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0 주일 낮 예배
지옥, 꺼지지 않는 불!
마가복음 9장 38-50절(269장)
(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39)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41)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43)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4)(없음)(45)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6)(없음)(47)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8)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9)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50)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저는 ‘지옥’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옥에 대해 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옥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전하려 합니다. 제가 지옥을 설교하기 위해 선택한 본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오는 지옥에 관한 내용은 추측이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지옥에 대한 교훈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지옥에 대한 가르침의 배경(38-42v)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가복음 본문에서 지옥에 대한 가르침의 배경이 되는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이 예수님께 어떤 사실 하나를 보고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하고 이야기한 것이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금지시키지 말라는 의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다면, 그러고서 즉시로 예수님을 비방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1)
1) 물론 이 부분은 상황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1:23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듯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두 말씀을 조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말씀이 주어진 상황과 연결시킨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답변은 이 정도에서 그쳐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41)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다 하여도 그것에 대한 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알고는 있지만 조금은 다른 문맥과 관련시켜서 알고 있는,2) “(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2) 이 말씀이 들어가 있는 마태복음 18장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어린 아이에 대해 교훈하는 문맥 속에서 이 말씀이 제시된다. 손이나 발, 눈을 빼고서라도 지옥에 가지 말라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제시된다.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소자를 실족케 하는 이야기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함께 묶여서 나온다. 본문인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유사한데, 어린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오늘 본문 앞 단락에 나온다.
이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 행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제자의 말에 금지시키지 말라고, 반대하지 않는다면 굳이 금지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서 예수님께 속했다고 작은 것 하나라도 대접한다면 꼭 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과, 예수님께 속한 자는 비록 작은 자라 할지라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것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족(蛇足)처럼 보이는 내용을 덧붙이시는 것은 이 ‘실족’이라는 부분과 연결해서 ‘지옥’에 대해 교훈하고자 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 요한이 말씀드렸던 내용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다음 단락인 43절 이하에서는 지옥과 관련된 교훈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2. 지옥은 결코 가서는 안 되는 곳!(43-47v)
43-47절까지의 내용은 매우 흡사합니다. 44, 46절이 ‘없음’으로 나와 있고, 나머지 43, 45, 47절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손이나 발, 눈을 찍어 버리고 빼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불구자가 되고, 절뚝발이가 되고 애꾸가 되더라도 영생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두 발/두 눈이 다 멀쩡한 채로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손을 찍어 버리고, 발을 찍어 버리고, 또 눈을 빼어 버리고서라도 천국에 가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나쳐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동양사람 특유의 과장법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씀에는 어느 정도의 과장법이 들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본문에 손이 우리를 범죄케 하고, 발이 범죄케 하고, 눈이 범죄케 한다고 한 것처럼 손과 발과 눈 때문에 범죄하게 되는 일이 있을 수는 있지만, 결국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죄를 범해서 그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에 내 손과 발, 눈은 그런 형벌에서 제외된다거나, 손/발/눈 때문에 범죄하게 되었으니 손/발/눈만 형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로 하여금 범죄케 한 손과 발을 찍어 버리거나 눈을 빼어버린다고 해도 이미 저지른 범죄에 대한 형벌을 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내 오른손으로 살인을 저질렀으니 오른손만 잘라서 감옥에 가두시오!”하고 주장한다면 받아들여지겠습니까? 또는 “그래서 오른손을 잘라버렸으니 나는 상관이 없소!”하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이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과장법을 써가면서 말씀하시는 본뜻이 무엇인지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범죄한 우리가 손과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어 버리면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범죄한 손과 발, 눈만 지옥으로 보내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범죄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손이고 발이라도 찍어 버리고, 눈이라면 빼어 버릴 정도의 각오가 없이는 결코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차라리 손발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결코 지옥에는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국에 들어가고자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런 각오로 살고 행하지 않으면 결코 지옥에 던져지는 불행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심각하고도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3. 지옥은 어떤 곳?(48-49v)
왜요?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천국과 지옥에 대해 강조해서 말씀하십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천국과 지옥을 신앙의 이유로,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하는 동기로 제시하는 것은 좀 유치한 것 아닐까요? 적어도 예수님이라면 좀 더 고상하고 괜찮아 보이는 동기를 제시하실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요! 설교를 시작하면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지옥에 대한 가르침은 상상이나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 누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거나 직접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을 보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이 가르친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지옥의 실체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지옥에는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이 어떤 곳이길래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시간은 없어서 세 가지로만 요약해서 말씀드립니다.
1) 첫째로, 그곳은 영원한 곳입니다. “(48)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은 지옥의 영원함을 보여줍니다. 거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고 해서 ‘영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옥에서의 영원한 삶은 ‘영벌’이라고 합니다! 지옥에 대한 두 번째 설명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지옥에서의 삶은 영원한 형벌의 삶입니다. 죽음보다 못한, 차라리 죽음이 더 나을 정도의 지독한 삶입니다. 그곳에서의 죽음만도 못한 삶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결코, 조그만치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잘 깨달은 단테(Dante)는 그의 <신곡(神曲)>의 ‘지옥편’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설주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고 말합니다. “지옥의 문지방을 넘어올 때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거기는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입니다. 100년 아니면 1,000년, 10,000년을 기다리고 버티면 빠져나갈 수 있다면 지옥에도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남자들 군대 가면 말하듯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 시계는 갑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기간을 버틸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버티고 기다려도 그곳에서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원히 영원히 지옥의 고통 속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2) 둘째로, 그곳은 형벌의 고통이 있는 장소입니다. “(49)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간 사람은 김치를 담글 때 소금을 쳐서 절이듯이, 소금이 아니라 불로 절임을 받는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옥에 정말로 불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짜 불인지, 상징적인 표현인지는 가봐야 알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곳이 형벌의 고통이 있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곳은 불로 형벌을 받는 곳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형벌을 받습니다. 흔히 지옥에 대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지옥에 가면 마귀와 귀신들이 무슨 간수장처럼 지옥에 간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물론 지옥에 가면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옥 자체가 고통의 장소여서 불로 고통을 받기도 하겠지만, 지옥에 떨어진 사람과 악한 영들은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일들을 하기는 할 겁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과 관련해서 기억하셔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5:41절에 있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 저주 받은 자들을 지옥 불로 들어가도록 선고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지옥을 뭐라고 묘사하는지 보십시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고 합니다. 지옥은 영영한 불인데,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 예비되었다고요? 마귀와 그 사자들입니다. 마귀는 설명할 것이 없고, 그 사자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사자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보통 ‘천사’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3) 지옥은 원래 마귀와 그에게 속한 타락한 천사들을 형벌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라는 말입니다.4) 그곳은 인간을 위해서 예비된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들어가 있어도 고통을 받는 곳에 인간이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인간도 형벌 받기 위해 지옥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요소가 첨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원래 인간을 위한 장소가 아닌 만큼, 지옥은 인간으로서 견뎌내기에는 매우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것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3) ‘앙겔로스’(a[ggelo")는 ‘전령, 대사, 보냄을 받은 자, 천사,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이다.
4) 그래서 제가 앞에서 불이 실제적인 것인지 상징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한 겁니다. 실제적인 불이 영적인 존재인 마귀에게 고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영에게 고통을 주는 불이라면 인간에게는 해가 없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천국의 원래 용도가 마귀와 타천사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일 뿐입니다.
3) 셋째로, 그곳은 상실의 고통이 있는 장소입니다. ‘상실’이라는 것은 ‘불’보다도 지옥의 고통을 더욱 실제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상실의 고통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이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 나옵니다. 이 본문은 보통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문의 어디에도 그것이 ‘비유’임을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직접 보신 ‘실화’라는 것이 신학적으로는 더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누가복음 16:23은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라고 기록합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그곳에서 멀리, 천국에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볼 수는 있었지만 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의 고통입니다. 자기는 지옥에 있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이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그의 지옥 고통을 얼마나 더 큰 것으로 만들겠습니까! 그러니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게 되지 않겠습니까?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춥고 괴롭고 어두운 바깥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방들과 밝은 빛, 즐거운 축제 소리를 보고 듣기만 해야 하는 소녀는 결국 성냥을 켜고 또 켜고 하다가 죽어버립니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죽은 소녀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소녀의 죽음을 미화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옥에서는 죽을 수도 없습니다. 영원히 자신의 불행과 천국에 간 다른 이들의 행복을 보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대해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습니다.5)
5)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신 분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신학적으로 표현되어 만인 구원설이나, 소멸설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지옥은 하나님의 ‘잔인함’이 아니라 ‘공의’와 ‘거룩’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속되어지는 설교에서 더 다루겠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들’을 보내시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강압’이 아닌 죄인들 자신의 ‘선택’임을 기억해야 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상실이 고통에 대해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합니다. 부자는 물 한 방울 요청한 것이 거절당하자,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어 세상의 자기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줄 것을 요청하는데, 이것 역시 거절당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옥에 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 때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 경험하게 되는 상실의 고통 가운데 또 한 부분은 과거 지상 생활에 대한 끊임없는 회상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옥에 오지 않을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가 들었던 복음과 신실하게 신앙생활 하라는 충고들을 회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지상 생활에 대한 회상은 지옥에서의 고통을 더더욱 쓰라린 것으로 만들 것이고, 그 고통을 감소시키는 역할은 전혀 하지 않을 것입니다.6)
6) 지옥에 가는 자들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천국에 가는 자들의 ‘기억’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천국에 간 사람들도 지옥에 간 가족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게 될 터인데, 가족이 지옥에 가 있다면 과연 천국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느냐 하는 것 역시 오래된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바로 앞의 각주에서 지적하였듯이, 지옥 형벌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의 표현이며,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가족이라는 것에 연연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의 표현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4.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50v)
이상으로 지옥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세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과 상실의 고통을 받는 장소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지옥이 아이들 이야기에 나오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하는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지옥을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마귀 사탄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가 유용하게 사용하는 속임수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를 소유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버림받은 자라고 칭할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다고,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교회에 다니지만, 성경을 일주일에 한 번 성경 봉독 시간에 읽기도 하고, 가끔은 기도도 하지만... 실상은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와 근거가 발견됩니까? 무엇을 보아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소유했고, 그리스도께 소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영국의 그리스도인 작가인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는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이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들의 뜻대로 되리라.’고 선언하신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때로 하시라고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 맘대로 하라고 하시는 사람입니까?
본문 50절은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는 듯 보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아마도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교훈인 것으로 보입니다. 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실족시키기 보다는 서로를 대접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서로 화목하면서, 서로를 실족시키지 않고 대접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로 ‘지옥’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을 다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그리스도인답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것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 지옥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가 얼마나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요! 저는 금요일 저녁 주보 컬럼에 써놓은 세 개의 메모와 함께 지옥과 관련된 또 하나의 메모를 했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옥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도 강력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게 하려 하셨다. 고상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다!” 지옥에 대한 가장 강력한 가르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사적 숙녀적으로 믿으라구요? 고상하게 괜찮은 사람처럼 살라구요? 아니요! 지옥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손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내는 한이 있어도 지옥에는 가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로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시면서도 그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지옥에 대해 묵상하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부흥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다가 지옥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했습니다. 거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고 도덕적으로 품행이 아주 방정한 생활을 하던 한 상인은 갑자기 자기 눈앞에 지옥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이 자기를 그곳으로 강제로 빠뜨리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안다. 이곳은 내가 평소에 예배드리던 교회이다. 나는 지금 하나의 환영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밑을 내려다보니 거기에는 분명히 지옥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앞에 있는 의자 등받이를 움켜잡았다. 지옥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자기 얼굴로 퍼지는 것 같았다. 그는 몸서리를 치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 죄! 내 죄! 나는 버림받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교회 건물을 빠져 나와 자기 집으로 갔다. “그때 만일 누군가 내게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아마 절망적인 목소리로 차분하게 지금 나는 지옥으로 가고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자기 방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몇 시간 동안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들이 생각났다. 그는 기쁘게 그 약속들을 부여잡았다. 그의 영혼이 ‘천상의 빛’으로 차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일어섰다. 그리고 그 밤에 읍내를 가로질러 자기 동업자 집으로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그리스도를 발견했어.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이렇게 달려 왔지!” 그들은 함께 기도했으며 그 동업자도 사흘 만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7)
7) W. Duewel, <부흥의 불길>, 179p
부흥이 임하였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 앞에서 지옥이 열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옥에서 잠이 깰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자려고 눈을 감지도 못하기도 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것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옥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옥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옥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지금과 같이 무사안일한, 그리스도인다운 맛이라고는 다 빠져서 싱거워진 삶에서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고 또 매달리십시오! 저 역시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