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신자를 지지하지 말라는데..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이다.
공직자는 임명권자인 개인에게 충성하는 신하가 아니기에 임명권자가 누구든 그 권한의 원천은 국민이기에 공직자로서 당연히 갖춰야 하는 기본 인식은 국가와 국민에 봉사하는 것이다.
공직을 '하사' 받는 왕국이 아닌이상 임명권자 개인에게 충성을 다하는게 신의를 지키는게 아니기에 배신자란 말도 그래서 맞지 않는 것이다.
○ 배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명언
"진돗개도 평생 주인을 잊지 않는다." "한번 배신해본 사람은 언제나 또 배신한다." "배신은 배신을 낳고 종국에 가서는 파멸을 부른다." "배신자 응징하지 않으면 또 다른 배신자 속출한다." "신의 저버린 배신자, 다시 일어선 적 없다." "TK에선 살인자는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배신자 프레임에 걸려들면 한국 정치판에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배신자는 영원히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겠지만, 이 명언들은 모두 한 사람이 한 말로 한국 정치판에서 배신자에 대해 독설을 가장 많이, 가장 집요하게 퍼부은 사람의 말이다.
○ 그는 누구일까?
전 대구시장 홍준표로, 그의 배신자 비난은 한 권의 책으로 내고도 남을 정도로 많다. '배신자 감별사'라 할지 '배신자 저승사자'라 할지 모르나, 홍준표를 배신자를 증오한 대표적 정치인으로 부르는 데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홍준표가 민주당의 대구시장 후보인 김부겸을 지지했다. 그간 국민의힘 진영에서 배신자 비난을 가장 거칠게 했던 사람이 홍준표와 '윤 어게인'파였는데, 이제 누가 과연 진정한 '배신자인지 어이가없다.
홍준표는 '윤 어게인'파는 아니지만,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의힘 의원들을 "레밍" "이재명 2중대" "민주당의 세작들" "도저히 같이 갈 수 없는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하고 모욕하면서 제명을 요구했다.
'배신자 섬멸'에 관한 한 홍준표와 '윤 어게인'파는 강력한 동맹관계 같은데 그 동맹관계가 깨졌다고 해서 '윤 어게인'파가 홍준표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국민을 배신한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국민에 대한 배신자인데, 누구의 배신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홍준표는 '진영 논리의 종언'을 외치면서 "국익에 충성하는 인생을 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영국 극작가 해럴드 핀터의 '배신'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배신'을 시사하는 작품이다.
한국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배신을 새겨보라 국가와 사회와 대의와 공익을 배신하는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소속된 이익공동체 위계에 복종하지 않는 정치인을 배신자로 몰아 매장하려고 하는 음모, 그리고 이 추악한 음모에 너무도 쉽게 굴복해 놀아나는 대중에 관한 이야기다.
누군가가 대통령을 배신했다고 악을 써대는 사람은 무수히 많은데, 그런 대통령이 국민을 배신하는 것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는건 이율배반 아닌가?
정치판의 일반적인 '배신자 타령'이 권력을 숭배하는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다는 걸 말해 주는 방증이다. 그간 한국 정치를 골병들게 만든, 그 지긋지긋한 '배신 마케팅'의 종언을 가능케 할 정도로 강한 울림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하는 무능에 절망하고 자책하는 나날이다.
○ 한동훈이 배신자인가?
한동훈 전 대표가 탄핵에 찬성한 것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질서있는 퇴진'을 언급했다가 번복하고서 헌재에 심판을 받기위해 법적으로 다퉈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3계엄을 선포했을 때 가장 먼저 "국민과 함께 잘못된 계엄을 막겠다"고 선언한 정치인이 한동훈이었다는건 엄연한 사실이다.
보수에서 한동훈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대중적 인지도에, 확고한 지지층, 중도층과 일반 국민에게도 설명 가능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보수에 가장 부족한 것이 강성 지지층만 알아듣는 말이 아니라,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저 말은 이해가 된다”고 느낄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정치 말이다. 그 점에서 한동훈은 여전히 유효한 카드고 현실적으로 보면 하나남은 보수의 구명정이다.
지금 국민의힘에서 익숙한 주류의 정치는 배제의 정치이다. 누군가를 몰아세우고, 배신자 프레임을 씌우고, 징계와 제소로 누르는 모습이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적어도 갈등보다 민심을 앞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누가 뭐라든지 보수 재건의 방향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보수가 살아나려면 더 좁아져서는 안 된다. 더 넓어져야 한다. 더 공격해서는 안 된다. 더 설득해야 한다. 자신들은 역량도 부족하고 대중적 확장성도 약하면서, 정작 보수를 다시 세울 가능성 있는 인물에게는 시기와 질투, 배신자 프레임을 덧씌웠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진짜 배신자일까. 한동훈일까. 윤석열 전 대통령 일까. 한동훈이 배신했다면 무엇을 배신한 걸까.
불법 비상계엄이라는 반헌법적 선택을 한 대통령과 거리를 둔 것을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은 배신이 아니라 상식이다. 국민을 버린 것이 아니라 국민 편에 서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보수를 무너뜨린 사람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다. 집권세력의 수장으로서 책임 있게 국정을 이끌지 못했고, 결국 비상계엄이란 최악의 선택으로 보수 전체를 깊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갔다.
해서 보수가 무너진 가장 큰 책임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외면한 채 배신자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정치적 진실을 뒤집는 것이라서 한동훈의 의미는 더 선명해진다.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식의 정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그것은 보수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수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함께 침몰하는 길이 아니라, 실패를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길을 선택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 재건이다. 충성이 아니라 책임의 정치이다.
지금 보수가 다시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실패, 계엄의 그림자, 윤어게인 정치, 음모론 정치와 결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 당권파는 그 강을 건널 의지도, 능력도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 시대가 보수에 요구하는 것은 극단이 아니라 상식이다.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책임이다. 당권이 아니라 민생이다. 분노의 정치가 아니라 설명의 정치이다.
결국 지금 보수 안에서 그 언어를 가장 또렷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 확고한 지지층과 대중적 확장성을 동시에 가진 사람, 무너진 보수의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지금 보수 재건의 마지막 카드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한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과 가장 가까운 인물 한동훈이다.
보수가 정말 다시 서고 싶다면 이제 감정의 정치를 멈춰야 하고 배신자 프레임을 버려야 한다. 누가 진짜 보수를 무너뜨렸는지 직시하고 누가 무너진 보수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는지 냉정하게 봐야 한다. 보수를 배신한 것은 한동훈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보수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있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가장 현실적인 이름은 한동훈이다. 이번 6.3선거의 결과로 나타난 민의를 읽지 못하는자 그가 바로 보수의 배신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