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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태릉(泰陵),강릉(康陵) 숲길걷기

작성자청마|작성시간26.06.21|조회수38 목록 댓글 0

[서울] 태릉(泰陵),강릉(康陵) 숲길걷기

태릉강릉은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역사적인 유적지로,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는 태릉과 강릉이 있다.

태릉은 제13대 왕 인조의 능이고, 강릉은 제14대 왕 효종과 그의 왕비의 능이다.

□ 일 시 : 26년 06월 16일 (셋째 화요일)

□ 출발지  : 서울 노원구 화랑로 727(태릉,정자각)

□ 도착지  : 서울 노원구 화랑로 727(강릉,정자각)

□ 걷기 구간 :  태릉,강릉 숲길걷일원.

약 3km / 운동시간 1시간 30분. 

 

□ 대중교통 : 갈 때, 신탄진역(08:12)  〉서울역(10:10 / 무궁화호)

① 화랑대철도공원,    노원 기차마을 스위스관.

서울역 승차(4호선)  〉동묘역 하차(4호선)  동묘역 환승(6호선)  〉화랑대역 하차(6호선)

 

 태릉,강릉 숲길걷기.

화랑대 버스정류장 승차(2212번)  〉태릉 버스정류장 하차(2212번).

 

 동묘, 벼룩시장

삼육대앞 버스정류장 승차(155번)  〉화랑대역 2번출구 정류장 하차(155번).

 화랑대역 승차(6호선) 〉 동묘역 하차(6호선) .

 

⑤ 구) 서울역사.

 동묘역 승차(1호선) 〉서울역 하차(1호선).

 

□ 올 때, 서울역(17:02)  〉신탄진역(19:03 / 무궁화호).

 함께하신 분들 : 창병순외 6명

  안내하신 분 : 창병순 팀장.

①  화랑대철도공원.② 노원 기차마을.

③ 태릉,강릉 숲길걷기. ④  동묘, 벼룩시장.

⑤ 구) 서울역사.

 

태릉강릉은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역사적인 유적지로,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는 태릉과 강릉이 있다. 태릉은 제13대 왕 인조의 능이고, 강릉은 제14대 왕 효종과 그의 왕비의 능이다.이 지역은 고즈넉한 자연경관과 산책로가 있어 역사적 유적을 감상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또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조선시대 역사를 배우기에 좋은 장소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명소이다.

태릉과 강릉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조선 왕릉으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 전시관

태릉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으로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알려진다.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하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고관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생은 격이 낮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는 바람대로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 윤원형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만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 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 있지만 그녀는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신분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문정왕후는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이 손꼽히기도 한다.

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의 월권은 적어도 국왕의 권위를 누르거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을 끝내며 문정왕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이 연이어 사망했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했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했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해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했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歸政)하고자 했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해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옆에 묻히고 싶었는지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서삼릉 내) 우측에 있던 중종의 능을 정릉(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터로 옮겨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정릉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자, 명종이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명분을 대고 태릉에 안장해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된다.

태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는데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 신을 의미하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 위의 만석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12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이유는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여기에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무인석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다. 문인석은 높이가 260센티미터로 사람의 실제 키보다 크며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 차림이다.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좌측 문인석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우측의 문인석은 반대 자세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인석이 홀을 잡는 방법이 동일한데 이곳은 예외다.

무인석은 문인석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얼굴이 크고 방울눈에 유난히 큰 코와 우락부락한 표정이 특징이다. 문·무인석 모두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다. 학자들이 이들 석상에 큰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는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기둥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정자각은 6·25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과 그 앞의 배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금천교를 만날 수 있으며

태릉의 소나무 숲은 신림(神林)으로 불릴 만큼 울창해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풍취를 느끼게 한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태릉은 효인이라는 사람이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왜군이 기마병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灰)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강릉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의 아들인 제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 씨의 능이다.

명종은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후부터 8년간 문정왕후 윤 씨가 섭정했고

15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친정했지만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했다. 1569년(선조 2)에 의성(懿聖)이라는 존호가 진상되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했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 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관료층의 분열과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명종은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즉위해 조선 왕조 시대의 격변을 누구보다 심층적으로 겪었다.

중종의 제1계 비인 장경왕후 윤 씨 소생의 세자 호(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윤임 일파의 대윤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명종)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인종이 우여곡절을 겪고 즉위하자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며 이언적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해 대윤에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을사사화 이후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을 정도다. 당시의 정황을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모비가 청정하게 되었으므로 정치가 외가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리해 뭇 간인(奸人)이 득세해 선량한 신하들이 많이 귀양 가거나 살해되었으므로 주상의 형세는 외롭고 위태로웠다."

당파 싸움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명종은 친정하면서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워낙 깊숙이 박혀 있던 기득권 세력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정치는 더욱 문란해졌다.

민생이 어려워지자 양주 지방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이 의적을 자처하며 1559년부터 1562년 사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임꺽정의 난은 3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난 중에서 상당히 장기적인 경우다. 위계가 철저한 시대였지만

난이 오래 지속된 이유는 백정이 도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명종실록』에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정확하게

적혀 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1)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 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당시의 집권자들이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었다는 말이다. 임꺽정이 출현할 당시 황해도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정도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에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강릉의 참도는 조선 왕릉의 여타 참도와 다소 다르다. 참도 자체가 매우 넓은 것은 물론 좌측 신도는 약 30센티미터, 우측 어도는 약 15센티미터 높게 시공되어 있다. 또한 정자각의 월대로 오르는 계단은 일반적으로 3단인데 이곳은 한 단 높아 신계와 어계가 4단이나 된다.

강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쌍봉 능이며, 두 능 모두 병풍석을 둘렀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었다. 봉분의 봉토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인석引石에 꽃무늬를 장식한 것이 이색적이다. 대체로 태릉과 마찬가지이나 혼유석은 각각 설치했다

상설 제도에 의해 장명등, 망주석, 석호, 석마, 석양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보존 상태가 모두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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