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테마 / 여행 사진

[전주]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향교·한벽루·벽화마을·오목대.

작성자청마|작성시간25.05.01|조회수215 목록 댓글 0

 

[전주]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향교·한벽루·벽화마을·오목대.

 

□ 일 시 : 25년 04월 27일 (넷째 일요일 / 맑음) 

□ 출발지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1(풍남문)

□ 도착지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1(풍남문)

 걷기 구간 : 한옥마을 주변.

□ 코스 :  풍남문 〉남부시장(점심) 〉전동성당  〉경기전 한옥마을  〉남천교  

전주향교 한벽당 〉한벽굴  〉옥류벽화마을(구강재)  〉자만벽화마을

이목대·오목대 한옥마을 전동성당  풍남문.

 

□ 함께한 카메라

카메라 바디 : 캐논 EOS 5D Mark IV.

렌즈 : EF 16-35mm F2.8L III USM.

        EF 70-200mm F2.8L IS III USM.

 

 사진  청마(靑馬)

 

 

덕진공원을 둘러보고 풍남문옆 남부시장에 들려 점심을 한후 한옥마을 주변을 둘러 보기로 하고 풍남을 시작으로  전동성당으로 이동하여 주변을 담아본다. 원래는 색장정미소를 먼저 가려고 했었는데 버스 배차간격이 너무 길어서 다음으로 미뤄본다. 경기전도 그냥 지나칠려다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고, 휴일이라 그런지 엄청난 인파에 사람구경을 하는듯 어딜가도 많은 인파로 그 넓은 도로가 좁을정도이고 남천교 전주천변으로 나가니 다닐만하다. 향교도 둘러보고 전주에 올때마다 이곳은 다 둘러보곤 했는데 못가본곳 한곳 한벽당을 가보기로 하고 천변길을 따라 한벽당에 올라본다. 

풍남문[豐南門]

전라북도 전주시 전동에 위치한 전주성의 문. 대한민국 보물 제308호이다. 1389년 고려의 제34대 왕 공양왕이 건설했으며, 당시의 명칭은 명견루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1767년(영조 43)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재건된 이후 풍남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에 이른다.

유명세를 타고있다는 풍남피순대집에서 점심을 한다.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 1길 19-3의 전주 남부시장은 조선 중기 때부터 전주성 남문 바깥에 섰던 남문장의 역사를 이은 오래된 전통시장이다. 일제강점기 때 전주성 동서남북에 섰던 장들을 하나로 통합해 남부시장이라는 명칭을 얻었고, 점포 수 794곳, 시장 면적 21,349m2인 남부시장이 오늘날에는 시장 2층에 청년몰을 유치하고 한옥마을과 함께 주말에는 야시장을 개설하여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보물 제308호. 일반적인 성문과 마찬가지로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기대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중층문루가 있다. 1층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2층은 앞면 3칸, 옆면 1칸이다. 1734년(영조 10) 성의 시설이 낡아서 수축할 때의 공사 내역을 기록한 조현명의 〈명견루기 明見樓記〉에 의하면, 이 성문은 조선 초기에 도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이 축성했다고 한다.

처음 성(城)을 수축할 때 남문 위에는 명견루라는 3층 문루가 있었는데, 1767년 3월 화재로 소실되자 그해 9월부터 관찰사 홍낙인(洪樂仁)이 재건을 시작했다. 이때 현재의 모습처럼 2층 문루가 되었으며 풍남문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성벽과 나머지 성문은 자취를 감추고 이 문만 남게 되었다. 1980년 중수공사 때 풍남문 양쪽에 있었다는 포루와 종각을 옹성과 함께 복원했다.

전주전동성당(全州殿洞聖堂)

사적 제288호. 대지 약 1만 3,200㎡, 건물면적 약 625㎡이다. 1891년 프랑스인 신부 보두네가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푸아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 벽돌을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서, 내부 열주는 8각 석주로 되어 있으며, 석주 사이는 반원의 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는 곳으로 천주교회사에서 많은 순교자를 낸 곳으로 꼽힌다. 이 성당은 자연순교지의 하나가 되어 있는 전동의 풍남문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과 진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 성당은 바로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던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곳에 있다.

1891년(고종 28) 보두네(Francis Baudounet) 신부가 전주 남문 밖에 집을 매입하고 정착하였다. 그 뒤 1908년 프와넬(Poisnel)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축에 착수하여 1914년에 준공을 보았다. 벽돌로 된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건물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외양상 유사한 점이 많으나 건축양식상으로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 벽돌을 사용하여 섬세한 모양을 꾸며낸 점은 같으나 반면에 아치의 모양이나 종탑의 양식은 전혀 다르다. 내부 열주(列柱)는 8각의 석주(石柱)로 되어 있으며, 정면 중앙의 종탑부는 12개의 채광창을 돌린 12각형 고상부(鼓狀部) 위에 12각의 총화형(葱花形)으로 된 둥근 지붕을 얹었고, 좌우에는 그보다 약간 작은 8각형의 고상부 위에 8각의 지붕을 얹었다.

두툼한 외부 벽체와 반원아치의 깊숙한 창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고딕양식의 명동성당이 내부 열주 사이를 뾰족한 아치로 연결한 아케이드인 데 반하여, 이 성당은 8각 석주 사이가 반원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이 성당은 건평 189평에 대지 4,000평이며,

전주 중앙본당이 1956년에 준공되기 전까지는 전주교구 주교좌성당이었다.  1981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기 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양처를 처음에는 어용 전이라고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 (1442년)에 전주는 경기 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경기 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경기 전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신성함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 그리고 어진을 모신 정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 사당임을 감안할 때 신문(神門)이라고 호칭되며 홍살문 안쪽 내·외신문의 세 문을 통과할 땐 ‘동입서출’, 다시 말해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와야 한다. 가운데는 태조의 혼령이 드나드는 ‘신도’이기 때문이다.

경기전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영흥 준원전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로 역할하였다. 경기전의 역사와 제향 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태조 어진이라는 왕조의 중요한 상징물에 대한 국가적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은 두 차례의 큰 전란 중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전되어, 이를 바탕으로 국초의 모습 그대로 태조 어진을 다시 그리고 전할 수 있었다.

어진(御眞)

성용·어용·왕상·어영·수용이라고도 한다.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그리는 초상화를 전신 또는 사진이라 했고,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화를 모시는 건물을 진전이라 부르게 되면서 어진이라는 말은 곧 왕의 초상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어진은 조상을 기리는 일반 초상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서 조종과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녔다. 따라서 어진은 따로 봉안하는 장소인 진전을 지어 귀하게 보전했다. 어진은 그리는 과정과 방식에 따라 도사·추사·모사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어진 제작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발견되며 고려시대에 본격화된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그려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전해지는 작품이 희귀하여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 서울 창덕궁의 〈영조어진〉·〈의종어진〉·〈철종어진〉, 영조의 연잉군 때의 도사본 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경기 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경기 전에 사고가 설치된 것은 1439년(세종 21년)의 일이다. 경내에는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 전(유형문화재)과 그의 22대 조이며 전주 이 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肇慶廟·유형문화재)가 있다.

특히 태조 어진(국보)과 함께 현존하는 조선왕조 어진들이 모셔진 어진박물관도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이 오랫동안 관광객과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도심 속에 담긴 고풍스러운 모습과 우거진 수목 덕분이다.

경기 전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있다. (출처 : 전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도심 한가운데 있는 조선 시대의 고풍스러운 공간으로 정전, 돌담, 대나무숲 등이 사극의 분위기를 한껏 살린다. 먹거리, 놀 거리가 풍부한 전주한옥마을 안에 있어 전동성당과 함께 돌아보기 좋으며 주변에 한복대여소가 많아 한복을 입고 돌아보기를 추천한다.

 

교량위에 멋진 한옥누각인 청연루(晴煙樓)는 상관계곡을 지나온 차갑고 맑은 물이 한벽당 주변을 돌아 흐르는 전주천이 그 옛날에는 푸른 구슬처럼 투명하고 맑았으며, 또 여름에는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으며, 한벽루 절벽에 부딪혀 소용돌이 치면서 하얀 포말을 이루는 장관을 연출하여 옛사람들은 한벽청영(寒壁晴煙)이라는 문귀로 찬미하였다고 하여 전주8경의 하나인 한벽당을 이르는 한벽청연의 유래에서 청연루로 이름지었다.

박진 효자비(朴晋 孝子碑)

이 비석은 1398년(조선 태조 6, 명 홍무 30)에 세워진 것을 1724년(조선 경종 4)에 중각한 것이다. 비각 안에는 1805년(조선 순조 5)에 후손 필성(必晟)이 지은 '전주부 효자박진정려기(全州府 孝子朴晋旌閭記)'가 걸려 있다.

박진의 자(字)는 내신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완산지'에 박진은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이 남으로 인하여 관직에 출사한지도 불과 1년여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시중들면서, 낮에서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예법에 따라 장사(葬事)와 제사를 모셨으며, 3년 동안을 여묘(廬墓)살이 하여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말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으나 태조(太祖) 이성계의 수용(晬容)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로 이전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순찰사 장만(張晩)이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654년(효종 5) · 1832년(순조 32) · 1879년(고종 16) · 1904년에 중수하였고, 1922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조선 후기의 경내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 각 10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신문(神門), 외문(外門), 만화루(萬化樓), 5칸의 명륜당, 각 6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계성사(啓聖祠), 신문(神門), 입덕문(入德門), 4칸의 사마재(司馬齋), 6칸의 양사재(養士齋), 2칸의 책판고(冊板庫), 직원실, 제기고(祭器庫), 수복실 등 총 99칸인 대규모의 건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향교는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라 칭하였다.

그 뒤 만화루는 1886년(고종 23)에 홍수로 수몰되었고, 책판고는 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관고(官庫) 소유 책판을 전주향교로 이장하여 책판고 내에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1920년의 홍수와 1950년 6 · 25전쟁으로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5성(五聖) · 10철(十哲) · 송조 6현(宋朝六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또 동무 · 서무에는 유약(有若) · 복불제(宓不齊) · 복승(伏勝) · 동중서(董仲舒) · 한유(韓愈) · 이통(李侗)과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도리기둥에 맞배지붕이고, 양합각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좌우 1칸씩은 눈썹지붕을 이어 달아 꾸몄으며, 전면에는 모두 널문을 달았다. 따라서 눈썹지붕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길게 뻗어 나와 있는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9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 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 ·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판본 67종 93책, 사본 32종 51책의 총 99종 144책이 있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한벽당(寒碧堂)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흔히 한벽루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한벽청연(寒碧晴讌)이라 하여 전주8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조선 태종 때월당(月塘)최담(崔霮)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세웠다고 전하며, 처음의 이름도 ‘월당루(月塘樓)’였다고도 한다. 그 뒤 사람들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과 누정 밑을 흐르는 물을 묘사한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당이라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도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크게 중수한 것이다.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배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는 머름과 계자난간(鷄子欄干)만이 둘려져 있어 자연과 일체를 이루려는 누정건축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공포는 2익공식의 구조이다. 쇠서[牛舌]에는 당초문을 초각(草刻)하였으며 연꽃모양의 주두가 특이하다. 한벽당 바로 동편에는 1986년에 복원된 요월대(邀月臺)가 있다.

한벽당(寒碧堂)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건물로,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깍아 세운 이 누각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담(崔霮, 1346-1434)이 1404년에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다.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데, 바위에 부딪쳐 흰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하여 한벽당(寒碧堂)이란 이름을 붙였다. 호남의 명승 한벽당에는 시인 묵객들이 쉴새 없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며, 길 가던 나그네도 이곳에서 쉬어가곤 했다. 지금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만 주변과 조화를 이룬 단아한 모습과 탁 트인 시야로 시민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흔히 한벽루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한벽청연(寒碧晴讌)이라 하여 전주8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조선 태종 때 월당(月塘)최담(崔霮)이 관직에 뜻이 없어 직제학으로 재임하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세웠다고 전하며, 처음의 이름도 ‘월당루(月塘樓)’였다고도 하고, 그 뒤 사람들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과 누정 밑을 흐르는 물을 묘사한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당이라 이름지은 것으로 보인다. 아들 최덕지(崔德之 ; 1384∼1455)도 마찬가지로 문종대 예문관직제학의 영예로운 자리에 제수되었지만 마다하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었다. 부자의 이런 모습은 후대에 귀감이 되어 칭송이 자자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배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는 머름과 계자난간(鷄子欄干)만이 둘려져 있어 자연과 일체를 이루려는 누정건축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공포는 2익공식의 구조이다. 쇠서에는 당초문을 초각(草刻)하였으며 연꽃모양의 주두가 특이하다.  1683년. 1733년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에 크게 중수한 것이다.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하였다.

한벽당 바로 동편에는 1986년에 복원된 요월대(邀月臺)가 있다. 면암 최익현이 지은 「한벽당중수기」를 보면 “주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削成蒼石稜) /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倒影寒潭碧)’ 라는 귀절이 있다. 한벽당이라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주자의 시도 그렇지만 누정이 들어선 자리와도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전주천의 물줄기가 휘돌아 가다 한벽당 절벽 아래 바위에 부딪치며 차고 푸른빛을 띠는 모습과 똑같다. 전주의 한벽당(寒碧堂)은 남원 광한루(廣寒樓)·무주 한풍루(寒風樓)와 더불어 호남의 삼한(三寒)으로 불린다.

주희(朱熹)의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12수 중, "조기(釣磯)"는 다음과 같다.

조기(釣磯)
削成蒼石稜 倒影寒潭碧 永日靜垂竿 兹心竟誰識 

깎아 세운 듯 푸른 모서리, 차디찬 연못에 비쳐 푸르르구나.

조용히 종일토록 낚시 드리우니, 누가 이 마음을 끝내 알까.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전주팔경의 하나였던 한벽당의 정기를 자르고자 철길을 만들었고 한벽굴은 그때 만들어진 전라선 터널이다. 자전거를 타고 전주천을 달리거나 느리게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사랑을 받던 장소이며 바로 옆에서 1급수인 전주천의 깨끗하고 시원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촬영지로 두 주인공처럼 한벽굴을 배경으로 서로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으며 드라마를 추억하는 방문객들이 많아 한참 동안 줄을 서야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전주 한벽루 밑을 통과하는 한벽굴은 전라선이 다니던 철길이었다. 1980년도까지만 해도 전라선은 이리에서 삼례 그리고 지금의 덕진광장에 있던 덕진역과 전주시청자리에 있던 전주역을 지나 이 곳 한벽당 굴다리를 지나며 전주천을 끼고 임실, 남원, 순천, 여수를 향해 달렸다. 이 전라선 철길을 이용하여 전주 금암동 분수대에서 한벽루까지 1990년 12월 개통된 기린대로(당시 기린로)는 여기서 한벽교를 지나 좁은목 약수터방향으로 이어지며 기존의 팔달로와 함께 전주시의 남-북을 잇는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3.5km의 기린로는 사업비를 제때 확보하지 못해 몇백미터씩 부분 공사로 추진되어 착공 7년만에 개통됐다.

한벽굴 안내문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전주팔경의 하나였던 한벽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의 정기를 자르고 철길을 만들었다. 한벽굴은 그때 만들어진 전라선 터널이다.1931년 10월 전주~남원간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당시 전라선 철길은 이리역에서 삼례, 적진을 거쳐 현재의 전주시청에 있던 전주역을 지나 오목대~이목대~한벽굴을 거쳐 중바위 서쪽 아래를 타고 색장동을 통과해서 남원을 향했다. 한벽굴은 나들이 장소로 유명한 한벽당, 그리고 전주천 빨래터와 더불어 전주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곳이다. 많은 학생과 시민이 이곳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으나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옥류벽화마을

전주향교 윗편 옥류동(교동) ‘구강재(龜岡齋)’가 게스트 하우스로 거듭났다.

이는 ‘거북언덕집’으로, 거북이 편안하게 알을 낳는 공간이라는 의미한다.

전주향교 윗편 옥류동(교동) ‘구강재(龜岡齋)’가 게스트 하우스로 거듭났다. 이는 ‘거북언덕집’으로, 거북이 편안하게 알을 낳는 공간이라는 의미한다. 전주 교동에서 태어난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89~1957)은 600년 된 그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월당공 최담의 후예다.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는 "금재는 나에 못지않은 학자이며, 그의 학문을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당시 옥류동(교동)에 '염수당(念修堂)'이라는 서당을 열고 후학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옥류정사(玉流精舍)'를 지어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을 모았다. 이때부터 한옥마을에 전주 인근에 살던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성당(誠堂) 박인규(朴仁圭, 1909~1976)다.

자만벽화마을은 전주한옥마을의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언덕을 따라 길을 올라가 보면 한옥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주가 되어 형성되었던 마을로, 2012년부터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도라에몽 등의 캐릭터가 벽면을 따라 그려져 있다. 영화 마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쿵푸펜더도 벽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살았던 곳을 표시한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와 푸른 하늘과 함께 전주 시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벽화마을의 명소 "옥상 정원"을 만날 수 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식당도 있으며, 대략 3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다. 근처에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어 문화재 탐방코스로도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이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전주 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고종 광무 4년(1900)에,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공사로 이 곳으로 옮겨 세웠다.

오목대는 고려 말 유왕 6년(1380)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발호하던 왜구를 정벌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연회를 베풀었고. 여기에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으며 야심을 보인 곳이다. 이를 눈치 챈 정몽주는 인근의 남고산성 만경대에서 고려를 걱정하는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 후 광무4년(1900) 고종 황제가 친필로 쓴 태조고황 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비를 세웠다. 뒷면의 글은 고종이 짓고 김영목(金永穆)이 쓴 것이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과 교동 사이에 걸쳐 700여채의 한옥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항일정신이 깃든 전통 한옥마을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1977년 한옥마을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우리 전통의 가옥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