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498
2부 장강의 영웅들 (155)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0장 동방의 암운 (4)
- 소의 머리를 내걸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판다.
안영(晏嬰)의 이 비유는 비단 남장(男裝) 여인의 일만 빗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영공(齊靈公)의 모든 처사가 그러했다.
'강대한 제나라 구축'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에 걸맞는 정책 마련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나,
세자 광(光)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모든 외교적인 행사에 그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나
제영공은 언제나 겉과 안이 달랐다.
안영(晏嬰)은 남장 여인의 일을 계기로 제영공의 성격 자체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성격인 모양이었다.
내(萊)나라 합병 이후, 제영공은 확실히 달라졌다.
- 패업(覇業).
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어떤 때는 자신이 이미 패업을 이룬 중원의 맹주인 양 행동했다.
우연히도 이런 제영공의 허영심에 부채질을 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 첫번째는 주왕실과의 혼사였다.
이 무렵 주나라 왕은 주영왕(周靈王)이었다.
BC 561년(제영공 21년), 주영왕은 제영공에게 사자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 왕후를 백구(伯舅)의 집에서 맞아들이고 싶다.
이를테면 청혼을 한 것인데, 제영공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백구(伯舅)라는 용어였다.
백(伯)은 패(覇)와 같은 뜻이다.
구(舅)는 물론 장인을 말함이다.
주영왕은 제나라를 공대하는 의미에서 '백구'라는 말을 썼을 것이겠으나, 제영공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이는 나를 중원의 방백(方伯)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닐까.‘
혼사는 즉각 이루어졌다.
제영공(齊靈公)은 자신의 딸을 주영왕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천자의 장인이 되었다.
이어 그 다음 다음해에는 그의 가슴을 더욱 들뜨게 하는 칙서가 주영왕으로부터 내려졌다.
<춘추좌씨전>에 기록된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자.
옛날 백구 태공망은 우리 선왕을 도와 주왕실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 되었고,
대대로 태사(太師)의 지위를 이어받아 동방에 군림하여왔다.
주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제나라 군주들 덕분이다.
이제 내가 그대 환(環, 제영공의 이름)에게 명하노니,
그대는 태공망이 정한 법전에 따라 선조의 공적을 계승하여 그들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
부디 신중하라. 나의 명을 저버리지 마라.
한마디로 태공망이나 제환공이 이룩한 패업을 다시 구축하여 주왕실을 보좌하라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진(晉)나라를 대신하여 중원의 맹주가 되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아가서 진(晉)나라를 치라는 밀명일 수도 있었다.
이것은 제(齊)나라에게 있어 확실히 큰 사건이요, 힘이었다.
주영왕(周靈王)의 이런 칙서가 내려진 이후, 제영공은 물론 그 신료들도 확실히 들떴다.
최저도, 고후도, 안약도 얼굴이 상기되었다.
- 주왕실은 진(晉)에 대해 불만이 크다. 천자의 마음이 떠난 이상 진의 시대는 끝이다.
지금까지 진(晉)나라는 제(齊)나라에게 있어 동맹국의 맹주였다.
따라서 주적(主敵)은 초나라였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 우리의 적은 진(晉)이다.
제영공과 신하들의 가슴은 뜨겁게 끓어올랐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위헌공(衛獻公)이 제나라로 망명해왔다.
이 또한 제영공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천하가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
단순한 망상이라고만도 볼 수 없었다.
위(衛)나라라면 진(晉)나라와 매우 가까운 사이다.
신하가 군주를 쫓아내는 행위는 패륜이다.
그 패륜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위헌공(衛獻公)은 진으로 망명하여 도움을 청했어야 했다.
그런데 위헌공은 어디를 선택했는가.
'보라, 우리 제(齊)나라로 오지 않았는가.'
제영공(齊靈公)이 위헌공의 망명을 반긴 또 하나의 이유는 진(晉)과 대결하기 위한 명분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중원 분위기로 보아 주왕실의 명만으로 진나라를 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그러나 위(衛)나라의 일을 명분으로 삼으면 얼마든지 당당하게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위헌공의 제(齊)나라 망명은 제영공의 가슴속에 숨겨져 있는 야심의 불씨에 기름을 부어넣은 격이 되었다.
어느덧 제나라 수도 임치성에는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최저도, 고후도 당쟁을 중지했다.
- 패자국으로 가는 길.
그 길목에 서 있지 않은가.
최저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했다.
세작들을 밀파하여 진나라에 대한 정보를 속속 입수했다.
- 진후(晉侯)가 병상에 누웠습니다.
최저(崔杼)의 눈이 반짝였다.
내읍에 머물러 있는 위헌공에게 사자를 보냈다.
내(萊)는 내나라 도성이었으나, 제나라에 합병된 후로 내읍으로 강등되었다.
- 진(晉)에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손림보(孫林父)의 패륜을 진나라에 호소하여 나라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위헌공(衛獻公)은 최저가 시키는대로 진나라 강성에 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가였다.
밀사는 진나라 재상 순언(荀偃)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 우리 주공께서 몸이 아파 군대를 낼 형편이 못 됩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최저(崔杼)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제영공의 처소로 향했다.
제영공은 뒤틀리는 웃음을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군주를 쫓아낸 나라를 응징하지 않는다니, 진(晉)나라는 맹주 자격이 없다.
내가 어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을쏜가."
마침내 제영공(齊靈公)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병차와 군사를 동원하라!“
BC 558년(제영공 24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런데 제나라 군대가 공격 목표로 삼은 나라는 진(晉)나라도 아니요, 위나라도 아니었다.
이웃인 노(魯)나라였다.
- 우리가 멀리까지 원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적을 우리 가까이로 끌어들이면 승산은 훨씬 높아집니다.
진(晉)나라는 멀다.
강성까지 진격하려면 위(衛)나라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군사들도 피로해지겠지만, 무엇보다도 군량 보급선에 차질이 생긴다.
최저는 이러한 문제까지 치밀하게 구상했다.
반면, 노(魯)나라는 가깝다.
국력도 진나라보다 약하다.
제(齊)나라의 침공을 받는 즉시 진(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것은 뻔한 일이다.
천 리가 넘는 길을 진나라 군대는 달려와야 하는 것이다.
지친 군대를 상대로 싸우는 일은 그만큼 수월하다.
만에 하나, 전세가 불리해지더라도 재빨리 국경선 밖으로 철수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진군은 닭 쫓던 개마냥 허탈감에 빠져 도로 먼길을 돌아가야 한다.
- 절묘하군. 과연 경(卿)다운 착상이오.
제영공(齊靈公)은 흡족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출병인만큼 제군(齊軍)의 공격은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았다.
그들은 눈깜짝할 사이 국경을 돌파하여 성(成)이라고 하는 읍을 포위하였다.
성읍(成邑)은 노나라 삼환(三桓)중 하나인 맹손씨(孟孫氏)의 본거지다.
수도 곡부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 공격하라.
제영공은 사냥하듯 즐겁게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전황은 그들이 생각했던 만큼 그렇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노군(魯軍)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성읍 수비군은 철저하게 농성 태세를 갖추었고,
거기에 노양공(魯襄公)이 직접 도성 군대를 이끌고 곡부를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법이군.“
제영공(齊靈公)은 싸움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이 노(魯)나라를 침공한 본래 목적은 진(晉)나라를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그런데 진나라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노나라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진도공(晉悼公)의 병이 깊어진 게 분명했다.
"미끼를 물지 않는데 공연히 줄다리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제영공(齊靈公)은 진나라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서자 미련 없이 군대를 후퇴시켰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제(齊)나라에 반가운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 진후(晉侯)가 죽었다고 합니다.
진나라 군주라면 진도공(晉悼公)을 말함이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재위 15년이니 이제 겨우 스물아홉 살이다.
그런데 죽은 것이다.
진문공 이후 진(晉)나라 전성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명군이다.
그런 진도공(晉悼公)이 죽었다는 것은 맹주 탈환을 노리는 제나라로서는 손뼉을 칠 만큼 기뻐할 일이었다.
강성(絳城)소식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진도공의 아들 표(彪)가 새 임금에 올랐다.
그가 진평공(晉平公)이다.
진도공의 재위 기간을 감안하면 진평공 역시 나이가 어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듬해 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齊)나라는 다시 군대를 내어 노(魯)나라 성읍을 침공했다.
역시 진나라의 개입을 노린 출병이었다.
이번에는 노(魯)나라도 당황했다.
급히 상경 숙손표(叔孫豹)를 진나라 강성으로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나라 재상 겸 원수인 순언(荀偃)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 우리 주공께서 아직 탈상하지 않았으므로 군대를 내기가 곤란합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노(魯)나라 군대는 갑자기 용맹해졌다.
원군은 없다, 라는 절박한 상황이 그들을 악에 받치게 한 것이 분명했다.
성읍(成邑)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던 맹속(孟速)이란 장수가 5백 결사대를 이끌고
제영공의 본진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해왔다.
이때 제영공(齊靈公) 또한 진나라가 노나라의 원군 요청을 거절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소간 맥이 빠졌다.
군사와 군량을 소모해가며 노(魯)나라와 싸워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노나라 결사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기까지 하질 않는가.
맹속(孟速)의 험악한 돌진을 보자 제영공(齊靈公)은 두려움이 일었다.
그런데 일찍이 안영이 지적했듯 그는 자신의 속마음과 겉행동이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때도 그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저 장수는 꽤나 용맹을 탐하는 자로구나.
내가 달아남으로 해서 저 장수의 이름이 후세에 남는다면 내가 어찌 달아나는 것을 주저하리오.“
전투를 두려워해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맹속(孟速)의 명성을 떨쳐주기 위해 달아나겠다는 것이다.
여유라면 여유요, 멋이라면 멋이었다.
하지만 후에 벌어지는 진(晉)나라와의 싸움에서 숲에 꽂힌 기치창검만을 보고 임치로 내뺀 것을 생각해보면
제영공의 이때의 도주도 마냥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아줄 수는 없다.
아무튼 제영공(齊靈公)은 세 번째 출병에서도 이렇다 할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임치성으로 돌아왔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