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5. 24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52
사방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
사도행전 9장 32-43절(259장)
(32)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33)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년이라(34)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35)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36)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38)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39)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43)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지난주까지 우리는 사울의 회심과 초기 사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베드로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연속적으로 설교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세세한 부분들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전체적인 흐름을 중시하며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초대교회가 형성되었고,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어떻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다시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전진해 가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전까지 교회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스데반의 순교 후에 시작된 박해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온 유대로, 그리고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선교는 특히 집사인 빌립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로써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유대 전 지역, 그리고 사마리아까지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고, 그 사역을 위해서 특별히 부르신 인물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부르심을 입은 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고향으로 물러나 은거하게 되었다는 것이 지난주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이로써 땅 끝을 향하는 선교의 발걸음이 힘차게 시작하는 듯 했지만 결국은 불발로 끝나고 만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귀향을 보고한 후, 누가는 즉각적으로 그의 시선을 베드로에게 돌려버립니다. 그래서 9장의 나머지 부분과 10장, 11장, 12장이 다 지나도록 사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고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행적에 대해서는 그가 “사방으로 두루 행”했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곳은 룻다와 욥바 두 곳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베드로의 행적을 제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 그리고 사마리아까지는 복음이 전해졌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땅 끝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있어서 사울의 수고만이 아니라 교회의 정식적인 인정과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가장 먼저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를 통해 예루살렘 공회가 이방인 선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고, 그 후에 사울의 이방인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일단 룻다와 욥바에서의 사역만을 살펴보고 넘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곧바로 이어질 고넬료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중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 룻다와 사론에서 복음이 전파 됨(32-35v)
본문 32절은 이 단락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이 구절은 “때에”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그러나’라고 번역되는 접속사입니다.1) 여기서는 사울의 이야기에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한편’ 베드로는...”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그는 “사방으로 두루 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방’이란 ‘모든, 전체’라는 뜻인데,2) 아마도 ‘유대 지역 전체’를 돌아다녔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발생한 핍박으로 성도들이 다 흩어져버렸고, 베드로는 흩어진 성도들의 공동체를 돌아보기 위해 유대의 여러 지역을 찾아 다녔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복음이 사마리아까지 전파되었고, 사마리아 교회를 승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그곳에 다녀가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관심은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비록 ‘사방’이라고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대상은 ‘유대 지역’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 중에서 지명이 제시되는 두 곳인 룻다와 욥바 역시 이방인 지역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유대 전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룻다라고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곳이며, 해안도시인 욥바로부터 동쪽으로 약 17-18km에 위치한 비옥한 땅입니다. 33절입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년이라.” 베드로가 룻다에 내려갔을 때에 ‘칭찬받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애니아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풍병을 앓는 사람이었고, 중한 중풍병 때문에 침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 8년이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중풍병 때문에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만났다’고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다가다 마주쳤다는 의미를 떠올립니다만, 이 단어는 ‘마주치다, 만나다’라는 뜻에 앞서 기본적으로 ‘찾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3)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애니아를 만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베드로가 의도적으로 애니아를 만나고자 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경우(사마리아 여인, 삭개오 등)에 의도적으로 그들을 만나도록 배려하신 것과 흡사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성도들 가운데 중한 환자를 치유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애니아를 찾아서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34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애니아를 고쳐주실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를 낫게 하신다고 선언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에게 치유의 은사가 주어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베드로의 굳건한 믿음이 이런 일을 가져온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오늘날에도 이런 믿음만 있다면 치유와 이적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치유의 은사’나 ‘믿음’만으로는 답변을 끝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서는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권능이 입혀졌고, 그 후부터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서에서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여러 이적들이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적과 치유에는 ‘은사’나 ‘믿음’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요구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사람을 치유하고자 하는, 그러한 이적이 일어나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애니아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라고 말했습니다. 낫게 하는 것은 베드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 애니아를 낫게 하고자 하는 의도와 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은사와 믿음만으로 애니아를 낫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베드로의 ‘권능’은 하나님의 ‘의지/뜻’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 하나님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아무리 ‘믿어도’ 치유와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그러한 케이스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애니아를 향해 예수님께서 그를 낫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시며, 실제로 그를 낫게 하신다고 말했고, 애니아는 즉각적으로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의도를 분명히 알았고,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애니아를 낫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이 우리와 베드로의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100%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는 수준에 올라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이나 인기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복음 전파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자리에 올라가게 될까요?
애니아가 치유함을 받은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35절입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사론/샤론은 ‘평야’라는 뜻인데, 욥바와 갈멜산 사이에 위치한 평야 지역입니다. 애니아가 치유함을 받는 것을 보고 들은 룻다와 그 주변의 사론 지역 사람들은 주님께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니라’고 번역된 단어는 ‘복귀하다, 돌아가다, 개종하다’라는 뜻입니다.4) ‘전부 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다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1) 헬라어 ‘데’(dev)는 ‘그러나, 그리고, 또한, 더우기, 지금’(but, yet, now, then, indeed, and)라는 뜻이다.
2) 헬라어 ‘파스’(pa'")는 ‘모든, 모두, 전부, 각각, 어떤, 전체의, 만유, 만민’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헬라어 ‘휴리스코’(euJrivskw)의 기본적의 의미는 ‘찾다(to find), 갖다, 얻다, 인지하다, 보다’라는 뜻이다. 그것이 ‘1)마주치다, 만나다. 2)질문, 생각, 시험, 조사, 관찰에 의해 발견하다’라는 뜻으로 발전되었다.
4) 헬라어 ‘에피스트레포’(ejpistrevfw)는 원래 ‘복귀하다, 다시 오다/가다, 개종하다, (되)돌아가다’라는 뜻이고, 일반적으로 ‘1)돌아가다, 돌이키게 하다, 되찾다. 2)돌이키다, 되돌아가다, 돌아오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 욥바에서 복음이 전파 됨(36-43v)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베드로는 당분간 룻다에 머물면서 교회를 돌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18km 정도 떨어져 있는 욥바에서 와달라는 기별이 오게 됩니다. 36절부터 봅니다. “(36)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38)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욥바에 선행과 구제를 심히 많이 하던 다비다(헬라 이름, 도르가)라는 여자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그만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뉘웠다는 것은 유대인의 장례 절차를 따른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고서 한 일로 보이기도 합니다.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않은 것이나, 즉시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한 것에서도 소생에 대한 기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비다를 소생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9절부터 봅니다. “(39)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욥바 성도들의 초대를 받은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다비다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다비다와 함께 사역하거나, 또는 다비다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베드로 곁에서 울면서 다비다가 살았을 때에 지은 옷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하자, 다비다가 눈을 떠서 베드로를 쳐다본 후에 일어나 앉았고, 데드로는 손을 잡아 일으킨 후에 사람들을 불러들여 살아난 다비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와 매우 비슷하기도 하고(막 5:40).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살릴 때의 방식과도 매우 비슷합니다(왕하 4장). 하지만 애니아를 고쳐줄 때와는 달리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가장 특이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마치 예수님인 것처럼 권위를 가지고 죽은 다비다를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의 행동이 지나쳐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다비다가 살아난 것은 더더욱 이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은 베드로의 방식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 땅에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역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요한복음 14장 12절이나 마가복음 16장 17절은 모두 이런 이적을 일으키는 주체를 각각 “나를 믿는 자”와 “믿는 자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믿음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권세’이며, 우리는 이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결과는 42절에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가고자 했던 것이 아님에도, 결국은 욥바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룻다로 돌아가지 않고 욥바에 여러 날 머무르게 됩니다. 43절은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가 고넬료와 연결되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친 것과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려낸, 어찌 보면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심심해 보이는 사건의 기록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설교의 시작 부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사건은 다음에 나오는 고넬료 사건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합니다. 물론 이 사건들 자체에서도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두 가지 사실만 지적하고 오늘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첫째는, 베드로가 어디를 가든지, 또는 그가 의도했든지 의도하지 않았든지 그를 통해서 복음 전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얼마나 전도를 많이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관계없이 전도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디를 가든지 늘 ‘복음 전도’를 염두에 두고서 행동합니다. 또, 그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는 바울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십시다! 그리고 그렇게 사십시다!
둘째는, 베드로가 사방을 다니고 룻다로 내려간 것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지만, 욥바로 내려가고 또 다시 고넬료를 만난 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그 일들이 교회 역사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중요하고 그렇지 못한 것, 우리가 의도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그 모든 것의 씨줄과 날줄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단지 충성뿐입니다. 충성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실 때에 부족할 것 없는 일꾼으로 드려질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 그것이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와 확신, 노력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