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나에게 많은 술을 사 주었다’ 김재철/칼럼니스트, 농학박사 2015-07-12 13:49:43최종 업데이트 : 2015-07-12 13:49:4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
| 어제 밤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퍼 마셨다고 자랑(?)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전혀 삐뚤어진 코가 아니다. 새벽녘 쯤 다시 반듯해 졌을까? 그런데 왜 코가 삐뚤어지게 마셨다고 하는 걸까. 난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그렇게까지 마신 기억은 없다. 아마도 못난 코나마 삐뚤어지는 것이 겁나서 그랬을 게다. 한국의 3소(三蘇), 변 씨 삼형제 중 막내인 수주 변영로는 암울한 일제시대 청동시인 공초 오상순 등과 함께 성균관 뒷산에서 대낮부터 술에 만취하여 발가벗은 채 소등을 타고 종로 거리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주선 변영로의 '명정40년'에 나오는 이야기다. 시인 조지훈은 주도유단(酒道有段)이라 하여 술꾼을 18단계로 분류하기도 했다. 동심의 시인 천상병은 하루를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낸다. 술값은 만나는 사람에게 손바닥을 보여 얻어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수 김인 9단이 가장 많이 뜯기었다나.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술을 가까이했다 하더라도 이들 주선(酒仙)들 앞에서 술 이야기를 꺼낼 처지는 아니다. 하지만 비록 주력(酒力)은 약하지만 술을 가까이 한 지는 벌써 50년이 넘으니 ... |
프로기사 인명록 (1)
가내지존추천 0조회 8300.08.13 03:42댓글 0
| 프로기사 인명록 1 <*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들의 프로필을 소개합니다. - 1> <1> 조남철(趙南哲) 九단 23년 전북 부안 출생. 37년 일본에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도 장에서 바둑수업. 41년 일본기원에서 입단한 후 43년 귀국했다. 해방 전후, 바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거의 전무했던 척박한 여건 속 에서도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일념으로 48년 '조선기원', 49년 '대한 기원' 등을 차례로 설립하면서 우리나라에 현대 바둑을 소개, 보급했고 그후 지금까지 한국의 바둑을 육성, 발전시키는 데에 앞장서 왔다는 것 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발족시킨 '조선기원'(48년)과 '대한기 원'(49년)이 오늘날의 '한국기원'이 모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초창기에는 당연히(?) 적수가 없어 국내 최초의 본격 바둑타이틀인 '국수(國手)'를 9연패 하는 등 6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 동안 한국바둑 의 얼굴이자 실력 제일인자로 군림했었다. 83년 9단으로 추대되었고 84년에는 일본바둑계로부터 '대창상(大倉賞)'을, 89년에는 우리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 등을 받았으며, 국 내 최초의 바둑책인 '바둑개론'(본래의 제목은 '위기(圍棋)개론'이었다) 을 비롯해 26권의 바둑저서를 갖고 있다. 현재 한국기원 명예 이사장이며 한국일보 명인전의 해설위원. 70을 넘 긴 지금도 가끔은 기전에 출전해 손자뻘의 후배들과 승부를 겨룬다. 95년 8월 현재도 국기전 본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타이틀 획득 통산 30회. <2> 김 인(金寅) 九단 43년 전남 강진 출생. 58년 중학생 신분으로 입단의 관문을 뚫고 이후 승승장구했으나 '조남 철 아성'을 허무는 데에는 역부족임을 느끼고 四단이던 62년 홀연히 일 본유학을 떠나 기타니 도장에서 약 1년간 수업하고 돌아와 65년 마침내 조남철 八단(당시)으로부터 '국수(國手)'를 쟁취했다. 일본 유학시절 일본 바둑계의 유력인사들이 "앞으로의 세계 바둑계는 '김죽림(金竹林)'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逸話)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김죽림'의 '김'은 물론 김인 9단을 가리 키는 것이었고 '죽'은 오다케(大竹英雄), '림'은 임해봉(林海峰)을 지칭 하는 것이었는데, 그 예언은 얼마 후 현실로 나타났다. '국수' 쟁취를 시발로 조남철 9단의 모든 타이틀을 차례로 빼앗으며 한국 바둑계 제2세대의 막을 열어 이후 약 10년간 각종 타이틀을 독식하 면서 '김인 시대'를 구가했다. 68년 시즌에 기록한 40연승이 저간의 사 정을 웅변하고 있다. 조남철류의 실리바둑에 대해 '두터운 바둑'을 선보인 것도 큰 공로로 평가되고 있으며 인품도 바둑처럼 중후해 '영원한 국수'로 불리며 많은 후배 기사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젊었을 때부터 원낙 과묵해 정창현 七단(83년에 작고)을 비롯한 동료기사들로부터 '크렘린'이란 별명을 얻었다. 한국기원 총무이사와 제5-8대 기사회장을 역임했다. 두주불사의 주량 에 한국기원 기사 중에서는 손꼽히는 등산애호가. 현재 세계일보 기성전 해설위원. 타이틀 획득은 조남철 九단과 똑같이 통산 30회. <3> 윤기현(尹奇鉉) 九단 42년 서울 출생. 중학교 때 바둑을 배워 1년반만에 입단하는 기재를 보였다. 바둑 입문에서 입단까지 최단거리 기록으로 남아 있다. 87년 국 내에서 다섯 번째로 9단에 승단했다. 입단 이후 김인의 라이벌로 부각되었으나 타이틀 도전에 계속 실패하 자 68년, 26세라는 '늦은 나이'와 六단이라는 '고단의 체면'에도 불구하 고 일본 유학을 떠나 2년간 기타니 문하에서 바둑수업을 하고 돌아왔던 집념파.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윤기현은 포석의 제일인자라는 소리를 듣다 가 72년에 드디어 김인으로부터 제16기 국수를 쟁취해 17기까지 2연패했 다. 타이틀 획득은 그것이 전부였고 국수 재위 불과 2년만에 후배 하찬 석에게 국수 타이틀을 양도했다. 이렇듯 정상에 머물렀던 기간은 짧았지 만, 일본 바둑계의 거장 다카가와(高川 格) 9단을 방불케 하는 '평명유 장'의 기풍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오늘날까지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일 정한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계속 활약을 하고 있다. 그 연배의 기사로는 드문 케이스. 직업기사로서의 한 모범을 보여 준다는 평을 듣고 있다. 젊었을 때의 별명은 '황소'. 그밖의 바둑활동도 다양해 81년부터 한국경제신문의 바둑란을 집필해 오고 있으며 82년부터 95년 봄까지 MBC 제왕전의 해설을 담당했다. 제9-10대, 12-15대 기사회장을 역임. 취미인 테니스가 프로급. 중학생 인 장남(윤사련)이 현재 일본에서 프로기사를 목표로 바둑수업을 하고 있다. <4> 조훈현(曺薰鉉) 九단 53년 전남 목포 출생. 62년 9살 때 세계최연소 기록으로 프로에 입문 한 불세출의 바둑천재. 9세 입단의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 다. 입단하자마자 곧 일본으로 건너가, 오청원(吳淸源) 하시모토 우타로 (橋本宇太郞) 등 중국과 일본의 천재기사를 배출했던 천재스쿨, 세고에 (瀨越憲作) 9단 문하생이 되어 일본기원을 통해 다시 입단했고 5단에 올 라가 있던 72년 병역의 의무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10년간 바둑수업을 했다. 귀국 후 한동안은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으나 74년 시즌에 들어서 면서 천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최고위(最高位)를 필두로 타 이틀을 하나 둘씩 잠식했고 77년 시즌에는 31연승을 기록하는가 하면 80 년초에는 전타이틀을 석권하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82년에는 한국 최초로 九단에 올랐고 80년에 이어 82년과 86년에 다시 전관왕에 오르는 등 무려 세 차례나 한국 바둑를 천하통일하면서 완벽한 일인체제를 구축했고 10년 동안의 장기집권 속에서 온갖 영예를 독식했 다. 88년, 한국 프로기사 중에서는 최초로 연수 1억원을 돌파한 것도 기 록이라면 기록 국수전 10연패(통산 14회 우승), 왕위전 9연패, 패왕전 16연패, 최고 위전 8연패(통산 15회 우승) 등 95년 4월30일 현재 통산 타이틀 획득수 1백33회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작성중에 있다. 89년에는 제1회 '응창기배'에서 우승함으로써 세계 바둑계의 황제로 등극했고 94년에는 '동양증권배'와 '후지쓰배'를 석권해 세계 3대 바둑 대회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또 95년 8월에는 제12기 박카스배 결승3번기 제3국에서, 국내 최초로 1천승 기록을 달성했던 서봉수 9단에게 승리를 거두어 두 번째로 1천승 고지를 밟았다. 화려한 감각과 스피드, 백병전의 기술 등은 당대 제일, 세계 제일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일단 불리해진 국면을 뒤흔들어 기어이 역전을 시 켜 놓는 힘은 가히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무튼 조훈현의 출 현으로 한국 프로바둑계는 전반적으로 한 점 이상 그 수준이 향상되었다 는 것이 바둑계의 통설이다. 술은 한 방울도 못하는 특이한 체질이나 담배는 체인 스모커. '장미' 하나만을 피우고 있다. 별명은 '제비'. 동료기사들과 자주 등산을 다니 던 시절 산을 타는 속도가 원체 빨라 동료들이 지어준 것인데 조훈현의 전매특허인 반상의 '속력행마'와도 잘 어울린다는 평이다. <5> 서봉수(徐奉洙) 九단 53년 대전 출생. 조훈현 九단과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바둑천재. 중학교 때 처음 혼자 바둑을 배웠는데, 바둑을 배운지 불과 2년만인 70년에 입단대회를 통과하는 출중한 기재를 선보였다. 프로에 입문해서 는 초단의 신분으로 곧장 명인전 본선에 올라가 바둑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본선이 진행되는 동안 二단으로 승단하면서 태풍의 눈으로 돌변하 더니 김인 정창현 등 당시 정상급들을 제치고 도전권까지 직행하는 괴력 을 발휘했다. 70년대 초반 다소 침잠해 있던 한국 바둑계를 뒤흔든 '서 봉수 충격'이었다. 서봉수 돌풍은 거기서 그치지를 않고 급기야 조남철 八단(당시)으로부 터 '명인'을 쟁취함으로써 한국바둑사상 최초의 대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다. 서봉수의 나이 약관 18세, 二단 때의 일이었다. 이후 서봉수는 비바람을 몰고다니면서 정창현 조훈현 윤기현 등 당대 실력자들의 도전을 차례차례 꺾고 '명인'을 5년 연속 제패하면서 70년대 중반 한국 바둑계에 춘추전국시대를 여는 선봉의 역할을 담당했다. 조훈현이 천하제일검으로 군림했던 70년대 중반부터 90년까지 조훈현 의 유일한 적수로서 장장 15년을 항쟁하면서, 조훈현 일색이 될 뻔했던 한국 바둑계를 '구출한' 사람도 서봉수였다. 15년 동안 서봉수는 거의 전 기전의 도전권을 독식하고 끊임없이 조훈현에게 쳐들어가 조훈현 제 국의 일각을 허물곤 함으로써 '조-서 시대' '백년전쟁'이라는 바둑사적 술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조훈현의 그늘 속에서 만년 2인자의 비애를 씹어야 했던 서봉 수였는데, 93년 제2회 응창기배 때 준결승에서 조치훈을, 결승에서 오다 케를 꺾고 우승, 제2대 세계바둑왕에 취임하는 것으로 한을 풀었다. 86년에 국내 네 번째로 九단에 올랐고 94년 11월에는 제29기 왕위전 본선리그를 통해 국내 최초로 통산 1천승의 대기록을 수립했다. 근성이 뛰어나고 계산에 강하며 실리에 밝은 기풍으로 타이틀 획득 통산 24회, 준우승 60회. '야성의 귀재' '들풀의 생명력'을 지닌 기사로 불리며 별명은 '표범'. <6> 유창혁(劉昌赫) 九단 66년 서울 출생. 국민학교 3-5학년 시절이었던 76-79년 '어린이 국수' 를 3년 연속 제패(제6-8기)함으로써 어린이 바둑계를 평정했고 79년에는 제6회 '학초배'를 차지해 국민학생으로서 전국규모의 성인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등 일찍부터 '미완(未完)의 대기(大器)' 로 촉망받았던 기재. 이때부터 유창혁은 곧 입단하리라고 예견되었지만 중학교에 진학한 후 가정형편상 바둑에 전념할 수 없어 한동안 바둑과 멀어져 있다가 5년이 나 지난 84년, 그 해 여름 세계아마바둑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고 돌아온 직후, 가을에 가서야 비로소 프로에 입문하게 되었다. 입단 이후에는 과연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며 파죽지세로 치고올라가 88년 11월, 조훈현으로부터 제6기 '대왕'을 쟁취, 조훈현-서봉수의 15년 전쟁으로 초토화해버린 한국 바둑계의 대지에 한 줄기 후련한 소나기를 뿌려 주었고 90년 12월에는 다시 조훈현으로부터 당시 국내 최대 타이틀 이었던 제2기 기성을 탈취함으로써 명실상부 세대교체의 기수가 되면서 '일지매' '세계 최고의 공격수' 등의 별명을 얻었다. 92년 6월에는 이창호로부터 제26기 왕위를 빼앗아 95년 8월 현재 4연 패(連覇) 행진중이며 六단에 승단했던 93년 여름에는 제6회 '후지쓰배' 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바둑의 그랜드 슬램 달성의 대미를 장식했다. 94년에는 '박카스배'를 추가해 타이틀 획득 통산 7회. 현재로서는 타 이틀 싸움에서 이창호에게 많이 밀리고 있는 편. 화려하면서도 두터움을 좋아하고 중앙경영이 일품이며 매우 공격적인 기풍. <7> 이창호(李昌鎬) 九단 75년 전주 출생. 한국 바둑계의 괴동. 20세기 현대바둑사의 불가사의. 국민학교 입학을 전후한 무렵 할아버지에 의해 기재가 발견되어 유명 아마-프로기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84년 서울에 올라와 국내 최초의 내제 자로 조훈현 九단의 문하에 들어갔다. 86년 국내 두 번째의 최연소 입단기록인 11세 프로 입문, 88년 세계최 연소 13세 도전자(제28기 최고위전)를 거쳐 89년 8월 제8기 KBS 바둑왕 전에서 우승해 세계 최연소 14세 타이틀 홀더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그래도 바둑계에서는 "이창호가 스승 조훈현의 바통을 넘겨 받으려면 앞으로 10년, 아무리 빨라도 5년은 지나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지 만, 이창호의 성장은 일반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그것이었다. 90년 2월, 이창호는 스승 조훈현으로부터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스승 의 본거지였던 제29기 '최고위'를 쟁취해 세상사의 공교로움을 보여 주 더니 그길로 곧장 달려 그해 가을에는 역시 스승으로부터 '국수'(제34 기)의 대통을 넘겨 받았다. 90년 봄부터 여름까지 이七단이 기록한 41연 승은 현재까지 최다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95년 8월 현재에 이르러서는 무려 13관왕에 올라, 입단 10년 이 채 안된 시점에서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때는 일본의 요다(依田紀基) 九단을 비롯해 외국기사에게는 성적이 좋지 않아 '국내용'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92년 제3기 동양증권 배에서 임해봉을, 93년 제4기 동양증권배에서 조치훈을 연달아 꺾으며 타이틀을 2연패함으로서 징크스에서 벗어났다. 94년에 七단 승단. 타이 틀 획득 어느새 47회. 스승 조훈현과는 5년을 한 집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기거하면서 가르침 을 받았으나 기풍을 비롯해 여러 가지 면에서 스승과는 대조적. 유-불리를 떠나 표정의 변화가 없으며 유리하다 해서 경거망동하는 일 이 없고, 불리하다 해서 초조해 하거나 무리수를 두거나 하는 일도 없 고, 형세가 유리하다 싶으면 결정타가 있어도 보류하고, 불리하다 싶어 도 오히려 느긋하게 집을 챙기며 기다리는 그런 기풍. 그러다가 끝내기 승부가 되면 그야말로 '신산(神算)'의 능력으로 정확 하게 반집을 찾아내는 바둑. 그 철저한 무표정과 한없는 기다림과 탁월 한 계산력으로 세계 바둑계의 열강들을 질리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이창 호인 것. 최근에는 속도와 파괴력이 가미되어 더욱 막강해진 전력. 조훈 현 九단의 뒤를 이은 이창호 七단의 등장으로 한국 프로바둑은 끝내기 부문이 눈부시게 발달되면서 전반적으로 다시 반 점 정도 수준 향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둑계의 통설이다. '강태공' '돌부처' '탱크' '80노인' '끝내기의 달인' '외계인' 등 별 명도 많다. '은진미륵' '미륵불' 등은 '돌부처'에서 파생된 별명들. <8> 장수영(張秀英) 九단 52년 인천 출생. 노력파 계보의 수장격으로 조훈현 九단과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 71년에 입단해 92년 九단에 올랐다. 체격이 두툼한데다 저단 시절에는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기풍이어서 '장비'라는 별명으로 통했으나 이후 아주 섬세하고 질긴 스타일로 기풍 의 변모를 보이면서 정상권에 진입했다. 장고파에 속한다. 입단부터 지금까지 성실한 자세로 큰 기복 없이 꾸준히 성적을 내고 있으며 80년대 초반에는 '도전5강'이 한 사람으로 주목받았으나 아직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어 왕위전 최고위전 동양증권배 등에서 준우승만 9 회를 기록하고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신 대국중에는 성냥개비를 부러뜨리는 버릇이 있었으나 요즘은 그 모습을 잘 볼 수 없다. 현재 한국기원 상임이사이자 동양시멘트 지도사범. <9> 백성호(白成豪) 九단 56년 서울 출생. 72년 입단. 손꼽히는 미남 기사이며 미성의 소유자. 학창시절에는 전교 1,2등을 다투었던 수재였는데, 바둑의 매력에 빠져 결국 프로기사행. 논리정연한 행마를 구사하며 두터움을 선호하는 기풍으로 80년대 초, 중반 '도전5강'의 멤버로 활약했다. 정상급의 기량을 갖추었으면서도 93 년 제1기 한국이동통신배 고단자전 우승 외에는 아직 본격 타이틀과는 인연이 닿지 않고 있다. 승부근성이 좀 부족하다는 것이 결점으로 지적 되고 있다. 이론에 밝아 해설이 특히 명쾌한 바 있어 앞으로 케이블바둑 시대가 되면 크게 활약하게 되리라는 것이 주변의 중론이다. 천성적으로 온후한 인품이며 대인관계의 매너가 깨끗해 아마추어 팬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음악에도 소양이 있어 청소년 시절에는 연주활동도 했던 실력. 저서로 '행마법 마스터'가 있고 현재 (주)LG의 지도사범. 95년에 九단 으로 승단했다. 겉으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어서 한국기원의 각종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법은 드물지만 온건합리주의의 성향을 자타가 공 인하고 있어 문제해결의 중재역을 위임받을 때가 많다. <10> 서능욱(徐能旭) 九단 58년 인천 출생. 재주형의 속기파. 72년 14세 입단으로 최근 한국기원 연구생들의 10대 입단이 줄을 잇기 전에는 손꼽히는 조기입단 기록 보유 자였다. 수읽기가 빠르고 전투력이 막강한, 출중한 기재여서 일찍부터 "조만간 큰 일을 낼" 인물로 주목받았으나 어떤 바둑이든, 바둑의 비중에 관계없 이 속기로 일관하는 바람에 아직 타이틀 홀더로는 등록을 못하고 있다. 80년대 초반 '도전5강'의 한 멤버였으며 별명은 손오공. 축, 장문만 아니라면 일단 끊고 보는 호전적 기풍이어서 바둑은 어지럽게 되기 일쑤 이고 패가 나는 바둑이 많아 '패능욱'이라는 애칭도 있다. 전투력에 관한 한 일본, 중국의 기사들도 혀를 내두르며 높이 평가하고 있는 터이 다. 대왕전에서는 창설부터 제4기까지 4년 연속 준우승한 진기록을 갖고 있다. 대왕전 최고위전 등지에서 준우승 13회를 기록중. 국면의 스케일이나 대담무쌍함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사 나이. 속기의 폐습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가 있었는지 몇년 전에는 손목에 염주를 걸고 나와 염주알을 굴리며 스스로의 속기를 스스 로가 컨트롤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정도로는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동료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90년에 九단으로 승단했다. 현재 (주)대우의 지도사범.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