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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회

천재 ③ 이광수 ② (춘원ㆍ1892)ㆍ여자관계ㆍ인물평ㆍ인물 연구

작성자청산|작성시간26.06.10|조회수3 목록 댓글 0

조선의 3대 천재는  "이광수(李光洙ㆍ1892~1950ㆍ58세)ㆍ홍명희(洪命熹ㆍ1888~1968ㆍ79세)ㆍ최남선(崔南善ㆍ1890~1957ㆍ67세)"이다. "한국 현대 소설의 아버지"라는 평가가 있으나, 일제 강점기 후반의 행적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순 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 개척ㆍ조선 왕가의 방계혈족ㆍ나치즘에도 공감.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ㆍ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ㆍ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1. 이광수(李光洙ㆍ고야마 미타로ㆍ1892~1950.10.25ㆍ향년 58세)

소설가로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남녀 청소년의 우상ㆍ"안창호ㆍ윤치호"의 사상적 계승자이기도 했다. (민족 개조론ㆍ실력 양성론 – 김성수도 같은 생각)ㆍ친일파ㆍ독립운동가(상하이 임시정부 참여ㆍ독립신문)ㆍ자유주의 운동가ㆍ페미니즘 운동가ㆍ작가(소설가ㆍ시인ㆍ백범일지 교정)ㆍ언론인(기자ㆍ동아일보 편집국장ㆍ조선일보 부사장)ㆍ모친- 김씨(3번째 부인)으로, 사실상의 서자

•  출 생: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  묘 소: 평양 룡성구역 룡궁1동" 산기슭의 특설묘역

•  사 망: 북조선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고개리 / 시신은 "홍명희ㆍ안재홍ㆍ김원봉"에 의해 장례→ 야산에 안장 (1950.07.12일, "김규식ㆍ김동원ㆍ안재홍ㆍ방응모ㆍ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승용차 안에서 사망)

•  호: 춘원(春園)ㆍ고주(孤舟)ㆍ외배ㆍ올보리ㆍ장백산인(長白山人)     •  사 인: 병사(고혈압ㆍ폐렴ㆍ동상ㆍ폐결핵)

•  별 칭: 만인의 연인ㆍ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ㆍ 친일 변절 후→ 이광수(李狂獸) / 필 명: 춘원생ㆍ경서학인(京西學人)ㆍ노아자닷뫼당백ㆍY생ㆍ장백산인

•  학 력: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 중퇴ㆍ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야간반 중퇴     • 종 교: 천도교(1903)→ 불교(1937)

•  처: 1째 - 백혜순(이혼ㆍ1910~1918ㆍ1살 연하)  / 2째 - 허영숙(이혼ㆍ1921~1946ㆍ도쿄여의전 졸업ㆍ서양식 산부인과 의사)→ 사진참조          •  연 인: 나혜석ㆍ김일엽ㆍ김명순 

•  자 녀: 3남 2녀 ("허영숙"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음) 이봉근(1째 아들)은 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2번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은 대부분 요절하였고, 아들 이영근ㆍ딸 이정화 만이 살아남았다.  딸- 이정화(펜실베니아 대학교수)

•  가 족: 모친- 김씨(3번째 부인)으로, 사실상의 서자 취급ㆍ형- 3명(요절)ㆍ처 조카사위- 백두진(白斗鎭ㆍ국무총리ㆍ국회의장)   

•  친 구: 김소월(곽산면 출신ㆍ이광수가 담임)ㆍ조만식(동료 교사)ㆍ백석(시인)ㆍ홍명희ㆍ최남선ㆍ안재홍ㆍ송진우

•  저 서: 소설ㆍ전기ㆍ시집ㆍ평전ㆍ수필 외에도 서예에 능해, 많은 서예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  수 상: 조선예술상(소설 무명, 1940, 모던일본사 주최)

2. 여자관계① 1910~1918: 본처 "백혜순( ? ~ ? )"과 중매 결혼 → 이혼

1910.07월, 중매로 만난 1년 연하의 "백혜순(白惠順)"과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결혼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이후 그는 "결혼할 자유와 이혼할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고 다녔다. 또한 이혼은 조선시대의 출처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과 보다 나은 삶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이라고 주장하였고, 무의미한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은 서로간의 피로이자, 무의미한 시간 낭비임을 강연ㆍ칼럼을 통해 역설하였다.

② 1921~1946: 후처 "허영숙(1895~1975ㆍ밀정?)"과 만남→ 사랑의 도피 여행(상하이 시절)→ 이혼

"허영숙(도쿄여의전 졸업ㆍ서양식 산부인과 의사)"은 "조선총독부"가 매수한 "밀정"이고, "허영숙"이 그를 포섭했다는 의혹은 "박종화(소설가)"등을 통해 제기되었는데, 이후 "허정숙"이 밀정이고, "조선총독부에 포섭되었느냐"의 여부는 논란 중에 있다. "박종화"에 의하면,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진학문(허영숙의 첫 애인)은 충격을 받고, 홧김에 일본 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한다.

이미 장편소설 "무정(1917)"으로 "전 조선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명성을 얻은 희대의 천재는 

"일본 유학" 중, 19세 때 결혼한 아내 "백혜순"과 이혼한 후, "도쿄여의전"을 졸업한 "허영숙"과 "베이징"으로 3달가량 "사랑의 도피여행(1918)"을 떠났다. 1920.04월, "강남의 봄"이라는 구절처럼 남쪽지방 상하이의 봄이 무르익어 갈 때, 그는 이미 2년째로 접어든 타국생활과 끝이 안 보이는 독립운동에 조바심을 느끼게 된다.

어려서 "천애고아"로 자라온 그는 "애정결핍증 소년"이 지닌 민감성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썼는데, "베이징"에서 뜻밖에도 "신채호"를 만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신이 "문제아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제아"의 내용은 "젊은 여자와 함께 산다는 것ㆍ매일신문에 글을 쓴다는 것ㆍ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말은 그가 여행을 떠날 때, "총독"의 측근인 일인 언론계 거물급인 

"아베"의 소개장을 소지하고 와서, 공사관의 도움을 받은 것을 뜻한다.

"베이징"에서 그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민족적 분위기를 안은 채, 귀국 후 도일하여 이듬해에 "2ㆍ8 독립선언서"를 쓴다. 그리고 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사명을 띠고,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 1919.02.05일이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근대화된 문명국가인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었고, 그의 조바심은 연인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에 솔직히 나타난다. "나는 상하이에 온 후로 작년(1919) 9월부터 대단히 자포자기한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술을 먹고 기생집에도 다녔습니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홍보로 "독립신문"을 펴내는 일을 맡았던 그는 "안창호"와 긴밀한 사제적ㆍ동지적 관계를 맺게 되어, 일생 동안 그의 이념ㆍ노선ㆍ충고를 따랐다. 그런데 그가 "독립신문" 일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만은 "안창호"의 충고를 거슬렀다.

"허영숙"이 "상하이"로 그를 찾아간 것은 1921.02월이었는데, 이 때 그는 아예 "상하이에 남는 길ㆍ안창호의 권고대로 미국으로 가는 방안" 등을 버린 채, 그 해 3월 귀국 길에 올랐다. 그는 "일제 총독부 밀사"로 의심받던 "허영숙"을 만난 뒤, 돌연 귀국하여 변절자로 의심받았다. "김우종(문학평론가)"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광수의 갑작스런 귀국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수는 "폐병 간호"가 인연이 돼, "의사 허영숙"과 결혼했다. "이광수에게 있어 허영숙은 아내 이상의 존재였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산부인과 의사였던 허영숙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당시 집필 중이던 "무정"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개인적 환경을 일체 무시하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조선문인협회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본인까지 회원으로 참여해 그들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광수의 친일은 자발적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해방 후 1946년, 이광수는 "허영숙"과 이혼을 하는데, 이를 두고 "그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축적한 부동산 같은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기 위한 위장이혼이었다"고 비판한다. 또 일각에서는 "친일파로 몰린 자신 때문에, 가족이 피해 받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50.07월, "이광수"는 납북 중 사망하고, 6ㆍ25전쟁 후, "허영숙"은 식구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③ 연인: 나혜석ㆍ김일엽ㆍ김명순과 관계

• 나혜석(羅蕙錫ㆍ1896~1948ㆍ52세ㆍ최초 서양화가ㆍ유화ㆍ페미니즘)  •  김일엽(金一葉ㆍ1896~1971ㆍ75세ㆍ승려ㆍ여성운동가ㆍ시인ㆍ수필가)  •  김명순(金明淳ㆍ1896~1951ㆍ55세ㆍ1920년대 대표 여류시인ㆍ페미니즘)

"나혜석ㆍ김일엽"과는 연인 관계이었고, "김명순"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1917~1918년 무렵, "나혜석"의 연인이었고, 1929년에는 "김일엽"과 잠시 사귀기도 했다. 1915년, "도쿄 와세다 대학" 유학 중, 그는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과 연애하였다. 그런데 "허영숙"과 연애하는 도중, 미술학교에 유학 중이던 "나혜석"과도 연애하게 된다.

두 여성과 연애하던 중, "나혜석"과의 결혼을 희망하였으나, 자신의 친구이자 나혜석의 오빠인 "나경석"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그가 고향에 부인 "백혜순"이 있는 유부남인데다가, 다른 여자인 "허영숙과 사귄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혜석"이 "정조 취미론ㆍ이혼 고백장" 등으로 지탄을 받을 때도 도와주었다.

"김일엽"의 "자유연애론ㆍ신 정조론"을 적극 옹호하였다. 또한 "김명순"의 후견인으로 그를 문단에 발탁하였으며, "이병도"의 집에 머무르도록 주선해주었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이들의 "자유연애"를 비난할 때마다, 이들의 "자유 연애론"을 인간 본연의 감정이며, 솔직한 자기표현이라며, 옹호하였다. (좌로부터, 나혜석ㆍ김일엽ㆍ김명순)

3. 인물평

어려서부터 몸이 병약하였고, "폐렴ㆍ결핵ㆍ손발 동상"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후처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로,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하였다. 취미로 "등산"을 좋아하여, 전국 각지의 명산을 등산ㆍ답사하였다.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던 듯하다. 틈만 나면, "허생전ㆍ이율곡ㆍ원효대사"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이들의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끼어 노래를 부르고 윷놀이도 했다. 그래선지, "이광수ㆍ허영숙"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아이들은 늘 아버지 편이었다.

"방정환"을 만나서, "어린이도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감화된 그는, 평생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반말을 쓰지 않고, 

존댓말을 썼다. 자신보다 10세ㆍ20세 이상 연하인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형님ㆍ아우님 하기도 했다. 또한 

"젊은이들의 의견"이라 하여, 무조건 반박하거나,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그를 "줏대 없다ㆍ체신

없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조선 사회가 지나치게 엄숙함만을 강조한다며, 이것 역시 가식적인 조선의 한 모습으로 규정했다.

그가 한때 사귀었던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은 해방 직후에 그를 만났는데, 그가 반말을 쓰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한 것을 회고하기도 했다. "춘원은 내가 인사하면 어린 나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어요. 말소리와 표정이 언제나 부드러웠고, 눈동자 빛깔이 엷어 꼭 서양사람 같았죠."

"백두산ㆍ금강산"을 비롯한 일부 산에 대해서는 등산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1921년 말ㆍ1923년, 2차례에 걸쳐, "금강산"을 방문하고, 기행문인 "금강산유기"를 지었다. "장안사ㆍ유점사" 등 한국전쟁 때 유실된 사찰과 사라진

기암괴석의 존재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금강산"을 오른 뒤에는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며, 그 절경을 칭찬하였다. 그는 "금강산유기"를 통해, 내금강의 빼어난 경관을 묘사하였다.

1936년, "계명"이라는 잡지에 남긴 기고문을 통해, "백두산 등반"에 대한 소감을 남겼다.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또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산인 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 백두산의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상 실제적 사정에 대하여 묻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작고 부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까닭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있을 까닭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을 우리가 이렇게 알아야 옳으며, 또 이렇게 알아도 그만이리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계명ㆍ1936)

 4. 인물 연구① 친일행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일생에 걸친 것이었다.

1919년 "2ㆍ8독립선언"에서부터 "상하이"에서 귀국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했던 "독립운동"이 도리어 특이하게 보인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그의 일생은 시종 "국가권력에 대한 신뢰ㆍ성취욕구ㆍ안일함에 대한 갈망"이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민족개량ㆍ문화주의"로 일관하던 그는 1937년 일제의 "동우회(수양동우회가 1929년부터 동우회로 명칭변경)사건" 구속에 걸려 옥고를 겪지만,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한편, 정신적인 지주 "안창호"의 타계(1938)에 직면한다. 이어 그는 1939년 "중국의 일본군" 위문을 위한 모임(북지황군위문작가단) 결성식의 사회를 맡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제3단계의 친일행위"로 들어선다. 즉, 춘원의 친일은

1단계: 1919년 이전까지로 이 시기는 주로 "통치권자에 대한 관념적인 협력정신"으로 볼 수 있고,   2단계: 상하이로부터의 귀국 이후로 자신의 이상과 현실적인 욕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이념체계인 "민족 개량주의ㆍ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하던 때이며,  3단계: 1939년 이후로, 이 때는 "전시협력체제"로 흔히들 친일이라고 하면, 이 시기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오히려 그 앞 시기가 더 중요한 역사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9.10.29일, "부민관"에서 열린 "총독부" 지시의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은 "박영희"가 사회를 맡았는데, 이광수가 회장으로 추대되어, "만세삼창"을 불렀다. 그러나 "동우회 사건"이 재판에 계류 중이었던 그는 "판사"로부터 회장 사임 압력을 받아, 12월에 그 직책에서 물러났다.

② 왕성한 일제 찬양ㆍ생활 풍속의 원천적인 개조 주장

그는 "의무교육과 우리 각오"를 비롯한 많은 논설과 "조선의 학도여"등의 시ㆍ"그들의 사랑"등의 소설ㆍ"성전 3주년"등의 수필ㆍ"반도 민중의 애국운동"등의 평론ㆍ"지원병 훈련소" 등의 방문기 등 글로 된 모든 장르를 동원하여, 왕성하게 "일제"를 찬양한다. 그의 세계관은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대적할 수밖에 없다"는 동서양의 대결 의식에서 비롯한다. 그는 소박한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던 "총독부의 통치이념"과 일치한다. "영ㆍ미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적대화할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그렇게 되면 "조선인도 일어날 날이 온 것"이라고 단언하는 그는, 전쟁에 조선인이 참여하는 것을 "성은에의 보답"으로 인식한다.

이런 시국적인 인식을 국민들에게 널리 퍼뜨리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세력으로 "좌익운동가들"을 지목한 것이 당시 "총독부 문헌"이었는데, 그 역시 같은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전향"이라는 술어를, "진실로 국가에 대하여서 반의를 포회하였던 자가 새로이 애국심에 자각하는 것이 정당한 의미"라고 풀이하면서, 이를 각계의 지식인들에게 적극 권장할 뿐만 아니라, 거짓 전향이나 전향 자체를 수치로 여기는 풍조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한다.물론 여기서 "전향"이란 사상적인 면만이 아니라, "민족주의"에서 "친일화"로의 변화까지도 포함시키는데, 그 충성도의 목표는 "임전태세의 완료ㆍ응소(應召)의 자세"임을 분명히 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생활혁신을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반도 민중의 애국운동ㆍ매일신보ㆍ1941.09.03) "이 생활의 혁신은 생활의 황민화, 생활의 합리화, 그리고 생활의 임전화(臨戰化)의 3대 강령에 의하여서 하여야 할 것이다. 생활의 황민화라는 것은 사상ㆍ감정ㆍ풍습ㆍ습관 중에 비 일본적인 것을 제거하고 일본적인 것을 대입 순화하는 것이다. 예하면, 혼상의례의 일본화ㆍ가족/친척 관념의 일본화ㆍ경신숭조(敬神崇祖) 천황중심의 생활의 신건설이다." 

이 글은 그의 "친일이념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내용의 골격은 "미나미 총독"이 주장했던 "전시동원체제의 지령"과 전면 일치하며, 이것은 당시 "녹기연맹"이 편찬한 "오늘의 조선 문제 강좌(전 6권)"과도 맞아떨어진다. 이로 미뤄볼 때, 아마 그(뿐 아니라 당시의 친일파들)는 이념적인 동질성 확보를 위한 일정한 연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력ㆍ위협"에 의한 "친일"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신념에 따른 친일이었음"을 나타내는 이런 "인간과 민족개조를 통한 조선인의 일본화, 모든 풍속과 습관과 가치관의 일본화"주장은 친일파 중에서도 그가 가장 열렬하게 내세운 사실들의 하나이다. 

생활ㆍ풍속의 원천적인 개조를 위하여, 그는 "역사"까지도 왜곡하였는데, 예를 들면 단편 "원술(元述)의 출정"에서는 장군의 딸 "아좌"와의 혼례를 앞두고, 출전했다가 패전의 굴욕을 씻고자, 태백산에 은거하던 "원술"을 등장시킨다. 3년여의 은거 중, 약혼녀 "아좌"가 나타나 "당나라"의 침입을 알리자, "원술"은 출정을 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는 옛 이야기 한 토막이지만, 그 다운 친일사상의 역사성이 스며져 있다. "원술"은 "김유신의 2째 아들이"며, 이 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설은 곧 "중일전쟁"에 조선인이 나서야 할 필요성을 긴 역사를 통한 진실로 합리화하려는 의도이다.

그래서 그의 친일사상은 당대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전 민족사를 통틀어 이를 일본화를 시키려고 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을 쳐라하옵신 대조(大詔)를 내리시다. 12월 8일 해 뜰 때, 빛나는 소화16년 하와이 진주만에 적악(積惡)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 웨스트 버지니아와 오클라호마 태평양 미 함대 부서지다.  이어서 치는 남양의 해공륙 프린스 업 웨일저 영함대기함 앵글의 죄악과 운명을 안고, 구안탄 바다 깊이 스러져 버리다. 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 만족이 번영할 기업 앵글의 발에 더립힌 지 2백 년 우리 임금 이제 광복을 선(宣)하시다" (선전대조(宣戰大詔)ㆍ신시대ㆍ1942.01)

③ "사이토 총독"과의 면담

그는 여러 글에서 "귀국하면 징역을 살 것"처럼 썼으나, 사실은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을 뿐만 아니라, 1921.05월, "허영숙"과 정식 결혼, 9월에 "사이토 총독"과 면담 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로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아베(총독 측근ㆍ일인 언론계 거물급)"를 통하여, "사이토 총독"에게 보낸 건의서 "유랑 조선청년 구제선도의 건"(1921.04)은 그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ㆍ시베리아" 등지의 2,000여 유랑자들(실은 독립운동가들)이 지닌 위험성을 3가지로 나눠서 경고한다면서,

첫째는, 독립운동을 표방해서, 무기를 들고, 조선 안에 몰래 들어오는 일이며,  둘째는, 과격파 러시아의 선전자가 되는 일이고,   셋째는, 사기꾼 또는 절도ㆍ강도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들이야말로 "수효에 있어 적은 것 같지만, 그 실제로 일본의 국방 및 사회의 안녕에 대해 경시해서는 안 되는 관계"라고까지 강변한다. 이런 충언을 해준 그를 "총독부"가 어떻게 대했을까? 에 대한 명확한 입증자료는 없다. 그러나 "아베"가 "총독"에게 건의한 여러 글들로 미뤄볼 때, "민족개량주의론"을 선양시켜, 독립운동의 이념을 누그러뜨리면서, "문화운동"을 유도하려 했던 점만은 분명하며, 그 주역으로 "이광수ㆍ최남선ㆍ최린" 세 사람에게 정책적인 배려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증명된다. 

"상하이"로부터의 귀국 자체를 "총독부의 회유"로 본 재일본 역사학자 "강동진"은 이광수가 192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받았던 수당이 한 달에 300엔이었다고 밝혔다. 1929년 무렵, 파격적인 "부장" 대우가 100엔이었다니, 그 위력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④ 보수에 합당한 "일본 제국"을 위한 봉사

이광수는 그 보수에 합당하게 일본 제국을 위해 봉사했을까? 월간 "개벽"지에 "민족개조론"(1922)을, 이어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1924)을 쓰자, 당시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비난과 욕설이 들끓었는데, 결국 그 압력으로 잠시 "동아일보사"를 그만둬야 할 지경이었다. 이 두 글은 나라 잃은 원인을 "국민성 자체의 약점"으로 돌리는 한편,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원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미 "독립운동권"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받은 그는 "안창호"의 의사에 따라, "수양동우회" 결성에 앞장섰는데, 이 단체는 그의 신원보증인 역할을 했던 "아베"를 통하여, "총독"에게 사전에 규약을 보고한 뒤에 창립되었다.

"조선 민족개조의 대사업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수양동우회는 그 뒤 비록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었지만, 적어도 춘원이 초기에 창설했을 때의 기본구도는 총독부의 정치적인 저의가 개입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광수가 친일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행위를 시작한 시기는 이처럼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인즉 그 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즉, 그는 1916년 "매일신보"에 쓴 기행문 "대구에서"라는 글에서, "일찍 해외에 있어 격렬한 사상을 고취하던 자가 도쿄에 와서 2, 3년간 교육을 받노라면, 번연 인구몽(引舊夢)을 버려, 이전 동지에게 부패하였다는 조소까지 듣게 되는 것을 보아도 알지라.  신문과 잡지와 서적과 선량한 청년회 같은 사교기관이 있어 기회를 따라 신지식을 주입하면 결코 여사한 무모를 행치 아니할 것이라"고 썼다. 이 말은 곧 독립 운동가들의 부당성과 우매성을 지적한 대목으로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강한 친일이념의 냄새를 풍긴다. 더구나 이 글은 형식이 총독에게 건의하는 서간체적 기행문으로 되어 있어, 그 뒤의 "유랑 조선청년 구제 선도의 건"과도 일맥상통한다.

일어로 된 처녀작 "사랑인가"와 친일의식의 단초 최근에 발표된 이광수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들은 그의 친일의식의 단초를 "대구에서"보다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그가 일본의 기독교 선교사계 교육기관 "메이지(明治)학원"에 다닐 때(18세,1909) 쓴 단편 "사랑인가"에서 찾고 있다. 소설은 11세 때 고아가 된 "조선인 유학생 문길"이 고독과 번민 속에서 사랑을 찾다가, "일인 소년 마사오"에게서 그 감정을 느끼나, 여전히 만족할 만한 애정은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는 마사오를 만나면, 제왕의 앞에라도 선 것처럼 얼굴을 들 수가 없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극히 냉담한 태도를 꾸미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또한 그 이유도 몰랐다. 그저 본능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붓으로 입을 대신했다. 3일 전에 그는 손가락을 잘라서 혈서를 보냈다." 바로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임종국"은 이 동성애적인 사랑의 의미를 반민족적인 발상의 효시로 보고 있는 것이다.

⑤ 최초의 미스코리아 심사 위원

1931.05월에 개최된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1931.10월 그는 심사위원으로 총 326명의 응모 사진 중, 특선 1명 포함해 14명의 입상자를 선정했다. 심사는 "심미계(審美界)의 권위"를 지닌 

"이광수ㆍ염상섭ㆍ김억ㆍ안석주ㆍ이승만(李承萬)ㆍ허영숙ㆍ나혜석ㆍ김원주ㆍ최승희" 등을 선정했다. "삼천리 지"의 고정 필진인 그 역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31년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주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코레아 삼천리 일색(一色)"을 뽑는 사진공모전에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 "최정원(崔貞嫄)" 등을 선발하였다. 1931.05월, 삼천리 지는 "18세 이상의 조선 여성, 3년 이내의 사진일 것"을 응모자격 조건이었다. 삼천리는 "구라파에 전 구라파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각국에도 그러한 모양으로, 우리 반도에도 전 조선을 대표할 려인 한 분을 찾아보자"며, "고상전아(高尙典雅)하고 아름다운 미모에다가 균제된 체격, 만신(滿身)이 예지와 총명에 찬 듯한 근대적 려인"을 뽑겠다고 광고를 냈다.

⑥ "현대미"에 대한 관점

그는 이상형인 여성의 기준을 밝히면서, "체격이 팔다리나 몸통이 자로 잰 듯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바로 맞고, 몸 쓰는 것, 걷는 것 등 모든 동작이 날씬하여 남의 눈에 조금도 거슬리게 보이지 않고(중략)또 취미와 그 정신이 아울러 고상하다면 그야말로 내가 찾는 미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얼굴은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윤곽에다가 눈은 어디까지든지 크고 처진 듯하며, 코나 귀가 복스럽게 예쁘고, 살결이 하얀 분이어야 한다."며, 얼굴 생김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준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다른 작가ㆍ문인ㆍ시인ㆍ예술가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거나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 소설가 "현진건"은 "첫째로 키가 조금 큰 듯하고, 목선이 긴 여자가 좋다. 제아무리 얼굴이 예쁘장하고 몸맵시가 어울려도 키가 땅에 기는 듯하고, 목덜미가 달라붙은 여자는 보기만 해도 화증이 난다"며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중추원 귀족들ㆍ일부 유학자들"은 그가 상스럽고 음란한 사상을 부추긴다면 비난하였다.

출처: by 당대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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