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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誌]485 이의총( 二義塚) (5)

작성자이광춘|작성시간26.06.05|조회수3 목록 댓글 0

[列國誌]485
2부 장강의 영웅들 (142)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18장 이의총( 二義塚) (5)


이 무렵, 중원 판도는 여전히 진(晉)과 초(楚)나라가 패권을 놓고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언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하였으나 진(晉)나라는 초(楚)나라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했다. 

중원의 노른자 자리에 위치한 정(鄭)나라가 변함없이 초나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晉)나라와의 싸움에서 한쪽 눈까지 잃는 수모를 당한 초공왕(楚共王)은 자나깨나 진나라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다. 

그런 중에 진여공이 신하들에게 살해되고 열네 살짜리 소년이 진나라 군위에 올랐다.

초공왕(楚共王)은 그런 진도공을 깔보았다.

- 진(晉)나라도 이제 끝이다.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 것인가.

우윤 벼슬에 있던 공자 임부(壬夫)가 이에 동조하여 계책을 내었다.

"지난날 우리가 언릉에서 진나라에게 패배한 것은 진나라가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오왕 수몽(壽夢)으로 하여금 우리의 배후를 치게 함으로써 우리의 전력을 분산시켜놓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진나라가 오나라와 교류하지 못하도록 그 길목을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의 말이 옳소. 어디를 끊어야 진(晉)과 오(吳)가 교통하지 못할까?“

"팽성(彭城)은 진과 오가 왕래하는 긴요한 통로입니다. 

팽성을 점령하면 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 연락이 두절될 것입니다.“

팽성은 지금의 서주로 강소성 동산현에 속한 도시다.


"하지만 그 곳은 송(宋)나라 영토로 우리 초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소. 

언제까지 우리가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질 않소?“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나라에는 송나라 대부인 어석(魚石), 향위인(向爲人), 인주(麟朱), 향대(向帶), 어부(魚府) 등 다섯 사람이 망명해와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송나라 재상 화원(華元)에게 숙청당해 도망쳐온 사람들입니다. 

팽성을 점령한 후 이들에게 병차를 내주어 그곳을 지키게 하면 

우리로서는 힘들이지 않고 팽성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화원의 공격을 받고 패해도 우리나라는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초공왕은 무릎을 쳤다.

"묘책이로다.“

초공왕은 군사를 내었다. 

자신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되, 공자 임부(壬夫)를 원수에 임명하고 어석 등 다섯 망명객에게는 향도(嚮導) 임무를 부여했다.

속국이나 다름없는 정나라 군주 정성공(鄭成公)에게도 출전 명령을 내렸다. 

진도공이 군위에 오른 해인 BC 573년 6월의 일이었다.


초(楚)나라는 양동 작전을 구사했다. 

정성공에게는 송나라 도성인 상구(商丘)를 공략하게 했고, 초공왕 자신은 그보다 훨씬 동쪽 땅인 팽성으로 진격했다.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초군(楚軍)은 영성을 떠난 지 20일이 채 안되어 팽성을 점령했다.

초공왕(楚共王)은 어석, 향위인 등 다섯 대부를 불러 지시했다.

"이제부터 이곳은 그대들이 통치하라. 

힘을 길러 송나라 정권을 차지해도 좋고, 그것이 힘들다면 진(晉)나라와 오(吳)나라 간에 오가는 모든 연락을 끊어라. 

그대들이 위기에 빠지면 언제든 달려와 도와주겠다.“

그러고는 병차 3백 대를 남겨두고 영성으로 귀환했다.


당시 송나라 군주는 송평공(宋平公)이었고, 재상은 화원이었다.

그들은 팽성에 초나라의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서자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어석(魚石) 등에 대한 토벌을 시도했다. 

토벌군 대장과 부장으로 노좌(老佐)와 화희(華喜)를 임명했다.

토벌군이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팽성 총독 어석(魚石)은 

재빨리 영성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농성 태세에 돌입했다.

토벌군의 공격에 어석(魚石)이 지휘하는 팽성 수비군은 맹렬히 저항했다. 

노좌(老佐)는 상대를 얕보았다. 

자신의 용기만 믿고 무작정 돌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부장 화희(華喜)는 더이상 싸울 마음이 사라져 군대를 돌려 상구성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초나라 영윤 영제(嬰齊)는 초공왕의 명을 받고 팽성을 구원하기 위해 송나라 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이미 토벌군이 패해 귀환했다는 소식에 방향을 바꿔 상구성으로 향했다. 

내친 김에 송(宋)나라 도성을 공략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기겁을 한 사람은 송평공과 화원이었다.

- 진(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합시다.

초공왕(楚共王)이 나이 어린 진도공을 깔본 것은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진(晉)나라는 군주와 각 귀족들 간에 주도권 다툼을 벌여오긴 했지만 

진도공의 즉위와 더불어 예전의 건재함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지혜롭고 덕망이 깊은 중군 원수 한궐(韓厥)이 여러 권문들을 조화롭게 다스리고 있었다.


화원(華元)으로부터 구원군을 요청받은 진도공(晉悼公)은 한궐을 비롯한 중신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옛날에 진문공(晉文公)이 패업을 성취하신 것도 송나라를 구원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소. 

우리 진나라가 다시 천하 패권을 잡느냐 못 잡느냐는 이번 송(宋)나라를 구원하는 일에 달렸다고 봅니다. 

더욱이 팽성은 오(吳)나라를 왕래하는 데 매우 긴요한 통로이오. 

나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송나라를 구원할까 하오."

"장하십니다.“

중군 원수 한궐(韓厥)은 감격에 젖은 눈길로 진도공을 쳐다보았다.

그해 겨울, 진도공은 친히 3군을 이끌고 송나라 구원에 나서 대곡(臺谷) 땅에 대채를 내렸다.


한편 상구성을 향해 진격하던 초나라 장수 영제(嬰齊)는 진군의 재빠른 출동에 크게 놀랐다.

"진나라가 이토록 기민하게 움직이니 가히 그 예기(銳騎)를 알 수 있도다. 

일단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이렇게 말하고는 군대를 돌려 영성으로 귀환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어 BC 572년(진도공 1년)이 되었다.

진도공(晉悼公)은 초군이 비록 회군했지만, 팽성 일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진격명령을 내렸다.

- 팽성(彭城)을 포위하라.

동시에 각 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군대를 출동시키라 지시했다.

이에 송나라를 비롯해 노, 위, 조, 거(莒), 주(邾), 등(鄧), 설(薛) 등 여덟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왔다. 

이때 제나라만이 군대를 보내오지 않았는데, 

이 일로 인해 제영공은 진도공의 문책을 받고 세자 광(光)을 인질로 보내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 해 정월, 진도공(晉悼公)은 팽성을 함락시켜 송나라에 돌려주었다.

이때 팽성을 지키고 있던 어석 등 다섯 대부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진나라 땅 호구(瓠丘)로 이송되어 감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호구는 지금의 산서성 원곡현 동남쪽 일대다.

진도공(晉悼公)의 이러한 활약은 그동안 초나라 눈치를 보던 중원의 여러 제후국들에 대해 강한 신뢰감을 안겨주었다. 

모든 나라들이 앞다투어 진(晉)나라를 방문하여 친선을 다짐하였다. 

다만 정(鄭)나라만이 초나라 위세에 눌려 여전히 진나라에 복종하지 않았다.

이런 정나라를 진도공(晉悼公)은 몹시 못마땅히 여겼다.


여름철에 그는 제, 송, 노, 위, 조나라 등 9개국 제후들을 척(戚) 땅에 소집하고 정나라 일을 의논했다.

이 회맹에서 노나라 대부 중손멸(仲孫蔑)이 특이한 계책을 내었다.

"정나라 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는 호뢰(虎牢)입니다. 

군후께선 그곳에다 관(關)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키십시오. 

그러면 정나라는 군후의 위세에 눌려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호뢰(虎牢)는 지금의 하남성 사수현 일대로 황하 남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진(晉)나라와 국경을 이룬 곳인데, 처음에는 정나라 땅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진나라에 귀속되어 있었다. 

신체에 비유하면 정수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좋은 제안이구려.“

진도공(晉悼公)은 중손멸을 칭찬한 후 9개국 군사들을 거느리고 호뢰 땅으로 나가 성과 돈대를 쌓았다. 

그리고 큰 나라에는 군사 1천 명을 보내도록 하고 작은 나라에는 3백 내지 5백 명의 군사를 보내게 하여 공동으로 호뢰성을 지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鄭)나라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 정나라는 정성공이 죽고 정희공(鄭僖公)이 새로이 군위에 올라 있었다. 

결국 정희공은 진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청하여 호뢰로 나가 항복 서약서를 바쳤다.

이로써 진도공(晉悼公)은 허나라와 채나라 등 초나라 인접국을 제외한 모든 중원 제후국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 또 초(楚)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진나라로부터 뺏아갈지 알 수 없었다. 

진도공이 이 문제를 고민하자 한궐(韓厥)이 안을 내었다.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오(吳)나라에 사자를 보내시지 않습니까? 

오나라와 초나라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지난날 초나라에서 망명해 온 무신(巫臣, 굴무)이 오나라와 교류하며 그 아들 무호용(巫狐庸)을 그곳에 머물게 한 바 있습니다.

이는 오나라로 하여금 초나라의 뒤를 치게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실제로 오(吳)나라는 수시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괴롭혀왔습니다. 

우리가 언릉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초(楚)나라 전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서는 지금이라도 오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초나라를 공격하라 부탁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초나라는 오군(吳軍) 때문에 정나라를 돌볼 여가가 없을 것입니다."

한궐의 말에 진도공(晉悼公)은 얼굴이 환하게 퍼졌다.

"이제야 나의 근심이 씻은 듯 사라지는구려.“

그는 곧 말 잘하는 사람을 뽑아 오왕 수몽(壽夢)에게로 보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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