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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 여행 사진

[아산] 아산 현충사(顯忠祠).

작성자청마|작성시간26.06.14|조회수32 목록 댓글 0

[아산] 아산 현충사(顯忠祠).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순국한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1706년에 창건하고, 이듬해 ‘顯忠祠’라 사액(賜額)되었다. 그 뒤 일본의 국권 침탈로 돌볼 수 없게 되어

한때 퇴락했으나, 1932년에 이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와 동아일보사가 성금을 모아 중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마쳤다.

□ 일 시 : 26년 06월 10일 (둘째 수요일)

□ 출발지  :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48(주차장)

□ 도착지  :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48(주차장)

□ 걷기 구간 : 현충사 일원.

약 3.1km / 운동시간 1시간. 

□ 대중교통 : 갈 때, 대전역(08:00)  〉천안역(08:58 / 무궁화호)

천안역 승차(1호선)  〉아산역 하차(1호선)  아산시티투어버스.

□ 올 때, 아산시티투어버스  아산역 승차(1호선)   〉 천안역 하차(1호선)

천안역(17:49)  〉대전역(18:29 / 무궁화호).

 함께하신 분들 : 자하잘외 7명

  안내하신 분 : 강시운 팀장.

 사 진 :  청마(靑馬).

① 온양 민속박물관

 ② 아산 현충사(顯忠祠)

③ 신정호수공원(달빛누리교)

 

민속박물관을 관람을 하고, 현충사에 도착하여 참배를 하고,

박물관은 시간이 부족하여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두루 두루 보고 나온다.

아산 이충무공 유허(遺墟) 현충사
‘아산 이충무공 유허’에는 사당인 현충사, 고택, 정려 등이 있다. 현충사는 이순신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하고자 1706년에 아산 유생들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현재 충무교육원 부근에 세웠다.

1707년 숙종이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내렸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 1906년 현충사 유허비를 세웠다. 1931년 종가의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져 이순신의 

묘소와 위토(제사 비용의 마련을 위한 토지)가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이때 민족적 모금운동을 통해 그 빚을 갚고, 이순신 고택 부근에 1932년 구 현충사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1966년부터 현충사 성역화사업이 진행되면서 현재의 현충사를 세웠다. 이순신이 태어난 4월 2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여 해마다 다례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순신, 난중일기 중.

정려 

이순신과 덕수이씨 가문의 충신(이완, 이홍무, 이봉상),

호자(이제빈)를 기리고자 편액을 만들어 마을 입구였던 지금 위치에 걸었다.

현충사 정려에는 이충무공 장군과 공의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오대손 이봉상 등 네분의 충신과 팔대손 이제빈, 한분의 효자 편액이 걸려있다. 원래 정려는 동남향으로 정위치에 있었으나 현충사 성역화시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복원하였다.

반송은 소나무과의 소나무의 변종으로 외형은 소나무와 비슷하나 줄기가 밑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옆에서 본 나무모양이 부채꼴인 것이 특징이다. 수형이 아름다워 조경수도 많이 쓰인다.

(1975년 4월 염티초등학교에서 70년생 이식)

구 현충사
1932년 민족 성금으로 다시 세워졌고, 1968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기둥에는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고자 정인보가 쓴 주련이 걸려 있다.

현충사는 1706년 숙종 임금 때 건립되어 이순신 장군을 향한 추모의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리고 유허비만 남게 되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때 ‘충무공묘소 위토 경매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민이 거국적으로 모은 성금으로 1932년 현충사를 중건(重建)하게 되었다. 이후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로 순한국식 콘크리트 구조로 된 현재의 현충사로 세워졌고, 기존의 건물은 서편 참배로 옆으로 이전하여 ‘구 현충사’라 부른다.

현충사 현판

1707년 숙종이 내린 顯忠祠(현충사)

현판으로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주련(柱聯)은 기둥이나 벽 등에 장식으로 서화를 써넣어 걸치는

물건 또는 글로써, 구 현충사의 주련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쓴 글이다.

일서해산입강상어백대(一誓海山立綱常*於百代**)

*(강상 :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근본 되는 도덕인 三綱과 五常,

三綱은 君爲臣綱, 夫窟婦綱, 父窟子綱은 사람의 다섯 가지 행실 仁, 義, 禮, 智, 信을 이름)

** (백의세대 : 世代, 永久, 永远의 뜻임)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재조건곤무벌긍어당시(再造乾坤無伐矜於當時)

천지를 구해냈으되 내세워 자랑함이 없었네

 

성인취의정충광어단성(成仁*取義**精忠光於檀聖)

*(인 : 어진 마음)

**(의 : 의로운 행위)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이래 빛나고

 

보천욕일공덕개어근방(補天*浴日功德盖於槿邦)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보천 : 보천은 여과씨가 하늘의 이즈러진 데를 기운 故事, 浴日은

의화가 해를 목욕시킨 고사. 즉 국가에 큰 공이 있음을 말함)

 

정인보(鄭寅普, 1892~?)는 1892년 서울 출생, 학자, 호는 위당(堂), 1910년 중국에서 동양학 전공, 1918년 귀국

연희전문 등에서 강의, 국가개념을 정립, 해방 후 국학대학장 역임. 동아일보 논설위원, 조서 "조선사연구" 외 다수. 6.25 때 납북

반송은 소나무의 변종으로 외형은 소나무와 비슷하나

줄기가 밑에서부터 여러갈래로 갈라지고 옆에서 바라본 모양이 부채꼴인것이 특징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

현충사에 모셔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도 작품으로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영정을 그릴 때 친분이 있었던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관한 기록을 참고하였다. 내용은 “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中有膽氣 忘身殉國 乃其素所蓄積也” (순신의 사람된 품이 말과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 온 소치라 하겠다) 이다.

건물 안쪽 벽에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 중에 특기할 만한 사건 10가지를 묘사한 십경도(十景圖)라는 그림이 있다. 서울대 미대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고 1970년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하였다. 현충사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매년 4월 28일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이순신의 생애>

1545년 - 한양 건천동(현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나다(양 4.28)
유년기 - 외가가 있는 아산(牙山)으로 이사함.
1565년 - 상주 방씨와 결혼하여 아산 충무공 고택에 거주.
1576년 - 식년무과에 급제.
1588년 - 함경도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1차 백의종군에서 사면됨.
1591년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임명.
1592년 - 한산해전 승리.
1593년 -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1597년 - 2차 백의종군,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명량해전.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11월 19일)

<난중일기>
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이순신이 1592년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 까지 7년간 쓴 일기로,

전투 기록, 가족, 친지, 동료들과 겪은 일상이나 건강 등이 담겨있다. 직접 쓴 초고본은 총 7권으로,

임진, 계사, 갑오, 병신, 정유, 속정유, 무술년의 일기가 남아있다. (을미년 일기 없음). 원래 초고본에는

해를 나타내는 간지(干支)만 적혀 있는데, 정조가 「이충무공전서」를 펴내면서 「난중일기」라고 붙인

명칭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이충무공 묘소는 이곳에서 9km 떨어진곳에 있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남해 관음포에서 전사했는데, 그 유해는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고금도에 모셔졌다.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아산시 금성산에 안장되었고,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 6) 현 위치인 어라산으로 이장되었다,

이순신의 묘소는 부인 상주 방씨와의 합장묘로서, 석물로는 상석, 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 석양 등이 있으며, 묘소 뒤의 곡장은 1970년대에 설치되었다. 봉분 앞 좌측 비석은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이 이이명에게 부탁하여 1720년(숙종 46)에 비문을 짓고 1776년(영조 52)에 세웠으며, 우측 묘비는 1998년 순국 400주년을 추모하여 이순신의 후손들이 세웠다. 묘소 권역에는 이순신의 업적을 기리고자 정조와 김육이 글을 지은 신도비를 비롯하여, 이봉상 

신도비 등이 있다.

충무정

1960년대까지 살면서 실제 쓰던 우물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결혼한 21살부터 살았던 집이다.

이순신 장군은 21살 때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무남독녀였다. 따라서 처가집이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의 본가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건물로서 안채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대로 종손이 살아오다가 1969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에 경내의 존엄성을 고려하여 이주하였다.고택 뒤편에는 가묘(家廟)가 있는데 이곳에는 현 종손의 4대조까지의 신위(神位)와 함께 이순신 장군의 신위가 중앙에 모셔져 있다.

현충사 고택 인근에 있는 은행나무(2본)은 원주 반계리나,

양평 용문사에 비하면, 작다 느낄 수 있지만,

수령 600면 된 보호수로 가을철 노랗게 물들어 장관이라고 한다.

수종 : 은행나무(2본), 보호수 지정일자 : 1982.11.10, 수 고 : 22m, 20m.

수 령 : 약 570 년, 나무둘레 : 400cm , 관 리 자 : 현충사, 소재지 :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산61

고택 옆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이순신이 활을 쏘던 지리이다.

주변에는 이순신의 장인, 장모, 셋째 아들 이면, 후손들의 묘소가 있다.

이면 공 묘소는 충무공 이순신의 셋째 아들인 이면의 묘소이다. 이면은 선조 10년(1577)에 아산에서 태어나 선조 30년(1597) 일본군과 싸우다 21살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전사한 지 220여 년 뒤인 정조 20년(1796)에 이조참의의 벼슬을 받았다.

이 무덤은 충무공 이순신의 장인·장모인 방진과 남양홍씨의 무덤이다.

방진은 전라도 보성군수를 지냈다. 현재 이순신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에 맞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끈 영웅적인 면모와

지혜롭고 강한 리더십, 희생정신과 충성심을 갖춘 최고의 장군으로 우리는 이순신을 우러르고 흠모한다.

아산 현충사

위치 :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 길 126

관람시간 :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매주 월요일 휴무 / 입장료 : 무료 / 주차 : 무료

대중교통 : 지하철 1호선 온양온천 역에서 하차,

온양온천시장 건너편에서 970,971번 버스 환승, 현충사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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