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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일낮설교]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창 3:16-24)

작성자自由魂|작성시간06.04.06|조회수1,281 목록 댓글 0
 

2006. 4. 2 주일 낮 예배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창세기 3장 16-24절(406장)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20)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2)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1. 고난을 위한 인생?(욥 5:7)

 

먼저 성경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기 5장 7절 말씀인데,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이 서로 논쟁하는 가운데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말한 내용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인데, 이것은 오늘 말씀의 본문인 창세기가 아니라 이 욥기의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라고 하는 이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제가 작년 11월에 했던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인생?”이라는 설교 제목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처럼, ‘인생이 고난을 위해서 있다.’고 하는 이야기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쓴 바다’와 같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그 ‘쓴’ 부분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고난’이라고 번역된 단어(아말, lm;[;)는 ‘수고, 진저리나는 노력, 걱정, 불만, 불행, 고통, 아픔, 슬픔, 고생’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런 고해와 같은 세상을 살면서 이런 고난... 수고, 진저리나는 노력, 걱정, 불만, 불행 등을 당하고, 그것은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고난도 당한다.’는 것과 아예 ‘인생은 고난을 위한 존재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고난을 당해도 포기하고 낙담하여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지 않는 것은, 비록 지금은 고난 가운데 있지만 언젠가 그 고난이라는 상황을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소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목적이 ‘고난’이라고 한다면, 그런 ‘고난을 위한 삶’을 구차하게 연명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성경은 과연 정말로 인생이 고난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라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 절인 6절과 함께 읽어야만 합니다. 6절과 함께 읽겠습니다. “(6)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7)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그런데 이렇게 묶어서 읽어도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드리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먼저 [공동번역]입니다. “땅에서 불행이 솟아나는 일이 없고 흙에서 재앙이 돋아나는 일도 없으니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 불이 불티를 높이 날리는 것과 같다네.” 다음은 [표준새번역]입니다. “재앙이 흙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고, 고난이 땅에서 솟아나는 법도 없다. 인간이 고난을 타고 태어나는 것은 불티가 위로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불행은 흙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고난도 땅에서 싹튼 것이 아니다. 불에서 불티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인생은 스스로 불행을 초래하고 있다.”

이정도면 엘리바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셨을 것 같습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이 어디에서부터 오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땅이나 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마치 인간이 그것을 타고 태어나는 것처럼 그를 따라다니기에, 마치 인생이 고난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불티가 불 위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인생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고난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라다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왜 인생에 고난이 필수적인 부록처럼 끼어들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오늘 본문인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게 주어진 고난이 무엇이며,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2. 인생에게 주어진 고난(창 3:16-19v)

 

오늘 본문은 타락한 인간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존 엘드리지의 <욕망으로의 여행>을 보면 이 부분과 관련된 기가 막힌 설명들이 나옵니다. 그의 글을 부분부분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우리의 대적인양 느껴질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가장 깊이 소원하는 바로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실 것처럼 보인다... 심오한 지혜와 선한 의도로 우리의 삶을 저주하셨다.”1)


 1) 존 엘드리지, <욕망으로의 여행>(서울:좋은씨앗,2002), 134, 137p.

 

1) 여자에게 주어진 고난(16v)

①16절에 나오는, 여자에게 주어진 형벌/고통/고난은 세 가지인데, 그 첫째는 ‘잉태하는 고통’입니다. 여기서 ‘고통’이라고 번역된 단어(이차본, @/bX;[i)은 ‘괴로움, 노동, 고통, 슬픔, 수고, 고역’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여자에게는 잉태의 고통이 주어집니다. 임신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 괴로움과 고통, 슬픔, 노동과 수고와 고역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남자로서는 정확히 다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저는 집사람이 입덧을 심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잉태의 고통’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실감했던 적이 있습니다.

②둘째로 ‘해산하는 수고’입니다. 그것은 잉태의 고통에 덧붙여집니다. ‘(자식을) 낳는다’는 말(야라드, dl'y:) 자체가 ‘배다, 낳다, 생기다, 산고를 겪다, 해산의 고통을 겪다’라고 되어 있어서 그 안에 ‘고통’의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스러운 일을 ‘수고하여’(에체브, bx,[,=고통, 상처, 노역, 슬픔, 노동, 고난) 하는 형벌이 주어집니다. 이것 역시 남자로서는 다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도 군대를 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여자들은 ‘남자도 아이를 낳아봐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③세 번째 형벌은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형벌이 될까요? ‘사모’라고 번역된 단어(테슈카, hq;WvT])는 ‘사모함, 갈망하다, 욕망, 동경, 소망’이라는 뜻인데, 같은 단어가 창세기 4:7에서는 ‘소원’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아내가 남편을 사모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남편을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남편을 자기 손에 쥐고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고 움직이고자 하는,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저주입니다. 타락 이전의 하와는 남편인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 만족했고, 아담을 조정하거나 다스리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타락 이후로 여자들은 남자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었고, 그런 욕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지배권의 행사는 남편이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통치하고자 하는 욕망은 남편에 의해서 철저하게 봉쇄됩니다. 저는 이전에 이 부분을 주로 ‘폭력’과 관련해서 이해했었는데, 앞에서 소개한 엘드리지의 글이 이 부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서 일부분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들의 불안정한 마음에 대하여 남자와는 전혀 다른 저주를 내리셨다... 이것은 분명히 아기와 결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자들은 모두 그 저주의 실체를 한다. 모든 여자들은 관계에서 오는 고독과 상심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암을 추적해가는 의사처럼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곳인 관계에서 그녀를 방해하신다. 여자들은 친밀감이 깨졌을 때에 뼛속까지 아파하며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여자들은 ‘버림받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실패가 두려워 남자로서의 역할을 거부하는 남자처럼, 친밀함을 회피하는 여성은 정직하고 공개적으로 그 두려움에 맞서지 않음으로, 거부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2) 여자들은 ‘관계’와 ‘친밀감’의 부분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내리신 형벌과 고통입니다.


2) 존 엘드리지, 139-141pp.

 

2) 남자에게 주어진 고난(17-19v)

①17-19절에 나오는 아담에게 주어진 형벌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땅이 아담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이것은 아담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땅에 대한 저주로 보입니다. 하지만 땅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담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최초의 범죄는 아담이 아니라 하와에 의해서 저질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타락에 대한 책임은 하와가 아닌 아담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도 아담과 하와 둘이었고, 형벌과 고통을 당했던 것은 둘이었지만... 성경은 인류타락의 장본인으로 아담을 지목합니다. 아담이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②둘째로 밭의 채소를 먹고 살기 위하여 종신토록 수고하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와에게 주어진 형벌 가운데 ‘잉태의 고통’이라고 할 때의 ‘고통’과 같은 단어(이차본, @/bX;[i)입니다. ‘괴로움, 노동, 고통, 슬픔, 수고, 고역’이라는 뜻이지요. 여자의 경우는 잉태하고 해산을 위해서 그 고통을 당하지만, 남자의 경우는 먹고 살기 위해서 그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여자의 경우는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기간 동안 그 고통을 당하지만, 남자의 경우는 ‘종신토록’ 그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종신토록’이라고 번역된 문장은 히브리어로 ‘콜 예메이 하예카’(*yY<j' ymey_ lK)로서 ‘생존하는 모든 날 동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평생을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괴롭고 진저리나는 노역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고한다고 그냥 먹는 것이 아닙니다. 땅은 그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땅의 소산을 먹기 위해서 수고하는데 소산만이 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그의 수고를 더욱 힘겨운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얼굴/콧구멍(아프, #a')에 땀을 흘려야만 겨우겨우 먹고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엘드리지의 글을 인용할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상처 입은 곳, 바로 이 땅에서 남자들을 좌절시키셨다. 그분은 수고의 영역에 일격을 가하셨다. 이곳은 남자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남자들은 수고함으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낀다... 남자들은 그 저주의 실체를 안다. 그들은 모두 무익함과 실패로 인해 계속되는 좌절에 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거기서 끝나는 법이 없다. 내일이면 다시 밖으로 나가 그 모든 일을 다시 해야 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패배로 인해 그다지 영향 받지 않는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실패로부터 재기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그렇지 못해 어떤 경우 실패로 인해 삶 자체가 쇠약해지기도 한다.”3) 

③셋째로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와 역시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형벌과 고통, 고난을 엘드리지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남자들에게 무익함과 실패를 약속하신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에게 관계에서 오는 상실과 고독을 보장하신다.”4) 이것이 전부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매우 잘 된 요약이라고 생각됩니다. 남자들이 겪는 무익함과 실패, 여자들이 겪는 관계의 상실과 고독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 고통을 매우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흙에서 취해져서 흙으로 돌아갈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3) 존 엘드리지, 137-139pp.

4) 존 엘드리지, 141p.


3. 고난과 함께 주어진 은혜(창 3:20-24v)

 

1)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21v)

21절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내용을 보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벗었음을 깨달은 후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3:7), 그것은 계속해서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형벌을 선고하신 후 바로 내쫓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가죽’(오르, r/[=살, 가죽, 생가죽, 피혁)을 취하여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벌거벗은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기 위해 어떤 동물을 죽이신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가죽으로 만든 옷에서, 앞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주실 ‘그리스도로 만든 옷’5)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우리에게 그 옷을 입히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분의 공로를 입어 구원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5)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2) 생명나무 실과를 금지하심(22-24v)

22-24절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에덴에서 추방하시고 에덴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으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은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처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금지하셨을 때 생명나무의 실과는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두 나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악을 알아야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 그 모든 것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영생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영생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생명나무’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라는 나무를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에 대한 금지는 곧 십자가라는 나무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모든 산 자의 어미(20v)

20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hW:j') 즉, ‘생명’이라고 이름 붙여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그녀에게 ‘생명’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장차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미/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아담의 ‘소망’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그는 분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아내가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산 자의 조상이 될 것을 소망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어떻게 그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저는 20절부터 나오는 사건이 꼭 전후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저주를 받은 직후에 무슨 정신으로 아내 이름을 지어주겠습니까? 아마도 아담이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에덴에서 추방된 후, 즉 24절 이후의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담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하나님, 생명나무를 금지시키시는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하와’라는 이름에 걸었습니다.


우리의 고난, 고통은 먹는 문제에서 시작합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기에 고통이 왔고, 먹고 살기 위해서 수고와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 고난과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이제 우리는 꼭 먹어야 하는 양식, 십자가 나무에서 딴 열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것이 우리가 고통 많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줍니다! 모든 인생에 부록처럼 따라붙는 고난! 우리는 그 고난의 바다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헤쳐 나가야 하고 생명나무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을 먹고 힘을 내십시다! 우리 앞에 있는 무익함과 실패, 관계의 상실과 고독을 성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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