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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성자초연 채현석|작성시간26.06.06|조회수2 목록 댓글 0

​관봉(冠峰)의 새벽, 갓바위 부처는 말이 없고
​팔공산 돌계단은 예순세 나이의 무릎에는 정말로 힘든 길이었다. 한 계단씩 발을 뗄 때마다 무릎이 쑤시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고난길 끝인 관봉을 사람들은 갓바위라고 부른다. 굽이진 돌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마치 내 지나온 삶의 굴곡진 기억들이 발걸음마다 툭툭 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산길을 흔들 때면, 이러다 정말 주저앉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묶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성을 다해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말을 믿고, 나는 꽃샘추위가 남은 이른 봄의 산길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올라 겨우 정상에 도착했다. 땀에 젖은 등줄기로 스며드는 산바람은 차가웠지만, 정상에 다다랐다는 안도감이 그보다 앞섰다. 갓바위 부처님 앞에 서자, 왠지 모를 숙연함에 가쁜 숨조차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달빛 드리워진 밤하늘 아래, 갓바위 부처님께 밤샘 기도를 올렸다.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가 바지춤을 타고 올라왔지만,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 번 앉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만큼 몸이 지쳐있었지만, 사실은 그 냉기조차 잊을 만큼 마음이 간절했다.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한 일, 부모님 모시며 힘들었던 세월이 한꺼번에 떠올라 목이 메어왔다. 남들은 소원을 빌러 왔다지만, 나는 가슴속에 맺힌 힘겨움을 다 쏟아내려고 왔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탓일까. 달빛 아래 엉엉 울며 쏟아낸 눈물이 갓바위 바닥을 적셨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어깨만 들썩이며 울음을 삼키다 보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참으로 길고도 힘겨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신기하게도 가슴에 쌓였던 묵직한 응어리가 흘린 눈물에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새벽이 다가올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밤새 엎드려 기도를 올리는 동안 내 어깨는 새벽이슬에 눅눅하게 젖어 들었다. 시린 어깨가 감각을 잃어갈 정도였지만, 신기하게도 마음만은 한결 평온해졌다. 하지만 가슴속을 태우던 화증이 눈물에 씻겨 내려가서인지, 차가운 이슬조차 포근함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부처님께서는 그저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큰 위로처럼 느껴졌다.
​어둠이 거친 산 너머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칠흑 같던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 햇살은 갓바위 부처님 얼굴을 비추고, 이슬에 젖은 내 어깨 위로 서서히 내려앉았다. 밤새 얼어붙었던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산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안개가 걷힌 발아래로 마을들이 옹기종기 정겨워 보였다. 너무 멀어 사람은 잘 안 보였지만, 산등성이에 띄엄띄엄 피어난 분홍 진달래는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저 아래 세상에 다시 돌아가 열심히 살아야 할 삶의 터전일 것이다. 밤새 울고 나서 햇살 아래 마주한 세상은 유난히도 정갈해 보였다. 어제까지 나를 괴롭혔던 고민들도, 이 높은 산 아래에서는 그저 한 조각 안개처럼 흩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신발을 고쳐 신고 일어났다. 무릎은 여전히 아팠지만, 발걸음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산 내리막길, 발밑에서 느껴지는 흙의 감촉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마치 내 마음속의 서러운 기억들도 흙처럼 부드럽게 다져진 것 같았다. 내려가는 길가에 핀 진달래꽃들이 나를 보고 말없이 웃어주는 듯했다. 시원한 봄바람이 이슬에 젖었던 어깨를 따스하게 말려주었다. 지독하게 슬펐던 마음을 산에 다 버리고, 나는 새로운 아침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제는 조금 더 가볍게 느껴졌다. 갓바위의 새벽은 내게 그저 소원 하나를 들어준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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