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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신앙 고백

요셉은 왜 자기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게 하였을까? (1)

작성자권기현|작성시간05.08.12|조회수1,407 목록 댓글 6

 

 

오래 전, 가입만 해놓고 자주 들어와보지도 못했습니다.

며칠 전, "부흥과 개혁" 회원 중 몇 분이

밀양으로 오셔서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먼 거리에 일부러 오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새벽에 글을 좀 쓰고 있다가

카페 생각이 나서 들어와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면서

좋은 글 몇 편을 읽고 갑니다.

 

꼬리말을 남길까 하다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올리는 것으로

말씀 교제를 함께 하는 것이 더 좋겠다 싶어

부족하지만 졸고 한 편을 두 번에 나누어 올립니다.

 

제 글보다는 성경 본문을 읽으시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아참!

 

그리고 바로미 목사님!

짧지만 여러 편의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장동관 님의 글을 여러 편 읽은 적이 있었는데,

함께 말씀으로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글 한 편을 쓰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바로미 목사님께서 글을 올리고 계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간 가벼워졌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장동관님과 한 번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닿으면 좋겠네요.

 

장동관님께서 고신대학원에

"하늘에 속한 사람"을 소개해놓으신 것을 보고는

그 책을 사서 읽고 있습니다.

저는 8월 22일에 중국으로 가서 9월 1일에 귀국할 계획입니다.

 

저도 장동관님께 책 하나 소개하고 싶네요.

 

C. 반더발(van der Waal), "성경 언약 연구", 나침반

 

이 책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세대주의를 겨냥하여 쓰여졌지만,

제 생각에는 이 책이

새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옛 언약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것 뿐 아니라

옛 언약이 새 언약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제 글을 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셉은 왜 자기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게 하였을까? (1)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히11:22)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24)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 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5)”(창50:24-25)



  1. 유언의 내용과 한 가지 의문


  창50:24-25을 보면 요셉의 유언이 나옵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중략)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우리는 요셉의 이 유언을 두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약속(24절)이고, 둘째는 맹세(25절)입니다.


  먼저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에게 예언을 합니다. 이 예언은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 그들의 증조부인 아브라함 때부터 받아왔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그 약속 말입니다. 요셉은 이전의 역사와 무관한 새로운 약속을 예언하지 않고 그들의 선조 때부터 주셨던 그 약속이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형제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자기는 죽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역사와 무관한 진공상태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인체 곳곳에 퍼져 있는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가는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요셉은 형제들에게 한 가지 맹세를 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는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내실 때가 오면, 자신의 해골을 메고 (약속의 땅으로) 가겠다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은 왜 동족들에게 자기의 해골을 애굽으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메고 올라가도록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참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만이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부친 야곱 역시 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을 때, 자신의 시체를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의 막벨라 굴에 묻을 것을 명하였습니다(창49:29-32). 그 역시 자신이 영원히 거할 참된 땅은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부친 야곱과는 달리 자신을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야곱이 죽은 지 오래지 않아(창50:1-14, 특히 3절 참조) 가나안 땅에 묻힌 것과는 달리,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가 오면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 땅에서 장사되었고, 그의 유골은 오랜 세월동안(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까지) 그 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의 신앙이 부친 야곱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유언은 서로 달랐습니다.


  만일 요셉이 하고자 하였다면, 임종 후에 곧바로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였던 그의 직위와 그간의 업적으로 보아서 왕이 허락하지 않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체를 당장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서 야곱의 유언 당시의 상황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는 알게 됩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요셉은 자신을 당장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하지 않고 오랜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직접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도록 했을까요?



  2. 야곱의 장사 후에 있었던 한 사건: 교회의 불신앙과 요셉의 애통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성경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앞의 창49장을 보면, 요셉의 부친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한 후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야곱을 장사한 내용이 나옵니다(창50:1-14). 그리고 곧바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요셉의 유언과 죽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 사이에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창50:15-21입니다.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 사이에 있는 이 내용이 요셉의 유언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해주는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제들은 걱정하며 겁에 질립니다. 옛날에 자신들의 시기심과 미움으로 인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갔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부친 야곱이 죽었으니 요셉이 이제 그 일에 대한 보복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을 찾아가서 그에게 빌며 생명을 구걸합니다(17-18절).


  그 때 요셉은 그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17절). 그가 운 이유는 형제들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자기의 형들 때문에 큰 고생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왜 애굽으로 팔려갔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5)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6)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7)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8)”(창45:5-8)


  그는 비록 형들의 사악한 죄악으로 인해 자신이 팔린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당대의 교회입니다. 당대 교회의 모습은 이렇게 신앙이 연약하고 또 죄악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바로 이 연약하고 죄 많은 교회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며, 그들을 이 세상에 보존하여 장차 오실 메시아의 구원의 길을 여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자신의 고난, 자신의 성공과 부귀영화가 모두 이토록 연약한 교회를 사랑하여 이 땅 위에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 포함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셨기에 형들에게 보복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이 목적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이주시키는 방법을 통해 이 죄 많고 연약한 구약 교회를 흉년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은 울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형들이 섭섭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아니라 당대의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형들(교회)의 불신앙에 대하여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을 애통하게 했던 이유였습니다.


  창47:9, 28에 의하면, 요셉의 부친 야곱은 130세에 애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7년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요셉은 이 17년 동안 단 한 번도 형들에게 복수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그렇게 하신 이유는 형들을 포함한 당대의 연약한 교회를 이 땅 위에 보존하시기 위한 구원 계획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또 그는 실제로 17년 동안이나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돌봐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요셉의 이러한 행동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노쇠한 아버지의 눈을 의식한 가식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요셉 당대의 교회는 이렇게 연약하였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형들의 이러한 생각은 마치 그 옛날 그들의 큰아버지 에서가 동생 야곱을 미워하여 자기 부친 이삭이 죽기만을 기다렸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창27:41). 스스로 교회를 떠나버린 에서의 불신앙이 요셉의 형들 가운데서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배교하여 교회를 떠난 에서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진행방향과 그 가운데 있는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큰 불신앙입니다. 물론 도둑질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살인하는 것, 간음하는 것 등등이 큰 죄악임에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앞의 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순종하는 것은 필히 그분의 구원 역사와, 또 그 가운데 있는 자신의 좌표를 발견해나가는 시대적 소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교회들이, 그리고 한국 교회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개인의 신앙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교단과 신학교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서 그 위치를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지, 내가 속한 교회는 그러한지에 대하여 바르게 진단하는 영적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당대의 교회가 그러한 시대적 소명에 충실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심한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뜨거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심한 통분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참고. 겔8:4)


  요셉은 이와 같이 영적인 무지와 암매에 빠져 있는 교회를 향하여 다시 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21)”(창50:19-21)


  우리는 여기서 개인의 감정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순종하고 있는 요셉의 인내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연약한 교회를 향해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불신앙과 공포에 휩싸여 살아가는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셔서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 엄청난 조롱과 모욕을 참지 않으셨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내는 어떤 개인의 성격이나 특성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이며, 동시에 우리를 향하신 성령님의 사역입니다(창48:9; 욘4:2; 갈5:22). 교회의 연약함, 교회의 허점은 이로 인해 우리가 교회를 미워해도 된다는 한 터럭만한 정당성도 우리에게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위해 애통하며 가슴을 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연약한 교회를 이 땅 위에 보존하기 위해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이 연약한 고신 교회를 위한 깊은 애통이 있는지….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한 오래 참음이 있는지….


  또한 우리는 혹시 요셉 당시의 형들과 같이 불신앙과 염려와 공포에 휩싸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서 있는 시대의 좌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염려와 걱정을 신앙과 별개의 것처럼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무관한 염려와 걱정은 매우 큰 불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분의 나라와 의(義)를 먼저 추구하는 것과 무관한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현저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마6:25-34).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께서는 이로부터 수십 년 후에 있었던 요셉의 죽음을 바로 이 사건 다음에 위치시키셨습니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가졌던 이러한 불신앙의 태도와 요셉의 유언 사이에 매우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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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광주행 | 작성시간 05.08.12 목사님 감사합니다. 일전에 밀양갔으면 만났을 텐데 ...다음에 한번 뵙지요 올려주신 글 감사합니다. 인내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최재호 | 작성시간 05.08.13 잘 정리된 글을 봅니다. 다음 2부가 기대됩니다. 그때 밀양에서의 기억을 잘 기억합니다. 길 헤맨 것도 좋은 추억으로...^^
  • 작성자권기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8.14 공학영님은 이 카페에서 찾아보니 고신대학교 휴학 중인 분이시네요. 반갑습니다. 광주행님은 저랑 아는 분 같기도 한데(집적 아는 분은 아닐지라도), 담에 뉘신지 갈켜주세요. 히히~ 최 집사님! 그날 밤 늦게 고생하셨지요? 바쁘실텐데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방문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작성자바로미 | 작성시간 05.08.14 밀양이 처가라서 언제 한번 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밀양예림중앙교회가 저희 처가 다녔던 모교회랍니다. ㅎㅎㅎ
  • 작성자권기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8.15 앗~ 제가 속해 있는 시찰이네요. 오실 기회 되시면 꼭 연락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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