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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팔이

작성자상록수|작성시간25.12.08|조회수21 목록 댓글 0

기억 팔이

나는 기억을 팔고, 거짓말로 먹고산다.

사람들은 나를 ‘사기꾼’이라 부른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을 조작해서 마음을 훔치는 사기꾼이다.

이름은 이도현, 서른아홉.

나는 오래전부터 외로운 노인들을 상대로

“고인의 친구”나 “전 동료”로 위장해왔다.

그들의 눈에는 늘 그리움이 가득하고,

그 틈은 언제나 돈보다 쉽게 열린다.

이번 표적은,

윤정희(72) — 어느 재단 이사였던 남편을 잃은 여인.

도시 외곽의 오래된 저택에서 혼자 산다.

은행 직원의 소개로 그녀의 정보는 이미 다 파악돼 있었다.

“정희 씨, 그때 ‘명동 다방’ 기억나시죠?

박 선생이 커피 두 잔 시켜놓고도 혼자 다 마셨잖아요.”

그 한마디에 그녀의 눈이 떨렸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정말… 그때를 기억하시는구나.

그 사람, 커피 마시고 꼭 웃었죠.”

그 미소가 내 심장을 찔렀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 아직도 잊히지가 않네요.”

그날, 나는 또 하나의 연극을 시작했다.

그녀는 매주 나를 불렀다.

“점심 같이 해요, 도현 씨.”

나는 늘 거짓된 미소로 맞았다.

그러나 그 식탁 위에는 언제나 진심이 있었다.

김치찌개 냄새,

삶은 계란 껍질을 벗기며 건네는 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반찬 안 먹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짜 마음을 조금씩 흔들었다.

나는 원래,

누군가의 슬픔에 감정이입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게 내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윤정희 씨는 달랐다.

그녀는 매번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내 말을 믿고, 내 눈을 바라봤다.

“도현 씨는, 참 좋은 분이에요.

남편 친구분이라 그런가, 말투도 비슷해요.”

그 말에 나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내 안에서 양심이라는 낯선 감정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집에는 오래된 거울이 하나 있었다.

거울 앞에서 그녀는 자주 머리를 빗었다.

“이 거울, 우리 남편이 사준 거예요.

당신도 이거 봤죠? 그때 명동 다방에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럼요. 그날 비가 왔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지만 그 반짝임은 나를 칼처럼 찔렀다.

왜냐하면 그날,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만든 거짓 기억 속에

조금씩 갇혀가고 있었다.

며칠 후,

그녀는 내게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이건 남편이 남긴 시계예요.

당신이 친구니까, 가지고 계세요.”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 시계는 분명히 증거품보다 더 무거운 죄였다.

그날 밤,

나는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걸었다.

“이건 그냥 일이야… 일이라고…”

스스로 수백 번 되뇌었지만,

그녀의 웃음소리가 자꾸 귀에 맴돌았다.

며칠 뒤,

은행 계좌 이체를 위한 위임장을 들고 그녀의 집을 찾았다.

“이거에 서명만 하시면, 정산이 편해집니다.”

그녀는 펜을 들었다가 나를 바라봤다.

“도현 씨, 이거… 우리 아들이 예전에 가져온 서류랑 비슷하네요.”

순간, 내 심장이 멎었다.

“아드님이요?”

“응… 사업한다고, 이 집을 담보로 했대요.

그 뒤로 소식이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슬펐지만 원망은 없었다.

“그래도 아들은 아들이잖아요.

나중에 돌아오면, 밥 한 끼 해주려고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펜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울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인간으로.

그날 이후,

나는 그녀의 돈에 손대지 않았다.

대신, 매주 찾아가 정원 손질을 도왔다.

그녀는 내가 뭔가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용히 물었다.

“도현 씨, 무슨 일 있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간신히 붙잡으며 말했다.

“그냥… 기억을 팔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그 기억이 팔리지 않네요.”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이제, 팔지 말아요.

그냥… 같이 기억해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동시에 피어났다.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가

처음으로 진실이 되던 순간이었다.

몇 달 후,

나는 멀리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모든 걸 잊기 위해 떠났지만,

결국 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부고란을 보았다.

〈윤정희 님, 향년 73세, 별세〉

그 아래엔 손글씨로 적힌 문장이 있었다.

“기억을 팔던 사람에게,

진심을 사게 되어 행복했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 동안 울었다.

그녀는 끝까지 내 거짓말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는 알고도 용서해준 걸까?

지금 나는,

더 이상 사기를 치지 않는다.

대신, 거리의 노인들에게 커피를 나눈다.

그녀가 좋아하던, 설탕 두 스푼 들어간 진한 믹스커피.

컵 속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나는 속삭인다.

“정희 씨,

그날 당신이 사준 기억은,

아직도 내 안에서 따뜻합니다.”

그리고 나는 미소 짓는다.

처음으로,

진짜 내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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