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본회퍼의 초기 신학에 있어서 성령과자기 안에 갇힌 인간의 마음의 문제

작성자김상수|작성시간01.02.06|조회수288 목록 댓글 0
본회퍼의 초기 신학에 있어서 성령과
자기 안에 갇힌 인간의 마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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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요한

머리말

기독교신학에서 성령 혹은 영에 대한 이해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격과 사역은 종종 대단히 추상적인 말들로 묘사되었다. 이를테면 삼위일체론적으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 이라고 하였다. 신인식론의 영역에서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능케 하는 요인 즉, '외적인 말씀에 대하여 중거하는 내적인 빛'이라고 설명되기도 하였다. 때로는 성령은 신유라든지 방언 등을 일으키는 초자연적 능력이라고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 걸과 성령에 대한 이해는 매우 혼동스러운 것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령은 어떤 특별한 주관적 경험과 동일시되거나, 객관적인 근거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앙의 공동체성이나 사회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성령은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는 내재적 공동체 정신 정도로 치부하는 문제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정통 주의자들은 성경의 영감론을 강조하고 말씀을 강조하여 계시의 객관성을 강조하였으나 역시 개인주의에 흐르며 신인식론에 집중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비인식론족 역사를 재발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강조하였으나 주관적 체험을 중시하여 주관주의에 빠지기 쉽고 개인적 기복주의에 흐르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이들은 복음의 공동체적 혹은 사회적 함축성을 발견하였지만 비신앙적이라가나 영적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흐름들 가운데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으나 성령론적으로는 별 대안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와같이 성령에 대한 이해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흐르거나, 신비주의나 주관주의 혹은내재주의 에 빠지거나, 인식론적으로 편향되거나, 개인주의적인 이해를 지적할수 있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성령은 말씀에 대한 영감과 그 말씀에 대한 내적 중거를 중심으로 이해되었다. 때로는 슐라이에르마허와 같은 주관주의적 신학도 있었지만, 말씀중심의 신학은 주관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였다. 주관주의적 신학도 있었지만 성령이 교회에 대하여 가지는 본유적인 공동체성을 충분히 개발된 조직적 성령론을 가지고 있었거아 성령론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초기의 작품들 속에 자주 나타나는 성령, 혹은 영(Geist) 에 대한 언급들은 성령이해의 주관주의와 개인즈의를 넘어섬에 있어서 의미심장하다. 본회퍼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의 윤리와 후기 의 개념들, 즉 비종교적 기독교, 성숙한 세계등과 나치에 저항한 그의삶을 통해서이었다. 그러나 초기의 작품들이 알려지면서 초기와 말기 사이에 많은 차이점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가 본회퍼 연구가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 와중에서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이 있다는 의견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여러면에서 그 연속성의 열쇠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Bethge 는' 계시의 구체성'이라는 점에서 john D. Godsey는 기독론에서, HEINRICH Ott나 Andre Dumas는 본회퍼가 중요시한 현실 (Wirklichkeit)'의 개념 등에서 그 연속의 고리를 보려고 했다. 이 논문은 연속성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논쟁 자체가 관심은 아니다. 이 논문은 밖으로드러나는 어떤 해답으로서의 중심개념보다도 오히려 본회퍼가 평생 씨름하여 왔던 밑에 깔려 있는 문제에 관심한다. 그 문제는 루터신학에서 유래한 문제인데 곧 cor curvum in se, 즉 자신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인간의 마음 , 혹은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마음 ,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인산의 마음의 문제이다. 바로 이 문제가 개인주의와 주관주의의 문제이다. '자기 안네 갇혀 있는 인간의 마음 ' 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안으로 내제화하므로, 거기에는 진정한 초월도 없고 진정한 타자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논문은 본회퍼의 초기 작품들 중 Sanctorum Communio에 나타나는 성령의 공동체적 이해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요, Akt und Sein의 영이라는 인식론적 주관주의를 극복하는 것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즉 두 작품 모두가 cor curvum in se의 문제에 대한 초기의 해답이었다는 것이다.

1. Sanctorum Communio 와 cor curvum in se의 사회적 문제

Sanctorum Communio는 1927년에 쓴 본회퍼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이것은 본래 교의학적 교회론을 사회학을 도구로 사용하여 펼쳐보려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성령론은 아니다. 그러나 대강 훑어 보기만 해도 그가 여기에서 영, 정신, 마음 등으로 번역되는 Geist, 그리고 영적, 정신적 등으로 번역되는 geistig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곧 알수 있다.

1)물론 여기서 본회퍼의 주관심사는 성령로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빈변히 언급되는 그의 영(Geist) 이해는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그는 여기서 삼위일체론과 같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셔리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셔회론을 발전시키면서 '영'의 공동채적 혹은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2)여기서 성령은 단순히 교회 안에 있는 영이라거나 개인을 교회 안으로 인도하는 영 정도가 아니다. 여기서 성령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임을 나타낸다. 그의 교회론을 쟌게함에 있어서 본회퍼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신자들의 의지나 하나의 기관인 교회의 전통적인 주장들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 관계들 마저도 지배하게 되는 인식론적 주객도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그는 인격이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경험적이거나 사회학적 논의에서 시작하지도 않는다. 가는 '기독교적 인격' 개념과 인간 존재의 기본적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출발한다.

3)본회퍼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인격을 이야기 하는 것은 동시에 그 인격의 사회적 존재 고조를 이야기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이유는 이개념이 철저히 하나님과 혹은 성령의 역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며, 바로 이점이 중요하다. 본회퍼는 관념론을 극복하려고하면서

4)관념론의 조객도식적 인식론을 비판한다. 그것은 타자를 인식의 대상인 객체로만 보고 못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CSep. 26f.).본회퍼에 따르면 관념론적인 인식론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대밉은 정신 [Geist]의 통일성 안에서, 그리고 그 지적인 직관안에서 극복되어진다. (CSep.26). "객체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적인 주체 안에 훗수됨으로써 개벽적객체의 생소한 타자성을 말소 당하게 되고, 따라서 객체의 진정한 인격성과 타자성 , 그리고 고유성은 상실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모든 체계들을 연함하는 것은 정신 [Geist]의 개념, 그것도 내재하는 정신의 개념이다.... '나' 는 그것이 정신인 이상 인걱이다. 그러나 정신은 칸트가 말했듯이, 가장 최고의 형상으로써 모든 질료를 포함하고 극복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정신과 보편자는 동일하게 되고 개체는 그 가치를 상실한다. (CSep.27)
관념론의 체계에서 정신은 내재적이고 보편적이어서 결국 개체들 사이에는 아무런 진정한 차이가 없어진다. 이것은 어찌 보면 정신이 무한히 확장되어 나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 정신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자기 자신이 형성한 테두리와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후에본회퍼는 Akt und Sein 에서이것을 cor curvum in se 라고 부르게 된다.) 관념론에서 객체의 타자성은 주체인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 오는 인식과정의 한 계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참된 타자성을 가진 인격과 그런 인걱들이 형성하는 참된 공동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이점에 대하여 관념론이 인식론적 범주로 부터 사회적인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하여 비난한다 . "순수하게 선험적인 보편 범주로뷰터 우리는 결코 낯선 타자인 주체의 실존에 도달할수 없다 ( CSep.28). "
관념론적 인식론의 영역에서 결코 낯선 타자인 객체는 주체에 의해 세워진 낯익은 객체로 전락 된다. 우리가 사회적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회퍼에 의하면, "오직 어떤 군본적인 장벽 [eine prinzipielle Schranke] 이 어떤 점에서 나의 정신 [Geiat] 에 나타날 때 뿐 (CSep. 29:SCgw p. 26)"관념론의 객체는 장벽이 아니다 (CSe p. 29;SCgw p.26)." 본회퍼에 의하면 정신 혹은 영은 낯선 타자인 대상적 실체의 장벽을 인정해야 [anerkennen] 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이렇게 관념론이 인격과 영의 개념을파악함에 있어서 부적절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고 한다.( CS ep.31 ; SCgw p. 28)

이 문제를 해결하기 의하여 본회퍼는 기독교적 인격개념을 이야기 한다. 기독교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인격은 오직 그것을 초월하고, 그것에 맞서고 그것을 굴복시키는 신적 인격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인간의 ] 영의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이 오직 신적 영에만 [Geist]해당하는, 절대적 가치로 채워져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CSe p.31; SCgw p. 29)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차이'요 '장벽의 경험' 이다. 피조물 인 간은 최고의 가치나 궁극적진리를 가지지 못한다. 오직 저 장벽을 인정함[anerkennen]으로써만 우리는" 인격들 사이에 있는 사회적이며 윤리적-존재적인 기본관계 [die sozialen ontisch-ethischen Grundbeziehungen der persinen]" 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CSe p.32; SCgw p.30). 여기에서 본회퍼는 그 당시의 인격주의의 인격 개념을 (주로 Eberharhard Grisebach로 부터) 도입된다. 개인이 오직 타자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말은 이제 '나' 는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말이 된다. '당신'이 '나'를 하나의 인격으로서 , 하나의 사고하는 실제적 영으로서 만나개 될때 그것은 또 하나의 '다른 나'로서 '나' 에게 맞서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CSe p.32; SCgw p.30f.). 관념론의 '객체' 와는 다르다. '그것은 주체성의 영[Geist]안에 니제하여 있는 것이아니다.""그것은 주체에게 장벽[Schranke] 그것은 하나의 '당신''에 대한 '나'로서 타자의 의지와 맞부딛치게 되는 의지를 촉말한다.(cse p.33; SCgw p.31)." 여기서 '장벽', '당신'의 초월성' 은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윤리적 초월이며, 오직 결단을 하는 인격에 의해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고 밖에 서 있는 국외자에게는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CSe p. 33; SCgw p.31)." 본회퍼는 관념론의 주객도식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제 주체와 객체가 아니라 '나와 당신' 의 관계에서 부터 공동체를 생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 가 인격적으로 '나' 로 세워지는 것은 스스로 되지 않고 , 하나의객체가 아니라 또 하나늬 주체인 타나로서의 '당신' 의대립을 통해서 이다. 이러한 나어가너의 관계를 톺해서 참된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본회퍼는 철학적 인격주의를 사용하여 관념론의 '영' 혹은 '정신'개념을 극복하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인격주의마저도 기독교적 하나님 개념으로 넘어서고자 한다., 인격주의 에고는 인격적 주채인 '나' 의 형성에 있어서, 결국 타자인 '당신'이 절대시 된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 외에 무엇이 절데시 될 수 있는가? 기독교적 인격 개념이 철학적 인격주의와다른 점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당신'을 절대시하지 않으면서도 타자인'당신'을 세우는 점이라는 것이다. '나'는 오직 '당신'과 함깨만 일어난다. 책임은 [상대방의] 주장에 따라오는 것이다. '당신 '은 그 자신의존제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의 요구에 대하여서만 말할 뿐이다. 이 요구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타자의 도덕적 인격의 창조나로 만드는 걱같이 보이는데, 그런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피할 수는 없는가? '당신'의 인격형성 행위는 그 자신의 인격적 존재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당신'의 의지로부터도 독립되어 있다... 하나님, 힉은 성령이 구체적인 '당신' 에게 왔고 그의 행위로써 저 타자로 하여금 나를 위한 '당신' 이 되게 하고 나의 '나' 는 거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9CSE P. 36; scGW P .32F.).
'당신'의 인격형성 행위는 '당신' 자신의존재나 의지나 능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도덕적 인격의 전능한 창조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연적인 사물의 성격도 아니다. 본회퍼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혹은 성령만이 타자의 인격의 원천이다. 말하자면 성령은 하나님의 인간인격 형성의 행위자인 셈이다. 인격의 근본 원천을 하나님께 돌림으러써 본회퍼는 인걱주의를 이용하는 동시에 넘어서고 있다. 이것이 그가 그의 인격 개념을 기독교적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이 개념에서 "어떤'당신'의 성격은 사실상 신적인 경험되는 형태이다 모든 인간적인 '당신'은 그 성격을 하나님의 '당신' 으로부터 받는다." 어떤 위미에서 '모든 인간적인 '당신'은 신적인 '당신'의 형상이다.... 그가 타자에게 미치는 효과로 인하여 (csE P.36;SCgw p. 33)" 타자는 하나님이 그를 '당신'으로 만드시는 한에 있어서 '당신'으로 만드시는 한에 있어서 '당신' 이다.
여기서 성령론적으로 의미심장한 점은 본회퍼가 성령을 윤리적 영역에서 인격형성의 신적인 행위자라고 본다는 것이다. 성령은 단순히 기록된 말씀의 인식론적 조명자일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형성에 친히 관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여 본회퍼는 관념론의 영 개념, 즉 실체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인격들 사이의 윤리적 장벽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의 절대적 차이를 알지 못하는 개념을 극복하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인격 개념과 영 개념은 cor curvum in se를 극복하는 것과 관련된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은 바로 '나'에게 와서 '나'로 하여금 '당신'을 하나의 초월적 타자로, 인격적인 '당신'으로, 나의 지배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사랑해야할 사람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인 '당신'의 개인적 독특성이 최대한 존중됨으로써 오히려 참된 공동체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영 개념의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는 극복되어 진다.
[상대방의] 그 인격은 무인격적인 정신에 [apersonalen Geist] 의하여, 혹은 다수 인격들을 말소하는 어떤 통일성에 [Einheit] 의해 초극될 수 없다 (CSe p.37; SCgw p.33).이런 의미에서 본회퍼가 말하는 성령은 '장벽의 원리'라고 불리울 수도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본회퍼 신학의 어떤 틀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사회관계속에 있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초월적이어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본회퍼는 심지어 타자의 '당신'은 하나님의 '당신'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 타자를 향한 길은, 신적인 '당신'을 향한 길이기도 하며, 그것은 인정하든가 [Anerkennung] 아니면, 거부하든가 [Ablenhnung] 하는 길이다 (CSe p.37; SCgw p.34)." 내가 타자와 가지는 진정한 관계는 곧 내가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로 방향지어 진다. 이것은 본회퍼가 인간의 사회 관계 한 복판에 있는 초월적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성령의 인격형성 행위의 결과로 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바와 같은 인식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우리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나'를 알듯이, 우리는 타자를 그의 계시를 통해서 안다 (CSe p.37; SCgw p.34). 그리고 그 '당신'을 인정하는 것은 [Anerkennung]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이다. 본회퍼는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기독교적 인격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으로서 맞섬으로써가 아니라, '나'로서 "그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한다 (CSe p.37; SCgw p.34).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신인식론의 문제인 성령의 내적증거의 교리를 윤리학과 사회관계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령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관화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본회퍼는 놀랍게도 성령이 주체인 '나' 안으로 "들어가서", '당신'의 객체적 '장벽'을 허물고 주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객체적 장벽을 확실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 진리를 주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객체적 장벽을 확실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 진리를 주관화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객관적 실체의 장벽, 즉, '당신'을 형성하고 보존하는 것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회퍼의 이론과 전통적인 영감된 말씀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 교리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다. 객관적 측면에서 보자면, 성령은 구체적인 '당신'에게 와서 그가 바로 나를 위한 '당신'이 되게 한다. 이것은 전통적 신학에서 말해 온 바, 객관적으로 영감된 말씀에 비교된다. 주관
적 측면에서 보자면, 성령은 주체인 '나'안에 들어와서 그와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읽는 신자 안에서 말씀에 대해 증거하는 성령의 사역과 비교된다.
이것은 대단히 특이한 생각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아니 그 이전에 사도 바울 이래로 성령은 '연합의 원리'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본회퍼는 성령이 '연합의 원리'가 아니라 일종의 '장벽의 원리' 혹은 인격적 '대립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가 성령을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연합을 이루는 요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Cf. CSep.119). 본회퍼에게는 성령은, 말하자면, 동시에 '장벽의 원기'요, 또한 '연합의 원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본회퍼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모순인가 ? 그렇지는 않다. '당신'은 '나'에 대하여 단지 장벽일 뿐만이 아니라 나의 책임을 요구하는 도덕적 주장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오직 참다운 인격의 개인적 특성이 존재하는 곳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기초관계는 '나-당신'의 관계이다. 만약 모든 '나'가 동일한 성령 안에서 '당신'의 장벽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다한다면 공동체와 그 참된 통일성을 이루어진다. 그렇게 될 때, 성령은 '통일의 원리'이기도 하다. 본회퍼에게 있어서는 개별적 인격을 바르게 강조함은 동시에 공동체를 바르게 강조함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성령의 내적 증거의 교리가 하나님 인식론에만 관련되어있던 것을 본회퍼가 윤리적, 혹은 공동체적 영역으로 확장하여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회퍼의 이러한 생각은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이며 인식론적으로 축소된 성령론을 보완, 극복하는 데 잇어서 도움이 된다. 클리포드 그린 (Clifford J. Green)은 본회퍼의 신학에서 기독교적 개념들의 근본적인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을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The Sociality of Christ and Humanity: Dietrich Bonhoeffer's Early Theology, 1927-1933 Th. D. Dissertation at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1972에서 잘 밝혀 주었다. 필자의 논문은 성령론에 있어서 클리포드 그린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는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개념이 가지는 함축적 의미들을 들추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Sanctorum Communio에서는 본회퍼가 말하는 저 참된 공동체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죄인의 공동체가 되었다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시 참된 성도의 교제인 교회, 즉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 회복되는 각 단계들이 서술되고 있다. 그러한 각 단계들에서 본회퍼는 신학적으로, 사회철학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공동체를 설명한다. 또한 각 단계에서 개인의 독특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성, 공동체성, 그리고 공동체의 통일성을 서술하고 있다.

2. Akt und Sein과 cor curvum in se의 인식론적 문제.

Akt und Sein은 본회퍼가 1930년에 쓴 교수자격취득 논문이다. 그가 Sanctorum Communio에서 윤리적 초월 문제에 집중하였다면, Akt und Sein에서는 인식론적 초월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씨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앞서 그가 윤리적 영역에서 성취하였던 것을 인식론적 영역에서도 이루어 내려고 한다. 즉, 그는 본격적으로 루터신학에서 유래한 저 cor curvum in se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그 당시 독일 철학 (ontology)으로 분류 분석하여 그들이 모두 cor curvum in se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고 지적한다. 행동의 철학이라함은 칸트 이후의 선험철학의 발전, 즉 헤겔에서 절정을 이루는 관념론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인식론적 주객관계에 있어서 주체의 행동이 관건이며 그것이 칸트가 애초에 선을 그어 놓았던 한계선 즉, 물자체의 선까지도 넘어서 나간다. 그리하여 인간 정신은 스스로 무한하다고 여기고 행동해 나간다. 그러나 본회퍼에 의하며, 인식 행위가 주체의 행동인 이상, 그 주체는 그 주체의 행동을 초월해 있는 타자를 진정으로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철학이란 주체의 행동 이전에 먼저 존재를 (주체의 존재든 객체의 존재든) 전제하고 그 존재에 충실해 보려는 시도이다. 여기에는 헤겔 이후에 Husserl, Scheler, Heidegger, 그리고 신토마스주의의 존재론이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조직적 존재론이라면 아무리 존재를 이야기하고 생각해도 결국 자기자신에게 출발하여 자신에게 매어 있는 생각일 뿐이지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행동의 철학이든 존재의 철학이든 동일하게 cor curvum in se의 문제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로서의 객체를 지향하는 autus directus가 되지 못하고 자신 안에서 맴도는 actus reflexus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이 문제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것은 오직 밖으로부터 인간의 정신 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계시이다. 인간 스스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도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게 알려지고 그에 의해 진리 안에, 계시 안에 두어질 때에만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고 한다 (ABp.79). 이러한 계시와의 만남은 인간 실존에게 "그 경계선, 즉 더이상 인간 자신 안에 있거나, 인간에 의해 그려진 선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인 경계선상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ABp.80; ASwpp.75f.). 계시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이나 세계현실에 대하여 사변적으로 숙고함으로써 나오는 개념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 주어진 실체이다 (ABp.80). 그러므로 기독교적 계시이해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 언제나 다시금 어쩔 수 없이 인간 자신의 정신에 빠져버리는 인간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행동이라고 한다. 이와같은 계시이해는 (초기) 바르트에서 볼 수 있다. 본회퍼에 의하면 바르트는 철저히 계시를 행동으로 보았다.
"이 행동은 결코 개념적 형태로 파악될 수 없으며, 따라서 조직적 사고로 제시될 수 없다 (AB p.82). 인간의 조직적 사고의 제한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본회퍼는 Grisebach를 비롯한 당시의 인격주의자들에게서 본다. 그러나 그는 인격주의자들이 '당신'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나머지 그것을 절대화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당신'을 도외시하고 인간의 '당신'에 매달리며, 복음을 도덕으로 축소시키고, 결국 계시를 상실하는 것을 비판한다 (AB pp.86-87). 그렇게 되면 역시 저 cor curvum in se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게 된다. 오직 말씀의 선포를 통해 주어지는 계시만이 그 문제를 극복한다 (AB p89). 물론 이렇게 인간이 계시에 의해 진리 안에 놓여진다고 하여도, 본회퍼는 그 자신이나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고는 역시 그 자신 안에 머무를 수 밖데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적으로 계시의 현실에 의해 간섭을 받아 세속적 사고와는 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AB p.89).
그러나 이러한(초기) 바르트적으로 이해하는 하나님의 계시행동은 초월적 순간들로 분산되어 역사 안에 구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된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단순히 초월적이고 순간적인 행동들만이 아니라 역사 안에 지속적 존재를 갖는 계시의 존재가 있어야 참으로 계시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자유로우시다 (AB p.90)." 하나님의 계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위로서만이 아니라 파악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 말하자면 영원한 비객체성으로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의 말씀으로 '가질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식으로 (AB pp.90-91)." 그런데 이렇게 말할 때 '안다', '파악한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것을 알듯이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주체는 성령이시다.
계시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 영에 하나의 주체로서 계시는 방식으로만 이해되어진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계시를 앎의 주체이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안다면, 그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지식은 '믿음'이라고 불리우며, 계시된 바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자신을 아는 행위 안에 계신다. 그것이 그의 자리이며, 이 행위에 대한 반성을 하는 나의 의식 안에서 발견되어질 수 없다. (AB p.92)여기서 계시에 대한 신앙은 오직 autus directus인 행위에 있다. "신앙은 결코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무언가 외래적인 것 [von auben kommende]을 향한다 (AB p.95; ASw p.89)." 신앙은 인간의 결단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결단이다 (AB p99). 본회퍼가 보기에 바르트의 견해는 이러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새존재는 비역사적 무시간적이요, 신앙 주체의 연속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AB pp.101-103). 본회퍼가 말하는 autus directus의 특징은 무시간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그 방향성이다. 본회퍼는 계시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존재를 확보하고자 한다.
여기서 본회퍼는 계시존재의 세 가지 가능성을 검토한다. 그것은 교리로서의 계시, 심리적 경험으로서의 계시, 기관(그것이 성서이든 교회이든)으로서의 계시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셋 모두 인간의 사고나, 경험이나, 기관의 체계 속에 들어 앉아 있어서 외래의 초월자와 무관하게 된다는 것이다 (AB pp.108-111). 물론 하나의 기관이 외래의 타자일 수 있지만 참으로 초월적인 외래성은 하나의 인격과의 만남이어야 한다고 본회퍼는 주장한다 (AB p.111).
본회퍼에 의하면 위에 세 가지 경우들은 계시된 하나님을 인간의 행위나 인간적인 차원의 어떤 존재에 의하여 넘어서거나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이미 있는 존재 [Seiende]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시는 우리에게 맞서는 생소한 외래성으로서의 대립적 [gegen-standlich] 성격과 계시적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이미 있는 존재 [Seiende]는 피조물이어서 인간 실존을 뒤흔들어 계시적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한다 (AB pp.111-112; ASw p.102). 그러나 도대체 계시가 계시이려면 초월적 하나님이 피조물인 존재를 통하여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 본회퍼는 그리하여 계시에 있어서 피조물적 존재 [Seiendes]와 피조물적 존재가 아니것 [Nicht-seiendes]의 양면성을 인정한다 (AB pp.112-113; ASw. pp.102-103). 그러면 계시를 받는 인간의 지속적 존재는 어떠한가? 본회퍼에 의하면 인간 실존은 언제나 '...안에 있는 존재'이다. 이 개념으로 연속성을 가진 존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계시 사건 안에 있는 인간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요, '교회 안에 있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인간 실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실존적 행위가 등반한다. 이 '...안에 있는 존재'의 걔념으로 보면, 주체가 존재들과 직면할 때, 존재들의 세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면서, 사물인식은 지양되고 그것을 자기의 지배 하에 두려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AB pp.115-116; ASw p.105). 이 '...안에 있는 존재'의 개념은 하이데거의 현존재 [Dasein] 개념을 본회퍼가 기독교적으로 변환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현 존재처럼 이 존재는 자신이 여러 존재들로 둘러 싸여, 그것들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단 이때 주변 존재들은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에 의해 붙잡힌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존재와는 달리 이 존재의 가능성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AB pp.118f.). 그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 존재는 단순한 운명으로 이 실존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교회 안에 놓여진 것이다. 이 존재는 일반적인 실존 세계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교회라는 사회적-신학적 세계 안에서, 즉 교회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존재나 자신의 존재를 마음대로 지배하고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본회퍼는 계시 수용자의 존재의 연속성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위와같이 하여 본회퍼는 역설적인 두 가지 측면, 즉 계시의 행위와 관련한 초월적 변혁 능력과 함께 계시의 존재와 관련한 연속성과 인식가능성 모두를 확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역설적인 양자는 어떻게 해서 하나의 현실일 수 있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초월적 행동이면서도 인식 가능한 지속적 존재인 계시를 생각해야 하는데, 본회퍼는 그 종합을 교회, 즉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에게서 보았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 행동과 존재의 일치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오직 교회 안에서 말씀의 선포를 통해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 일의 주체이시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인격으로 계시하시므로 오직 이 사건만이 외래적이며 초월적이다. 또한 교회는 구체적이고 연속적인 존재를 가진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말씀의 선포와 공동체 형성 모두의 주체이라고 한다 (AB p.120; SW PP.107F.). 본회퍼에 의하면,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종국적 계시이다.
즉 그것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 이다 (AB p.121)." 이 공동체 안에서 "교회의 각 지체는 그렇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다른 지체에게 '하나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AB p.122)." 계시 행위는 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며,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 계시는 이 공동체이다. 계시 존재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 품어진 새로운 여러 인격들의 공동체의 존재이다 (AB p.123). 여기서 일어나는 계시 행위의 주체는 그리스도의 인격이므로 계시는 초월성과 인간 존재 변혁능력을 가진다. 이 공동체는 인식 가능한 연속적인 존재를 가진다. 물론 이 연속성은 오직 신앙 안에서만 있는 것이지만, 본회퍼는 교회 안에서 계시를 수용하는 사람의 새존재 역시 죽은 존재 [Seiende]가 아니라 신앙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행동적인 측면이 있다. 또한 이 새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요,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이므로 비존재적 행위 [Nichtsein]이 아니라 존재이다. 따라서 교회 안의 새존재인 인간은 행위와 존재의 일치이다 (AB pp.130f). 본회퍼는 신앙하는 이 새존재의 연속성도 개인의 연속성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연속성으로 본다 (AB p.132). 본회퍼는 이 공동체가 이 세상의 한 종교적 부분이라고 하지 않고 온 인류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AB p.132)여기에서 성령이라는 말은 불과 몇 회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위에서 서술한 맥락에서 언급되어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의 계시행위를 논하면서 본회퍼는 하나님을 계시에서 '알려진 자 (계시된 그리스도)'요 또한 동시에 계시를 '아는 자(성령)'이라고 하였다. 성령은 신자 안에서 계시를 아는 주체이다 (AB p.92ff.). 성령은 우리 안에 신앙을 일으키고는 자리를 비켜버리는 식으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남아서 스스로가 인식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즉, 본회퍼에 의하면, 성령은 계시 인식의 주관성이 아니라 철저히 계시의 객관성 혹은 초월성을 보장하면서 계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다. 본회퍼는 성령을 단순히 객관적이고 외적인 말씀을 인식 주체 안에 주관화하는 요인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영으로써, 우리 안에서 계시를 받아들이고 아는 주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성령이 우리라는 인간주체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계시의 초월성과 타자성을 보장하는 자인 동시에 우리 안에 신앙을 창조한다. 여기서 성령이 창조하는 신앙은 actus reflexus가 아니라 autus directus인 신앙이다. 대개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성령을 신자 안에서 외적인 말씀에 대하여 내적으로 증거하는 이로 이해하였으나 본회퍼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여기서 그는 성령을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인식하는 주체로 묘사한다. 문제는 본회퍼가 이런 말을 cor cuvum in se에 대한 철저한 비판 후에 한다는 사실이다. 즉, 본회퍼의 논술의 맥락으로 볼 때, 이 말은 성령이해의 주관주의를 지지하는 말이 아니라 철저히 그 반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인간 영의 안에 임재해 있으나, 어디까지나 인간 영과 다른, 인간에 대하여 초월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성령은 그러므로 단순한 내재 (immanence)의 원리가 아니라 초월적인 하나님의 임재 (presence)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영과 구별되는 초월적 영이다. 이로써 인식론 의미에서 주관주의적 actus reflexus에 빠지는 cor curvum in se의 문제가 극복된다.
그러나 이렇게 성령이 우리의 신앙 행위의 주체가 된다면, 인간의 주체는 어찌 되는가? 본회퍼는 우리의 신앙 행위에 있어서 성령과 성령의 창조물인 신앙을 받은 인간은 함께 주체가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AB p.95). 그러나 본회퍼는 양자의 관계에 대하여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본회퍼는 하나님이 다시금 우리의 지배 하에 들어오는 인식대상처럼 취급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또한 성령을 우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헤겔이 말한 바, 절대 정신이 유한 정신의 인식 안에서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본회퍼는 하나님의 성령과 인간의 영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또한 본회퍼에 있어서는 계시에서 성령이 하나님을 아는 주체가 되는 것은 절대정신이 자기실현을 거쳐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한 계기에 불과한 것이 전혀 아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한편으로 본회퍼가 성령을 가리켜 계시에 대한 인식주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가 말씀을 설교하고 믿는 일에 모두 주체가 된다고 한다는 점이다 (AB p.122). 이것은 만약 본회퍼가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 [Christusgeist]을 동일시하고, 오늘날 성령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은 결국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본회퍼는 이상스럽게도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을 구분한다 (CSe
pp.98-99). 이것은 또 다른 면에서 문제가 된다. Sanctorum Communio에서는 타자를 인격으로 세워주는 것이 성령의 일이라고 묘사하였는데, Akt und Sein에서는 동일한 것을 그리스도의 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AB p.124). 이것 역시 본회퍼가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을 구분하는 이상 문제가 된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본회퍼에게 있어서, 성령은(성령이라고 하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든) 주관주의의 영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성령은 우리가 계시를 인식하는 순간에도 계시의 초월성을 보장하는 분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라는 신학적-사회학적 맥락에서 인격을 형성하는 행위자이다. 이 경우에 초월성은 Sanctorum Communio에서 처럼 단지 윤리적 초월 만이 아니라 인식론적 초월도 말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인격이 되고, 나의 밖에 있는 참된 외재성이 되는 타자의 설교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믿는다. 물론 본회퍼에 의하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계시에서는 이 인식론적 초월성 (불가지성, 비객체성)은 항상 어떤 알 수 있는 자료 (가지성, 객체성)를 동반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가지성 자료로 인하여 신학적 사고가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미래로부터 오는 초월적 불가지성에 대한 actus directus는 과거로 흘러가면서 가지적 자료를 actus reflexus에 남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과거에 있는 자료는 성령에 의해 일깨워지는 미래(초월, 외재성, 이제 올 것)에 근거하며, 미래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방향지어진다는 것이다 (AB p.183). 이렇게 보면 성령은 우리가 지배할 수 없는 초월성을 의미하는 미래를 일깨우는 자로 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저히 성령은 내재의 원리가 아니라 초월적 하나님의 임재요, 우리 안에서 cor curvum in se인 우리 영을 초월자인 하나님과 타자를 향해 일깨우는 이로 이해되어 진다. 그러므로 본회퍼의 신학에 있어서 성령이 '장벽의 원리'인 동시에 '연합의 원리'이라는 말은 모순이 아니다. 성령을 우리 인간의 마음 즉 cor curvum in se를 깨뜨리고 침투해 들어오는 이라고 하는 이해가 바로 그 열쇠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자신 안에 갇혀서 맴돌고 있는 우리의 영을 개방하여 우리로 하여금 전적 타자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고 하나님을 actus direcrus의 믿음으로 믿게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윤리적 장벽을 가진 인격적 타자요 주체로 발견하고 인정하게 된다; 또한 그로써 우리는 상호간에 사랑으로 대하게 되고 공동체적 일치를 이루게 된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은 cor curvum in se인 인간의 영의 개방자요 해방자이다.

맺는말

이상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본회퍼의 신학에 잇어서, 성령은 단순히 우리 안에 본래부터 내재하는 어떤 인간적인 원리가 아니라,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으로서, 인간의 정신세계 외부로부터 인간에게로 와서 인간과 함께 임재하며, 자기 안에 갇힌 인간의 정신을 개방하여, 하나님과 타인들의 인격적 초월성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는 영이시라는 것이다. 본회퍼가 성령론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위와같은 초월과 임재의 역동적 관계, 그리고 자기 안에 갇힌 인간의 마음의 문제는 본회퍼의 초기사상 뿐만 아니라 후기에까지 이어지는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후기에는 그런 관심사들이 다른 맥락에서 다른 언어들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관계에서 타자를 인격적으로 인정하게 하고 참된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성령의 윤리적-사회적 사역과, 사회-신학적 존재 즉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서 계시 사건을 일으키시며 그 계시를 actus directus인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인식론적 사역이다. 이러한 논의들에서 본회퍼는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회퍼가 말하는 성령에 대한 논의들 중에는 문제성이 있는 점들도 있다. 예를들면 Sanctorum Communio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을 구분한 것이라든지, 종말에 가서 교회의 객관정신이 성령과 동일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점 등이다. 그러나 본회퍼의 성령에 관한 논의는 cor curvum in se인 영 개념에 매여 있는 성령이해의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유익한 통찰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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