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치매였다.
시계 수리공이셨지만, 이제는 시계도 못 고치셨다. 그런데 손주가 장례식 후에 할아버지의 수리 일지를 보았다. 할아버지가 4년 동안 고친 시계는 단 하나였다. 손주 방 벽시계. 원래 고장 나지 않은 시계였다."
멈춘 벽시계
할아버지는 시계 수리공이셨다.
50년 동안. 동네 시계는 거의 다 할아버지 손을 거쳤다. 할아버지는 시계 소리를 들으면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그만큼 시계를 사랑했다.
그런데 4년 전부터, 할아버지는 시계를 보지 못했다.
치매였다.
아들 내외는 할아버지를 모셨다. 하지만 바빴다. 손주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자주 오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혼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매일 오후 5시. 할아버지는 현관문 앞에 앉으셨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앉아 계셨다.
"아버지, 왜 거기 앉아 계세요?"
"응? 아, 손주 오는 시간이라."
손주는 오지 않았다. 거의 오지 않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앉아 계셨다.
손주는 할아버지가 불편했다.
냄새가 났다. 말이 중복됐다. 같은 질문을 백 번 했다.
"밥 먹었니?"
"먹었어요, 할아버지."
"진짜 먹었니?"
"먹었다고요!"
손주는 짜증을 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자주 손주 방에 들어가셨다.
"왜 들어오세요!"
"시계... 시계 좀 보러..."
방에는 벽시계가 하나 있었다. 고장 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꾸 만지셨다. 돌리시고, 두드리시고.
손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치매가 심하시구나.
어느 날, 손주는 시험기간이었다.
기말고사. 밤새 공부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방문을 열었다.
"손주야, 시계..."
"할아버지, 지금 바빠요! 나가주세요!"
할아버지는 멈칫하셨다.
"아... 그래. 미안하다."
문이 닫혔다.
손주는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분명 밤 12시에 공부를 시작했는데...
시계를 자세히 보았다.
초침은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시침이 이상했다. 3시간 정도 느렸다.
손주는 시계를 고쳤다. 다시 원래 시간으로.
그리고 잊었다.
할아버지는 그날 밤, 손주가 잠든 후에 방에 들어오셨다.
손주는 시험 때문에 지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셨다.
그리고 손주의 이마에 입을 맞추셨다.
"수고했어. 내 손주."
그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밤이었다.
할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가셨다.
심장마비였다. 평화롭게, 잠든 것처럼.
손주는 시험장에서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그는 시험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장례식은 작았다. 손주는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한 대화가 짜증 섞인 말이었다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울 수도 없었다.
며칠 후, 손주는 할아버지 방을 정리했다.
낡은 책상. 돋보기. 시계 부품들. 그리고 한 권의 수첩.
수리 일지였다.
손주는 펼쳐보았다.
첫 페이지는 50년 전 일지였다. 시계 수리 기록. 정교한 필체.
그런데 4년 전부터, 내용이 이상해졌다.
"2022년 3월 15일. 손주 방 시계 점검. 문제 없음. 그래도 한 번 봐줌."
"2022년 4월 2일. 손주 방 시계 재점검. 여전히 잘 됨. 침침한데도 잘 보임."
"2022년 5월 8일. 손주 방문 앞에서 30분 기다림. 손주가 전화 중이었음. 나중에 시계 보러 감. 시계는 멀쩡함."
손주의 눈이 흔들렸다.
2022년 10월 15일. 손주가 시험 기간이라고 함. 밤새 공부한다고. 걱정됨. 시계를 3시간 늦춤. 그럼 손주가 더 잘 수 있을까? 나는 바보임. 시계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님. 하지만 손주가 조금이라도 자면 좋겠음.
2022년 11월 20일. 손주가 시계 고쳤다고 함. '할아버지, 시계 좀 만지지 마세요' 라고. 나는 고개 숙임. 미안했다. 하지만 다음 날, 또 시계를 늦춤. 나는 나쁜 할아버지임.
손주는 눈물이 났다.
계속 넘겼다.
2023년 5월 12일. 오늘 손주가 왔다. 머리가 많이 컸다. 자는 얼굴을 봤다. 이마에 뽀뽀했다. 나는 매일 보고 싶다.
2023년 9월 8일. 손주가 '할아버지, 저 바빠요' 라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그래도 시계는 늦췄다. 나는 못 참는 사람이다.
2024년 2월 1일. 나는 요즘 기억이 자주 나지 않는다. 하지만 손주 방 시계는 잊지 않는다. 몇 시인지. 언제 들어가야 할지.
2024년 7월 14일. 오늘 손주가 다쳤다. 학교에서 넘어졌다고. 방에서 자고 있었다. 이마에 뽀뽀했다. 괜찮아지길.
2025년 1월 3일. 나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다. 손주는 아직 안다. 하지만 곧 잊을지도 모른다. 그 전에, 손주의 얼굴을 많이 봐두려고 한다. 그래서 자주 방에 들어간다. 시계 핑계로.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2026년 6월 10일. 오늘 손주가 시험을 본다. 나는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시험에 방해될까 봐.
하지만 손주가 공부하다가 잠들었다. 나는 이불을 덮어줬다. 이마에 뽀뽀했다.
이 일지를 볼 날이 올까? 내가 없을 때.
손주야, 나는 치매가 아니었다. 조금 기억이 안 날 뿐이지.
나는 너의 이마에 뽀뽀하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시계를 고친 게 아니라, 너와 함께할 시간을 고친 거란다.
사랑한다, 손주야. 나는 너의 할아버지였다는 게 행복했다."
손주는 그날 밤, 자신의 방 벽시계를 봤다.
시계는 멈춰 있었다.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아무도 만지지 않았다.
손주는 시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뒤쪽 커버를 열었다.
거기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글씨.
"이 시계는 고장 나지 않았어. 내가 매일 늦췄을 뿐이지. 네가 조금이라도 쉬었으면 해서."
손주는 시계를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 저... 진짜 바보였죠?"
"할아버지는 저를 보려고 그런 거였는데..."
그는 시계를 다시 벽에 걸었다.
시간을 맞췄다.
그리고 매일 밤, 자기 전에 시계를 올려다보기로 했다.
"할아버지, 오늘도 수고했어요."
"내일도 봐주세요. 저, 이마에 뽀뽀해주세요."
"저 이제 안 짜증낼게요."
시계는 조용히 초침을 옮겼다.
마치 할아버지가 대답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핑계'를 대면서까지 다가와주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나요? 지금 그분께 전화 한 통 하는 게 어떨까요? 댓글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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