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타(181) 제4권“신무기”라는 이름으로 물건처럼 소모되는 마루타
제16장. 이시이와 요시다는 다시 한 번 후미코를 사이에 두고 진검 대결
1절. 이시이와 요시다의 진검 대결
"하하하. 요시다 다카부미(吉田幸文) 대위, 군(君)의 운명이 끝나는 날인데, 각오는 단단히 하고 나왔겠지? 기분은 어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시이(石井永手) 대위."
"사랑이라는 것이 자네를 한번 살려주고, 그것이 당신을 다시 죽이는 셈이군."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못 알아 듣는 척하지 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네. 후미코(美子) 양을 만나지 말게"
"후미코 양은 나와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다. 그런데 당신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후미코는 나에게 몸을 주었다. 너는 빈 껍데기만 차지하는 것이지."
요시다 대위는 분노감을 억누르며 군도의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대여섯 발자국 떨어져 있는 이시이 대위는 요시다의 동작을 놓치지 않고 쏘아보고 있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정신이 곧 알맹이다. 대위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군."
"자네가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어쨌든 나는 한 해 전에 그녀를 정복했다."
"정복했다는 것은 착각이다."
"착각이래도 좋아, 그녀는 내 품에서 희열로 몸부림쳤어."
씩--, 하는 소리와 함께 요시다 대위가 칼을 빼들었다.
이시이 대위는 의도적으로 그를 자극하여 흥분시키려고 했다.
검도에서 흥분은 금물이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 제2실험장에는 이토오(伊藤) 헌병 중위와 모리가와(森川) 중위가 지켜보고 있었다.
두 중위는 양쪽 숲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바라보았다.
"하하하, 요시다 군. 자네는 항상 성미가 급한 게 탈이야.
자네같이 경도제대(京都帝大) 출신의 인텔리가 그렇게 침착하지 못하다는 것은 유감이네."
이시이 대위가 칼을 빼들었다.
"그 칼에 독을 묻혀 가지고 오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지난번 같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걸쎄."
"독이라구? 그럴 필요없이 너의 목을 쳐 주겠다."
그들은 점차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갔다.
칼을 치켜 들고 서로를 노려보는 그들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땅거미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이었다.
밤안개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맞은편 사람의 모습을 분간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안개의 축축한 습기가 크레졸 현상을 일으키면서 얼굴이며 노출된 피부를 적셨다.
나무 밑에서 두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이토오 중위와 모리가와 중위는 긴장했다.
요시다 대위와 이시이 대위는 서로의 눈을 쏘아보며 칼을 맞대었다.
그들은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서로에게 빈틈을 주지 않으면서 기회를 노리기 위해 눈빛이 빛났다.
한옆에 있는 보안등 불빛에 반사되어 칼날이 번쩍였다.
짙은 안개 속에서 보안등 불빛은 무지개 빛을 내었다.
그들은 아직 일합(一合)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를 지켜보며 탐색하는데 십여 분을 보냈다.
안개가 점차 걷히며 새벽은 빨리 오고 있었다.
골짜기 아래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는 침묵이 감도는 제2실험장 빈터에 음울하게 울렸다.
결투장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졌다.
이윽고 칼과 칼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땀이 흘렀고 땀은 옷을 적셨다.
골짜기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안개를 밀어 붙이며 동트는 아침해를 비추게 하였다.
결투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많이 늘었군."
이시이 대위는 요시다의 칼놀림에 실제 놀라워하고 있었다.
한 해 전 여름에 바로 그 장소에서 요시다 대위와 대련한 경험이 있었던 이시이는 그를 얕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별다른 공격을 못하자 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요시다 대위는 군도를 똑바로 들고 이시이 대위의 눈과 군도를 잡은 손을 보았다.
이시이 대위의 손등이 갑자기 도마뱀의 머리로 변했다. 필리핀 마닐라의 큰 도마뱀이 그곳에 있었다.
요시다 대위는 군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요시다의 눈이 갑자기 광채를 뿜으며 번득이자 이시이는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요시다가 들고 있는 검이 허공을 그으며 날았다.
이시이 대위는 손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칼을 떨어뜨렸다.
이시이 대위는 두어 발 앞에 떨어진 자신의 칼을 보았다.
땅에 떨어진 군도가 마치 자신의 몸뚱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칼을 잡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요시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요시다 대위가 이시이 대위의 가슴으로 칼을 내리 그었다.
이시이 대위의 앞가슴 군복 단추가 모두 떨어지고 옷이 찢어졌고 그의 가슴이 드러났다.
칼을 집으려다 멈춘 이시이는 고개를 들고 요시다 대위를 쳐다보았다.
요시다가 그에게 칼을 집으라는듯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이미 패배한 것이 확실해진 이상 이시이는 다시 칼을 집을 수 없었다.
"내가 졌으니 내 목을 쳐라."
이시이 대위가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요시다 대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지. 승부는 끝났는데 왜 자네를 죽이겠나.
한 해 전에 자네는 나를 살려 주었으니 이번엔 내가 그 빚을 갚는 걸쎄."
요시다 대위는 칼을 칼집에 꽂고 돌아섰다.
그가 막 발걸음을 떼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기합을 넣는 소리가 들렸다.
요시다 대위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시이 대위가 땅에 떨어진 칼을 들어 자신의 배를 갈랐던 것이다.
"이시이 대위님, 참으십시오.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고 이토오 중위가 나무 밑에서 뛰어 나왔다.
"물러 서라. 명령이다." 하고 이시이 대위는 심한 고통 속에서 소리쳤다.
"무인답게 죽겠다, 이토오."
"대위님......."
이토오 중위가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불렀다.
"이토오, 부탁이다. 나를 쏘아다오."
복부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으나 이시이는 단번에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옆으로 쓰러지더니 소리쳤다.
요시다 대위는 우뚝 서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쪽에 서 있던 모리가와 중위가 이시이 대위 쪽으로 뛰어갔다.
이시이 대위는 고통으로 인해 계속 몸을 떨었다.
"뭐 하느냐, 빨리--."
이토오가 권총을 꺼내 이시이 대위의 머리를 쏘았다.
한 발의 총성이 새벽 공기를 찢었다.
이토오 중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권총을 든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시이 대위님은 에도시대 [江戶時代: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사무라이 시대]를 잊지 못하고 동경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 시대에 대한 향수일 것입니다."
이토오 중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총성을 듣고 위병소의 병사들과 본부 건물에서 여러 명이 뛰어왔다.
요시다 대위는 그들을 뒤로하고 골짜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착잡한 심경으로 아침 공기를 마시기 위해 하천으로 내려갔다.
이시이 나가데(石井永手)에 대한 증오감이 팽배되어 있었던 요시다로서도 그의 죽음을 보자 착잡한 심경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를 증오하는 감정이 그를 죽였다는 결말을 맺은 듯해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매달린 메달을 만지작거렸다.
그 메달을 만질 때마다 생명을 지켜 줄 것이라고 말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시이 대위의 할복은 장교들 사이에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모한 죽음이라고 비난하는 장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