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창조과학회의 기독교 세계관(몇 편의 글 모음)

작성자김상수|작성시간06.10.31|조회수682 목록 댓글 0
창조과학회의 기독교세계관

기독교 세계관 운동 (http://cafe.daum.net/ezra100/ )
글 쓴이 원동연
(한국에너지연구소 선임연구원, 본회 충남, 대전지부장,
재료공학 Ph.D)


1. 서론


현재 우리의 사회전반을 살펴보면 무신론과 인본주의가 이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오염되고 회의와 불신 속에 빠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배금주의, 인본주의, 윤리적 타락 등이 기독교 내에까지 은밀하게 침투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과학주의, 기술주의, 경제주의가 현대문화의 특징을 형성하며 우상화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혁명과 대규모의 기술개방은 인간에게 힘을 부여했고, 인간은 스스로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세계를 정복함으로써 낙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과학을 절대적 위치에 끌어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주의이다. 과학주의는 자연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정복하기 위한 기술지배를 필연적으로 잉태시켰고,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물질적 부요라는 경제주의의 가속적 발달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인간의 사고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 중에 하나는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사고 방식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세상과의 갈등과 긴장상태를 회피하려고 이원론적 사살이 도입되었다. 쪼들리는 시간문제, 직책에 따르는 여러 가지 섭외활동, 학교에서의 경쟁, 승진시 거쳐야 할 복잡한 인간관계, 단순한 흑백논리로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도덕적 회색지대 등등이 엄청난 중압감을 가지고 들이닥칠 때 대부분의 기독학생이나 사회인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행동패턴을 정하게 된다. 이때 대표적인 행동패턴으로 타협, 분리, 이원론적 태도로 대별된다. 타협형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한다. 분리형은 갈등과 싸움을 견디기 힘들어 하나님에 대한 이상적 친화 상태를 유발하여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이원론적 태도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채택하는 것으로 이중적인 가치관, 행동양식,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갈등도, 문제의식도 없이 둔화되어 버린 '신앙적 지킬박사와 하이드' 라고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이건 신앙과 무관한 일이니 나도 남들처럼 적당히 하자" 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크게 두가지 지상명령을 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있는 전도하라는 명령이다 (마 9:28, 28:19, 행 1:8, 딤후 4:2). 둘째는 문화적 명령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창 1:28). 이 두명령을 두고 어느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얘기하긴 어렵다. 이두가지 명령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도 어색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때문에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전도명령에 비해 문화적 명령은 인간타락 이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점에서 좀더 본래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와 인식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며 전 인격적 변화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고후 5: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신분이나 자격에 추가된 또 하나의 신분이나 자격이 될 수 없다.

Kenneth Herman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성경적 견해는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말과 동등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자신의 전 존재와 행하는 모든 일을 대표하고 규정하며 특징지워야한다. 자신의 인간됨이 자신의 모든 일을 특정짓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특징짓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됨을 특징짓는 행위는 성경공부, 예배, 전도, 헌금, 설교등의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생활, 취미생활, 가정생활, 학문활동 등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전 10:31)고 권면한다.

2. 학문과 신앙


사단의 궤계를 대적할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 시급한 일은 복음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에 대한 체계적 정립이라고 생각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교육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학문연구는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학문세계의 인본주의화는 우려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무신론과 인본주의적 경향이 학문연구의 본래적 특징인양 간주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가 되었다. 학문연구의 탈가치 ( value-free)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인본주의적 가치를 학문체계에 도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물주의, 행동주의, 과학주의 등). 학문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이 학문을 학문답게 한다는 의도적 반역이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다. 학문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이처럼 위축된 것은 학문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우리는 신앙만 시키면 된다는 이방 종교적 이원론이 우리의 뇌리속에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왜 기독교적 학문연구를 해야 하는가?

첫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긴다. 이것은 Augustine이 말한 소위 '종교적 집중 (religious concetration)'윈리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한 어떤 것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 사도 바울도 인간의 경배대상은 창조주가 아니면 창조의 어떤 측면(피조물)이라고 말했다 (롬 8:18-22). 따라서 모든 인간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어떤 견해 즉, 세계관(world view)을 가지고 자신의 주위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잘못된 신앙은 피조물을 창조주의 자리까지 격상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합리주의로부터 marxism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절대화의 기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세상에서 이런 우상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올바른 학문적 조망을 위한 선결문제이다. 둘째, 사람은 자기들이 섬기는 대상의 형상에 따라 자기를 형성해간다. 즉, 인간은 자기가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자기를 형성해 나가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학문에 대한 견해도 그들이 섬기며 경배하는 대상을 따라 형성되어간다. 한 예로 철학을 생각해보자. 철학자체의 뿌리는 철학이 아님을 유의해야한다.

철학도 보다 근본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면 어떤 피조물을 향한 신앙적 결단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실용주의 철학, Kant 철학이 있고 하나님께 근거한 기독교 철학이 있는 것이다. 셋째, 학문연구를 창조의 다양한 측면들을 연구하는 활동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근본에 있어서 창조의 질서를 연구하지 않는 학문 연구를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는 물리, 화학, 생물, 지학 등의 자연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문과학, 사회과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인문과학, 사회과학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사회적 기구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또 다른 의미를 창조속에는 사실을 추구하는 자연과학과, 가치를 추구하는 인문과학 사이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 구분은 연구대상이 창조속의 사물들인가 추상적 개념인가에 따른 것이데,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자연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논리의 세계까지 만드셨기 때문이다 (골 1:15-16).

기독교적 학문연구는 학문세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 시대에 뿌리깊게 스며들어 있는 이방사상의 추방과 배교적인 시대정신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피조세계를 연구함으로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케 한다 (롬 1: 19-20)는 측면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연구한 결과를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기독교적 학문연구가 효과적으로 수행되면, 학문과 신앙은 전통적인 반목관계를 청산하고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 궁극적 한계는 연구의 주제나 형태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학문분야의 조망을 형성하는 개개인의 세계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학문적으로 기독교적이 되게 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3. 기독교적 세게관

세계관은 그 정의부터 사람마다 의견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세계관의 범주에 어떤 것이 포함되어야 하는 가에도 사람마다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다. 본고에서는 J.Sire 교수의 세계관에 관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비교적 포괄적이면서도 체계적이라 생각되어 간단히 소개한다.
Sire 교수는 그의 저서 (The Universe Next Door)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IVP)에서 세계관이란 '이세상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나 가정들'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이 세상의 근본적 구상요소란 다음 다섯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있다. (1)참된 최고의 실제는 무엇인가? (2) 인간이란 무엇인가? (3) 인간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주의, 이신론, 허무주의 , 실존주의, 동양 범신론 등의 세계관과는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1) 우주의 참된 최고의 실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혹자는 물질, 여러 신들, 사물들속에 깃들어 있는 사상등 다양한 대답을 할지 모르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있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시고 인격적, 초원적, 내재적, 주권적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유지하시는 유일하신 분이다.

(2)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관의 질문에 대해 유물론적 세계관에서는 매우 정교한 전기 화학적 기계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 그래서 인격과 자기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가진 존재라고 본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이 형상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 회복가능한 존재라고 본다.

(3) 인간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사망관의 질문에 대해 혹자는 개체성과 인격의 소멸, 다른형태로 탄생하기 위해 잠시 쉬는 단계등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은 죽음이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사망의 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본다.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혹자는 문화적, 육체적 생존을 향한 동력, 혹은 인간에 대한 긍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도덕은 초월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선한 속성이 세상의 모든 도덕 기준들의 기준이 되므로 상황윤리를 부정한다.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역사관의 질문에 대해 혹자는 지상낙원을 이룩해 나가는 과정, 신들의 계획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 끝없이 순환하는 수레바퀴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역사는 직선적인 것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 나가는 의미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본다. 즉, 역사는 인간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관심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다음에는 이런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하며 기독교 신앙과 가장 문제시되는 것 중에의 하나인 자연과학의 문제를 조망해 봄으로써 현 시대에 있어서 과학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검토하였다.

4. 과학과 과학주의

16, 17세기, Newton과 Galileo 등의 역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과학혁명 이래 과학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급격히 증가해 왔다. 그리스 관념론적 철학으로부터, F.Bacon의 경험주의 철학으로의 전환으로 특징지을수 있는 과학혁명은 그후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체계적인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게 하였고 18세기 Lavoise, Dalton 등의 화학혁명, 산업혁명, 19세기 생물학 혁명, 20세기 현대물리학의 탄생을 거치면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의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듯 했다. 그러나 20세기 비극적인 양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전 인류를 일시에 파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 핵무기의 개발과 끊임없는 군비경쟁 등은 종래 과학문명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인간의 순진한 기대는 많이 변했지만, 과학의 위력에 대한 인간의 경외감은 끊임없이 증대되어 왔다. 컴퓨터와 유전공학의 무한한 가능성, 가정, 사무실, 공장의 자동화, 이 모든 것들을 역동적으로 연결해 주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도래 등 현대 과학 문명을 특징짓는 대표적 업적들은 거의 대부분 지나간 반세기 동안에 이룩된 것들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도입으로 인한 폭발적 지식의 증가와 이로 인한 문명의 급속화는 사람들로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어떤 신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부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곧 과학주의(Scientism)이다. 과학주의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신념들은 경험이나 실험, 즉 과학적 방법에 의해 검증되어햐 하며 과학적 방법만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깃이다. 둘째, 계량화된 것만 과학에 의해 알려질 수 있으므로 오직 측정 가능한 물리적 실재들만이 알려질 수 있다. 셋째, 과학은 전제가 없으며 객관적이다. 즉, 과학은 주관의 여지가 전혀없는 순수 객관적인 학문이므로 무전제에서 출발한다. 넷째, 모든 우주는 기계적이며 인과율의 사슬(casual chain)로 연결되기 때문에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다섯째, 과학은 자기의 고유한 방법론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여섯째, 과학적 방법만이 진리에 이르는 참된 방법이므로 다른 학문도 과학적 방법으로 하여야 한다.

위의 과학주의의 주장들은 외형적으로 보면 탈가치화, 객관화, 계량화 등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와 주관이 전혀 섞여지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첫째 주장은 실험주의(experimentalism)이며, 둘째 주장은 유물주의(materialism)이며, 넷째 주장은 결정주의 (determinism)이며, 다섯째 주장은 진보주의(progressism)이며, 여섯 번째 주장은 방법론적 환원주의(methodological reductionism)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과학주의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있어서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내용에 있어서는 합리주의 (rationalism)를, 정신에 있어서는 휴머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해보면 과학주의란 인간이 하나님이 주권과 섭리를 삭감하고 인간 그 자신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이론을 구축하는 데서 나온 자연스런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 과학자는 팽배한 과학주의에 대해 특히 주의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학주의는 과학의 결과가 아닌 과학에 대한 신앙이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과학의 가치에 대한 하나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 그것도 기독교신앙에 반대되는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다. Runner는 "과학주의의 승리는 기독교 신앙의 패배이며 그 역도 사실이다."고 했다. 과학주의가 성경과 상치되듯 종교적 주장이라한다면 기독교인 과학자는 과학에서 과학주의 대신 성경적 입장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부정하거나, 또 과학기술이 우리들의 물질세계에 미친 지대한 공헌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과학적 방법론과 그 한계를 이해하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여러 가지 인간활동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세상에는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이며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적용대상은 실험과 관찰이 가능하고, 계수화할 수 있는 물질계에 한하며, 행복이 무엇이며 도덕적인 가치와 기준은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존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분이신가? 등과 같은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의문에 대해서는 현대과학이 전혀 답을 줄 수 없다.

토아스 아퀴나스 이래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이성과 논리적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리고 자연과학이 결코 신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라는 일반 대중의 잘못된 기대가 있었지만,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는 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현대과학은 증명이 없이는 믿지 않는 것이고, 증명없이 믿는 것이 곧 신앙이다.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5. 창조과학과 신앙

창조이론은 만물의 근원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이론이다. 한 개인이 창조이론을 받아들이느냐 진화이론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한 조망이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기원에 관한 개인의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무에서 천지만물을 만드셨다고 믿는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자연만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라면 성경기독과 자연에 나타나있는 증거들 간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생명체는 성경의 기록대로 창조 주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한꺼번에 그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저절로 오랜 시간동안에 진화한 결과라는 진화론이 생물학, 지질학, 고생물학, 고고인류학 분야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진화론을 가장 확실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진화론을 반대하거나 비평하는 사람은 과학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은 이들 몇몇 자연과학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인문과학, 사회과학, 나아가 예술에 이르는 전 학문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g여성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결코 과학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과학의 전제고 출발점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진화론은 먼저 그 자체가 뚜렷한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진화론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한다. 사실 역사상 나타난 수많은 이단학설 가운데서 진화론 만큼 복음전파에 해를 끼친 이론도 없었다.

소위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이러한 진화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창조론의 증거를 제시하는데는 신학적 논의만으로 부족하게 느껴진다. 과학시대에 살면서 실증주의 정신에 기초한 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세대들에게, 성경 첫장에 나타난 창조의 증거를 과학적으로 제시하는 일을 매우 설득력있는 방법이다. 특히 진화론일색의 교과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진화론의 허구를 지적하고 창조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처음부터 기독교 유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주의론적이고 유신론적인 기독교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연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롬 1:19-20).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시 14:1)고 한다. 성경은 과학이나 과학을 할 수 있는 재능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문화활동의 일부로 과학활동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한다 (창 1: 28). 또한 과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자연계는 사탄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세계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연구는 피조세계의 자연과학적 측면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의 과학적인 사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과학을 이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과학자를 이 시대의 새로운 제사장으로 되게 하는 과학주의나 이와 유사한 반 기독적 조류를 비판하므로 과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립해야 한다. 둘째, 피조세계의 자연과학적 측면을 연구하므로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능력과 신성을 발견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연구된 결과가 인류의 복리를 위해 사용되어 이웃 사랑이 실천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기독교세계관을 알아야 하는 이유
기독교세계관 글 양승훈

1. 서론

하나님께서 세상을 생각하시고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본질의 연장인 인간도 생각하고 행동한다.

비록 그의 사고의 깊이의 심도와는 무관 하더라도. 인간의 사고활동은, 언제나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세계관에 근거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다.

세계관이란 철학자나 심호한 사상가에 국한된 호사품이
아니라,그가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뒷바침하고 있는
세계관이란 과연 무엇인가?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란 우리 세계(세상)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견지하는 바 일련의 전제들 (혹은 가정들)이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세계관이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근본적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1) 참된 최고의 실재(reality)는 무엇인가?

(2) 인간은 무엇인가?

(3) 인간의 사후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이와같은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 세상과 인생과 문화전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기독교적 안목을
말한다.
다음 장에서 왜 이러한 다소 난해해보이는 것들을 고찰해야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냉랭한 지식만의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있는 깊은 문제 - 우리들을 오류로 이끄는 몇 가지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적 세계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먼저

(1)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함에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主님으로 인정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시간 및 재물사용, 앞길의 계획 의뢰함 따위에만 국한시켜 왔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은 교회, 사회 심지어 우주 전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 1:3, 골 1:20, 마 28:18, 행 2:36)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 신앙의 영역에만 국한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한편으로 우리가 "예수님은 나의 주인(主人) 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한국과 같은 비기독교적인 문화 사회 속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과 생활 양식을 개발하여 좀 더 완벽히 융화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에 대한 답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2) 이원론(二元論)적 행습의 탈피를 위하여서이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피조세계를 관찰, 인식함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사고의 틀의 부재 혹은 거부로 말미암아 사고가 이분되거나 그릇된(지나친 혹은 소홀한) 강조를 하거나 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분열 증세를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심각한 분리를 야기시켜 신앙과 생활 모두에 해를 끼치게 되는데, 이제 우리 주변에서 그 구체적인 원인들을 살펴보자.

첫째로 동양종교(특히 불교)의 탈세속적 자세 및 유교의 형식주의와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 요행, 맹목적 열심 등에 의하여 우리의 종교심은 깊은 영향을 받아왔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초자연적인 것과의 결부로 인하여 신앙과 생활의 분리가 야기되었다.

둘째, 한국교회의 짧은 역사에 비해 숱한 고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현재적 책임보다는 미래의 천국의 모습에 편중되는 모순을 낳았다.

세째로는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펼쳐나가기가 어려우므로 이 가운데 상존하는 긴장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원론적 경향이 스며들었다.

이것은 전임 사역자보다도 실생활의 많은 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야 하는 일반 신도들 사이에 명백히 드러난다.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는 대표적 패턴에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타협형, 갈등을 견디기 힘들어 이런 생활에서 도피하는 분리형, 그리고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이원론형이 있다. 특히 이원론형은 자기의 이중적인 면 때문에 갈등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는 교회의 몰인식과 이원론을 지양하는 이런 방향에의 교육이 부재한데 기인한다. 기성교회의 다분히 공리적인 목회 방침이나, 여러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특히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이 일반 전공과목에 대한 올바른 안목과 인간 및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 것들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3) 풍성한 삶으로 회복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은 너나 할것없이 모두다 풍성한 삶(요 10:10)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흔히들 이 풍성한 삶을 '영적생명', '중생', '새로운 피조물' 등등의 개념으로 혹은 현제적 축복(건강회복, 사업의 발전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풍성한 삶이란 훨씬 넓은 창조의 전 영역과 창조의 본질적 성격,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적 잠재력(성, 예술, 학문, 사회)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올바른 안목이 없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좁고 왜곡된 생각 속에서 자위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보았다. 이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위의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을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는 어떠한 안목을 가지는 것이 성경적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올바른 세계관 선택을 위한 소고 / 양승훈

출처 : VIEW/DEW

1. 서론

사람은 비록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해도 다양한 세계관들 속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결정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결정은 그 선택된 세계관의 여하에 따라 잘못될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관 선택의 자유는 개인에게 모험과 책임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왜 많은 세계관 중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선택해야 하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난호의 기독교 세계관 소고에 이어 다른 세계관 -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 에 대해 발생동기와 인간론, 도덕론, 인식론을 중심으로 살표보기로 한다.


2. 이신론

이신론은 전통적 기독교에서 제시한 섭리, 예지, 의지, 운명에 대해 장황한 논쟁을 하던 이들이 신학과 철학의 혼란한 논쟁을 벗어나 어떤 지적 통일을 이루고자하는 시도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욕구와 더불어 하나님은 이성적 신이기에 그가 만든 우주도 합리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따라서 연구의 대상이라는 근거에서 우주의 형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연구한 하나님이 만든 세계의 상(image)은 질서정연한 거대한 기계, 기어와 지레가 기계적으로 정확히 맞물리는 거대한 시계처럼 보였다. 이는 더 많은 탐구와 발견을 자극하였고 근대과학을 탄생시켰다.

더우기 이에 의해 신지식에 대한 권위의 근거가 특별계시에서 이성으로 옮겨졌으며, 우주의 구조는 거대한 시계로 비유되었고, 하나님은 그 시계의 제조자로 간주되었다.

이들 사조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중 첫째,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하여 '제1원인(a first cause)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고, 인간사의 주권자도 아니시며, 섭리자도 아니시다.' 라고 전제함으로써 하나님은 인간과 소외된 존재로서 인간에게 엄청난 고독감을 안겨다 주게 되었다.

우주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폐쇄체계안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정론적 성격을 지니며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가 없다고 봄으로써 인간은 그 체계 안에서 어떠한 변화도 창출할 수가 없다.

인간론에 있어서도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중의 하나인 부품으로 간주하므로써 자기결정력을 잃게되고 인간의 의미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윤리에 관해서는 우주는 정상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 옳은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며,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창조시 정해졌기 때문에 역사는 직선적이라 생각하고, 재조정이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신론은 짧은 기간동안 학문 세계에만 영향을 미쳤다.

이와같이 이신론이 빨리 사라진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로, 윤리면에서 타락하지 않은 정상적인 우주를 가정하여 우주는 자연회 모든 것이 선으로 흐른다면 윤리의 독특한 내용은 설 탕을 잃게 되었다. 둘째로, 인식론의 면에서 개별에서 보편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지성(infinite mind)이 필요하나 이신론 안에서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째로, 인간 본성면에서 인간의 재조정에 대해 닫혀진 세계에서는 그 인격과 존재의 중요성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자연주의

이신론은 유신론과 자연주의라는 두 개의 큰 대륙을 연결하는 지적 호기심의 이행기에 불과했지만 자연주의는 지금도 많은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중대한 사조 중의 하나이다.

이신론에서는 하나님을 창조주 또는 인격은 없지만 우주의 암시적 유지자로 보는 반면 자연주의에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실제적 가치가 없는 이론적 실제로만 생각한다.

자연주의 기본 내용은 첫째로,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명제에서 본질의 중심 요소가 하나님에서 우주로 옮겨가게 되었고, 실재는 기계적, 공간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단위들'로 구성되며 화학과 물리학을 통해 그 관계를 알아낼 수 있는 불변의 '법칙률'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우주는 보는 관점에서 이신론과 유사한 사상체계를 가지지만 이신론과는 달리 사건의 발생 순서와 그들의 의존관계 및 사물의 존재 양식 등이 고정 불변의 필연적 단계가 논리적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고 불확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이 개념에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와 그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부여했다.

셋째로, 인간과 인격에 관해서는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이고, 인격이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관계라고 전제함으로써 인간의 이해력은 순수한 신비가 아니고 기계의 복잡성에서 유래한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화학적, 물리적인 성질의 다양한 의존 관계가 불확정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인간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할 수가 있다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로, 죽음은 인격과 개체성의 완전한 소멸로 간주한다. 즉 전인격이란 사회적, 물리적, 상황안에서 활동하는 생물학적 유기체의 작용이며, 인간의 존재란 사망 시에 소멸한다. 이같은 전제는 인간을 덧없는 존재로써 규정짓고 말았다.

다섯째로,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며, 전체적 목적성은 없다. 유신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의도하신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는 목적론에 근거하고 있지만 자연주의는 그 과정이 자율적이어서 단지 역사는 인간이 계속 존재할 때까지만 <지속>할 뿐이다. 만일 인류가 소멸하면 인간의 역사도 소멸하고 자연의 역사만 계속될 것이다.

여섯째로,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라는 명제에서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이 가치의 부여자로 본다. 그러나 자연주의자들은 의식과 자기 결정적인 인간과 함께 생긴 것이기 때문에 윤리도 인간과 함께 성립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 이전의 선악의 분별력에 관해서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도덕적 가치 근원을 인간의 경험에서 찾고 있으며 인간 생존 유지를 최고의 가치기준으로 둔다. 이의 주요 결점은 자기의식과 자기결정력이라는 <존재>가 가능성의 <영역>에서 선으로 향한 <당위의 영역>으로 자연적으로 진행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상에서 자연주의의 주요 내용들을 다루어 보았는데 이 사상들이 과학적 연구방식과 각급 학교의 교육 및 사회 모든 분야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자연주의는 정직하고도 객관적인 인상을 주고 많은 사람에게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비판자들에 의해 헛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비판이 자연주의 내부의 불일치에서 더욱 크게 노출되고 있다. 즉 자연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또한 그처럼 불분명한 기원을 갖고 있는 <존재>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두려움을 야기시키고 결국은 허무주의를 낳게된다.


4.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감정이다. 즉 모든 가치에 대한 부정이며, 자연주의의 자연적 산물인 극단의 무의미 상태이다.

자연주의 사고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이성의 결과는 확신할만한 것이 못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우주의 폐쇄적 성질은 하나의 제한으로 느껴졌으며, 죽음이 소멸이라는 관념은 심리적 불안을 야기시켰고, 자연의 최고 산물로써 인간의 지위는 우주로부터 소외나 우주와의 연합-따라서 인간을 해변가의 조약돌 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으로 간주되었다.

자연주의에서 허무주의로 건너가게 된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면, 자연주의의 첫번째 명제 '물질은 존재의 전부이며 영원히 존재한다'와 둘째 명제 '우주는 폐쇄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운행한다'에서 자연주의는 폐쇄체계를 불확정인것으로 간주하여 도덕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노력하지만 폐쇄된 우주에서의 불확정성이란 인식되지 않은 확정석에 불과한 것이다. 이로써 어떠한 차원에서든지 우주를 변경시키려는 힘도 우주의 한 일부분이고, 또한 현재의 상황이 미래를 결정한다고 봄으로써 자연주의는 인간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다.

인식론에 있어서 인간이 비인격적인 힘의 결과로 존재한다면, 즉 물질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작용한다면 물질이 의식적 존재로 하여금 정확한 관찰과 옳은 전제에 기초한 참된 인식이나 논리적 결론에 이르도록 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도덕론에 있어서도 자연주의자들은 세계란 단지 거기(There)에 존재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도덕적 당위(Ought)를 느끼게 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윤리의 최고 가치를 인간 생존의 유지에 둠은 윤리적 상대주의를 초래하였고, 이는 가치 사실(the fact of Value)를 지적할 뿐 결코 절대적 표준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연주의는 자연히 윤리적 허무주의로 귀결되고 재판정이 존재하지 않은 상채에서 인간에게는 범죄의 사실(the fact)이 아니라 죄책감(the feeling of guilt)만 남아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상에서 자연주의의 인간론과 인식론, 도덕론은 절대적 가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인간에게 극도의 의미 상실을 안겨다 줌으로써 자연히 허무주의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음을 살펴보았다.


5. 실존주의

실존주의의 중요한 목표는 허무주의를 초월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놓았고, 이러한 좌절과 문화적 불만의 토양 속에 실존주의는 문화적 뿌리를 내렸다. 실존주의는 자생적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 세계관들과의 관계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크게 구분된다.

우선 알베르트 까뮈나 장 폴 싸르트로에 의해 제창되었던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고찰하고, 또한 19세기 중반에 죽은 정통교회에 대한 반응으로 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하여 신정통주의로 연결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명제를 제외하고는 자연주의 모든 명제를 긍정한다.

이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첫째 명제는 우주는 단지 물질만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가지 형태로 나타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는 세계는 단순히 존재했고 그때 새로운 의식적 존재인 인간이 탄생했다. 그래서 (그 이유는 모르지만) 주관세계와 객관세계가 있게 되었다. 자연주의는 객관세계를 실재로, 주관세계를 그 그림자로 간주하여 두 세계의 통일성을 강조하지만, 실존주의는 두 세계간의 불일치를 강조했으며 의식과 자기결정력에 의한 주관세계를 선호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인간론에 있어서는 단지 인간만이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이 주관세계의 왕으므로 내적으로 자유롭고 가치를 긍정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신론적 실존주의 관점에서의 객관세계는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되어 있어 인간과 대립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인다. 그 중 가장 극복하기 힘든 궁극적인 부조리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이 인간을 한 객체로 만든다는 확실성과 생에 대한 사랑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은 가치장출을 객관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데서 찾고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객관세계의 최종 무기인 죽음 앞에서 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순종하는 수동성이나, 함께 부조리에 직면했다는 사실에 위로함을 받는 것을 악으로 간주하고, 부조리에 도전하여 어엿한 인간이란 사실을 매 순간 자신에게 입증하는 의식적 선택행위를 선이라 본다.

이상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도덕적 근거를 인간에게 둠으로써 인간 본유의 권리를 가졌다는 의식을 충족시켰을 뿐이지 각 개인을 초월하는 도덕적 준거점을 제공하지는 못하였으며, 죽음이 없다면 가능했을 의미들을 종식시켜 버렸고, 나아가 허무주의를 넘어 단지 유아론(唯我論), 즉 80여년간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릴 고독한 자아에 도달했을 뿐이다.

다음으로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유신론의 명제들을 받아들이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출발점이 하나님과 우주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며 하나님은 인간이 의심없이 확신할 만큼 자애로운 신이라는 완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아니한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결정적과 개인의 확신을 통한 선택이라는 신앙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결단한다고 본다.

또한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인격적인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참된 삶은 "만남"이라는 논리하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인경의 만남으로 해석하여 유신론 체계 자체의 풍요함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회복을 시도하였다.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전통적인 유신론의 관점에서 가장 문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분은 성경의 역사성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사건의 기록으로서 역사는 불확실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현제화된 모델, 유형, 신화 등으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적을 신화화했고, 성경은 역사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한 전통적 유신론자들의 비판은 어떻게 일어나지 않은 사건(일어나지 않은 부활)이 소망이나 실로 다른 어떤 것의 상징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말하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려면 먼저 사건이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의미창출을 주관세계에 둠으로써 객관적 준거점을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사하다. 또한 의미의 근거로서의 사실성을 포기할 때 그들은 자연히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미마저도 포기하게 될 것이다.


6. 결론

이제까지 기독교 유신론에서 실존주의까지의 여러 세계관을 살펴 보았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올바른 세계관인가? 그것은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키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내적인 지적 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둘째는 실재의 자료를 모두 포함할 수 있어야 하며, 셋째는 그것이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것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신론에 이어 실존주의자까지의 모든 현대사상들은 많은 점에서 모순을 안고 있음을 살펴보았고, 기독교 유신론만이 진실한 설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기독교 유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지적 세계관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하고 인격이 있으신 우주의 주재(主宰)에게 인격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진정 살만한 가치있는 검토된 삶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참고서적)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제임스 사이어 지음, 김헌수 역,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85.


기독교세계관 연구


출처 :

1. 세계관이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세계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기본 틀이다.

가. 기독교세계관의 필요성
- 경제의 고도성장과 교회의 양적 급팽창 이면에서 독버섯처럼 번지는 세속화 그리고 기독교정체성의 위기, 전통적 가치관의 급속한 몰락 등으로 인한 위기감 속에서, 특히 서구에 비해 기독교 역사가 짧고 전통 종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 기독교가 당면하고 있는 온갖 이원론적 행습, 패해의 밑바탕에는 기독교세계관의 부재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라는 껍데기에 '세속' 내지 '전통종교'라는 안경을 끼고 다니기 때문에 그 數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기독교적이 되지 못하고 있다.

- 영어의 Christian은 명사적으로는 '기독인'이고, 형용사적으로는 '기독교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적이 되는 것, 이 두가지는 개인이나 기독공동체의 성장과정에서 분리할 수 없는, 또한 분리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 특히 '문화'회복을 위해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어야 '분별'과 '회복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기독교세계관이란?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의 Knudson>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적인 진리들을 숙고함으로 얻은 깊은 진리들을 체계화한 것"
- 여기서 세계관은 단순히 성경내용을 체계화한 것이 아니라 체계화된 진리에 대한 성령의 조명을 필요로 한다.




나. 올바른 세계관의 역할
1) 통일적인 삶을 살게 한다.
- 인생의 지표를 얻는 것이고 복잡하고 혼란한 개념을 정돈할 방법을 찾는 것이며 우리의 행동들 간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다.

2) 생동적인 삶을 살게 한다.
- 올바른 생의 의미가 확립될 때 비로소 생동적인 삶이 가능하며, 의미있는 인생관은 건전한 세계관으로부터 나온다.
- 사물의 가치가 전도되고, 의미가 상실되며 '인생에 궁극적 희망이 있는 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때야말로, 분명하고 믿을만한 세계관이 필요하다.

3) 사고와 행동의 방향을 설정한다.
- 역사상 이 시대만큼 복잡 다양하고 다원화된 사회는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책임있는 선택, 우선순위의 결정을 위해서는 올바른 세계관의 확립이 필요.


※ 올바른 세계관의 특징 <왈쉬(B.J.Walsh), 미들톤(J.R. Middleton), 홈즈(A.F. Holmes)>
▷ 현실성, 내적통일성, 개방성, 타당성, 생동성 등을 들 수 있다. 즉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모두 포함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나 사건에 대하여 공평하게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모순됨이 없이 내적인 조화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내용이 절대화되어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가져서는 안되며 끊임없이 확장되는 생의 지평을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어야 한다.
▷ 또한 논리적으로 타당해야 하며 싸늘하게 죽은 지성이서도 안된다.




다. 세계관의 속성
- 영구 불변의 세계관은 없다.
- 개혁주의 세계관도 역시 잠정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피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영적 통찰력이 성장해감에 따라 더욱 더 완전하고 성숙한 형태로 항상 다듬어져가야 한다.


2. 올바른 세계관
가. 동양사회와 서양사회의 세계관 배경의 차이
< 서양사회 >
- 고대 희랍의 인본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중세의 교권주의, 진화론과 막시즘, 패권주의, 계몽사상, 유물론과 자연주의, 실증주의, 무신론, 허무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등 수많은 반기독교적인 사상들이 근대 사상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서양에 있어 기독교의 수천년 역사가 그들의 사고체계 뒤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즉 서구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에 관한 관심은 주로 서구 세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함.

< 동양사회 >
- 동양의 전통사상(무속, 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 민족마다의 건국신앙)들은 기독교적 전통이 아닌 또다른 유기적, 통합적, 범신론적인 세계관을 형성해왔다.
- 따라서 동양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에 관한 관심은 동양의 반기독교적 사상에 대항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 따라서 서구인들에게 이원론의 문제는 주로 세계를 보는 정신세계에 나타나는 데 비해, 동양인에서는 주로 생활태도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에게는 기독교세계관으로 이분화된 정신세계를 통일시키는 작업이 필요하고 동양인들에게는 기독교세계관내에서 일관성있는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고려하여야 할 몇가지

1) 일차적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세계관의 적용대상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실 문제만은 아니지만)
- 만일 한국에서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단지 서구의 사변(思辨)적인 내용의 학습으로만 그친다면 그 자체가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와 문화적 전통이 다른 서구인들에게서와는 달리 동양적 전통을 가진 우리들에게 세계관의 사변화는 치명적이다.
-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구호나 강연이 아니라 삶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지성'이 아닌 '기독교적 가슴')

2) 지나치게 복잡해서는 안된다
(물론 어느 정도 논리성을 가져야 하지만)
- 서구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은 철학개론이나 조직신학서설 같은 느낌이 든다. 이는 사변화된 희랍적 전통을 반영한 것.
- 기독교세계관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면 논리적 적합성은 유지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무식한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알 수 없는 세계관을 생활로서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

3) 기독교세계관과 전통사상의 이원대립적인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 서구인들이 희랍전통으로부터 기독교적인 요소를 발견해냈듯이
- 우리는 한국의 전통사상으로부터 기독교적인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

인간의 타락, 지리적 고립과 언어적 장벽이 에덴동산에서의 '원형문화(Prototype culture)'를 많이 왜곡시켰을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때때로 민족마다의 전통문화 속에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원형문화의 그림자들이 반영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림자들에 대한 바른 기독교적 시각을 개발하는 것도 기독교세계관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4) 이원론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필요하다.
- 한국의 전통문화와 기독교세계관의 부조화가, 삶에 대한 이원론적 태도에 연유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최근 세계관운동의 가장 큰 목표는 이원론적 행습의 타파였다.
- 무조건 이원론적 태도를 배격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이원론을 배격해야 한다.
- 동시에 속된 일을 거룩한 일 속에으로 통합하거나. 거룩한 일을 속된 일 속으로 통합하는 혼합주의적 일원론도 경계해야 한다.
- 이원론의 배격은 聖, 俗의 경계를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거룩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분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 세상에 대한 바른 분리가 없이는 바른 참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기독교세계관의 출발 - 창조
가. '창조'
- 기독교 유신론의 핵심.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기독교유신론과 다른 세계관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며 기독교적 사고의 핵심이 된다.
-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견해는 기독교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기독교적 신관, 인간관, 자연관, 학문관, 도덕관, 결혼관, 역사관, 시간관 등의 기초가 된다.

나. 창조주
○ 창조주 하나님은 단일론 이나 이원론에서의 신과 뚜렷이 구별된다.
- 잘못된 단일론(유물론, 자연주의, 세속적 휴머니즘 등) :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일부로 포함
- 이원론 :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이들간의 관계에 혼돈

○ 하나님과 피조물
- 현대의 자연주의적 휴머니즘은 모든 것을 자연으로 환원시킴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왜곡시켰다. 피조물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범신론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 없이 피조세계만을 받아들이면 자연주의로 흐르게 된다.
- 성경에 나타난 창조주 : 우주의 필연성이나 어떤 제한에 묶여 있는 분이 아니라 우주를 초월하신 최고의 책임자이시며 다른 어떤 것과도 대등한 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원론을 부정한다.
다. 창조기사

○ 영감성
- 성경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인 것에 있으며 성경은 생물학이나 지질학, 연대기 등의 교과서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자연의 원리들이 성경을 통해 새롭게 발견, 해석되고 있다(창조과학운동). 따라서 성경은 비역사적이라기 보다는 초역사적이요, 비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초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
-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온 우주 가운데 있는 만물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말한다. 인간의 존재도 자신의 내부나 주위 환경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를 지으신 창조주와의 관계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 뿐 아니라 가치와 희망, 의미, 목적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 독특성
- 전세계의 모든 창조신화들이 기존의 재료로부터 변형에 의한 창조를 말하고 있는 데 반해, 성경의 창조는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 히브리어 'bara'는 無의 상태에서 어떤 것이 창조될 때 사용하는 것.(이 동사는 유독 히브리어에만 있다)
- 無로 부터의 창조는 창세기 뿐 아니라 시편33편 6절, 9절, 아모스 4장 13절, 로마서 4장 17절, 히브리서 11장 7절에 기록.

20세기 들어 현대물리학이 탄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시간, 물질, 공간은 절대적인 물리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는 절대 無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절대 無에서 무엇이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절대 無의 상태에서 어떤 것이 창조되었다는 동사가 유독 히브리어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기록하시기 위해 히브리어를 선택하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창조의 증거들
♣ 대기와 궁창위의 물, 그리고 노아 홍수 ♣ 바다와 물 : 최대밀도 온도와 빙점의 차이
♣ 공룡이야기 : 멸종?
라. 창조의 의미와 목적
1) 창조주와 피조물의 본질적 구별
-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피조세계의 일부가 아니며 피조세계도 그 일부가 아니다.
- 하나님은 피조되지 않았고 무시부종한 분으로서 피조물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2) 모든 피조물의 전적 의존성 (히1:1, 요1:13)
-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의존 원리는 불변이다. 단지 인간이 자의적으로 하나님 의지하기르 거부했을 뿐이지 의존적 인간이 자존적 존재로 바뀐 것은 아니다.
3) 창조의 목적론 (골1;15~17)
-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 (창1:31)
- 역사 전체를 통해 그의 선하심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
▶ 만물이 그에 의해서,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선 것이다 : 골1;15~17)
【 인간창조의 목적 】
▷ 무릇 내 이름을 일컫는 자 곧 내가 그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개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43:7)
▷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여 함이라 (사43:21)

※ 우주는 정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되고 인도되는 유목적적 우주이다. 이는 내재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에 의해 주어진 과정만을 이루어가는 진화론적 목적과는 달리 초월적인 창조주께서 피조계를 위하여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인격적인 목적론이다.




4)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 (창1:28)
- 인간이 청지기라는 사실은 소극적으로 보존, 관리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를 조작, 계발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 이러한 청지기적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 제정하신 질서나 규칙을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자들이 열심히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동기이어야 한다.(학문과 연구의 목적)

5) 하나님의 자기계시 (롬1:19,20)
- 성경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특별계시),
-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일반계시)



3. 타락 그리고 구속의 역사


※ 이미. 그 뿐께서는, 자신을 알게 할 여러방법(계시)를 마련해 두셨다. 이미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그 증거들을 발견하고 깨달아 아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다. ☞ 창조냐? 진화냐?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가. 타 락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언약의 파기 (창조질서의 파괴)
- 하나님과 의존적인 관계를 거절하고 (하나님으로 부터의 도피)
- 인간 자신이 자기의 주인임을 선언한 행위. (사실상으로는, 하나님과 피조세계로부터의 소외의 시작)

※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대신 다른 것을 섬길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섬기지 않은 중립적인 상태에 있을 수 없다<어거스틴은 이를 '종교적집중'이라고 불렀음>
우상숭배의 개연성이 내포되게 됨 (물질, 명예, 지적만족, 성욕, 특정이데올로기, 인생의 목표 등. 그러나 우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채워질 수 있는 인간의 내적 공허를 채우는 모조품일 뿐이다.) ☞ 바닷물로 갈증이 채워질 수 있는 가? 모조는 모조다.



※ 고백들
▶파스칼 :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공허(God -shaped vaccum)가 있다.
▶어거스틴 :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



【 결 과 】
▶ 인간소외와 피조물 의지 (피조물을, 하나님 대신 숭배하는 신앙 출현 - 우상숭배)
▶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
▶ 불의, 추악, 탐욕, 악의, 교만

②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


- 하나님과의 단절 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에 있어서도 단절과 소외
【 결 과 】
▶ 근심과 공포, 절망과 좌절, 이질감과 불합리, 무의미와 소외, 시기, 비방, 분쟁, 사기, 무정, 무자비, 배신 등 등
▶ '죄나무'(?) : "죄가 열리므로 죄나무인가, 죄나무이기 때문에 죄가 열리는가?'
※ 인간은 선한 일을 위해서는 굉장한 극기와 절제가 필요하지만, 악한생각이나 행동을 위해서도 조금도 결심할 필요가 없다.



※ 타락과 문화
현대 문학과 예술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③ 자연(피조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 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여호와 하니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 하나님의 저주가 사람 뿐만 아니라, 땅과 모든 생물계에 미침
- 구속사의 시작을 내포 (무화과잎 가죽옷 : 희생양?)
【 결 과 】
▶ 생물들은 죽어서 썩어지고, 환경을 파괴 오염되어져 가고, 가용에너지는 갈수록 감소
( 열역학제2법칙 - 엔트로피증가의 법칙)
▶ 생물계의 약육강식과 정글의 법칙(용불용설 - 진화론)
▶ 잡초일수록 번식이 강하고, 해충일수록 구제가 어렵다.
▶ 자연계의 쇠퇴와 멸망

※ Lynn White 신드롬 경계
※ 여기서 노동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다. 소명이다. 노동에 있어 타락의 결과는, 노동환경의 악화일 뿐이다.



※ 피조세계의 구분 = 구조와 방향
▷ 구 조 : 하나님의 창조법칙에 의해 구성된 피조물의 본질
▷ 방 향 : 피조물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지의 여부
즉, 타락이란, 창조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 방향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 <주의! 잘못된 이원론 경계>




나. 회복 - 구속



예수께서 만물을 회복하신다는 것은 먼저 인간에게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형상(에베소서 4;24. 골3:10)을 회복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청지기로서 피조세계를 향한 본래 의도를 이루시고 인간과 (고후5:18) 모든 피조세계(막16:15) 화목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 구속은 타락한 인간이 온전하고 무흠한 상태가 됨을 의미하기 보다 그렇게 될 가능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 예수님을 통한 구속의 의미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의 범죄로 왜곡된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을 의미함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

※ 막 16장 15절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preach the gospel to the whole creation)"에서 만민은 피조세계 전체를 말한다 즉 가시적 세계 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영적세계, 사회구조, 논리의 세계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학문의 세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인정될 때, 좀 더 온전한 피조세계의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 성경에서 사용한 구속을 설명하는 단어들
○ redemption : 살아서 자유케 함. 다시 산다는 의미 (=salvation 구원, 구세)
○ reconciliation : 화해, 조화, 일치, (복종, 체념 - ?)
○ renewal : 부흥, 소생, 새롭게 함
○ salvation : 소테리아 - 질병후의 건강, 위험후의 안전 등
○ regeneration : 제건, 부흥, 거듭남

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특성
○ 피조세계 회복의 의미 :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또는 도래
-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공간적, 시간적 개념보다 하나님의 통치권과 관련있다.
- 외형적으로 어떻게 보이느냐 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백성이 있고, 하나님의 명령이 집행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 한국교회의 문제는, 너무 개인적인 구원에 치중하므로 인하여 이 땅(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하여는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와 정치의 철저한 분리)
이는, 1938년 신사참배 반대 이후, 신앙적 굴절을 겪었고, 해방 이후에도 이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없었던 한국교회의 역사적 배경들로 인하여,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거의 잃게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하나님 나라 성취의 이중적 특성


※ 2차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하던 d-day와 실제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 연합군이 승리한 1945년의 v-day와가 다른 점을 들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사단과의 전쟁에서 대세는 결정되었고, 사단의 패배는 분명해졌다. 지금 우리는 D-DAY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국부적으로 사단이 이기는 것 같고 잠깐동안 전세가 사단에게 유리한 듯이 보여도 궁극적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 이미 우리들 가운데 임하고 계시고 (완료 또는 진행형)
- 또한 장차 도래하기를 고대 (소망형)

【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3가지 - lens 】

창조
모든 존재와 인식의 기원 (회복의 원형)
세계관 논의의
출발점

타락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의 '상태'에 대한 근원적인 진단 근거 제공
올바른
세계관 평가의 기준

구속
사단이 왕노릇하는 타락한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가 왕 노릇하는 '상태'로의 회복
기독교세계관의
궁극적 지향점


세계관 전쟁의 3단계 / 성인경
출처 : http://hana.sungkyul.ac.kr/~gms/외부강사/세계관.htm

고린도후서10;4,5

성인경(L'Abri Fellowship)



몇 년 전인가 생각합니다만, 제가 일하는 라브리에 대전과기대 대학원생 한 명이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하는데 성경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알고보니,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 사건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을 시작으로, 대학원에 다니면서부터는 아에 교회 다니는 것도 그만 두었고, 마지막 해결책으로 라브리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세계관 전쟁에 실패한 것입니다. 저는 그 학생을 도우면서 대학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얼마나 위험한 영적 전쟁터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학생만 세계관 전쟁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아줌마는 시장 가는 길에 자기 아들에게, "너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부인은 직업차별 정신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공부와 출세를 잘못 연결시켰습니다. 과연 이 아줌마를 믿음 좋은 분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믿음이 좋더라도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영적 전쟁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세계관 전쟁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교육의 실패요 신앙교육의 실패입니다.


세계관 전쟁의 실패 원인


그러면 왜 실패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몇 가지 중요한 원인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만이 필요하다'는 생각때문입니다.

이 방법을 지지하는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오직 성경만' 필요하지 세상적인 지식은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좋으나, 학교공부를 무시하거나 세상 지식과 학문활동을 소홀히 여기게 되므로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 anti-intellectualism)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끔 저는 공부 잘 하던 학생들이 예수믿고 성경에 미쳐서 공부를 등한히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정신이 17세기 경건주의 이후에 유럽교회에 지적 공백을 초래하게 되었는데, 역사가 존슨(Paul Johnson)의 지적에 의하면, "그 공백을 대부분 이신론자나 회의론자, 혹은 무신론자들이 매웠으나 200년이 지나도록 그 공백은 매워지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중에 하나가 우리 나라 대학생들이 읽는 교과서의 90% 이상이 예수 믿지 않는 교수들이나 필자들이 쓴 책들입니다.


둘째, '성경과 학문은 동등하다'는 생각입니다.

성경과 학문의 '권위(權威)'를 동등하게 취급하여, 성경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권위가 있으나 학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해당 학문이 더 권위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종교적 구원에 대해서는 성경을 봐야 하지만 샹물학적 기원에 대해서는 다윈(C.Darwin)의 진화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나 세상 학문을 특정한 분야에 대한 고유한 권위를 가진 하나의 동등한 정보(情報)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어떤 기독교 철학 교수님은 그의 인생론에서, "나는 신앙과 학문은 별개의 문제로 본다"고 했는데, 그가 이원론(dualism)적 세계관의 노예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종교적인 '경전(經典)'으로는 믿었는지 모르지만 모든 문제에 대한 '진리(眞理)로 믿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가슴은 예수의 영혼이지만 머리는 바벨론 사람들의 두뇌"를 가진 학생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전공은 전공이다', '신앙은 신앙이고 직장은 직장이다'는 잘못된 생각이 낳은 쓴 열매 중에 하나입니다.

셋째, '성경과 학문을 적절히 혼합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방법은 속칭 '야채 샐러더식', 혹은 '짜집기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성경과 학문을 적당한 비율로 냣고 혼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창조론과 진화론을 냣은 '창조진화론', 혹은 예수와 융을 냣은 '인본주의 심리학'이 그런 것들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성격테스트 MBTI라는 것은 거의 다 융의 심리학을 기초한 것이랍니다. 혹은 성경과 기업성장학을 냣은 것이 '교회성장학'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문제는 요즈음 이 방법이 기독교인 대학 교수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지적 타협과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지게 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방법은 모두 훌륭한 방법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제가 오늘 제안하려고 하는 방법은 성경과 학문을 하나되게 하는 통합법(integration)입니다. '통합한다'는 것은 성경과 지식을 분리하거나 혼합하지 않고 하나되게 하거나 조화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작업을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4:13에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의 '하나 되게 하는 것(unifying)'은 모든 지식에서 잘못된 것을 파괴하고 그리스도 앞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통합하는데는 3단계가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0:4,5에 의하면, 1)무기를 잘 알고, 즉 성경의 능력을 분명하게 알고, 2)하나님을 대항하여 높아진 불신앙적인 지식과 학문을 잘 비판하고, 3)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여서, 성경적인 학문과 지식 체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는 바로 고린도후서에 있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성경과 학문을 하나되게 할 것인지, 즉 어떻게 하면 세계관 전쟁의 최전선에 설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경과 학문을 하나되게 하는 길


먼저 고린도교회의 문화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옛 고린도 도시는 '철학과 지식의 도시'였습니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고향이 고린도였습니다. 바로 그런 도시에 고린도교회가 세워졌고, 아닌게 아니라 온갖 지식의 오염과 혼돈 때문에 교회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세속적인 헬라철학 사상의 도전 앞에서 온갖 파당이 생겼고, 계모를 성폭행하는 놈이 없나, 거기다가 동성애자들까지 법썩거렸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들어온 "수다한 사람들(Sophists)", 즉 괴변론자들이 생겨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했기 때문입니다(고후2:17).

오늘날도 동서양교회를 막론하고 기독교인이 처한 영적 전쟁은 '세계관의 전쟁'이며,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학생 청년들은 이런 영적 전투의 최전선에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적인 통합 방법이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를 잘 알아야 합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어떤 철학적 이념이거나 외모입니까? 이런 무기들을 성경은 '육체의 무기'라고 규정합니다. 그런 육체적인 무기로는 세속적인 생존경쟁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적 영적 싸움에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요즈음 교회가 영적 전쟁에 실패하고 욕이나 얻어 먹는 이유는 '육체의 무기'를 가지고 영적 전쟁을 치룰려고 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전쟁에는 영적 무기가 필요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늘날의 영적 전쟁의 최전선(最前線)은 세계관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쇠로 만든 스텔스전투기나 핵무기가 아닙니다. 그런 무기는 파괴력이 대단하지만 영적 전쟁에는 종이호랑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보다 10,000배나 더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이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까? 그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으로 빚은 신령한 무기라는데 있습니다. 여기의 "강력(强力)"이라는 말은 표준 새번역에서는 '강한 무기'라고 번역했는데, 이 단어는 원래 헬라의 제우스 신에게나 붙인 최고의 신적 능력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경이 강력한 이유는 그것이 '신령한 능력(divine power)'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기는 인간의 용광로에서 달구어낸 육체적인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인생에게 주신 신령한 영적인 무기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7에서 바울은 이 성경을 "성령의 검"이라고 불렀는데, 이 신령하다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불같은 감동으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무기인가 하면, 견고한 요새도 무너뜨릴 수 있는 폭팔력이 있으며,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잘드는 비수"와 같은 파괴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즉 모든 사상과 철학을 산산조각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무기는 아무리 무서운 죄인이나 철저한 사상도 박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파괴력이 있는 무기입니다. 죄인들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총이나 칼로도 안되지만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 성경의 능력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손에는 '성령의 검'이 들여 있습니까 아니면 '돈키호테의 녹쓴 칼'이 들려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성경이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이 절대 진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진리"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바른 설명과 대답을 주는 진리라고 믿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은 겉만 번지러한 '가죽 장갑'보다는 끼면 낄수록 따뜻한 '털 장갑'과 같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성경은 인생의 기본적인 철학적 질문에 대한 바른 설명과 대답이다(타당성), 2)성경은 합리적이며 내적 체계에 일관성이 있다(일관성), 3)성경은 절대적이며 오류가 없는 정확한 정보이다(정확성), 4)성경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 실천할 수 있다(실천성), 5)성경은 죄인을 회개케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구원성) 등입니다.

둘째, 우리의 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적은 타락한 문화가 아니라 그 타락한 문화 뒤에 있는 사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사단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 영화로 소문난 '패왕별희'나 '클라잉게임'보다는 그 영화 뒤에 있는 잘못된 성담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적은 '사람'이나 '문화'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과 문화에서 과시하는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울어야 하는 것은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잘못된 철학과 이념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직면한 적도 '사상적인 적'이었습니다. 특히 5절에 보면 그 적을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1)"모든 이론"이라고 했고, 2)"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라고 했고, 3)"모든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20세기가 직면했던 적은 맑스주의와 같은 무신론적인 이데올로기나 아니면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상대주의와 같은 진리관이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세계관 뒤에는 반드시 악한 영들이 있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서 6:12) 이처럼 우리는 '사상의 세계'라는 동일한 영역을 두고 사단과 긴장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많은 문제 중에 하나가 동성애였습니다. 동성애자가 교회에 나오고 있었고, 동성애를 하다가 그만 둔 사람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저도 요즘 대학생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동성애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어느 대학교에서 조사한 바로는,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전교생의 80-85%가 '괜찮다'는 대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동성애를 하고 있습니까"했을 때, "예"라고 대답한 사람은 0.03%도 안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세계관 전쟁을 해야 할 필요와 소망이 있습니다.

적의 목표가 하나님과 진리를 대항하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세속사상은 고도의 전문성과 과학성을 자랑으로 하나님과 진리를 대항합니다. 사단은 세속 사상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장을 띄우고 있습니다. 그 도전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 분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상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으며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고 무신론적인 사상과 생활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상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파하라", 즉 '비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파한다"는 말은 대충 부숴놓는(destroy)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가루로 만든다', '박살낸다(demolish)'는 말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대결을 동반합니다. 대결이 동반되지 않는 진리는 진리도 아닙니다. 쉐퍼(F.Schaeffer)는 대결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1)무대결(no confrontation)이 있습니다. 2)사랑이 없는 대결(confrontation without love)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결을 위한 대결로써 무조건 비판만 일삼는 것입니다. 3)사랑의 대결(confrontation with love)이 있습니다.

사랑의 대결이란 비판할 때 잘못된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그 사람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잘못된 사상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퍼부어 대셨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인격을 파괴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격적으로 모욕하거나, 감정적으로 상처를 주면 대결은 잘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 것도 남는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의 동성애 문제는 그 지방에 유행하던 동성애 윤리가 비판없이 교회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동성애는 비판했지만 사람은 받아 주었습니다.(고린도전서6:8-11) 그래서 고린도전서 7:2을 보면 바울의 대안이 나오는데,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남자와 여자"란 말 앞에는 정관사가 하나씩 붙어 있는데, '한 남편'과 '한 여자'란 뜻입니다. 1부 1처, 즉 부부간의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종류의 성적 행위도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판할 때 무분별하게 비판하면 안됩니다. 성경에 비추어서 객관적으 비판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기독인들이 가진 종교적 색안경 때문에 탁월한 예술성이 있는 불교 유산을 막무가내로 평가절하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는 문화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상은 사상으로 대결'해야 합니다. 사상을 감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대립해서는 안된다.

셋째,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바울은 강력한 무기를 가진 기독교인들이 적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이제 남은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과 생각과 사상을 그리스도 앞에 복종시키라고 말합니다. 이 단계가 가장 어려운 단계이며 쉽지 않은 단계인데, 이것을 통합단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한 길을 택합니다. 1)독선적이고 종교적인 색안경을 끼고 객관성을 잃어버리거나 2)앞선 사람들에게 미리 비판해서 다 요리된 것을 요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고기를 먹고 싶으면, 잘 씹고 소화하는 법을 배울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다 씹어놓은 고리를 날름 받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옥석(玉石)을 가릴 수 있는 성경적인 비판력과 영적 통찰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두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로잡을 것"이 무엇인지, 즉 배우고 수용할만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배우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악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진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둑놈도 자기 자식에게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니까요. 무신론자나 비기독교인이 주장하는 학설이나 이론이라도 기독교의 사상과 부합하는 사상이 있다면 수용해야 합니다.

칼빈은 "플라톤에게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플라톤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다"고 한 적이 있답니다. 아무리 플라톤의 철학에 99%가 쓰레기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1%가 옳은 것이라면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성령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라브리의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라브리를 세운 복음주의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는 사르트르(J.P.Sartre)의 실존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실존 의식이라고 하는 '순간순간의 삶이 중요하다'고 하는데서 믿음이야말로 화석화되거나 형식화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실존적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설명의 형식은 사르트르에게서 빌려온 통찰력입니다. 쉐퍼는 그 말을 조심스럽게 인용했으나, 오늘날은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기독신앙이 실존주의 신앙이 되면 곤란하지만 순간순간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실존적 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학문을 통합할 때,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지 않고 "나에게" 복종시키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통합의 주된 실패 원인은 나에게 복종시키려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논리와 나의 지식' 앞에 무릎을 꿇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학문적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지적으로 항복하는데는 댓가가 필요하며, 그 댓가가 때로는 상당한 아픔을 가져옵니다.우리의 학문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지식이 이 땅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 통합 작업을 가장 훌륭하게 한 사람 중에 하나는 헨델입니다. 그의 불후의 명작 [메시아]를 들어보면, 독일식의 치밀한 조직과 짜임새, 이태리식의 수려함과 화련한 솔로, 영국풍의 웅장함과 합창의 묘미가 멋지게 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할렐루야' 코러스를 곡 중간에 두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적인 완성도까지 높혔습니다.


세상은 지금 세계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전쟁의 최전선에 배치된 정예군들입니다. 제발 그 최전선에서 도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전선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요즘은 동성애 뿐만 아니라 사오정과 같은 말장난도 문제지만 '제3의 길'과 같은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나 IMF와 같은 경제, 정치문제 등도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터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되게 하고, 성경과 학문, 그리고 생활이 하나가 되게 해서 이 나라와 교회를 바로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7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윤용빈 02/14 9


이 글의 목적은 서양 철학의 최근 동향을 간략히 서술하고 그것이 기독교적 학문 연구와 관련될 수 있는 점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고자 한다. 첫째로 서양 철학이 어떻게 현재의 상황, 즉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둘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내용을 소개함으로서 그것을 정의하고자 할 것이다. 셋째로 철학의 이러한 동향이 기독교 학문 연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넷째로 기독교 학자가 실제로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의 한 실례로서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해석학을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이 논고는 개혁주의 노선에 서 있는 북미의 기독교 사상가들이 철학의 이러한 동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철학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20세기의 서구 문화의 일반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데이빗 클렘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 팽배한 근대주의적 이상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불만과 위기감은 금세기 후반에 들어 과학에 대한 신뢰 상실과 환경문제에 봉착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일부에서 일어난 문명의 위기의식이나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 최근 들어 마침내 17세기 이후 4세기 이상 지속해온 "근대(近代)의 종말"에 대한 종합적이고 본격적인 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규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은 이 동향이 아직도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이루기보다는 여러가지 주장들이 논쟁을 벌이며 전개되는 단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넓게 보려면 적어도 근대 철학에 대한 극단적 비판인 데리다의 해체주의뿐 아니라 수정주의적 계몽사상가인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그리고 가장 온건한 대안이라 볼 수 있는 철학적 해석학을 주창하는 가다머 등의 삼대 조류는 물론 그 외에도 여러 학자들의 상이한 주장들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유파들에 어떤 공통성이 없는 것은 아
니다.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반형이상학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철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형이상학은 결국 복잡한 실재(實在)를 이해하기 쉽고 다루기 쉽게 이론적으로 체계화 하려는 노력이었다. 형이상학은 근대에 들어와 과학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객관주의적이 되고 말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점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 비판은 객관주의적 진리관의 몰락이 가져오는 상대주의의 위협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또 하나의 어려운 부담을 지워준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양극적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있다. 이와 연관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과제는 주체를 중심으로 삼는 근대 철학의 사고방식을 비판, 극복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근대 철학의 이론 중심적인 추상성에 반발하여 실천적·윤리적 요소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아가서는 문화, 사회, 정치적인 양상들을 철학의 본질적인 분야로 다루고 있다. 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일견 반계몽주의적이며 반인본주의적 성향을 가진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기독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문화와 그것의 정신에 맞서 도전하고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계몽주의 붕괴 후유증으로 비관적·허무주의적 상대주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주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가다머의 철학적인 해석학은 일상 언어를 통한 이해가 가진 존재론적 구조를 분석함을 통하여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진리관을 주창하고, 아울러 그 철학을 기반으로 책임과 공동체적 정신을 기조로 한 문화, 사회관을 펼친다. 또 북미의 일단의 기독 철학자들의 움직임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논의에 의미있는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은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주의 진리 앞에 굴복시켜야 할 사명을 가진 기독 학자들에게 커다란 도전과 기회를 제공한다.

9 창조타락구속의 개혁주의적 세계관
성경적 세계관 : 창조· 타락 . 구속(알버트 월터스)


알버트 월터스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개혁주의적 세계관
성경을 기초로 형성된 세계관을, 종종 개신교의 종교개혁에서 이름을 따서, 󰡐개혁주의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종교개혁은 죄와 구속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신선하게 재발견했다. 성경과 함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따라 살겠다는 소망이 이 개혁자들의 기치였다. 우리는 이처럼 성경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속적인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개혁자들의 길을 따른다. 지속적인 개혁이란 성경에 의해 늘 개혁되고 전통을 무반성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세계관의 정의
󰡐Worldview󰡑(세계관)라는 영어 단어는 독일어 󰡐Weltanschauung󰡑의 번역어이다. 이것은 󰡐철학󰡑과는 분명히 구별되며 아마도 독일 철학자 딜타이(Dilthey)에 의해서 대중화된 용법을 따랐던 화란의 신칼빈주의자들이 선호했던 󰡐세계 · 인생관󰡑(world-and-life view)보다는 덜 복잡하다는 이점이 있다. 받아들일만한 동의어로는 󰡐삶에 대한 관점󰡑 또는 󰡐신앙 고백적 비전󰡑등이 있다. 또한 우리는 더욱 포괄적으로 말해서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견지하고 있는 󰡐원칙들󰡑 또는 󰡐이상들󰡑의 전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세계관을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라고 정의하자. 이제 이러한 정의의 요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로, 󰡐사물들󰡑이란 말은 우리의 신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칭할 수
있는 말이다. 즉 이 말은 세계, 인간의 삶 일반, 고통의 의미, 교육의 가치, 사회 도덕성, 가정의 중요성 등을 모두 포함한다.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기본적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사물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세계관은 개인의 신념의 문제이다. 신념들은 󰡐인식적 주장󰡑, 즉 일종의 지식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감정이나 의견과는 구별된다. 즉 나는 사물들의 상태에 관해서, 또는 무엇이 사실인지에 관해서 일종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꺼 그러한 신념을 옹호하기 위해 논증한다. 나는 여기서 󰡐신조󰡑(credo), 즉 그것을 위해서 기꺼이 논증할 뿐만 아니라 돈의 지출이나 고난을 무릅쓰고서라도 옹호하고 주장하려고 하는 헌신적인 믿음이라는 의미에서 신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세계관은 한 개인의 확신과 관련된 것이다.
셋째로, 세계관이 사물들에 관한 기본적 신념들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관은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궁극적인 문제들, 즉 일반 원칙들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인간 생활에 관한 불변의 규범이 존재하는가? 고통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후 세계는 존재하는가?
마지막으로 ,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은 하나의 틀이나 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즉 그것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기본적 신념들은 다른 기본적 신념들과 충돌한다. 예컨대 결혼이 하나님의 계율이라는 신념은 이혼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관이 결코 내적 일관성을 결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관성이 없는 세계관이 많이 있다. (비일관성은 세계관에 관한 가장 흥미 있는 사실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 그러나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관성 있는 하나의 유형을 이루고자 하는 경향이며, 심지어는 비일관성조차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정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관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더욱더 어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 신념은, 실제적인 비상 사태나 시사 정치 문제, 자신들의 신념과 충돌하는 확신들에 직면하게 될 때 쉽게 드러난다. 예컨대 군대 징집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복음주의 또는 반문화, 평화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죽음의 상황에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하는가? 낙태, 사형, 자녀 교육시의 체벌, 동성 연애, 인종 차별, 인공 수정, 영화 검열제도, 혼 외 성 관계 등에 관한 견해는 어떠한가? 이 모든 화제들은 어떤 일정한 유형을 보여 줌으로써 한 사람의 세계관의 내용을 시사해 주는 반응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세계관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을 갖는 것은 성인(成人) 됨의 한 요소인 것이다.

세계관의 역할
세계관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는 세계관이 우리 삶의 인도자의 기능을 한다고 믿는다. 세계관은 그것이 의식되지 못하고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조차도 나침반이나 약도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큰 방향을 제시해 주고, 우리 앞의 사건과 현상들의 혼란 속에서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감지하게 해준다. 세계관은 사건과 쟁점들, 우리 문명의 구조와 우리 시대를 평가하는 방식을 상당량 결정한다. 그것은 우리 시계에 들어오는 다양한 현상들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정하도록 해준다. 인간의 독특한 성격 가운데 하나는, 인간은 세계관이 제공하는 이와 같은 방향 감각이나 인도 기능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자의적인 견해를 취하거나 전적으로 무원칙적인 결정을 할 수 없는, 불가피하게 책임을 지닌 피조물이므로 무엇인가에 의해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따라 살아야 할 어떤 신조, 가야 할 길을 보여 주는 어떤 지도를 필요로 한다. 우리 삶에서 부딪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결정할 때 우리는 세계관의 인도를 받는다.
다시 한번 우리는 비일관성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대립되는 신념들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종종 우리의 신념들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의 주장과는 달리 세계관이 인도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항해하고 있는 배가 폭풍으로 인해 원래의 항로에서 다소 벗어나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경향, 즉 키잡이가 제 항로를 찾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세계관

그러면 세계관은 성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은 분명하다.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세계관은 성경적일 때만 우리의 생활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다. 이 말은 세계관 문제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이 말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에 실패할 때, 우리의 신념의 많은 것들, 심지어는 기본적인 신념조차도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고 있는 문화에 취하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세계관을 성경의 가르침에 더욱 일치시키는 개혁의 과정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나 그 핵심적인 목적은 가르침이다. 우리가 우리의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할 때는 더욱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성경에 접근해야 한다. 바울은 구약을 가리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가르침)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 15:4) 라고 말한다. 신약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때문에 󰡐건전한 교리󰡑 - 이론적인 신학으로서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인생이 삶과 죽음의 현실에서 따라야 할 실천적인 교훈으로서의 교리 - 가 사도들의 증거에서 그 중심을 차지한다. 바울이 같은 구절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성경은 바로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내와 안위를 주어 우리로 하여금 실망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굳게 잡도록 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했던 󰡒마음을 새롭게 함󰡓(롬 12:2) 에도 포함된다. 만일 우리가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 을 분별하려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성경에 비추어 우리들의 세계관을 점검하고 수정하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의 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의 삶과 성경

성경의 가르침을 이처럼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교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세속적󰡑이라는 훨씬 더 넓은 의미의 인간 생활과 구분해서, 기본적으로 󰡐거룩한󰡑 또는 󰡐종교적󰡑인 영역, 즉 신학이나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에만 국한시키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세계관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교회관이나 신관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매우 위험한 오류이다. 물론 우리는 성경에서 세례, 기도, 하나님의 택하심, 교회 등에 관해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술공학, 경제학, 자연과학을 포함하여 우리의 삶과 세계 안의 모든 것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은 노동, 사회집단, 교육과 같은 일상적인 세속적 문제들도 포함한다. 만약 이러한 문제들을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성경적 범주에 기초한 세계관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종종 비종교적이라고 가정되는 이런 영역들은 세속화된 서구의 경쟁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정복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경 신학의 기본적 개념들을 우리의 세계관과 관련시키는 것, 혹은 차라리 이러한 개념들이 우리 세계관을 구성하도록 해야 함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주장은 신자라면 성경과 그 가르침을 소위 󰡐종교적인󰡑 영역으로 제한 시키지 말고 바로 지금의 문화 전체와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한 하나의 호소이다.

신학,철학과 세계관

이제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가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과 신학,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야기된다. 이 문제는 혼동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데, 일상적인 용법에서는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사물들에 관한 포괄적인 조망들을 󰡐신학󰡑이라 부르고, 이성의 권위에 호소하는 포괄적인 조망을 󰡐철학󰡑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의 어법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삶에 대한 조망과, 신학이나 철학 교수들이 가르치는 전문적인 학문 분야와의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학이나 철학은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기에는 어려운 전문적인 탐구 분야이다. 그것들은 특별한 기술,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 상당한 정도의 교육을 요구하며, 또 훈련 받은 전문가들의 분야이다. 그러나 세계관은 상당히 다른 문제이다. 삶에 대한 조망을 갖기 위해서 학위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성경적 지혜나 건전한 교리가 고급의 신학 훈련으로 증가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이론󰡑의 본질을 정확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하지 않지만, 철학과 신학은 학문으로서 과학적이며 이론적인 데 반하여 세계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관은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일상적인 경험의 문제요, 모든 인간 지식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따라서 그것은 성질상 비과학적이요, 오히려 전(前)과학적이다. 왜냐하면 과학적인 앎은 항상 일상적인 경험의 직관적인 앎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과학이나 이론의 인식 차원보다 더 기본적인 인식 차원에 속한다. 미학이 미에 대한 모종의 선천적인 감각을 전제로 하고 법 이론이 어떤 근본적인 정의감을 전제로 하듯이, 신학과 철학은 세계에 대한 어떤 전이론적인 관점을 전제로 한다. 신학과 철학은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다듬은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세계관, 철학, 신학은 범위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지만, 세계관이 전(前)과학적인 데 비해 철학과 신학은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철학과 신학의 차이는 구조와 방향이라는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더욱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철학은 사물들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전체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포괄적이고 과학적인 학문, 즉 세상을 감염시키는 악과 그 치료책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은 사물들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전체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포괄적이고 과학적인 학문, 즉 세상을 감염시키는 악과 그 치료책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철학은 성경의 기본적인 범주에 비추어서 피조물들을 보고, 기독교 신학은 피조물들의 기본적인 범주에 비추어서 성경을 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계관은 구조의 문제와 방향의 문제에 똑같이 관심을 갖는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특징

이제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대략 이해했으므로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특징을 살펴보자.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어떤 특징 때문에 이교적, 인본주의적인 세계관 및 다른 기독교 세계관과 구별되는가?
역사적 정통 기독교의 주류 안에서조차도 서로 다른 기독교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정통 기독교 교회들은 상당히 많은 기본적인 성경적인 가르침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희랍 정교, 로마 카톨릭,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이 상당한 정도의 동일한 성경적 유산과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 교회 안의 깊은 분열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분열은 좁은 의미에서의 신학상의 차이점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차이점도 반영하고 있다. 이제 개혁주의적 세계관과 다른 기독교 세계관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점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러한 차이점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법은 헤르만 바빙크가 제시한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정의를 이용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그가 창조했으나 타락한 세계를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화목케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그것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신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이러한 전(全)기독교회의 삼위일체적 신앙 고백의 모든 주요 용어들을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화목케 함󰡑, 󰡐창조함󰡑, 󰡐타락함󰡑, 󰡐세계󰡑, 󰡐새롭게 함󰡑, 하나님의 나라󰡑등의 용어들은 그 범위가 우주적인것으로 이해한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것도 성경적 신앙의 이러한 기초적인 실체들의 범위 밖으로 나갈 수 가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모든 기독교 세계관들은 이러한 각 용어들의 범위를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한다. 그들은 각각의 용어들을 일반적으로 󰡐종교적󰡑 또는 󰡐거룩한󰡑 영역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의 경험의 세계 중의 단지 어떤 한정된 영역에만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한정된 영역 밖에 있는 모든 것은 󰡐세상적󰡑, 󰡐세속적󰡑, 󰡐자연적󰡑, 󰡐속세적인󰡑 영역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모든 소위 󰡐두 영역󰡑 이론들은 기본적으로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변형체로서, 우주의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통합적인 조망과 대조된다.
이것이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독특성을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세계관의 특징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이 세계관은 󰡐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는 통찰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자연이란 창조된 실체를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이 원래의 선한 창조계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구속은 재창조이다. 만일 이 말을 좀 더 자세히 들여 다 본다면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확언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근본적인 차원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선한 창조, 죄로 인한 창조계의 타락,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통한 창조계의 회복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조 교리가 매우 중요함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구원의 전체적인 핵심은 죄로 타락한 창조계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개혁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은혜가 자연 이외의 어떤 것을 포함하게 되며, 그 결과 구원은 기본적으로 비창조적, 초창조적, 심지어는 반 창조적인 어떤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창조계에 가져온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거룩한 영역에 속하며 원래의 창조계는 세속적 영역에 속한다.


교재의 이해와 토론을 위한 문제

1.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2.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점검할 때 무엇을 최종적인 지침으로 삼아야 하는가?
성경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성경 본래의 용도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성경의 본래 용도는 무엇인가?
3.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의 삶의 내용을 주요하게 결정하는 것은 세계관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개인이나 사회를 평가할 때 어떤 관점에서(즉, 무엇을 중심으로) 평가하는가? 성경의
관점이 저자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가?(잠 4:13 ; 전 3:11 ; 롬 1:18이하; 대하
36:11이하)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 잠언 4:13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
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 전도서 3:11

4.기독교 안에도 다양한 세계관이 있는데, 이런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취하
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세계관과 문화 (프란시스 쉐퍼)

쉐퍼는 사상은 자체에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어떤 세계관이든지 사상은 삶의 양태, 즉 문화를 만들며, 문화는 사상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와 문명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은 사상에 근원을 둔다. 인간은 내적 정신 생활에 있어서는 특이한 존재이다. 즉 그들의 정신 세계는 그들의 행동을 결정짓는다.󰡓
그가 현대 문화를 심각하게 본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세계관은 결과를 낳으며 필연적인 결과를 낳는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쉐퍼는 모든 문화가 복음 안에서 통일되기를 추구했다. 그가 일했던 서구 교회는 16세기에 되찾았던 만물에 미치는 그리스도의 주재권(Lordship, 골 1:17~18)을 17세기의 경건주의 시대 이후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화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해 버렸고 이원화 시켰던 것이다.
특히 20세기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반문화적인 사고가 팽배하던 시대였다. 대학생들은 학교에서 학문화 신앙을 통합하는 것을 포기했고, 직장인들은 일터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작품 활동에서 메시지를 상실한 채 심미적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다. 영화인들은 스크린 에서 절망을 부르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쉐퍼는 아퀴나스 이후로 제기된 자연과 은혜의 분리를 중단하고, 정신계와 물질계의 이원화를 배제하고, 신학과 타 학문 사이의 분열을 멈추고, 복음과 문화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복음과 문화, 그리스도와 세상이라는 분리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