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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체, 구양순체, 안진경체

작성자仁川書藝지킴이|작성시간19.11.03|조회수327 목록 댓글 0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王羲之, 307~365]

 

동진(東晉) 사람인 왕희지는 한나라 때 생겨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킨 중국 최고의 서예가였다. 생존 당시에도 그의 서체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그의 글씨를 수집하여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아끼다가 죽을 때 관에 넣어갔다고 한다.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고 탁본만이 전해지는데 서풍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기품이 높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십칠첩(十七帖)이 전해진다. 672년 당() 고종의 명을 받아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는 그의 서풍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도 순화각첩(淳化閣帖)》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등에 필체가 전해진다.

 

구양순[歐陽詢, 557~641]

 

중국 당나라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 담주(潭州) 임상(臨湘;湖南省) 출생. ()의 양제(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고, 당의 고조(高祖)가 즉위하자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다. 624년 칙령을 받들어 예문유취(藝文類聚)100권을 수찬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이 되었고, 홍문관(弘文館) 학사를 겸했으며, 발해남(渤海男)으로 봉함을 받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를 수여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서()에 능하여 고려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비백(飛白((((장초(章草()의 서체를 자유로이 썼으나, 그 중에도 해서(楷書)가 가장 뛰어났다. 서풍(書風)은 왕희지(王羲之) 이래의 정통파 흐름을 받은 데다 새 시대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전형미를 창작하여 후세에 해법(楷法)의 모범이 되었다. 우세남(虞世南저수량과 함께 초당(初唐)의 삼대가(三大家)로 추앙되고 있다. 현존하는 서적(書跡) 중에서 구성궁예천명(九成官醴泉銘)이 가장 유명하다.

 

 

구양순체의 특징

 

 

자획(字畵)과 결구(結構)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謹嚴)하여 한자 한자를 쓰는 데도 잠시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다고 하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였다. 구양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하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한국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행했었다.

 

 

楷書 중에서 가장 세련미를 지니며 귀족적이 서체가 바로 欧陽詢체이다. 구양순은 젊어서 왕희지(1)(王羲之) 부자의 체를 공부하여 그이 결체는 강건하면서도 세차고 잘 정돈된 을 취하여 준엄하고 세찬점 즉 붓을 댈때 면도날도 베고 도끼로 찍는 듯한 명쾌한 날카로운 맛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구양순은 한가지 양식에 사로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자국이 둥글둥글 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구양순체의 기본글자의 취하는 형태는 안진경체의 향세와 달리 배세구조를 취한다.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유현[隣遊県]의 고궁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寿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 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이 비석의 명문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2)(魏徴)이 칙명에 의하여 찬()하고, 구양순(欧陽詢)이 썼다. 이것은 구양순이 76세 때에 쓴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첫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3)(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그 탁본(4)은 이미 심하게 마멸되어 그 동안 수 많은 감상자들이 몰려들었던 사실을 말하여 준다. 이와는 별도로 송탁본(宋拓本)의 우수한 서첩(書帖)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안진경(顔眞卿:709785)

 

중국 당()나라 때의 서예가 안진경(顔眞卿:709785)의 서체.

 

안진경은 당나라의 서예가로서 해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했는데,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한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과 균제미(均齊美)가 있어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안진경삼고(顔眞卿三稿)’라 불리는 제질문고(祭姪文稿)》 《고백부문고(告伯父文稿)》 《쟁좌위고(爭座位稿)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고 급작스럽게 꺾이는 등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어 당시 유행했던 진()의 서예가 왕희지와 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서체를 본뜨지 않고 스스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고 평가된다.

 

안진경의 가문에서 만든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과거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으며, 명나라의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는 간행된 서책의 대부분이 안진경체이다.

 

그의 글씨는 후대 중국의 명필 유공권(柳公權소동파(蘇東坡채경(蔡京동기창(董基昌왕탁(王鐸)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한호(韓濩조광진(曺匡振김돈희(金敦熙) 등이 특히 안진경체에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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