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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유로가는 문63]삶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작성자인범|작성시간26.06.05|조회수4 목록 댓글 0

자유로가는 문ㅡ 63

니체ㅡ 우상의 황혼

삶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굳이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정신세계와 신체 건강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대하는 정신세계가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정신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건강한 삶의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소란스러운 일에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쉽게 바꾸거나 흔들리지도 않는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균형 있는 감각을 유지한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을 대할 때와,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돈이 적은 사람을 대할 때의 자세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어떤 일에 임하든 그것이 단시간에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향을 잃지 않고 꾸준히 걸어갈 수 있는 지구력을 갖추고 있다.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삶이 건강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보다 더 나아 보이고 더 좋아 보이는 가치를 좇는다. 지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또 다른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기성세대라는 말을 듣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요즘 젊은 세대는 힘든 일을 회피하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한다고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또 사람들이 가진 도덕관념을 두고 세상 말세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도덕이 살아 있었으나 지금은 도덕이 몰락했다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사람들은 언제나 과거의 도덕을 기준으로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도덕관념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세상은 망하지도 않았고, 혼란 속에서 무너져 내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난 수천 년 동안 국가와 집단은 더욱 효율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을 찾아냈고, 앞으로도 그렇게 발전해 갈 것이라는 점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은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때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순간, 그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특정한 삶의 방식이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방식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삶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탐욕하는 삶을 비난하고, 욕망하는 삶을 비난하며, 그것이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니체는 삶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하였다.

>>>>살아 있는 자들이 행하는 삶에 대한 단죄는 궁극적으로는 특정한 종류의 삶의 한 징후일 뿐이다. 이러한 특정한 종류의 삶이 지배해 오면서 그러한 단죄가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은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건드리기라도 하려면 우리는 삶의 바깥에 자리를 잡아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의 삶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 문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영감 아래서, 즉 삶의 광학(光學) 아래서 말한다. 즉 우리에게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삶 자체이며, 우리가 가치를 설정할 때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다.<<<<

대우고전총서 우상의 황혼 60쪽 인용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삶의 객관적 가치를 평가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

우리가 무의식중에 자주 사용하는 "객관적인 입장"이라는 말은 사실상 언어의 유희에 가깝다.

인간은 삶의 바깥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삶의 바깥에 선다는 것은 죽은 자에게나 가능하다.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존재가 삶 전체를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그 생각에 개입하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굳이 옳고 그름을 말할 필요가 없다.

허공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바람 한 점을 느낄 때, 따뜻한 햇살 한 조각을 받아 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두고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는다.

그저 느낄 뿐이다.

자신의 삶을 비판하든 타인의 삶을 비판하든,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느끼든 가치 없는 것으로 느끼든, 그것은 각자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일 뿐이다.

세상이 본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삶은 비판의 대상도 아니며, 가치의 경중을 따지는 대상도 아니다.

물고기가 물의 가치에 대해 논하다가 물이 가치 없다고 판단하여 물 밖으로 나온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하늘을 나는 새는 지구의 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설령 과학적 이론으로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이해가 새의 비행을 직접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휴대전화 카메라의 기능이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바다를 찍은 사진이 강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지리산을 찍었는데 설악산이 될 수도 없다.

카메라는 세상을 담아낼 수는 있지만 창조할 수는 없다.

삶 또한 마찬가지다.

삶은 휴대전화 카메라가 세상을 담아내는 방식과 닮아 있다.

네 눈에 비친 세상을 고통으로 가득한 고해로 볼 것인지, 행복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볼 것인지,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볼 것인지, 기쁨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볼 것인지는 오직 당신 해석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당신이 바라보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니체는 삶의 가치에 대해 말할 때조차 삶 자체가 우리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삶을 비난할 때에도, 삶을 찬양할 때에도, 결국 말하고 있는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해석이다.

한 사람의 삶은 하나의 삶만 경험할 수 있다.

가수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가수의 삶을 알 수 없고, 여자로 살아보지 않은 남자는 여자의 삶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삶의 바깥에서 삶을 해석할 수 없다.

언제나 삶 안에서 삶을 해석할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여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된 세상이 곧 자신의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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