을 가증스러운 일로 만들었다.... 이 땅에 있는 신들과
여신들의 마음은 크게 기뻐하였다. 성소를 소유한 자들
은 기뻐하였다. 온 나라도 크게 기뻐하였다. 좋은 시절
이 돌아올 것이다. 커다란 집에 있는 신들의 인네아드
(Ennead)도 팔을 들어 찬양하며, 그들의 손은 영원토록
기쁨에 차 있다. 아몬은 왕에게 생명과 만족을 준다...
투트-안크-아몬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후 아마르나 일가 중 '아이(Eye)'가 잠시 이집트를 다스렸으나, 그 이후로 아마르나 일가는 통치권을 잃고 말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이집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렘합(Haremhab)' 장군의 노고가 컸다. 그는 아마르나 일가의 실각 후에 강경책으로서 아톤 신 사상이라는 이단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행정부의 부패를 일소하여 국가의 기강을 다시금 확립하였다. 훗날 이집트의 기록들은 그를 아멘호텝 3세 이후 최초의 합법적 왕으로 기록하였으며 이에 따라 아마르나 일가의 이름들은 이단자로 간주되어 역사에서 말살되어 버렸다. 한편 하렘합은 이집트 군대의 총책임자로 있을 때에 '사카라(Sakkharah)'에 큰 무덤을 만들고, 여기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그 중 그의 강경한 일면은 현재 비엔나에 소장된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 파라오가 그들을 너희 손에 맡기셨다. 그들의
아비와 아비 시절 즉 처음 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살지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와서.... 그들의
나라에서는 굶주리고, 그들은 들짐승처럼 살며...힘의
원천이신 파라오가 그의 위력의 칼을 보내시어.... 그
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성읍을 파괴하며 불을 보내고
.... (그래서) 이방 나라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
리를 차지할 것이며....
그렇지만 이집트 제18 왕조의 통치권은 하렘합 장군을 마지막으로 그의 뒤를 이은 또 다른 군대 최고 책임자인 람세스에게 넘어감으로써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제19 왕조가 시작되었다.
아마르나 시대에 있어서 팔레스틴 등 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행동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팔레스틴에서의 이집트 세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아케나텐의 후계자인 투트-안크- 아몬의 경우 이집트의 국경을 확대하기 위해 수리아에 군대를 보냈지만 그들은 전혀 성공하지 못했으며, 하렘합의 경우에 있어서도 카나크에 있는 제11호 탑에 힛타이트를 포함하여 그가 정복했다는 원수들의 목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목록은 실제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상투적 목록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나아가 아마도 하렘합이 힛타이트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보고 있다.
B. 힛타이트(Hittites) 제국
힛타이트는 성경에서 '헷'이라고 언급되었으며, 그 성경적인 기원은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이다(창 10:15). 이들은 족장시대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을 정복할 때까지, 팔레스틴에 거주한 종족 중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민족 가운데 하나였다(창 15:22;23:3-4;26:34;27:46;28:10; 신 7:1; 수 1:4; 삿 3:5 등).
역사학적으로 혹은 고고학적으로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터어키의 '보가츠코이(Boghazkoy)'에서의 발굴 작업을 통해 드러난 기념비의 잔재들과 여러 언어들로 기록된 수천개의 비문들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은 다른 인도-아리안 족속들과 더불어 주전 2000년 초에 러시아의 남쪽으로부터 코카서스를 건너 서쪽으로 소아시아에까지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언어는 서부의 인도 유럽 계통 언어군(言語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아시아에 들어와서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셈족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서 설형문자와 종교 사상 등을 조금씩 배웠던 것 같다. 이들의 역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고대 왕국(주전 1800-1450) 시대이며, 둘째는 짧은 중간 시대(주전 1450-1400), 마지막으로 새 제국 시대(주전 1400-1200)이다. 본 논문에서는 주로 새 제국 시대 초반을 다룰 것이다.
고대 왕국 말기의 혼란과 짧은 중간 시대가 끝이 나고 새 왕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새 왕국의 가장 강력했던 지도자는 수필룰리우마스(Suppiluliumas)였는데, 그는 이집트가 아케나톤 통치 하에서 쇠약해진 틈을 타서 수리아의 모든 영토를 현재의 베이루트 북쪽 에서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켈프(Kelb)강 남쪽까지 통합하였다. 또한 소아시아 전역을 진압하였으며, 미탄니 왕국을 정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힛타이트 문서에 잘 설명되어 있다.
나, 태양신 수필룰리우마스, 위대한 왕, 하티 땅의 왕,
용감한 자, 태풍 신의 총애자는 전쟁에 나갔다. 투스
라타(Tusratta, 미탄니 왕국의 통치자. 이집트의 아멘
호텝 3세, 4세와 동시대인) 왕이 너무나 건방지게 굴
기 때문에, 나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이수와(Isuwa)
땅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미탄니의 제후들과 그들
의 소유물 모두를 하티 땅으로 끌고 왔다.... 투스라타
의 불손함 때문에 나는 이 모든 나라들을 일년 안에
정복하여 하티 땅으로 만들었다. 이편에서는 니브라니
산(레바논산)을, 저편에서는 유프라테스강을 나와 국경
으로 삼았다.
한편 당시에 있어서 수필룰리우마스의 명성은 이집트에까지 알려져 있었는데, 이미 언급한 이집트의 투트-안크-아문이 죽은 후그의 미망인이 자신의 새 남편감으로 수필룰리우마스의 아들 중 한 사람을 보내달라는 편지에서 증명된다.
....과부가 된 그들의 여왕이 사신을 나의 아버지에게
보내 이같은 소식을 전했다. "나의 남편은 죽었고, 내
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들리는 말에는 귀하에게 많은
아들이 있다 하오니, 저에게 한 명을 보내주시어 제
남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저의 종 중에 하나를
택해 남편을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인심이 후하였기 때문에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기 위
해 아들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수필룰리우마스의 아들은 이집트에 도착하기 전에 반대파의 이집트인에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양국 사이의 전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죤 브라이트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당시 힛타이트를 휩쓸었던 전염병으로 인해 이집트를 침략할 수 없었으며, 둘째는 미탄니의 지배하에 있던 앗시리아가 미탄니의 멸망과 함께 독립하면서 바빌론을 지배하고 미탄니 동부에 엄청난 위협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브라이트는 후자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다. 아무튼 브라이트는 이 때 만일 힛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났다면 이집트는 아시아 지역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당시의 이런 상황은 팔레스틴의 이스라엘인들에게도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힛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면 팔레스틴은 전장의 한복판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필룰리우마스 이후 힛타이트 제국은 무와탈리스(Muwatallis, 주전 1306-1282)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그 이후로 세력이 점점 위축되었으며, 주전 1200년 경에 바다 사람들에 의해 제국은 붕괴되고 몇 개의 영주국으로 분립되었다가 마침내 주전 717년에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의해 갈그미스가 정복됨으로써 힛타이트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C. 미탄니(Mitanni) 왕국
이집트 제18왕국 초기의 파라오들에 의해서 활발하게 아시아 원정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에 이집트인들은 힛타이트인들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 까닭은 힛타이트 고대 왕국의 무르실리스(Mursillis)가 바빌론을 급습한 후로는(주전 1530 경), 점차 쇠퇴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기력한 힛타이트인들 대신에 이집트인들은 미탄니 왕국이 와슈가니(Wasshugani, Khabur강 상류 연안 으로 추측)를 수도로 삼고 메소포타미아 상부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탄니 왕국은 주전 16세기 말에 건국되었는데, 후리족(Hurrian) 주민들이 이 나라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구약성경에서 후리족(Horim, Horites, Hurrians)은 일찍이 에돔(세일)에 살았던 자들로서(창 30:20) 에서의 후손들에게 쫓겨난 자들이다(신 2:12.22). 그러나 이들은 세일은 물론 팔레스틴의 중앙지대 외에도 세겜과 길갈에서도 살았다(창 34:2; 수 9:6.7). 또한 많은 학자들은 비(非) 셈계 족속으로 코카서스 남방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 동쪽으로 흘러들어온 '후리족'을 성경에 나타난 호리족과 동일하게 보기도 한다. 이들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에 일찍부터 자리 잡았고 멀리 지중해 연안까지 흩어져 있었으나 결국 이들의 영토는 앗시리아에게 넘어갔으며, 그 이름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 왕국의 통치계급은 그들의 이름들-슈타르나(Shutta-
rna), 사우쉬사타르(Saushsatar), 마르타타마(Artatama), 투슈라타(Tushurata)-에서 알 수 있는대로 인도-아리안들이었다. 이들은 베다신들(Vedic gods: Indra, Mithra, Varuna)을 숭배했으며 '마리야(누)(Marya(nnu))라고 알려진 귀족 출신의 병차용사들에 의해 호위되었다. 이 왕국에 있어서 이들 지배계급인 인도-아리아인들과 인구 다수를 차지했던 후리인들은 거의 공생에 가까운 생활양식에 도달해 있었다.
미탄니 왕국은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와 동시대인인 사우쉬사타르(Saushsatar) 때에 전성기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주전 1450 경). 이 당시 미탄니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티그리스 지방(Nuzi)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북부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었으며, 어쩌면 아마 지중해 연안까지도 뻗쳐 있었을지 모른다. 이 때 앗시리아는 미탄니의 속국이었다.
미탄니 왕국은 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이집트와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탄니의 왕들은 이집트에 대항하여 가데스의 동맹세력을 후원했을 것이다. 물론 투트모세 3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탄니는 약 5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시리아에 대한 자신들의 주도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전쟁은 이집트의 투트모세 4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미탄니의 왕이 자신의 딸을 투트모세 4세와 결혼시킴으로인해 양국간에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상호간에 유리한 것이었으며, 특히 주전 1400년 직전에 힛타이트족이 다시금 세력을 회복하여 북부 시리아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으므로 양국간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국 말기에 이르러 투슈라타(Tushurata)왕은 자국 내의 분란-친 이집트파와 친 힛타이트파 사이에 벌어졌던-에 이집트의 도움까지 없어지자 홀로 힛타이트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패배로 나타났으며 그는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 그의 아들 마티와자(Mattiwaza)는 힛타이트의 보호를 자청하며 그들의 대신으로써 왕좌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탄니 왕국은 이집트나 힛타이트 제국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팔레스틴의 상황에 영향을 준 일은 없었다고 본다. 다만 간접적인 방법으로-반란군 지원 등과 같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탄니 왕국은 힛타이트가 혼란기를 겪고 있을 때에 이집트 세력을 견제함으로 이집트의 근동 지역 석권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는 한편 수리아 등지에서 이집트 세력을 자극함으로 이집트로 하여금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출애굽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의 안녕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D. 주변 국제정세 종합
본 장에서는 이미 살펴보았던 출애굽 당시의 이집트와 힛타이트 그리고 미탄니의 상황을 종합해 보고자 한다. 이 모든 상황들이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출애굽 전기설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출애굽 사건과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문제의 출발점은 바로 홍해 사건에 있다고 본다. 성경이 진술하는 바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스라엘인들은 분명히 이집트에 의해 속박되어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홍해를 건넜다. 문제는 바로 그 홍해 사건 때에 전멸 했다고 전해지는 이집트의 군사력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가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을 다시금 끌어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군대를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출 14:4-9). 물론 당시에 그 사건을 목격했던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을 추격하는 이집트 군사의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가 자신의 모든 군대와 병거들을 총출동시켰는지도 미지수 이다. 그러나 민수기 1장 1절에서 54절까지 기록된 인구조사 결과를 감안한다면 파라오가 자신의 전군을 총동원시켰다는 사실이 그다지 무리는 아닌 듯 싶다. 사실 이집트의 기록 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의 탈출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 므로 이집트의 전군이 전멸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이 사건이 이집트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은 당시 주변 역사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
사실 홍해에서의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이집트의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동원된 이집트의 전차 600대가 전멸당했다는 사실은 당시 이집트의 군사력에 엄청난 손실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실제성은 크게 두 가지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홍해를 건너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초기의 몇 년동안 이집트의 추격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집트 본토에 남아있는 군사력이 있었다면 파라오는 충분히 이스라엘인들을 추격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여분의 군사력이 있었어도 어떤 엄청난 충격에 의해 추격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틴에는 투트 모세 3세가 배치한 이집트 관리들과 군대가 있었는데, 이들에 의한 추격이나 공격도 없었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그렇게 소수는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둘째로 아멘호텝 2세의 통치시기 동안에 아시아에 대한 두 차례의 원정이 있었는데, 처음 원정은 그의 제위 7년에 있었다. 이 때는 이미 출애굽 사건과 홍해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다. 장일선이 앞서 최초의 원정은 이집트에서 투트모세 3세에서 아멘호텝 2세로 파라오가 바뀌는 상황 변화를 이용하여 일어난 북부 팔레스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 까닭은 이집트에 대한 반란과 그에 따른 진압이 아멘호텝 2세가 즉위한 지 7년이 지나서 일어났기 때문 이다. 따라서 이것은 파라오가 바뀌는 상황 변화가 아닌, 아멘호텝 2세 즉위 초기에 발생한 어떤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이집트가 위축되었었다는 데에 더 타당성을 두어야 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한때 세력을 구축하던 힛타이트의 고대 제국이 무너지고, 중간시대라는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그 대신 미탄니 제국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아멘호텝 2세가 진압했던 북부 팔레스틴의 반란은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의 대리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40년 간을 방황하였을 때에 왜 이집트가 이스라엘인들을 끝까지 추격 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당시의 팔레스틴은 이 지역을 지키려는 이집트의 세력과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미탄니 왕국사이에서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는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광야에서의 40년 생활은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틴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피했던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의 상황은 이전의 상황과 매우 달라져 있었다. 이 때의 상황은 한 마디로 이집트의 쇠락과 힛타이트의 부흥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스 (john J. Davies)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또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언급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이집트가 팔레스틴을 통치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즉 아멘호텝 3세의 통치 후반에서 그의 아들 아케나톤의 통치에 이르는 동안 이집트가 굽격히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시작할 그 무렵에 일어났던 큰 사건 중의 하나는 투트모세 4세와 미탄니의 국왕 아르타타마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이다. 정략적 결혼과 함께 맺어진 이 조약으로 이집트와 미탄니 사이의 오랜 분쟁은 일단락 되었는데, 그 결과 팔레스틴은 두 나라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었던 것 같다. 이는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탄니는 물론 이집트까지도 팔레스틴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다시금 이 지역에 등장했던 힛타이트 새 제국이 미탄니 왕국을 정복하고 당시 이집트 내부의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중앙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때에 팔레스틴 지역은 이 당시까지도 이집트와 아시아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복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집트가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한 아마르나 혁명으로 인해 상당한 내부적 혼란을 겪고 있을 때에 팔레스틴에서는 이집트에 대한 반란과 함께 이스라엘인들에 의한 정복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시의 국제정세는 출애굽 전기설의 역사적 배경을 잘 증언해 주고 있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에서 가나안 정복으로 이어지는 모든 진행 사항은 단순한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당시 주변 상황의 흐름과 변화에 따르는 필연적인 것이다.
IV. 결 론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출애굽 사건의 연대와 그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를 분석함으로써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진정성과 그 정확한 시기를 알아내는 데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논의에 앞서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서에 이르는 사건들은 분명한 역사적 진정성 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본 논문은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출애굽 전기설과 후기설을 소개하면서 각 학설이 주장하는 정당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출애굽 전기설의 경우, 이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주전 1446년 경을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연도로 생각하고있는데, 이는 성경 열왕기상 6장 1절과 사사기 11장 26절의 내용에 기인한 것이다. 물론 후기설 주장자들은 이에 대한 죤 브라이트의 세대설을 들어 반박하고 있지만, 전기설 주장자들은 480년이라는 성경의 기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다. 더우기 사사시대의 긴 시간적 공간 역시 전기설 주장자들의 정당성을 위한 하나의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전기설 주장자들은 출애굽기 초반에 언급된 모세이야기와 이집트 제18왕조 초기의 역사적 상황을 비교함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죤 가스탕의 여리고 발굴과 그에 따른 연구 결과를 가지고 자신들의 견해를 증명하였다. 즉, 여리고성이 주전 1400년 경에 대재난으로 인해 붕괴되었으며, 이는 여호수아가 인도하는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붕괴되었다는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후기설 지지자들은 캐슬린 케년의 연구 결과를 들어 반박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여리고가 주전 1400년 경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년의 연구는 후기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 역시 아님을 밝혔다. 또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로 아마르나 서신에 등장하는 아피루를 언급하고 있는데, 전기설 지지자들은 이들 아피루를 가나안을 정복하는 이스라엘인들과 동일시함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증명한다. 그러나 후기설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인들과 아피루를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들을 하나의 폭도로 규정한다. 본 논문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활동하던 아카디아식 명칭 '하비루'와 전쟁 포로나 혹은 강제 동원된 노역자 등을 일컫는 이집트식 명칭 '아피루'의 구분을 통해 전기설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한편 후기설 지지자들의 성경적 배경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나타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인데, 이들 건축물들이 축조될 때는 이집트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통치 시기이므로 출애굽이 일어난 시기는 제18왕조가 아닌 제19왕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기설 지지자들은 제19왕조 이전에도 이런 건축물들이 제18왕조 초기의 파라오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이집트의 고대 기록을 내세워 반박하고 있다. 출애굽 후기설을 위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민수기 20장에서 21장에 언급된 요단강 동편 지역의 에돔과 모압의 우회로에 관한 넬슨 글뤽의 고고학적 발굴에 기인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주전 13세기 경에는 요단강 동편 지역에 에돔과 모압이 도시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이 도시화된 모압과 에돔을 만났다면 이는 주전 13세기 이전에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전기설 지지자 들의 반박 중 특히 주목할 학자는 레온 우드이다. 그는 랭카스터 하딩의 발굴 결과를 소개하면서, 글뤽의 발굴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이집트에서 발굴된 초기 철기시대의 이스라엘 양식의 가옥구조와 팔레스틴 명단에 언급된 자료를 통해 출애굽 전기설을 증명하였다.
다음 장에서는 출애굽 전기설을 전제로, 출애굽 당시 팔레스틴 주변의 국제정세에 영향을 끼치던 이집트와 힛타이트 제국, 미탄니 왕국의 상황을 소개하고, 이것을 하나로 종합하여 당시의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당시 이집트는 제18왕조 기간이었으며, 힛타 이트 제국은 중간시대의 혼란기와 새 제국시대의 부흥기에 걸쳐 있었고 미탄니 왕국은 전성기에서 멸망에 이르는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이 기간은 크게 두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의 40년을 보낸 기간과 가나안 으로 입성하던 기간이다. 전자에 있어서 팔레스틴은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 사이의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지던 상황이었으며, 후자에 있어서의 팔레스틴은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 미탄니 왕국의 멸망 이후로는 힛타이트 새 제국과 이집트의 완충지였다. 따라서 광야 40년간의 기간은 팔레스틴의 혼란에서 도피하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으며, 가나안 입성 당시의 팔레스틴의 상황은 이스라엘인들이 마음놓고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주변의 역사적인 정황도 출애굽 전기설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출애굽 연대에 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학자들 사이에서 핫 이슈로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는 출애굽 사건 자체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이 앞으로도 계속 중요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진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출애굽 사건의 정확한 연대는 밝혀져야 한다.
지금도 성경의 역사성을 증언하는 과거의 유물과 기록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에 따라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게 될 것이며 또한 그 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많은 오류들이 정정될 것이다.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 진정성을 신뢰하는 한 사람으로써 본 연구자는 더 많은 자료의 발견과 연구를 통해 보다 더 정확한 연대가 밝혀짐으로써 이들의 역사적 진정성을 입증하는 데 진일보한 결과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참 고 문 헌
1. 국 내 문 헌
김희보, [구약 이스라엘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1.
문희석, [구약성서배경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 [구약성서배경사(I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5.
------, [성서 고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안영복, [구약역사] 서울: 성광출판사, 1986.
장일선, [구약성서 시대의 역사기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최종진, [구약성서개론] 서울: 소망사, 1990.
2. 번 역 문 헌
Anderson, B.W. [구약성서 이해(상)] 강성열.노항규 역. 서울: 크리 스챤 다이제스트, 1994.
Anderson, G.W.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 김찬국 역.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1.
Bright, John. [이스라엘의 역사(상권)] 김윤주 역. 왜관: 분도 출판사, 1992.
Erich, E.L. [요점 이스라엘 역사] 배제민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8.
Gunneweg, A.H.J. [이스라엘 역사] 문희석 역. 서울: 한국신학 연구소, 1990.
Harrison, R.K. [구약성경고고학] 윤창렬 역. 서울: 한국기독교교육 연구원, 1984.
Herrmann, Siegfried,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역사] 방석종 역. 서울: 나단출판사, 1989.
Horn, S.H. [성서고고학입문] 장수돈. 오강남 역. 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1990.
Schmidt, W.H. [역사로 본 구약신앙] 강성열 역. 서울: 나눔사, 1989.
Wood, Leon. [이스라엘의 역사] 김의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1989.
3. 국 외 문 헌
Albright, W.F.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Baltimore: The John Knox Press, 1957.
Davies, John J. Conquest and Crisis-Studies in Joshua, Judge and Ruth. Widona Lake: BMH Books, 1982.
Frank, H.T. An Archaeological companion to the Bible. London: SCM Press, LTD, 1961.
Glueck, Nelson. The other side of the Jordan. New Haven: The 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 1940.
Herbert, Gabriel. When Israel came out of Egypt. London: SCM Press, LTD, 1961.
Kenyon, Kathleen M. The Bible and Recent Archaeology Atlanta
: John Knox Press, 1978.
Kitchen, K.A. The Bible in its world-The Bible and Archaeolo-
gy. Exeter: The Paternoster Press, 1977.
Livingstone, G.H. The Pentateuch in its cultural environment. Grand Rapids: The Baker Book House.
Pfeiffer, Charles F. Old Testament History.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Robinson, H.W. The History of Israel, Its Facts and Factors. London: Gerald Duckworth & Co, LTD.
Schoville, Keith N. Biblical Archaeology in Focu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8.
Thomas, D.W. ed. Archaeology and Old Testament study. Oxfo-
rd: The Clarendon Press, 1969.
Wiseman, D.J. ed. Peoples of Old Testament Times. Oxford: The Clarendon Press, 1975.
Unger, M.F. 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4.
4. 학 술 지
박준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 : 히브리의 하나님." [이화] 1981년 35집 : 156-67.
Gorny, Ronald L. "Environment, Archaeology, and History in Hittites Anatolia." BA (June/Sep 1989) : 78-96
-----------------. "Hittite Chronology" BA (June/Sep 1989) :
88-89.
Krahmalov, Charles R. "Exodus Itinerary Confirmed by Egyptian
Evidence." BAR (Sep/Oct 1994) : 54-62. 79.
Leonard, Jr, Albert. "The Late Bronze Age-Archaeological sour-
ces for the History of Palestine." BA (March 1989) :
4-39.
McMahon, Gregory. "The History of Hittites." BA (June/Sep
1989) : 62-77.
------------------. "The Hurrian and the Horites." BA (june/
Sep) : 75.
Merrillees, Robert S. "Political Conditions in the Eastern Medi-
teranean during the Late Bronze Age." BA.
Sarma, Nahum M. "Exploring Exodus." BA (June 1986)
Shanks, Hershel. "An Ancient Israelite House in Egypt?" BAR
(July/Aug 1993) : 44-45.
5. 신 문 류
Fox, Maggie. "Computer finds Biblical starts to cosmic beginnin-
gs" The Korea Herald, 10 April !976, p. 5.
< 약 어 표 >
BA : Biblical Archaeologist
BAR : Biblical Archaeology Review
A. 문제제기와 연구 목적
최근 국내에서 발행되는 한 영자(英字) 일간지에 흥미있는 기사가 실렸었다. 그 내용은 천문학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컴퓨터 중의 하나를 사용하여 우주의 기원에 관한 천체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성경이 말하는 혼돈(Chaos)에서부터 형태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내용을 굳게 믿고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내용이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바로 위에서 말한 창조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는 구약성경은 그 책이 저작 집필된 이후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읽혀져 왔으며 또한 읽혀지고 있다. 동시에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하여 많은 정의를 내려왔다. 그리고 그 많은 정의 중 그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이 한 권의 역사책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이 책에는 창조는 물론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의 기원과 역사가 담겨져 있고, 그들의 주변 민족의 역사와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구약성경은 그 역사성에 회의를 가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당해야 했다. 특히 구약성경의 상황적 배경이 되고있는 모세오경의 고대성에 대한 회의와 그에 따른 비평은 구약성경을 수난으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세기에 출현했던 종교사학파의 태두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의 연구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헤겔(G.W.F.Hegel)의 변증법철학과 다윈(C.Darwin)의 진화론에 의거한 역사비평적 방법을 구약연구에 적용한 학자로서 오경의 네가지 자료(J.E.D.P)를 구체화시켜 연대 결정을 확립한 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성서 연구 방법에 있어서 신의 계시나 신학적인 해석은 완전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고, 단지 역사의 발전과정에 토대를 가지고 역사적 원인 요소를 강조 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은 그 고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19세기의 역사주의적인 성서비평에 대한 반동적인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 반응은 언어학(Philology), 인류학(Anthropology), 고고학(Archaeology) 등에서 일어났다. 특히 고고학의 경우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성서 고고학(Biblical Achaeology)'이라는 새 학문을 탄생시킴으로서 당시 팽배해 있던 구약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으로부터 구약성경의 고대성과 역사성을 수호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본 논문에서 논의될 출애굽 사건 역시 일차적으로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으며, 고고학과 그 외의 주변 역사가 증명하는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주장하는 입장이 다르고 이에 따라서 얼마간의 혼동이 있는 듯 하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국내에서 발행된 대부분의 주석 성경들은 출애굽 연대에 대해 전기설을 따르는 반면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평신도들은 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저서들로 인해 전기설과 후기설 사이에서 많은 혼동을 겪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출애굽 전기설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 학설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나아가서는 후기설의 입장을 전기설의 입장에서 비평하고자 한다. 동시에 전기설에서 주장하는 출애굽 시기의 주변국가 들의 정세를 살펴봄으로서 출애굽이 어떠한 상황에서 일어났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B. 연구방법과 범위
본 논문에서는 출애굽의 연대에 대해 연구된 국내외 학자들의 저서들을 바탕으로 각 학설의 정당성에 대한 증명을 소개하고 그 위에 본 논문의 논지를 세우고자 한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기초하여 이들을 종합 정리하여 본 논문의 논지를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자료들은 지금까지 발견되고 연구되어 온 것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완전하게 확증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앞으로 또다른 자료들이 발굴되고 그에 따른 연구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자료들은 지금까지 소개된 자료에 국한된 것임을 밝혀둔다.
본 논문의 범위는 출애굽 사건과 그에 따른 가나안 정복에 중점을 둘 것이다. 즉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사이의 40년의 광야 생활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 까닭은 출애굽 연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경적, 성경 외적 증거들이 출애굽 사건 당시와 약 40년 뒤에 일어난 가나안 정복 당시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전개할 것이다.
제I장 서론에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이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한다는 전제하에 출애굽 연대를 다루고자 하는 목적과 연구방법을 소개하였다.
제II장 출애굽 사건의 연대에서는 신학계에서 쟁점이 되고있는 출애굽 전기설과 후기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양자의 정당성에 대한 증명들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동시에 양측의 주장들이 서로 상충된 부분들을 소개하면서 전기설의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이다.
제III장 출애굽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에서는 제2장의 연구를 통해 선택된 전기설의 입장에 서서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에 영향을 끼친 이집트, 힛타이트, 미탄니 등 세 나라의 당시 역사를 정치적 상황을 중심으로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나서 이들의 정세를 종합 정리하여 이들의 상황이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제IV장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앞으로의 전망과 그에 대한 연구자의 제안을 첨가함으로 본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II. 출애굽 사건의 연대
지금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출애굽 연대에 대한 학설 들은 모두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주전 16세기 설이다. 이 학설은 주전 250년 경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Manetho)의 진술에 근거를 둔 것인데, 그는 반(反) 유대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이 힉소스 족속들과 함께 축출되었으며 그 시기는 주전 1550년 경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성경적, 고고학적 증거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둘째는 주전 15세기 설로서 학자들이 전기설이라고 명칭하는 학설이며, 셋째는 주전 13세기 설로서 후기설이라고 명칭하는 학설이다. 이 두 가지의 학설들이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A. 출애굽 전기설 - 주전 15세기 설
근래에 이 학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엉거(M.F.Unger)이며, 국내에서는 김희보와 안영복이 이 학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각 학자들이 생각하는 출애굽 연대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엉거는 주전 1441년 또한 김희보와 안영복은 주전 1446년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출애굽 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들은 무엇인가?
1. 성경적 근거(1) - 열왕기상 6:1과 사사기 11:26
김희보는 출애굽 사건이 주전 1446년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성경이 증명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열왕기상 6장 1절을 제시하였다. 이 구절의 내용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지 480년" 그리고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 즉 주전 966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주전 966년에 480년을 더하면 주전 1446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안영복은 사사기 11장 26절을 근거로 출애굽 전기설의 성경적 근거를 삼고 있다. 이 구절의 내용은 사사 입다가 암몬왕 에게 "이스라엘이 암몬에 거한지 300년이 되었다"고 말한 것인데, 여기에서 입다는 주전 1,100년 경의 사람이며 이스라엘이 요르단 동편(Transjordan)에 주전 1,400년 경에 도착한 것으로 전제한다면 열왕기상 6장 1절과 잘 일치된다는 것이다.
2. 성경적 근거(2) - 사사시대의 길이
우드(Leon Wood)는 사사시대의 길이를 분석해 보면 후기 연대에서 계산된 것보다 더 많은 길이가 요구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서 출애굽 사건의 전기설의 증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출애굽 사건과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는 사이의 대부분은 사사기가 차지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광야시대, 여호수아 시대, 삼손의 죽음에서 사울의 즉위라는 총 약 61년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초기 연대를 근거로 하면 사사기 기간은 300년하고도 1/3세기가 되지만, 후기 연대를 근거로 하면 1.5세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애굽 연도를 주전 1446년이라고 할 때에 왕국이 세워진 주전 1050년 경까지는 396년이라는 중간기가 생긴다. 여기에 우드가 언급한 61년을 감하면 335년이 된다. 그러나 출애굽 후기설에 따라 주전 1300년에서 1240년 경으로 그 시기를 잡는다면 왕국의 형성까지 250년에서 190년이라는 중간기가 생긴다. 여기에서 61년을 감한다면 더 짧은 기간이 될 수밖에 없다. 우드는 바로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사사기에 나타난 그 많은 사건들이 벌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견해이다.
3. 모세의 이야기와 제18왕조 초기의 역사적 상황
출애굽기 초반에 언급된 모든 히브리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출 1:16)은 이집트의 파라오 아모시스(Amosis)와 아멘호텝 1세(Amen-
hotep I) 하에서 힉소스족이 추방된 직후와 일치한다고 본다.
또한 모세를 거두어들인 파라오의 딸(출 2:5)은 투트모세 1세(Thutmose I)의 딸인 핫셒수트(Hatshepst) 이 외의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안영복은 이미 알려진 이집트의 모든 공주들 중에 오직 그 녀만이 자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이집트의 궁전에서 히브리 아기를 키울 정도의 대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안영복은 또한 모세의 미디안 체류기간 40년은 자신이 도망 나왔던 때의 파라오가 죽기를 기다리는 기간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출 7:7; cf.행 7:23), 후기설에서 출애굽 사건 당시의 파라오라고 주장하는 람세스 2세(Rameses II) 이전에 40년 이상을 통치한 왕은 오직 투트모세 3세라는 점을 들어 이 파라오의 통치 기간동안 모세가 미디안에서 체류했으며, 다음 파라오인 아멘호텝 2세 때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다.
엉거는 출애굽 사건 당시의 파라오가 아멘호텝 2세라는 전제하에 색다른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멘호텝 2세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장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투트모세 4세(Thutmose IV, 주전 1424-1414 경)이며, 유명한 스핑크스의 발 사이에서 발견된 꿈비석(Dream Stele)을 남긴 자이다. 엉거는 이것을 증거로 아멘호텝 2세의 장남이 출애굽기에 나타난 10번째 재앙으로 죽었을 것이며(출 12:29-30), 그 자리를 투트모세 4세가 차지한 것이라고 보았다.
4. 여리고 발굴 - 죤 가스탕(John Garstang)의 연구 결과
죤 가스탕은 그가 리버풀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1930년에서 1936년까지 구(舊) 여리고(Tell `es Sultan)을 발굴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로 여리고성은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주전 1414-13
78 경) 때에 무너졌다. 그 근거는 자기류와 부적들이 그의 시대에는 있었으나, 그의 후계자 아케나톤(Akhenaton, 주전 1378-1367 경) 때에는 없었다.
둘째로 주전 14세기말 경의 한 건물에서 발견된 자기류들은 모암왕 에글론(삿 3:12-14)이 잠시 점령했을 때의 것이다. 이 견해는 이와 똑같은 자기류가 근처의 무덤에는 없다는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이는 당시 그 곳에 살았던 사람은 누구나 여리고 묘지에 매장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로 제2 후기 청동기(The Late Bronze Age II)와 제1 초기 철기(The Early Iron Age I) 때로 여겨지는 그 이후의 몇몇 사기 조각들(미케네식을 포함)은 숫자가 얼마 되지않는 거류민들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이 조각들의 수가 매우 적었으며 침략 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사한 43개의 무덤 중에 오직 두 군데에서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리고성 자체에 대한 발굴에서 가스탕은 주전 15세기 경의 거주지-D도시라고 명명됨-를 발견했다. 그는 그 곳을 거대한 이중 벽돌 성벽을 가진 요새로 설명했는데, 그 성벽의 외곽은 높이가 300피트이며 두께는 6피트였다. 내벽은 두께가 외벽에 비해 2배나 더 두꺼웠다. 이 요새는 거대한 석조 축조물로서 이전 청동기 시대(주전 1700 경)에 벽돌 성벽으로 대치되었다고 보았다. 가스탕은 이 지대가 대재난-지진같은-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추측하였다(수 6:20).
가스탕은 또다른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 증거는 수입된 Cypriot 자기인데 특히 주전 14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창사골(Wishbone) 모양의 우유 주발과 목이 긴 Bilbis에 관한 것이다. 이것과 똑같은 자기가 케년(Kathleen M.Kenyon)이 중요한 곳으로 여겼던 므깃도의 적토층 X과 VII에서 발굴되었는데, 특히 주전 1479년에서 1150년으로 추정되는 적토층 VIII과 VII에서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그런데 여리고는 므깃도에 비해 더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 수입품 들은 므깃도에서 이 물건들이 풍부해진 이후에 여리고에 도착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전 1479년 이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자기가 실제로 주전 1400년까지 연장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가스탕은 이것을 사실로 가정할 때에 이 자기밑에 있는 재의 층은 여호수아 때의 완전한 도시함락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5. 아마르나 서신에 나타난 '아피루'(`Apiru)
아마르나 서신(The Amarna Letters)은 주전 1400년에서 1367년 사이에 팔레스틴에 있는 도시들의 왕들이 아멘호텝 3세 혹은 아케나톤의 이집트 법정에 보낸 편지들이다. 이 편지에는 팔레스타인 통치자 사이의 계략, 대항책, 반박의 고소문 등 당시의 혼란한 상황들을 나타내주고 있다.
문제는 이 서신들 중에서 팔레스틴 지방의 왕들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구원을 요하는 내용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편지에서 침략자로 나타나는 '아피루(`Apiru/`Aperu)'에 관한 것이다. 엉거는 '아피루'와 이스라엘인들을 동일시하면서 그 당시에 가나안을 공격한 자가 이스라엘인들이 아니라면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또한 데이비스(John J.Davies) 역시 엉거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몇몇 경우에 있어서 이들의 침략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행동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B. 출애굽 후기설 - 주전 13세기설
근래에 후기설을 지지하는 많은 학자들 가운데에서 B.W.앤더슨과 죤 브라이트(John Bright)등이 대표적이며, 국내에서는 문희석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1. 성서적 근거(1) -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출 1:11)
라암셋성은 현재의 타니스(Thanis)라고 추정되는데, 이는 몽테(Montet)가 1912년부터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을 하고나서부터 거의 모든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힉소스 지도자들이 한때 이 성을 사용했으며, 그 이후 아모시스(주전 1580-1557 경)가 힉소스족을 축출한 이후 세토스 1세(주전 1313-1292 경)가 이 성을 다시 재건할 때까지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인 들이 주전 15세기 경에 이 성을 다시 건축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문희석은 출애굽기 1장 11절의 '건축하다'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에 대한 설명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증명하고 있다. 즉 '건축 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bnh'는 '재건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이 곳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브라이트는 이 당시(주전 13세기 경) 문서에 나타난 '아피루'들이 왕의 계획을 위해 일하는 국가 노예로서 언급됨을 밝히면서 이들과 이스라엘인들의 관계를 언급하였다.
2. 고고학적 근거 - 에돔과 모압의 우회로(민 20:-21:)
민수기 20장 21절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에돔과 모압을 피해 그들의 땅을 돌아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주전 13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도 않았다. 또한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에 사람들이 살고 있던 많은 도시들의 이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목생활이 끝나버린 시대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한 넬슨 글뤽(Nelson Glueck)은 요르단 동편 (Transjordan)과 아라바(Araba) 지역을 조사한 결과, 주전 1900년에서 1300년 경까지는 인구가 희소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주전 1400년 경에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입성했다면 에돔, 모압, 암몬인들의 정항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글뤽의 연구에 대해 올브라이트(W.F.Albright)는 에돔과 모압이 최소한 청동기 후기에서 철기 시대(주전 13-12세기)까지에는 전혀 사람이 살고있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더욱이 아마르나 서판과 이집트의 목록 그리고 다른 역사 기록들 가운데 요르단 건너편 남쪽 지역에서 도시들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사실은 글뤽의 연구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또한 구약의 광야 방랑 전승들에서는 에돔과 모압이 국가로 나타나있다고 주장하였다.
또다른 한편으로 피네간(Jack Finegan0 역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요단강 건너편의 초기 청동기 문명은 주전 1900년 경에 사라져 버렸으며, 그 때부터 철기시대의 전까지는 그 지역에 영구적 정착 역사에 약간의 간격이 있다고 보았다. 이후 주전 13세기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새로운 농경 문화가 에돔 족속, 암몬 족속, 아모리 족속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수기 20장 14절에서 17절에 전제되어 있는 상황은 주전 13세기까지는 실재하지 않던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이스라엘인들이 그 이전 600년 동안의 어느 시기에 요단강 건너편 남부지역을 통과하였다면, 그것은 다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유목민들이 그들의 통과에 대해 저항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아이, 벧엘, 라기스, 드빌 지역에 대한 발굴
아이(Ai: et-Tell)성은 여리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13마일에 위치하고 있으며, 1933년 마르케-크라우제(Marquet-Krause) 부인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발굴을 통해 이 곳이 주전 3200년과 2400년 사이에 가나안의 주요 요새들 가운데 하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지역은 주전 2300년 경에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주전 1100년 경에 몇몇 촌락이 정착했던 것을 제외하면 계속 미정착 상태로 남아있었음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가나안 정착 당시에 이 지역은 폐허였으며, "아이" 혹은 "폐허"라는 명칭이 이 시기에 붙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아이성의 정복 기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아이성에서 1.5마일 정도 떨어진 벧엘의 주민들이 침략자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자신들의 기지로써 아이성에서 농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벧엘(Bethel) 지역은 1934년 올브라이트(W.F.Albright)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그 결과 이 지역은 중기 및 후기 청동기 시대에 매우 번영했었음이 드러났다. 주전 13세기 동안 이 지역은 엄청난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그 증거로서는 그 지역에 남아있는 딱딱한 덩어리의 재와 파편들을 들고 있다. 문희석은 벧엘의 멸망과 아이성의 정복 사이의 관련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라기스(Tell ed-Duweir)는 1933년 스타키(J.L.Starkey)에 의해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발굴의 결과 그는 이 곳의 역사가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결정적으로 이 지역이 주전 13세기 경에 멸망했다는 증거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한 주발 단편을 개조한 결과에서 나타났다. 이 단편에는 이집트의 세리가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숫자 기호가 새겨져 있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있는 한 연대는 어느 한 파라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 단지 그의 통치 4년이라고만 밝히고 있었다. 그 글씨체를 감정한 결과 주전 1224년 경의 메르넵타와 동시대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지역이 멸망할 때에 그 주발이 깨진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 곳은 주전 1220년과 1200년 사이에 멸망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드빌(Tell Beit Misrim)은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13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1926년 카일(Kyle)과 올브라이트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발굴에서 약 3피트 정도 두께의 검게 그을린 암설층(岩屑層)이 그대로 밑에 남아있었으며, 여기에서 후대 히브리인의 정착 지층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와 구별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이 지역이 주전 1200년 경에 파괴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멘호텝 3세가 사용하던 갑충석(딱정벌레 모양의 부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고고학적 발굴들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출애굽 후기설을 증명하는 견고한 고고학적 증거들로 인정되고 있다.
4. 메르넵타 석비
이 석비는 1896년 페트리(Petrie)가 테베(Thebes)에 있는 메르넵타의 큰 시체 보관 신전 마당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이집트에서 발견된 기념비들 중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기록된 유일한 비석이란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이 비문의 내용은 리비아인들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 대한 메르넵타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팔레스틴에서 거둔 그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었다.
문희석은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히 이집트를 떠났으며 이미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있었다고 주장 한다. 또한 메르넵타가 통치했던 기간이 주전 1224년에서 1216년 까지이며, 이 비석이 그의 통치 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때에 출애굽 사건의 연대를 주전 1220년 이후로 볼 수는 없다고 본다.
한편 로빈슨(H.W.Robinson)은 이 석비가 출애굽 후기설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이 석비에서 언급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특별한 어떤 지명이 없이- 팔레스틴 어딘가에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집단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네벡(A.H.J.Gunneweg)은 구체적으로 이 비문에서 이스라엘은 사람의 집단이나 민족으로 표현되어 다른 이름들과는 대조를 이룬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고정된 땅을 의미한 것이 아닌 사람의 집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출애굽 후기설을 증명하였다.
C. 출애굽 연대의 선택
여기에서는 이미 언급했던 출애굽 연대에 관한 전기설과 후기설의 주장들을 다시금 살펴보면서 이들 사이에서 상충되는 부분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들을 살펴볼 것이다.
1. 열왕기상 6:1의 480년에 관한 논쟁
출애굽 전기설 지지자들이 출애굽 시기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된 열왕기상 6장 1절의 내용에 대해 후기설 지지자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브라이트의 설명에 동의하고 있는 듯 하다. 브라이트에 따르면 40이라는 숫자는 즐겨 사용된 어림숫자로서 흔히 한 세대를 나타내곤 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480년 역시 12세대를 나타내는 어림숫자일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실제 한 세대는 대략 25년 쯤 될 것이며, 이렇게 계산한다면 12 세대는 480년이 아닌 약 300년이 되고 출애굽의 연대는 13세기 중엽으로 추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브라이트의 주장에 대해 우드는 원문에서 12세대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였다. 즉 원문 에서는 오직 480년이라는 숫자를 말하고 있을 뿐이므로 세대에 대한 착상은 원문에 나와있는 것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비돔과 라암셋에 관한 논쟁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의 건축과 여기에 관련된 강제노역에 대한 출애굽기 1장 11절의 기록은 출애굽 후기설 지지자들에게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 체류하던 연대와 장소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혹은 그의 선왕 세토스 1세)는 주전 13세기에 자신의 거주지를 이집트 북동쪽에 있는 변두리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 수도 명칭을 "람세스의 집"이라고 칭하였다. 바로 이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사현장에 이스라엘인들이 강제동원 되었으며, 출애굽기 초반의 상황이 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출애굽 후기설 지지자들의 주장에 대해 김희보는 람세스 2세는 이미 건설되어 있던 비돔과 라암셋을 확장하고 수축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그는 여기에 고고학적 견해를 덧붙이고 있는데, 투트모세 3세가 델타 지역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 있는 라(Ra)신의 신전 전면에 두 개의 비석을 세운 것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왕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 '헬리오폴리스의 주'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에 투트모세 3세는 그 곳을 자신의 군사기지로서 성을 쌓아 요새화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헬리오폴리스는 라암셋의 고대 명칭이다.
또한 출애굽 전기설의 배경인 이집트 제18왕조의 수도는 테베(Thebes: Upper Egypt)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버려진 모세를 줏어서 양육한 공주가 핫셒수트라고 할 때에 당시 이집트에 그 녀가 끼친 공적은 매우 크고 또한 그 녀는 아모시스가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릴 때 파괴된 것을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중에 아바리스(라암셋)가 있었던 것 같다는 주장을 통해 후기설 지지자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설 지지자들은 투트모세 3세의 엄청난 건축사업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건축사업이 주로 이집트 고원에 집중되었으며, 제 19왕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파라오들이 삼각주 지역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의 건축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양측이 서로 유리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가지고 맞서고 있으므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물론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비돔"과 "라암셋"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 기사에 관한 역사적 정황이 더 비슷한 후기설이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당시에 이집트를 통치하던 파라오의 정확한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시기를 딱 잘라 언급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3. 여리고 발굴
죤 가스탕의 발굴 결과, 여리고의 멸망이 주전 1400년 경이며 그 원인은 대재난-지진같은-이라는 결론은 출애굽 전기설을 위한 가장 큰 증거자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여리고에 대한 새로운 발굴과 연구들은 가스탕의 연구 결과들에 도전을 가했다. 출애굽 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가스탕의 연구 결과에 타격을 가하는 근래의 연구들을 가지고 전기설을 반박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K.M.케년의 연구 결과를 주로 인용하고 있다.
케년은 영국 고고학 연구소 소속으로 1952년에서 1958년까지 여리고 탐사를 지휘하였으며 그 발굴의 결과는 다음과같다.
첫째로 가스탕은 여호수아 앞에서 무너진 성이 "이중벽"으로 믿고 있었지만, 그 성은 이중벽이 아니라 시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성이었으며, 이 두 성은 여호수아보다 500년전 시대의 것이었다.
둘째로 구릉으로 된 이 도시는 심하게 폐허가 되어 "샘 위의" 구릉을 제외하고는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00 경 이후)의 모든 유적이 없어졌다. 케년은 이에 대해 이 기간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한 것으로 본다.
셋째로 가스탕은 이 구릉지대에서나 또는 무덤에서 발견한 자기들을 주전 1400년 경의 아멘호텝 집권 때로 계속 이어진다고 보고 있으나, 실제로 주전 1550년 경의 제2 중간 청동기(The Mid-
dle Bronze Age II) 때에 중단되었다. 이는 자기류에서 가스탕이 발견했던 재의 층이 여호수아의 파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힉소스 추방 직후에 이집트 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넷째로 가스탕은 샘 위에 있는 한 건물에서 발견한 몇 개의 자기 조각들을 모압왕 에글론의 정복 시기로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것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도시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 따라서 이 도시는 주전 1325년에 파괴된 것이다.
다섯째로 두 개의 무덤에서 가스탕이 발견한 몇 개의 조각들은 여호수아가 함락시킨 도시의 자기들과 똑같은 시기의 것이다. 가스탕이 생각하듯 제2 후기 청동기(The Late Bronze Age II) 때나 제1 초기 철기(The Early Iron Age I) 때의 것이 아니다.
우드는 이렇듯 맞서고 있는 가스탕과 케년의 견해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케년의 연구 결과가 후기설 지지자들에게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우드의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드는 앞서 언급한 케년의 세 번째 결론이 가스탕보다 더 후기설 지지자들과 맞선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서는 43개의 무덤 가운데 두 군데에서 발견한 몇 개의 자기 조각들의 연대를 주전 14세기로 추정하면서 주전 13세기에 대한 유일한 증거를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가스탕은 주전 1400년 경으로 본 자기류들과 함께 부적들을 발견하였는데, 이 부적들은 주전 1400년 경의 아멘호텝 4세 때의 것이며 이 때가 마지막 시기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케년은 부적들은 가보가 될 수 있는 것이기에 형태를 가리킬만한 충분한 증거가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우드는 이러한 부적들이 초기 연대를 기초로 한 여리고 함락 바로 그 때에 끝이 났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여기에 만일 부적이 가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전 1400년 이후이어야 할텐데 여기에서 발견된 것들은 주전 1400년 이전 자기에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후기설 지지자들이 더 이상 여리고의 발굴에 관해 케년의 발굴과 연구를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케년 자신의 발언에서 비롯된다. 케년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여리고에 거주했던 사실은 주전 14세기의 3.4분기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출애굽 후기설에서 주장하는 견해를 설명하면서 여리고 함락을 주전 13세기와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따라서 출애굽 후기설 주장자들은 여리고에 관한 한 그들의 고고학적 입지를 상실한 셈이다. 그렇지만 가스탕의 발굴은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지 않으며, 어떤 부분들은 그 신빙성을 인정받고 있다.
4. 요르단 동편지역의 발굴 상황
요르단 동편지역(Transjordan)에 대한 넬슨 글뤽의 연구 결과 주전 1900년에서 1300년 경까지 이 지역은 인구가 매우 적었으며, 따라서 주전 1400년 경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에돔과 모압 혹은 암몬인들의 저항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은 많은 저항을 받았었다(민 20:-21:). 그러므로 이들의 가나안 입성은 주전 1300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출애굽 후기설 지지자들을 위한 좋은 증거자료가 되었다.
안영복은 글뤽의 연구 결과를 부정하면서, 모세는 페트라성(Petra, Sela)을 통과하는 극히 좁은 산길인 왕도(King's Highway)로 가기를 원하였으며, 이 길은 잘 훈련된 수백명의 군사로서도 쉽게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반드시 정주민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유목민 혹은 반유목민(Semi nomads)들은 이스라엘이 그 힘든 지역을 통과함을 막기에 충분한 숫자로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을 것이며, 더욱이 이들의 생활 양식은 항구적인 건물과 같은 어떤 유물들을 왜 거의 남기지 않았는가를 설명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드는 좀더 설득력있게 글뤽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글뤽의 발굴 결과에 대한 랭카스터 하딩(Langcarster Harding0의 이의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힉소스 통치 기간 중 암몬 지역에 정착민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 곳에서 발견된 무덤 속의 매장 물질이 그 당시 때부터 잘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딩은 이러한 무덤이 유목민의 것이라고 본다.
둘째로 암만(Amman) 비행장이 건설되는 동안 발견된 작은 신전에 관한 것인데, 이 신전에는 상당한 자기류와 다른 물품들이 들어있었으며 주전 1600년에서 1399년의 전형적인 이집트 돌항아리와 수입된 미케네식 Cypriot 자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로 마다바(Madaba)에서 발견된 후기 청동기 말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로 추정되는 큰 무덤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딩은 이 비정착 세기 중에 요르단 동편 지역의 자기가 팔레스틴 본토의 자기와 사뭇 다르다는 것이 알려졌으므로 글뤽의 표면 탐사에서 발견된 파편들을 재검토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요르단 동편에 대한 보다 정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정확한 진상을 밝혀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 아마르나 서판에 언급된 '아피루'에 관한 논쟁
아마르나 서판들 가운데 몇 개의 서판에 기록된 '아피루'라는 명칭과 가나안을 침공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인(히브리인)들과 동일시하여 출애굽 전기설을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출애굽 후기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아마르나 서판에서 언급한 '아피루'와 이스라엘인들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들 중에 프랑크(Frank)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 아피루와 이스라엘인들 사이의 무관성을 주장하였다.
첫째로 다른 고고학적 증거들은 히브리인들의 침략으로 보기 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로 하비루(habiru/`Apiru)에 관한 질문은 아직도 미궁으로 남아있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기록들에 따르면 그들은 민족적 으로 혼합된 집단이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그들의 용무에 의해 결속되어 있다. 만약 이들 가운데 이스라엘인(히브리인)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히브리인 심지어 유목민들도 아니라는 것이 프랑크의 견해이다.
리빙스톤(Livingstone)은 하비루(아피루)에 대해 설명하면서 히브리인들(후의 이스라엘인들)과 하비루(habiru/hapiru: 아카드식 명칭) 혹은 아피루(`Apiru/`Aperu: 이집트식 명칭) 사이의 고대의 관련은 학자들이 풀기에 매우 어려운 문제였음을 밝히고, 음성학적으로 이 명칭이 '히브리'라는 말과 동등하다고 밝혔다. 사실 모세오경에서 히브리인의 조상은 'Eber'(창 10:21-25;11:14) 그리고 'Heber'(창 46:17; 민 26:45)라고 명명되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4:장 13절에서 '히브리인'이라고 호칭되었고, 그의 후손들도 같은 명칭을 부여받았다(창 39:14;40:15;43:32; 촐 2:6; 신 15:12).
그렇지만 한 가지 명확히 해야할 부분은 아카드식 명칭으로 서의 하비루와 이집트식 명칭인 아피루 사이에는 그 의미상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아카드식 의미에 있어서 하비루라는 집단이 강도, 부랑자 등과 같은 사회 하류층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이집트식 명칭은 아피루는 역시 같은 사회 하류층을 의미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전쟁 포로' 혹은 '국가 건축사업을 위해 동원된 포로들'에 해당되는 집단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인들을 아피루로 간주 한다면 그들은 '국가 건축사업에 동원된 포로들'에 해당된다.
따라서 아마르나 서신에 언급된 아피루들을 리빙스톤이 진술한대로 주전 2000년 경 고대 근동 전역에 걸쳐 나타난 하비루들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프랑크의 반박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즉 이 말은 아마르나 서판에서 파라오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가나안 지역의 왕들이 언급했던 것은 아카드식의 하비루가 아닌 이집트식 아피루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군네벡의 진술을 참조하고자 한다.
군네벡은 가나안 내부의 이집트 세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사사기 1장 27절 이하의 내용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므낫세 지파가 벧세안, 다아낙, 도르, 이블로암과 거기에 속한 이웃 촌락들을 차지할 수 없었으며, 이 지역들에 거주하던 가나안인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는 확인으로 시작하고 있다. 모든 이런 촌락들은 하나의 연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바닷가의 도르에서 동쪽으로 므깃도 평지의 남쪽 주변 그리고 요르단의 벧 세안 지대에 이르고 있다. 물론 군네벡은 전기설 지지자는 아니기 때문에 주전 13세기의 상황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촌락들이 지방을 가로지르는 연결이며, 이미 주전 1500년 경 이집트인들의 수중에 있던 요새들이었던 옛 도시의 건설을 다룬다는 점이다. 또한 카르낙의 아몬(Amon) 성전의 사원 탑문에 새겨진 투트모세 3세 때의 팔레스틴 명단에는 므깃도, 다이낙, 이블르암, 벧 세안, 수냄, 욕네암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르나 서신에서 아피루의 침략에 대해 구원을 요청하던 가나안 지역의 왕들이 이집트의 세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이 아카드식 하비루보다는 이집트식 아피루와 더 관련이 있음을 증거해준다.
결론적으로 아마르나 서신에 나타난 아피루라는 집단을 반드시 메소포타미아적 의미로 해석하여 이들을 이스라엘인들과 별개의 집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의 그 지역 상황을 무시한 데에서 나타난 오류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확한 상황 조명을 통해 사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6. 메르넵타 석비에 관한 문제
메르넵타 석비가 과연 출애굽 후기설을 증명하는 자료가 될 것인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고 본다. 본 연구에서는 한 고고학적 발굴보고를 통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성서고고학 학술지인 Biblical Archaeology Review의 편집자인 허셀 섕크스(Hershel Shanks)는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인 맨프레드 비탁(Manfred Bietak)의 흥미로운 발굴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양식의 가옥이 한때 이집트의 수도였던 테베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옥은 주전 1.200년에서 1.100년 경(제1 철기시대)의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문제는 비탁이 동부 나일 삼각주안에 위치한 텔 엘 다바(Tell el Daba: 성경의 라메세스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발굴을 지도할 때에 이러한 형태의 이스라엘 주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탁이 이 가옥을 발견한 것은 1930년대에 시카고 대학 동양 연구소에 의해 진행되었던 테베 발굴에 관한 리포트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서 그는 당시 이집트 가옥과는 전혀 다른 한 가옥의 설계도를 발견하였는데, 그 집의 형태는 방의 배열 형식에 있어서 철기시대의 팔레스틴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택(four-room house)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가옥의 형태는 당시 팔레스틴의 중앙 고원지대에 있었던 수백개의 작은 마을에 널리 퍼졌던 것이었다고 비탁은 밝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메르넵타 석비에서 나타난 이스 라엘은 결코 출애굽 사건을 지나 가나안을 정복하던 시기의 이스 라엘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전 1.200년에서 1.100년경의 팔레스틴 에서 유행하던 이스라엘 양식의 가옥구조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 다는 것은 분명히 메르넵타의 원정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가옥구조를 생각할 만큼 이미 팔레스틴에서의 정착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메르넵타 석비는 출애굽 후기설을 위한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팔레스틴에서의 이스라엘의 정착을 알려주는 단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7. 이집트의 팔레스틴 명단과 출애굽 사건
미국 미시간(Michigan) 대학의 교수인 크라말로프(Charles R. Krahmalov)는 구약성서의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디본(민33:45-46), 헤브론(민13:22; 수10:36-37,11:12; 삿1:10), 기손(삿4:-5:) 등 지역에 대해 이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출애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고스타 알스트룀(Gosta Ahlstrom)과 토마스 L. 톰슨(Thomas L. Thompson)에 대해 자신의 아티클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특히 디본(Dibon)의 경우에 있어서 구약성서의 진술에 반박하는 학자들은 요르단 동편을 침략한 이스라엘인들이 진을 쳤던 그 지역의 도시들 가운데 디본이 속해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 까닭은 디본의 현재 명칭인 텔 엘 디반(Tell el Dhiban)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에 관한 아무런 고고학적인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텔의 가장 윗층에서 주전 1.200년에서 1.100년경의 유적이 발굴되기는 했지만, 도시는 주전 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이다. 이런 고고학적 조사는 주로 1950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후기 청동기 시대의 흔적을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 이에 따라 반박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승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크라말로프는 민수기 33장 45b절에서 50절에 언급된 아라바(Arabah: 사해 남쪽의 황량한 지대)에서 모압 평지(요르단 계곡 아랫쪽)에 이르는 도로에 위치한 이임(Iyyim)-디본(Dibon)- 알몬디블라다임(Almon Diblathaim)-느보(Nebo)-아벨싯딤(Abel Shi
ttim)-요단강 등의 지명을 이집트의 팔레스틴 명단에 나타난 지명들과 비교하면서 출애굽의 역사성을 증명하였다.
크라말로프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있어서 이집트는 팔레스틴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을 통괄하는 지도를 작성하였다. 이 지도에는 팔레스틴의 주요 도로는 물론 아라바에서 모압 평지를 연결하는 요르단 동편 지역을 관통한 중요 도로들 역시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들 지도에는 도로 외에도 그 도로상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들도 언급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모두 3개인데, 본 연구에 있어서 특히 주목할 만한 지도는 투트모세 3세 통치하에서 작성된 가장 초기의 것과 람세스 2세 때에 작성된 가장 후기의 것이다. 전자는 카르낙(Karnak)에 위치한 아몬 신전에 새겨진 소위 '팔레스틴 명단(Palestine Lists)' 이라 명칭되며, 이집트의 지형학적 명단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팔레스틴, 요르단 동편 지역, 레바논과 시리아와 관련된 119개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아라바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는 4군데의 지명을 신명기 33장 45b절에서 50절에 나타난 지명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투트모세 3세의 명단 민수기 33장
이인(Iyyin) 이임(Iyyim)
디본(Dibon) 디본(Dibon)
알몬디블라다임
(Almon Diblathaim)
느보(Nebo)
아벨(Abel) 아벨싯딤
(Abel Shittim)
요르단(Jordan) 요르단(Jordan)
한편 람세스 2세 때의 명단은 카르낙(Karnak)에 있는 아몬 신전의 거대한 홀 입구 좌측면에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49개의 명단이 있다. 이 명단을 민수기 33장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람세스 2세의 명단 민수기 33장
이임(Iyyim)
헤레스(Heres)
카로(Qarho) 디본(Dibon)
알몬디블라다임
(Almon Diblathaim)
느보(Nebo)
익타누(Iktanu)
아벨(Abel) 아벨싯딤
(Abel Shittim)
요르단(Jordan)
투트모세 3세와 람세스 2세의 팔레스틴 명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민수기에 나타난 '디본'이라는 지명이 출애굽 전기설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투트모세 3세의 명단에서 나타난 지명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만일 출애굽 사건이 후기설의 주장에 따라 람세스 2세의 통치 하에서 일어났다면 옛 지명 '디본' 대신 '카로'가 민수기에 나타났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 사건이 전기설의 주장대로 이집트 제18왕조 초기에 일어났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III. 출애굽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이 일어나던 당시의 상황은 비단 이집트 뿐만 아니라 이집트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매우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오랜동안 힉소스족에 의해 압제를 당하던 이집트의 세력 확장과 이에 맞서는 팔레스틴 북부 세력 사이에서 팔레스틴은 이집트 본토와 이집트 적대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본 장에서는 출애굽 전기설의 입장에서 당시 주변 국제정세에 영향을 끼친 이집트, 힛타이트, 미타니의 상황에 대하여 언급할 것이다.
A. 이집트 - 제18왕조와 아마르나 시대
이집트 제18왕조는 아모시스 1세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그는 세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팔레스틴으로 진출 하여 힉소스족의 최후 보루인 샤루헨(Sharuhen)성을 3년만에 함락시켰다. 이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나일강에서 배로 항해하는 한 선장의 자서전적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은 아모시스 1세와 투트모세 1세 때의 전쟁에 참여한 에벤(Eben)의 아들 아모시스가 자신의 참전 기록인데, 이집트 북부 엘 카브(El-Kab)에 있는 그의 무덤에 새겨둔 것이다. 그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그 후 아바리스성 남쪽 에집트 땅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나는 포로를 한 명 끌고 왔다.... 그리고는 아바리스가 함락
되었다.... 샤루헨성을 3년간 포위하였다. 왕은 드디어 그 성
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제18왕국의 초기에 있어서 이들 힉소스족에 대한 축출이 있은 이후로 큰 전쟁은 없었으며, 왕국 내부의 정치적인 재조직으로 인해 팔레스틴과 수리아를 침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힉소스족들에 의한 통치는 이집트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으며, 그들내에서 제국주의적인 애국주의 감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모시스 1세 이후 이집트인들 사이에서는 아시아에 있는 원수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주전 1490년 경에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정치적 논쟁은 핫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 사이에서 벌어졌는데, 논쟁의 초기에 있어서는 핫셉수트의 비군사적 정책이 우세하였으며 상대적으로 투트모세 3세는 열세에 놓여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었다. 핫셉수트는 권력을 잡은 이후 이집트의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재건, 건축, 사업, 평화로운 외국과의 교역에 힘을 기울였다. 핫셉수트의 정책을 지지하던 여당의 관심은 이집트의 고왕국(古王國)과 중왕국(中王國)이 누렸던 외국에 대한 경제, 문화적지배권을 재확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핫셉수트는 갑자기 권력을 읽고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1.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핫셉수트 이후 그의 친척 투트모세 3세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부터 평화와 자유무역을 옹호하던 핫셉수트의 여당이 몰락하고 대신에 호전적이며 제국주의적인 당파가 득세한 것이 분명 하다. 투트모세 3세는 군사적이며 행정적인 능력을 겸비한 위대한 인물로서, 아시아 방면으로 17차례에 걸친 전쟁을 일으켜 수리아 북방까지 이르는 이집트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이 지역의 장악을 위해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파견하여 지배하도록 하였다.
그가 일으킨 아시아에 대한 최초의 침공은 "자신을 공격했던 외국 통치자들(Hyksos)에 대한 징벌자"로서 반역에 대한 형벌이 그 구실이었다. 실제로 이 반란은 주전 1468년 5월에 가데스(Kadesh)의 군주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틴과 수리아의 330명의 군주들이 연합하여 일으켰다. 이 사건에 관한 이집트의 기록은 그들의 신 아몬-레(Amon-Re)가 투트모세 3세에게 승리를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카르나트(Karnat) 신전 벽에 새긴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3년 세 번째 계절 첫째 달 제16일. 예헴(Yehem)성까지
도착했다. 왕은 그의 군대에게 아래와 같이 명하였다. "저
추악한 가데스의 원수가 와서 므깃도성에 들어갔다. 그는
지금 그 곳에 있다. 그는 이집트에 신실했던 [모든] 이방
나라의 영주들을 자기 곁에 모으고 그 뿐 아니라 멀리 나
하린과 미탄니 나라들의 왕, 후루, 코데의 왕, 그들의 말들
과 군대 등도 모으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여기 므깃도에서 [왕과 싸우기 위해]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집트에 대항하는 반란군들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반대로 이집트인들은 전쟁에서의 승리와 함께 엄청나게 많은 전리품들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집트인들의 기록이 언급하는 전리품들은 다음과 같다.
므깃도 [성읍에서 왕의 군대가 가져간 전리품의 목록] :
포로 340명, 자른 손 83개, 말 2041필, 망아지 191마리,
준마 6필.... 야노암(Yanoam), 누게스(Nuges), 헤렌케루
(Herenkeru)에 있는 원수들의 가구와 기타 황복한 도성
에 있는 재산 중 왕이 가져간 물품목록 : ...어린이 84명
과 영주들, 1796명의 남녀 노예와 그들의 자녀들, 굶주림
때문에 적병에게서 뛰쳐 나와 사함을 받은 103명, 모두
2503명....
투트모세 3세에 의한 아시아 원정은 이미 언급한 최초의 원정 이후로 그의 통치 제42년에 제16차와 17차 원정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그의 원정을 통해 새로 편입된 이집트의 영토에는 주둔병들은 물론 이집트의 고위 감독관 그리고 시종드는 종으로 조직화 되었다. 또한 지중해 항구들을 장악하여 이집트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지방군주들을 그대로 그들 보좌에 놓아두었으나, 그들의 아들과 형제들을 이집트에 인질로 데려갔다. 이집트의 인질이 된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죽어서 왕위를 계승 하게 될 때까지 이집트의 궁중에서 길러졌다.
한편 앞에서 언급했듯이 투트모세 3세는 모세의 미디안으로의 피신 그리고 체류기간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그의 기나긴 통치기간이 그 열쇠인데, 그는 주전 1504년에서 1448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듯이 모세가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을 은둔했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토록 기나긴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는 투트모세 3세 외에는 없다.
2.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
투트모세 3세가 죽은 후 그 자리를 계승한 아멘호텝 2세는 그의 통치기간 중 두 차례에 걸쳐 아시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특히 투트모세 3세의 죽음과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의 즉위라는 상황 변화를 틈타 아시아-특히 북부 팔레스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그의 아버지 때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여 북부 팔레스틴으로 진격하여 세메스-에돔(Shemesh-Edom)에서 반란군과 접전하였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제7년 세 번째 계절 첫째 달 제25일.... 왕은 세메스-에돔
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분노에 찬 사자처럼 이방 땅을 짓
밟고 순식간에 그 도성을 파괴시켰다. 왕은 '승리자 아몬'
이라고 불리우는 수레에 올라탔다. 그가 거두어들인 노획
물의 목록 : 아시아인 35명, 가축 22마리.....
아멘호텝 2세는 반란군들을 섬멸시킨 후, 유브라데스 강쪽으로 올라가서 티크시(Tikhsi)에 있던 일곱명의 반역 군주들을 사로잡아 이들을 이집트로 끌고가서 아멘(Amen)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한편 이집트인들의 아시아 원정을 통해 이집트의 종교들이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고, 아시아 지역의 종교들이 이집트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그 한 예로서 나일 계곡에 있던 신들의 사당들이 아시아에서도 세워졌으며, 해외에 거주하는 이집트인들도 바알과 아낫(Anath)같은 아시아의 신들을 위해 헌납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집트 내에는 바알과 아스토렛(Ashtoreth)을 섬기는 제사장들도 있었다.
전기설 주장자들은 아멘호텝 2세를 출애굽 사건 당시의 파라오라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3. 투트모세 4세(Thutmose IV)
투트모세 4세 역시 그의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벌에 나선 것은 분명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문서 자료는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때문에 별로 알려진 바도 없다. 그의 원정이 선왕과 같이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장일선은 투트 모세 4세는 그의 선왕들인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텝 2세의 노력 으로 인해 그가 군대를 동원하여 큰 원정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벧 세안 제8 지층에서 나타난 배수로 구멍에서 발굴된 그의 이름이 새겨진 파양스 도자기로 제작된 갑충석의 내용으로 볼 때에 장일선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내용은 투트모세 4세가 미탄니의 왕 '아르타타마(Artatama)'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딸과의 결혼을 청했 다는 것이다. 그리고 투트모세 4세는 미탄니 국왕의 허락을 얻어 공주와 결혼하였다. 문희석은 이에 대해 브레스테드(Breasted)의 견해를 빌어서 투트모세 4세가 북부 지역에 친구를 두기 원했던 것으로 보고있다. 물론 두 나라 사이에 어떤 조약이 맺어졌을 것이며, 그 결과 투트모세 4세가 이집트를 다스리는 동안에는 더 이상 아시아 지역들을 침공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의 의문점들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자존심 강한 이집트의 파라오가 미탄니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맺은 조약의 내용과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조약이 맺어진 이후에 단 한 번도 아시아 지역에 대한 원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투트모세 4세의 통치 기간에 아마르나 시대의 혼란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4.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Akhenaten)
아멘호텝 4세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이집트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한 권력 투쟁이라고 하겠다. 이집트 제18왕조 초기에는 신전과 국가 사이의 실제적인 경계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의 개인이 고위 행정 관리, 제사장, 군대 지휘관의 자리를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왕국 후기에 들어서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직책이 요구 되었다. 따라서 직책들이 전문화되고 직업화하게 되었다. 이전 선왕들의 활발한 정복사업은 크고 광법위한 행정부를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민간인의 직책들이 확대되고 강조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학교에서는 소년들에게 제사장 교육보다는 사무원 교육을 시키게 되었으며, 특정한 기간이 없이 해외에 주둔하는-그 중 일부는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됨-군대는 직업적인 관리와 군인 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신전의 경우에 있어서 국가의 신들은 승리를 보장해주는 신들이었으며, 그 대가로 전리품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받았다. 특히 아몬-레(Amon-Re)는 제국의 신으로서 거대한 토지와 수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해마다 풍부한 수입을 거두어 들였다. 이처럼 당시 이집트는 관리, 군인, 사제의 세 계급으로 구분되어 서로 경쟁하는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파라오는 자신의 신적 권위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왕, 관리, 군인, 사제 사이에서 계급간의 권력 투쟁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권력 투쟁이 아마르나 혁명의 전조가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아멘호텝 4세는 자신이 점차로 최고의 행정 관리들과 사제들에게 눌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이 이전에 누리던 절대 권력을 다시금 확보하기 위해 이미 언급한 당시의 새로운 경향들을 혁명의 자료로 포착하였다.
아멘호텝 4세의 개혁 정책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변경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멘호텝(Amen-hotep : 아몬신이 만족하였다)에서 아케나톤(Ahken-Aton : 아톤신은 무사하다)으로 바꾸었다. 또한 기존의 수도였던 테베(Thebe)를 버리고 북쪽으로 약 320Km 떨어진 아켓-아톤(Akhet-Aton : 지금의 Tell el Amarna 근처)으로 천도하면서 이 곳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가 열정적으로 숭배하기 시작한 아톤신은 태양 표면의 생명 부여 능력이라고 믿어진 신으로서, 아케나톤은 이집트와 제국 전역에 사람을 파견하여 모든 비문들에서 신들의 이름 특히 아몬 신의 이름을 지우도록 하였다. 이것은 혁명적인 격변이었다.
이 파라오는 신체적으로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따라서 선왕들의 관례를 따라 정복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무리였다. 반대로 그는 영적이고, 예술적이며, 지적인 분야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 시대의 행정가들 역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갑자기 지위에 오른 이들은 파라오에 대해서 온갖 충성을 다바쳤다. 대신 전에 제국과 신전을 다스리던 사람들은 모든 권력에서 축출되었다. 그리고 외국과 관련되는 문제들에 있어서 새로운 행정가들은 아무런 외교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내적으로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나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데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아울러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집트에 속해 있던 아시아 제국들은 붕괴되고 말았다. 제국의 약화를 틈타 팔레스틴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집트에 대한 반란과 외적의 침입이 그 주된 요인이었다. 다음의 아마르나 서신은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왕의 충실한 신복 비리디야(Biridiya)로부터, 나의 주, 나의 태양신, 대왕의 두 발 앞에 종은 일곱 번씩 일곱 번 엎드립니다. 궁수들 이 (이집트로) 돌아간 다음부터 라바이우(Labayu)는 종에게 대해 적대 행 위를 감행해 와서 털을 뽑을 수도 없고 라바이우 앞에서는 성대문을 나 갈 수도 없다는 것을 대왕께서는 아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제 므깃도 를 점령하려고 합니다. 대왕께서는 대왕의 도성을 방어하사 라바이우가 취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당신 발 밑에 있는 먼지, 밀킬루로부터.... 대왕이시여, 종과 수와르다타 (Shuwardata)를 괴롭히는 세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아시옵소서. 나의 주 대왕께서는 아피루의 손에서 대왕의 땅을 방어하소서. 그렇지 않으시 면 대왕께서는 수레를 보내시어 종들이 우리를 치기 전에 우리를 데려 가소서....
문제는 이렇듯 이집트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켓아톤에서도 문제는 있었다. 파라오의 신병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갔으며, 그를 도와 통치할 만한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딸을 '스멘크케레(Smenkhkere)'라는 청년과 결혼시키고 그를 자신의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스멘크케레는 테베로 돌아와 아몬신 숭배를 계속 하였다. 비록 아케나톤은 그의 수도 아켓아톤을 떠나거나 자신이 섬기던 아톤신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통치권을 지속시키기 위해 사실상 항복과 다름없는 타협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아케나톤이 죽고나자 그가 이끌었던 개혁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또다른 사위 '투트-안크-아톤(Thut-ankh-Aton)'은 자신의 이름을 '투트-안크-아몬(Thut-ankh-Amon)'으로 바꾸고, 반동 세력들에 대한 충성에 항거하면서 수도를 다시금 테베로 옮기고 선왕 이전 형태의 종교와 정부에 열심을 보였다. 다음의 기록은 카나크(Karnak)에 있는 아몬 신전에 세워진 기념비에 새겨진 것으로 새 파라오가 아마르나 종교 개혁을 청산하고 아몬 종교로 원상 복귀한 업적을 적고 있다.
...훌륭한 통치자, 그의 아버지 아몬과 모든 다른 신들을
위해 파괴된 것을 다시 수축하여 영원토록 지속토록 하
였다. 그는 두 땅에서 거짓을 축출하고 공의를 세워 거
짓을 가증스러운 일로 만들었다.... 이 땅에 있는 신들과
여신들의 마음은 크게 기뻐하였다. 성소를 소유한 자들
은 기뻐하였다. 온 나라도 크게 기뻐하였다. 좋은 시절
이 돌아올 것이다. 커다란 집에 있는 신들의 인네아드
(Ennead)도 팔을 들어 찬양하며, 그들의 손은 영원토록
기쁨에 차 있다. 아몬은 왕에게 생명과 만족을 준다...
투트-안크-아몬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후 아마르나 일가 중 '아이(Eye)'가 잠시 이집트를 다스렸으나, 그 이후로 아마르나 일가는 통치권을 잃고 말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이집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렘합(Haremhab)' 장군의 노고가 컸다. 그는 아마르나 일가의 실각 후에 강경책으로서 아톤 신 사상이라는 이단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행정부의 부패를 일소하여 국가의 기강을 다시금 확립하였다. 훗날 이집트의 기록들은 그를 아멘호텝 3세 이후 최초의 합법적 왕으로 기록하였으며 이에 따라 아마르나 일가의 이름들은 이단자로 간주되어 역사에서 말살되어 버렸다. 한편 하렘합은 이집트 군대의 총책임자로 있을 때에 '사카라(Sakkharah)'에 큰 무덤을 만들고, 여기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그 중 그의 강경한 일면은 현재 비엔나에 소장된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 파라오가 그들을 너희 손에 맡기셨다. 그들의
아비와 아비 시절 즉 처음 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살지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와서.... 그들의
나라에서는 굶주리고, 그들은 들짐승처럼 살며...힘의
원천이신 파라오가 그의 위력의 칼을 보내시어.... 그
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성읍을 파괴하며 불을 보내고
.... (그래서) 이방 나라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
리를 차지할 것이며....
그렇지만 이집트 제18 왕조의 통치권은 하렘합 장군을 마지막으로 그의 뒤를 이은 또 다른 군대 최고 책임자인 람세스에게 넘어감으로써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제19 왕조가 시작되었다.
아마르나 시대에 있어서 팔레스틴 등 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행동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팔레스틴에서의 이집트 세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아케나텐의 후계자인 투트-안크- 아몬의 경우 이집트의 국경을 확대하기 위해 수리아에 군대를 보냈지만 그들은 전혀 성공하지 못했으며, 하렘합의 경우에 있어서도 카나크에 있는 제11호 탑에 힛타이트를 포함하여 그가 정복했다는 원수들의 목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목록은 실제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상투적 목록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나아가 아마도 하렘합이 힛타이트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보고 있다.
B. 힛타이트(Hittites) 제국
힛타이트는 성경에서 '헷'이라고 언급되었으며, 그 성경적인 기원은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이다(창 10:15). 이들은 족장시대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을 정복할 때까지, 팔레스틴에 거주한 종족 중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민족 가운데 하나였다(창 15:22;23:3-4;26:34;27:46;28:10; 신 7:1; 수 1:4; 삿 3:5 등).
역사학적으로 혹은 고고학적으로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터어키의 '보가츠코이(Boghazkoy)'에서의 발굴 작업을 통해 드러난 기념비의 잔재들과 여러 언어들로 기록된 수천개의 비문들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은 다른 인도-아리안 족속들과 더불어 주전 2000년 초에 러시아의 남쪽으로부터 코카서스를 건너 서쪽으로 소아시아에까지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언어는 서부의 인도 유럽 계통 언어군(言語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아시아에 들어와서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셈족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서 설형문자와 종교 사상 등을 조금씩 배웠던 것 같다. 이들의 역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고대 왕국(주전 1800-1450) 시대이며, 둘째는 짧은 중간 시대(주전 1450-1400), 마지막으로 새 제국 시대(주전 1400-1200)이다. 본 논문에서는 주로 새 제국 시대 초반을 다룰 것이다.
고대 왕국 말기의 혼란과 짧은 중간 시대가 끝이 나고 새 왕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새 왕국의 가장 강력했던 지도자는 수필룰리우마스(Suppiluliumas)였는데, 그는 이집트가 아케나톤 통치 하에서 쇠약해진 틈을 타서 수리아의 모든 영토를 현재의 베이루트 북쪽 에서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켈프(Kelb)강 남쪽까지 통합하였다. 또한 소아시아 전역을 진압하였으며, 미탄니 왕국을 정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힛타이트 문서에 잘 설명되어 있다.
나, 태양신 수필룰리우마스, 위대한 왕, 하티 땅의 왕,
용감한 자, 태풍 신의 총애자는 전쟁에 나갔다. 투스
라타(Tusratta, 미탄니 왕국의 통치자. 이집트의 아멘
호텝 3세, 4세와 동시대인) 왕이 너무나 건방지게 굴
기 때문에, 나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이수와(Isuwa)
땅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미탄니의 제후들과 그들
의 소유물 모두를 하티 땅으로 끌고 왔다.... 투스라타
의 불손함 때문에 나는 이 모든 나라들을 일년 안에
정복하여 하티 땅으로 만들었다. 이편에서는 니브라니
산(레바논산)을, 저편에서는 유프라테스강을 나와 국경
으로 삼았다.
한편 당시에 있어서 수필룰리우마스의 명성은 이집트에까지 알려져 있었는데, 이미 언급한 이집트의 투트-안크-아문이 죽은 후그의 미망인이 자신의 새 남편감으로 수필룰리우마스의 아들 중 한 사람을 보내달라는 편지에서 증명된다.
....과부가 된 그들의 여왕이 사신을 나의 아버지에게
보내 이같은 소식을 전했다. "나의 남편은 죽었고, 내
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들리는 말에는 귀하에게 많은
아들이 있다 하오니, 저에게 한 명을 보내주시어 제
남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저의 종 중에 하나를
택해 남편을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인심이 후하였기 때문에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기 위
해 아들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수필룰리우마스의 아들은 이집트에 도착하기 전에 반대파의 이집트인에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양국 사이의 전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죤 브라이트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당시 힛타이트를 휩쓸었던 전염병으로 인해 이집트를 침략할 수 없었으며, 둘째는 미탄니의 지배하에 있던 앗시리아가 미탄니의 멸망과 함께 독립하면서 바빌론을 지배하고 미탄니 동부에 엄청난 위협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브라이트는 후자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다. 아무튼 브라이트는 이 때 만일 힛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났다면 이집트는 아시아 지역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당시의 이런 상황은 팔레스틴의 이스라엘인들에게도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힛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면 팔레스틴은 전장의 한복판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필룰리우마스 이후 힛타이트 제국은 무와탈리스(Muwatallis, 주전 1306-1282)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그 이후로 세력이 점점 위축되었으며, 주전 1200년 경에 바다 사람들에 의해 제국은 붕괴되고 몇 개의 영주국으로 분립되었다가 마침내 주전 717년에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의해 갈그미스가 정복됨으로써 힛타이트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C. 미탄니(Mitanni) 왕국
이집트 제18왕국 초기의 파라오들에 의해서 활발하게 아시아 원정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에 이집트인들은 힛타이트인들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 까닭은 힛타이트 고대 왕국의 무르실리스(Mursillis)가 바빌론을 급습한 후로는(주전 1530 경), 점차 쇠퇴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기력한 힛타이트인들 대신에 이집트인들은 미탄니 왕국이 와슈가니(Wasshugani, Khabur강 상류 연안 으로 추측)를 수도로 삼고 메소포타미아 상부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탄니 왕국은 주전 16세기 말에 건국되었는데, 후리족(Hurrian) 주민들이 이 나라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구약성경에서 후리족(Horim, Horites, Hurrians)은 일찍이 에돔(세일)에 살았던 자들로서(창 30:20) 에서의 후손들에게 쫓겨난 자들이다(신 2:12.22). 그러나 이들은 세일은 물론 팔레스틴의 중앙지대 외에도 세겜과 길갈에서도 살았다(창 34:2; 수 9:6.7). 또한 많은 학자들은 비(非) 셈계 족속으로 코카서스 남방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 동쪽으로 흘러들어온 '후리족'을 성경에 나타난 호리족과 동일하게 보기도 한다. 이들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에 일찍부터 자리 잡았고 멀리 지중해 연안까지 흩어져 있었으나 결국 이들의 영토는 앗시리아에게 넘어갔으며, 그 이름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 왕국의 통치계급은 그들의 이름들-슈타르나(Shutta-
rna), 사우쉬사타르(Saushsatar), 마르타타마(Artatama), 투슈라타(Tushurata)-에서 알 수 있는대로 인도-아리안들이었다. 이들은 베다신들(Vedic gods: Indra, Mithra, Varuna)을 숭배했으며 '마리야(누)(Marya(nnu))라고 알려진 귀족 출신의 병차용사들에 의해 호위되었다. 이 왕국에 있어서 이들 지배계급인 인도-아리아인들과 인구 다수를 차지했던 후리인들은 거의 공생에 가까운 생활양식에 도달해 있었다.
미탄니 왕국은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와 동시대인인 사우쉬사타르(Saushsatar) 때에 전성기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주전 1450 경). 이 당시 미탄니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티그리스 지방(Nuzi)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북부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었으며, 어쩌면 아마 지중해 연안까지도 뻗쳐 있었을지 모른다. 이 때 앗시리아는 미탄니의 속국이었다.
미탄니 왕국은 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이집트와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탄니의 왕들은 이집트에 대항하여 가데스의 동맹세력을 후원했을 것이다. 물론 투트모세 3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탄니는 약 5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시리아에 대한 자신들의 주도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전쟁은 이집트의 투트모세 4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미탄니의 왕이 자신의 딸을 투트모세 4세와 결혼시킴으로인해 양국간에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상호간에 유리한 것이었으며, 특히 주전 1400년 직전에 힛타이트족이 다시금 세력을 회복하여 북부 시리아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으므로 양국간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국 말기에 이르러 투슈라타(Tushurata)왕은 자국 내의 분란-친 이집트파와 친 힛타이트파 사이에 벌어졌던-에 이집트의 도움까지 없어지자 홀로 힛타이트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패배로 나타났으며 그는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 그의 아들 마티와자(Mattiwaza)는 힛타이트의 보호를 자청하며 그들의 대신으로써 왕좌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탄니 왕국은 이집트나 힛타이트 제국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팔레스틴의 상황에 영향을 준 일은 없었다고 본다. 다만 간접적인 방법으로-반란군 지원 등과 같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탄니 왕국은 힛타이트가 혼란기를 겪고 있을 때에 이집트 세력을 견제함으로 이집트의 근동 지역 석권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는 한편 수리아 등지에서 이집트 세력을 자극함으로 이집트로 하여금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출애굽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의 안녕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D. 주변 국제정세 종합
본 장에서는 이미 살펴보았던 출애굽 당시의 이집트와 힛타이트 그리고 미탄니의 상황을 종합해 보고자 한다. 이 모든 상황들이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출애굽 전기설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출애굽 사건과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문제의 출발점은 바로 홍해 사건에 있다고 본다. 성경이 진술하는 바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스라엘인들은 분명히 이집트에 의해 속박되어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홍해를 건넜다. 문제는 바로 그 홍해 사건 때에 전멸 했다고 전해지는 이집트의 군사력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가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을 다시금 끌어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군대를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출 14:4-9). 물론 당시에 그 사건을 목격했던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을 추격하는 이집트 군사의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가 자신의 모든 군대와 병거들을 총출동시켰는지도 미지수 이다. 그러나 민수기 1장 1절에서 54절까지 기록된 인구조사 결과를 감안한다면 파라오가 자신의 전군을 총동원시켰다는 사실이 그다지 무리는 아닌 듯 싶다. 사실 이집트의 기록 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의 탈출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 므로 이집트의 전군이 전멸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이 사건이 이집트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은 당시 주변 역사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
사실 홍해에서의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이집트의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동원된 이집트의 전차 600대가 전멸당했다는 사실은 당시 이집트의 군사력에 엄청난 손실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실제성은 크게 두 가지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홍해를 건너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초기의 몇 년동안 이집트의 추격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집트 본토에 남아있는 군사력이 있었다면 파라오는 충분히 이스라엘인들을 추격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여분의 군사력이 있었어도 어떤 엄청난 충격에 의해 추격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틴에는 투트 모세 3세가 배치한 이집트 관리들과 군대가 있었는데, 이들에 의한 추격이나 공격도 없었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그렇게 소수는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둘째로 아멘호텝 2세의 통치시기 동안에 아시아에 대한 두 차례의 원정이 있었는데, 처음 원정은 그의 제위 7년에 있었다. 이 때는 이미 출애굽 사건과 홍해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다. 장일선이 앞서 최초의 원정은 이집트에서 투트모세 3세에서 아멘호텝 2세로 파라오가 바뀌는 상황 변화를 이용하여 일어난 북부 팔레스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 까닭은 이집트에 대한 반란과 그에 따른 진압이 아멘호텝 2세가 즉위한 지 7년이 지나서 일어났기 때문 이다. 따라서 이것은 파라오가 바뀌는 상황 변화가 아닌, 아멘호텝 2세 즉위 초기에 발생한 어떤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이집트가 위축되었었다는 데에 더 타당성을 두어야 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한때 세력을 구축하던 힛타이트의 고대 제국이 무너지고, 중간시대라는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그 대신 미탄니 제국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아멘호텝 2세가 진압했던 북부 팔레스틴의 반란은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의 대리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40년 간을 방황하였을 때에 왜 이집트가 이스라엘인들을 끝까지 추격 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당시의 팔레스틴은 이 지역을 지키려는 이집트의 세력과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미탄니 왕국사이에서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는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광야에서의 40년 생활은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틴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피했던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의 상황은 이전의 상황과 매우 달라져 있었다. 이 때의 상황은 한 마디로 이집트의 쇠락과 힛타이트의 부흥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스 (john J. Davies)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또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언급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이집트가 팔레스틴을 통치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즉 아멘호텝 3세의 통치 후반에서 그의 아들 아케나톤의 통치에 이르는 동안 이집트가 굽격히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시작할 그 무렵에 일어났던 큰 사건 중의 하나는 투트모세 4세와 미탄니의 국왕 아르타타마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이다. 정략적 결혼과 함께 맺어진 이 조약으로 이집트와 미탄니 사이의 오랜 분쟁은 일단락 되었는데, 그 결과 팔레스틴은 두 나라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었던 것 같다. 이는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탄니는 물론 이집트까지도 팔레스틴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다시금 이 지역에 등장했던 힛타이트 새 제국이 미탄니 왕국을 정복하고 당시 이집트 내부의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중앙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때에 팔레스틴 지역은 이 당시까지도 이집트와 아시아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복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집트가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한 아마르나 혁명으로 인해 상당한 내부적 혼란을 겪고 있을 때에 팔레스틴에서는 이집트에 대한 반란과 함께 이스라엘인들에 의한 정복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시의 국제정세는 출애굽 전기설의 역사적 배경을 잘 증언해 주고 있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에서 가나안 정복으로 이어지는 모든 진행 사항은 단순한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당시 주변 상황의 흐름과 변화에 따르는 필연적인 것이다.
IV. 결 론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출애굽 사건의 연대와 그 당시의 주변 국제정세를 분석함으로써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진정성과 그 정확한 시기를 알아내는 데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논의에 앞서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서에 이르는 사건들은 분명한 역사적 진정성 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본 논문은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출애굽 전기설과 후기설을 소개하면서 각 학설이 주장하는 정당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출애굽 전기설의 경우, 이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주전 1446년 경을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연도로 생각하고있는데, 이는 성경 열왕기상 6장 1절과 사사기 11장 26절의 내용에 기인한 것이다. 물론 후기설 주장자들은 이에 대한 죤 브라이트의 세대설을 들어 반박하고 있지만, 전기설 주장자들은 480년이라는 성경의 기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다. 더우기 사사시대의 긴 시간적 공간 역시 전기설 주장자들의 정당성을 위한 하나의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전기설 주장자들은 출애굽기 초반에 언급된 모세이야기와 이집트 제18왕조 초기의 역사적 상황을 비교함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죤 가스탕의 여리고 발굴과 그에 따른 연구 결과를 가지고 자신들의 견해를 증명하였다. 즉, 여리고성이 주전 1400년 경에 대재난으로 인해 붕괴되었으며, 이는 여호수아가 인도하는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붕괴되었다는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후기설 지지자들은 캐슬린 케년의 연구 결과를 들어 반박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여리고가 주전 1400년 경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년의 연구는 후기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 역시 아님을 밝혔다. 또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로 아마르나 서신에 등장하는 아피루를 언급하고 있는데, 전기설 지지자들은 이들 아피루를 가나안을 정복하는 이스라엘인들과 동일시함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증명한다. 그러나 후기설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인들과 아피루를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들을 하나의 폭도로 규정한다. 본 논문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활동하던 아카디아식 명칭 '하비루'와 전쟁 포로나 혹은 강제 동원된 노역자 등을 일컫는 이집트식 명칭 '아피루'의 구분을 통해 전기설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한편 후기설 지지자들의 성경적 배경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나타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인데, 이들 건축물들이 축조될 때는 이집트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통치 시기이므로 출애굽이 일어난 시기는 제18왕조가 아닌 제19왕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기설 지지자들은 제19왕조 이전에도 이런 건축물들이 제18왕조 초기의 파라오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이집트의 고대 기록을 내세워 반박하고 있다. 출애굽 후기설을 위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민수기 20장에서 21장에 언급된 요단강 동편 지역의 에돔과 모압의 우회로에 관한 넬슨 글뤽의 고고학적 발굴에 기인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주전 13세기 경에는 요단강 동편 지역에 에돔과 모압이 도시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이 도시화된 모압과 에돔을 만났다면 이는 주전 13세기 이전에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전기설 지지자 들의 반박 중 특히 주목할 학자는 레온 우드이다. 그는 랭카스터 하딩의 발굴 결과를 소개하면서, 글뤽의 발굴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이집트에서 발굴된 초기 철기시대의 이스라엘 양식의 가옥구조와 팔레스틴 명단에 언급된 자료를 통해 출애굽 전기설을 증명하였다.
다음 장에서는 출애굽 전기설을 전제로, 출애굽 당시 팔레스틴 주변의 국제정세에 영향을 끼치던 이집트와 힛타이트 제국, 미탄니 왕국의 상황을 소개하고, 이것을 하나로 종합하여 당시의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당시 이집트는 제18왕조 기간이었으며, 힛타 이트 제국은 중간시대의 혼란기와 새 제국시대의 부흥기에 걸쳐 있었고 미탄니 왕국은 전성기에서 멸망에 이르는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이 기간은 크게 두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의 40년을 보낸 기간과 가나안 으로 입성하던 기간이다. 전자에 있어서 팔레스틴은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 사이의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지던 상황이었으며, 후자에 있어서의 팔레스틴은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 미탄니 왕국의 멸망 이후로는 힛타이트 새 제국과 이집트의 완충지였다. 따라서 광야 40년간의 기간은 팔레스틴의 혼란에서 도피하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으며, 가나안 입성 당시의 팔레스틴의 상황은 이스라엘인들이 마음놓고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주변의 역사적인 정황도 출애굽 전기설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출애굽 연대에 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학자들 사이에서 핫 이슈로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는 출애굽 사건 자체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이 앞으로도 계속 중요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진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출애굽 사건의 정확한 연대는 밝혀져야 한다.
지금도 성경의 역사성을 증언하는 과거의 유물과 기록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에 따라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게 될 것이며 또한 그 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많은 오류들이 정정될 것이다.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 진정성을 신뢰하는 한 사람으로써 본 연구자는 더 많은 자료의 발견과 연구를 통해 보다 더 정확한 연대가 밝혀짐으로써 이들의 역사적 진정성을 입증하는 데 진일보한 결과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참 고 문 헌
1. 국 내 문 헌
김희보, [구약 이스라엘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1.
문희석, [구약성서배경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 [구약성서배경사(I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5.
------, [성서 고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안영복, [구약역사] 서울: 성광출판사, 1986.
장일선, [구약성서 시대의 역사기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최종진, [구약성서개론] 서울: 소망사, 1990.
2. 번 역 문 헌
Anderson, B.W. [구약성서 이해(상)] 강성열.노항규 역. 서울: 크리 스챤 다이제스트, 1994.
Anderson, G.W.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 김찬국 역.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1.
Bright, John. [이스라엘의 역사(상권)] 김윤주 역. 왜관: 분도 출판사, 1992.
Erich, E.L. [요점 이스라엘 역사] 배제민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8.
Gunneweg, A.H.J. [이스라엘 역사] 문희석 역. 서울: 한국신학 연구소, 1990.
Harrison, R.K. [구약성경고고학] 윤창렬 역. 서울: 한국기독교교육 연구원, 1984.
Herrmann, Siegfried,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역사] 방석종 역. 서울: 나단출판사, 1989.
Horn, S.H. [성서고고학입문] 장수돈. 오강남 역. 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1990.
Schmidt, W.H. [역사로 본 구약신앙] 강성열 역. 서울: 나눔사, 1989.
Wood, Leon. [이스라엘의 역사] 김의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1989.
3. 국 외 문 헌
Albright, W.F.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Baltimore: The John Knox Press, 1957.
Davies, John J. Conquest and Crisis-Studies in Joshua, Judge and Ruth. Widona Lake: BMH Books, 1982.
Frank, H.T. An Archaeological companion to the Bible. London: SCM Press, LTD, 1961.
Glueck, Nelson. The other side of the Jordan. New Haven: The 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 1940.
Herbert, Gabriel. When Israel came out of Egypt. London: SCM Press, LTD, 1961.
Kenyon, Kathleen M. The Bible and Recent Archaeology Atlanta
: John Knox Press, 1978.
Kitchen, K.A. The Bible in its world-The Bible and Archaeolo-
gy. Exeter: The Paternoster Press, 1977.
Livingstone, G.H. The Pentateuch in its cultural environment. Grand Rapids: The Baker Book House.
Pfeiffer, Charles F. Old Testament History.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Robinson, H.W. The History of Israel, Its Facts and Factors. London: Gerald Duckworth & Co, LTD.
Schoville, Keith N. Biblical Archaeology in Focu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8.
Thomas, D.W. ed. Archaeology and Old Testament study. Oxfo-
rd: The Clarendon Press, 1969.
Wiseman, D.J. ed. Peoples of Old Testament Times. Oxford: The Clarendon Press, 1975.
Unger, M.F. 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4.
4. 학 술 지
박준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 : 히브리의 하나님." [이화] 1981년 35집 : 156-67.
Gorny, Ronald L. "Environment, Archaeology, and History in Hittites Anatolia." BA (June/Sep 1989) : 78-96
-----------------. "Hittite Chronology" BA (June/Sep 1989) :
88-89.
Krahmalov, Charles R. "Exodus Itinerary Confirmed by Egyptian
Evidence." BAR (Sep/Oct 1994) : 54-62. 79.
Leonard, Jr, Albert. "The Late Bronze Age-Archaeological sour-
ces for the History of Palestine." BA (March 1989) :
4-39.
McMahon, Gregory. "The History of Hittites." BA (June/Sep
1989) : 62-77.
------------------. "The Hurrian and the Horites." BA (june/
Sep) : 75.
Merrillees, Robert S. "Political Conditions in the Eastern Medi-
teranean during the Late Bronze Age." BA.
Sarma, Nahum M. "Exploring Exodus." BA (June 1986)
Shanks, Hershel. "An Ancient Israelite House in Egypt?" BAR
(July/Aug 1993) : 44-45.
5. 신 문 류
Fox, Maggie. "Computer finds Biblical starts to cosmic beginnin-
gs" The Korea Herald, 10 April !976, p. 5.
< 약 어 표 >
BA : Biblical Archaeologist
BAR : Biblical Archaeology Review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