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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簿儀)의 일곱 여동생 "칠금화(七朶金花)"

작성자청산|작성시간26.03.19|조회수2 목록 댓글 0

https://youtu.be/Ytg0tuidMW8?si=wu8I5yUymVzVYBOB

만주국 황제가 된 부의(簿儀)

 

1908년 3살의 어린 나이로

청나라 황제가 된 선통제(宣統帝) 부의(簿儀)는,

1912년 2월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퇴위를 당하면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중국사(中國史)의 마지막 황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그리고 12살 때인 1917년에는,

청나라 부활을 꿈꾸는 복벽파(復辟派)의 쿠데타로

복위(復位)를 하였지만,

쿠데타의 실패로 "12일 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이후 1932년에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의 집정(執政: 최고 통치자)이 되고,

1934년에는 생애 세 번째로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꼭두각시 황제 생활도 끝이 납니다.

만년의 부의(簿儀)

 

그리고 선양(瀋陽)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려던 부의(簿儀)는,

공항에서 소련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고,

이후 전범(戰犯) 신분으로 소련에서 5년, 중국에서 10년

도합 15년간 수감 생활을 하게 됩니다.

1959년 12월에는 특별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54살의 부의는 출소하여 일반인으로 살게 되는데,

1967년 10월 요독증(尿毒症)이 악화되면서

61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부의(簿儀)에게는 칠금화(七朶金花)로 불리는

일곱 여동생이 있었는데,

황실녀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도 있는 신분이었지만,

그녀들도 오빠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

어린 시절 온영(韞媖)

 

첫째 "애신각라 온영(愛新覺羅 韞媖)"은

부의(簿儀)가 황제로 즉위하는 해인 1908년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온영(韞媖)은 궁에서 자라게 되는데,

4살 때인 1912년 부의(簿儀)가 퇴위되었지만,

"부의(簿儀)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황제의 칭호는 그대로 유지하며,

황제는 황실 식구, 환관, 궁녀들과 함께

자금성(紫禁城)에서 그대로 생활하고,

임시 정부로부터 매년 400만 냥의 생활비를 받는다"는 등

8개 항의 합의된 조건에 따라, 궁(宮) 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사실 갇혀 지내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온영(韞媖)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갔으며,

미모와 지위가 어우러지면서,

베이징에 널리 이름도 알려집니다.

성년이 된 온영(韞媖)

 

그리고 1924년, 16살의 온영(韞媖)은

곽포라·윤양(郭布羅·潤良)과 결혼을 하는데,

윤양(潤良)은 만주족 귀족 집안 출신인

부의(簿儀)의 정실 황후 곽포라·완용(郭布羅·婉容)의 동생으로, 당연히 정략결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혼을 한 온영(韞媖)이

다음 해 1925년 갑자기 병으로 쓰러집니다.

급성 맹장염이었는데, 베이징의 외국 병원에서

수술을 하면 금방 나을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온영(韞媖)의 가족들은 서양의 의술을 믿지 않았고,

무엇보다 온영(韞媖) 스스로가 귀한 신분인 자신의 몸에

그 어떤 접촉도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온영(韞媖)은

17살의 나이로 허망(虛妄)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온영(韞媖)의 결혼 행렬

 

셋째 온영(韞穎: 좌)과 온화(韞和)

 

둘째 "애신각라 온화(愛新覺羅 韞和)"는

부의(簿儀)가 황위에서 쫓겨나기 직전인 1911년에 태어났는데, 이후로도 황실의 자금성(紫禁城) 생활이

계속되면서, 궁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천성이 자유로웠던 온화(韞和)에게

궁 생활은 감금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궁 생활을

"배고프지도 춥지도 않았지만, 자유는 없었습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21살이 된 1932년에는,

만주국(滿洲國)이 건국되는 창춘(長春)에서

영국 유학생 출신의 엘리트 정광원(鄭廣元)과 결혼을 하는데,

정광원은 부의(簿儀)를 도와준 스승이면서,

만주국 초대 총리가 되는 정효서(鄭孝胥)의 손자였습니다.

온화(韞和)와 두 딸

 

따라서 온화(韞和)의 결혼도

부의(簿儀)가 동생을 위해 준비한 결혼이라기보다는,

정효서의 힘이 필요했던 부의(簿儀)와

권력을 쥐고 싶었던 정효서 사이의 정치적 거래였습니다.

결혼 후 온화(韞和) 부부는 1년간 영국 유학을 다녀오는데,

두 사람은 뜻밖에도 서로 잘 맞았고,

귀국 후 남편 정광원은 부의(簿儀)를 따라 청(淸)나라 부흥에

나서면서, 부의(簿儀)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이 됩니다.

그러나 1945년 만주국이 무너지면서

버려진 온화(韞和) 부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온갖 고난을 겪고 목격하면서

눈 덮인 동북 지방을 떠돌아야 했으며,

험난한 여정 끝에 1949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정착을 하게 됩니다.

가영화(賈英華)의 "말대황매온화(末代皇妹韞和)"

 

이후 온화(韞和)는 50~60명의 아이들이 있는

보육원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남편 정광원은 베이징 우체국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생활하게 되는데,

온화(韞和)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2002년 온화(韞和)는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나는데,

떠나기 전 작가 가영화(賈英華)가 쓴 작품

"말대황매온화(末代皇妹韞和)"에 이런 서문(序文)을 남깁니다.

"이제 저는 쇠퇴한 마지막 왕조와 왕부의

가장 나이 많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제 경험과 이 책이 역사적 변혁의 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제 소망 중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년의 온화(韞和)와 정광원(鄭廣元: 중앙) 부부

 

셋째 온영(韞穎)

 

셋째 "애신각라 온영(愛新覺羅 韞穎)"은

퇴위된 오빠 부의(簿儀)가 자금성(紫禁城)에서 살던

191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10살이 되던 해에

청나라 황실이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일본의 도움으로 톈진(天津)의 일본 조계지(租界地:

외국인 거주 지구)에서 살게 됩니다.

부의(簿儀)는 일곱 여동생 중에서도

셋째를 제일 귀여워하며 챙겼는데,

함께 일본어도 배우고 테니스를 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부의의 주선으로 황후 곽포라·완용(郭布羅·婉容)의

동생 윤기(潤麒)와 약혼을 합니다.

그런데 같은 정략결혼이지만 두 언니와는 좀 달랐는데,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자금성에서 함께 놀던 절친이었습니다.

자금성에서 함께 놀던 부의(簿儀)와 윤기(潤麒)

 

자금성 생활이 심심했던 부의(簿儀)는,

활달한 꼬마 처남인 윤기(潤麒)를 자주 불러서 함께 놀았는데,

나이가 비슷한 온영(韞穎)과 윤기(潤麒)는 절친이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1931년 창춘(長春)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결혼 후 한 달도 되기 전에 부의(簿儀)는

윤기(潤麒)를 일본으로 보내 군사학을 공부하도록 했고,

온영(韞穎)도 함께 일본으로 갔습니다.

사실 군사학 공부도 공부였지만,

일본의 도움을 얻기 위한 볼모나 마찬가지였는데,

온영(韞穎)은 일본 황실의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33년 창춘(長春)으로 다니러 온 온영(韞穎)은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온영(韞穎)과 윤기(潤麒) 부부

 

만청(晩淸) 최고의 미인 격격(格格) 온영(韞穎)

 

이렇게 하여 윤기(潤麒)는 만주국 군사학교에서

교관 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은 창춘(長春)에서 살게 됩니다.

1945년 만주국이 무너지면서,

윤기(潤麒)는 소련군에 포로로 잡히고,

이후 온영(韞穎)은 세 아이들과 함께

동북 지역을 떠돌며 힘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1949년 우여곡절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왔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형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문맹자가 많았던 주민들 사이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그녀에게 신문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면서,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온영(韞穎)은,

주민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사회 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풀려난 남편 윤기(潤麒)와 함께

 

그리고 이런 일들이 알려지면서,

주은래(周恩來) 총리도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얼마 후 그녀는 베이징 동성구(東城區)

정협위원(政協委員)으로 선발됩니다.

이후 그녀의 삶은 크게 나아지는데,

훗날 만나게 되는 오빠 부의(簿儀)는 자신의 저서

"나의 전반부 인생(我的前半生)"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게으르고 요구할 줄만 알던 셋째 공주(三格格)가

사회 운동가가 될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1957년에는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남편 윤기가 풀려나면서, 12년 만에 가족이 다시 만나는데,

인생의 마지막까지 알차게 살았던 온영(韞穎)은,

1992년 남편보다 먼저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만년의 온영(韞穎)과 윤기(潤麒) 부부

넷째 온한(韞嫻)

 

1914년에 태어난 부의(簿儀)의 넷째 여동생

"애신각라 온한(愛新覺羅 韞嫻)"부터는

부의(簿儀)의 배다른 동생으로,

앞의 세 동생만큼 부의(簿儀)와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온한(韞嫻)도 부의(簿儀)의 주선으로

경호대장이었던 조기번(趙琪璠)과 결혼을 합니다.

조기번은 몽골계 귀족 집안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부의(簿儀)의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자식도 낳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48년 국공내전(國共內戰) 막바지에 상하이로 갔던 조기번이,

인민해방군에 막혀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조기번은 살기 위해

국민정부를 따라 대만(臺灣)으로 도망을 칩니다.

부의(簿儀)와 조기번(趙琪璠)

 

이렇게 하여 결혼 8년 만에

온한(韞嫻)과 아이들은 조기번과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당시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던 온한(韞嫻)은 치료를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북(東北)에서 베이징으로 와야 했는데,

치료비와 양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팔아가며 생활을 꾸려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고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온한(韞嫻)은 먹고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1958년부터는 고궁박물관에서

기록물을 정리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2년 후 고궁박물관 공사가 끝나면서

그녀는 다시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하며 살게 됩니다.

 

만년의 온한(韞嫻)과 조기번(趙琪璠) 부부

 

그 후 주은래(周恩來) 총리의 배려로

부의(簿儀)의 가족이 정부 지원을 받게 되면서,

온한(韞嫻)은 정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하게 되었으며,

병원 치료도 마음 놓고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82년 4월 말에는,

70년대 중반부터 대만과 중국 본토 사이에

노골적인 적대감이 완화되면서,

34년 동안 꿈에서만 서로를 볼 수 있었던 남편 조기번이,

마침내 베이징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온한(韞嫻) 혼자서 훌륭하게 키워낸

의사인 딸과 전기 기술자 아들과 함께,

부부는 그저 껴안고 울기만 했습니다.

이후 온한(韞嫻)은 2003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랫동안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오빠 부의(簿儀)와 함께 골프장에서 온화(韞和), 온영(韞穎), 온한(韞嫻)

 

다섯째 온형(韞馨)

1959년 12월,

사면(赦免)을 받고 전범 관리소에서 풀려난 부의(簿儀)가

베이징 기차역에 도착할 때 마중을 나온 사람이

부의(簿儀)의 다섯째 여동생 "애신각라 온형(愛新覺羅 韞馨)"과 만가희(万嘉熙) 부부였으며,

이후 부의(簿儀)는 누이 집에서 보름 동안 생활하다가,

정부가 마련한 숙소로 옮겨갑니다.

온형(韞馨)은 1917년 사가(私家)에서 태어났는데,

자라면서 황제였던 오빠가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자금성(紫禁城)에 있는 오빠를 쉽게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철이 들면서 오빠의 초대로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오빠가 아닌 폐하(陛下)로 부르며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무순(撫順) 전범 관리소의 만가희

 

사실 부의(簿儀)의 아버지 순친왕(醇親王)은,

친일(親日) 성향을 보이는 부의(簿儀)에게

매우 불만스러움을 표출하고 있었으며,

후손들에게도 부의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통제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따라서 만주국 시절 온형은 부의(簿儀)가 살던 집회루(緝熙樓)와

마당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매일 볼 수 있었지만,

오빠가 아니라 항상 황제의 예(禮)를 지켜며 대했습니다.

그리고 베이징 역에서 만난 부의(簿儀)를

큰 오빠라고 부른 것이, 일생에 처음이었습니다.

온형(韞馨)도 자라면서 부의(簿儀)의 추천에 의하여,

청(淸)나라 재상의 아들로 일본에서 군사학을 공부한

만가희(万嘉熙)와 결혼을 하였으며,

만가희도 부의(簿儀)의 적극적인 신임 속에 일을 하였습니다.

 

만년의 온형(韞馨)

 

그리고 만가희 역시 만주국 몰락과 함께

무순(撫順) 전범 관리소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혼자가 된 온형(韞馨)은,

1957년 남편 만가희가 풀려날 때까지

재봉틀 가게에서,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자전거 타기와 주판 치는 법까지 배워가며 여러 일을 하여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1957년 남편이 풀려나고,

풀려난 남편이 일본 유학 실력을 바탕으로

번역 회사에서 일본어 번역가 일을 하면서

형편이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남편은 1972년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이후 온형(韞馨)은 베이징의 호텔에서 웨이터리스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모두 대학 공부까지 시켰는데,

1998년 8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만년에 만난 세 자매: 3 온영(韞穎), 5 온형(韞馨), 7 온환(韞歡)

 

여섯째 온오(韞娛)

 

여섯째 "애신각라 온오(愛新覺羅 韞娛)"는

오빠 부의(簿儀)가 자금성(紫禁城)에서 쫓겨난 후인 1920년,

사가(私家)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의 그림에

푹 빠져 지냈으며,

모든 생활에서 황가(皇家)와 관련되는 것을 싫어했는데,

성인이 되면서 이름도 "부온오(溥韞娛)"로 바꾸고

평생을 그림에 매진했습니다.

따라서 인물 소개에서도 청(淸)나라 공주보다는

"근대 중국의 훼화가(卉畵家: 꽃을 주제로 한 전문 화가)"로

이름을 남깁니다. 그녀는 여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몰골화(沒骨畵: 스케치 없이 그리기) 전문가였던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녀도 몰골화 전문 화가가 됩니다.

온오(韞娛)의 작품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친모(親母)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어머니 등가씨(鄧家氏)는 아버지 순친왕(醇親王)의

두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귀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선량하고 근면하며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는데,

집안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고,

이 열정을 딸 온오(韞娛)에게 물려준 것이었습니다.

194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에서는 나이가 든 온오(韞娛)의 신랑감 물색에 나섰으며,

금(金)나라 황실 집안의 후손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그림을 전공하고,

일본 미술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던

완안애란(完顔愛蘭)과 결혼이 성사됩니다.

1941년 동생 온환(韞歡)과 함께

온오(韞娛)의 남편 화가 완안애란(完顔愛蘭)

 

그리고 1945년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공통분모인 그림에 대한 관심사 때문에,

함께 그림을 공부하고 감상하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며 웃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날로 깊어졌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1947년부터

베이징의 북해(北海) 공원, 중산(中山) 공원 등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는데,

남편은 난초 그림에 심취하여 난왕(蘭王)으로 불렸으며,

온오(韞娛)는 특히 모란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약(芍藥)"은

1959년 국경절 10주년 기념

전국미술전람회에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온오(韞娛) 부부의 공동 작품 "난죽도입축(蘭竹圖立軸)"

 

그리고 1960년에는 그녀의 그림 "수선화(水仙)"가

춘절 회화전에 소개되었으며,

1979년에는 그녀의 작품 "연꽃과 잠자리(荷花蜻蜓)"가

건국 3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었습니다.

이렇게 온오(韞娛)는 평생을 그림과 함께 하였는데,

베이징 예술원에서도 함께 일을 하면서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을 만난 것이

다른 자매들과는 달리 가장 큰 복(福)이었던 것 같습니다.

온오(韞娛)는 말년에는 남편과 함께

고궁박물원 등 여러 기관에 서예와 그림을 기증하는 등

문화재 기증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온오(韞娛)는 남은 여섯 자매 중 가장 먼저인 1982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병상에 누워 있을 때도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온오(韞娛)와 지켜보는 남편과 아들 왕소(王昭)

 

일곱째 온환(韞歡)

 

1921년에 태어난 막내 "애신각라 온환(愛新覺羅 韞歡)"은

일곱 자매 중 유일하게 자신의 사랑을 찾아

자유 결혼을 한 딸이었습니다.

아마도 황제였던 오빠 부의(簿儀)와는

15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고,

당시 부의는 집안일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덟 살이던 1929년 영국공무국(英國工部局)에서 운영하는

요화학교(耀華學校)에서 공부를 시작한 온환(韞歡)은,

초등학교를 세운 넷째 오빠 부임(溥任)의 일을 돕는 등

실력을 쌓아나갔으며,

1948년에는 친구 이숙분(李淑芬)과 함께

"견지여자직업학교(堅持女子職業學校)"를 열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도서로도 발간된 온환(韞歡)의 일생

 

그리고 1950년에는 "김지견(金志堅)"이라는 이름으로

공립 초등학교 교사로 공식 채용되었으며,

형제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혁명 활동 퍼레이드에도 참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2월 이숙분의 소개로 만난,

자신과 이상을 공유하는 산둥성(山東省) 쯔보(淄博) 출신의

가난한 한족(漢族) 청년 조홍지(趙洪志)와 결혼을 합니다.

당시 아버지 순친왕(醇親王)이 극구 반대를 했지만,

온환(韞歡)은 이를 극복하였으며,

언니들의 화려한 결혼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세 쌍이 함께 하는 간소한 합동결혼식이었지만,

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사랑하는 청년과 자유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김지견(金志堅)은

1960년 남편을 먼저 보내고는 평생을 교직 생활에 바칩니다.

만년에 고궁을 찾은 온환(韞歡)

교사로 헌신한 온환(韞歡)

 

그녀는 고귀한 황족 혈통과는 무관하게,

베이징 정충가(精忠街)의 초등학교부터 제227중학교까지

평생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특히 부지런하면서 업무에도 능통하고

매사에 헌신적이었던 그녀는 동료들에게 많은 칭송을 받았으며,

"모범 교사(模範敎師)"라는 칭호도 여러 차례 수상하였는데,

오늘날 베이징의 여러 학교에서

그녀의 업적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9년 제227중학교 부교감으로 퇴임한 김지견은,

2004년 중병으로 입원하여 20여 일 후에 세상을 떠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가문은 중국 역사에서 죄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생에서 국민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제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출처: 혼창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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