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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요설교]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사도행전 강해 66)

작성자自由魂|작성시간06.08.30|조회수626 목록 댓글 0
 

2006. 8. 30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66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사도행전 14장 19-28절(519장)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24)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25)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26)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27)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라고 잡았습니다만, 이 말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것은 유명한 탐험가요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명을 받은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해야 할 사명을 받은 사람은 그 사명을 달성할 때까지는 죽게 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야기를 입증하는 하나의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과 그 후에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바울의 죽음(19v)

 

본문의 사건은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을 쓰스와 허메로 오해하고 제사 드리려는 것을 간신히 뜯어말린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꼭 그 사건이 있은 직후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도 그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났을 것입니다. 19절입니다.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누가는 이 부분을 매우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담담하게 넘어갈 만한 사건은 결코 아닙니다. 19절은 누가가 이제부터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의 주인공으로 삼으려 했던 바울이 죽었다고 하는 기록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추방당해야 했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그곳의 유대인들의 박해를 참고 견디다가 결국은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습격 때문에 도망 나와야 했습니다. 그렇게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박해와 협박으로 인해 이곳 루스드라까지 쫓겨 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추적하여 루스드라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루스드라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무리를 초인하여”라고 번역된 부분은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을 설득시켜서 자신들의 말에 대해 동의하고 신뢰하며 확신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1)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합심하여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이러한 핍박에서 바나바는 제외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가장 활동적으로 사역했기 때문에 바나바보다 바울을 가장 위험스러운 인물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 ‘페이도’(peivqw)가 본문에서 ‘초인하여’라고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는 원래 ‘(논쟁으로 참이나 거짓을) 확신하다, 화해하다, 진정시키다, 동의하다, 의존하다’(persuade)라는 뜻이며, ‘1)설득하다, 친구로 만들다, 진정시키다  2)설득 당하다, 믿다, 경청하다, 순종하다, 양보하다  3)신뢰하다, 확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인 후에,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 밖으로 끌어다 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의 “돌로... 쳐서 죽은 줄로 알고”라는 표현과 다음 절의 “바울이 일어나”라는 표현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알고’는 법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2) 이것은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인 이 일이 그들의 법과 관습에 따라 행해진 것이며, 돌로 친 이후에 죽음을 확인하는 것 역시 법과 관습에 따라 행해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냥 우르르 돌로 치고서 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우르르 내다 버리는 방식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비시디안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바울을 쫓아올 정도로 바울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바울만큼은 꼭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돌에 맞아 기절한 정도를 가지고 죽었다고 판단해서 내다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소개했던 것처럼 유대인의 돌로 쳐서 처형하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허술한 것이 아닙니다.3) 그냥 마구잡이로 돌을 던지는 게 아닙니다. 스데반의 순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증인이 되는 사람이 큰 돌로 바울의 머리를 찍었을 것이고, 그 후에 사람들이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바울의 시체를 성 밖에 내다 던진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이 사건은 분명히 바울의 죽음에 대한 보고입니다. 그런데도 누가가 바울의 죽음에 대해 너무도 담담하게 기록하는 것은 아마도 뒤이어지는 바울의 부활에 더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죽음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야 합니다.


2) ‘노미조’(nomivzw)는 원래 ‘법(용도)에 따라 행하다, 익숙하다, 생각하다, 간주하다, 상상하다’(to deem)라는 뜻이며, ‘1)습관이나 관습을 지키다, 습관이나 관습에 따르다  2)여기다, 생각하다, 가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이 부분은 2006. 3. 15  수요 예배 때의 사도행전 강해 42 “어느 쪽에 속하십니까?”(행 7:54-60)을 참조하라. 이 부분과 관련된 설명만 인용한다. : “‘신성모독죄’에 걸려 사형을 받게 되는 경우, 유대인들은 죄인을 돌려 쳐 죽였습니다. 돌로 쳐 죽인다고 하면 우리는 보통 죄인을 가운데 놓고(살인배구 하듯이...) 여러 사람이 돌을 던져서 죽게 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정확한 방법은 아닙니다. 죄인이 ‘신성모독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증인’이 먼저 큰 돌을 가지고 죄인의 머리를 찍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람들이 돌을 던집니다. 사실 던져진 돌에 맞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처음 돌로 찍히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사인(死因)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처음 죄인의 머리를 돌로 찍은 사람은 그 죄인의 사형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죄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그 ‘증인’의 발 앞에 갖다 둡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하는 말은 단순히 사울이 옷을 지켰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데반의 사형에 있어서 사울이 가장 주도적인 역할과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는 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그런 바울이 너무도 시시하고 간단하게 죽어버렸음을 기록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헛소리거나, ‘바울이 사명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라고 하시는 그 ‘사명’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삶과 죽음 모두를 초월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은 꼭 살아서만 이루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어서도 이루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그냥 그렇게 죽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었고, 바울은 다시 살아나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바울도 결국은 죽지 않습니까! 물론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땅 끝(스페인,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한 후에 죽었으니 ‘사명’을 완수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4) 하지만 실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땅 끝이 스페인이 아니라면, 바울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4) 이 부분은 2006. 3. 22의 수요 예배에서 했던 사도행전 강해 43 “흩어진 교회”(행 8:1-3)을 참조하라. 땅 끝과 스페인에 대한 부분만 인용한다. : “‘땅 끝까지’이르는 그 일을 위하여 사울/바울을 세우신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선택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행 22:21).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을 거스리지 않고자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전도했습니다(행 26:19-20). 그는 자신을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로 여겼기에, 모든 지역과 할 수 있다면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롬 1:24-25).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습니다(롬 15:19).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복음으로 가득 차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는 더 이상 일할 곳이 없기에 마지막으로 서바나, 즉 스페인에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롬 15:23, 28). 바울이 로마의 교회에 편지를 쓴 직접적인 이유는 로마 교회가 자신을 서바나에 선교사로 파송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롬 15:24).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땅 끝’이 스페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스페인까지 가면 그 다음에는 바다이고, 바다 끝에는 낭떠러지라고 생각했기에 바울이 살던 시대에 있어서 ‘땅 끝’은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모든 판단의 중심에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내 사명이냐,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우리는 단지 사명을 맡은 자로서 ‘충성’해야 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5) 하나님께 요구하지 마십시오. 요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순종과 충성만이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음을 기억하십시오!


5)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2. 바울의 부활과 복음 전도(20-25v)

 

저는 앞에서 ‘알고’라는 단어가 법적인 사망 진단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이 ‘일어났다’고 하는 표현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서 제자가 된 루스드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바울을 둘러섰습니다. 그들이 쓰러진 바울을 중심으로 둘러섰던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울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그가 죽었다면 장례 절차를 집행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Robertson, Bengel).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바울을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자리에서 일어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죽음에서 일어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6) 그렇기 때문에 앞에 나온 ‘죽은’과 20절의 ‘일어나’는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6) ‘아니스테미’(ajnivsthmi)는 원래 ‘세우다, 일어나다, 들어 올리다, 일으키다, (다시) 일어나다, (똑바로) 서다’(raise up)라는 뜻이며, ‘1) (죽음에서) 일으키다, 일어서다  2) (자리에서) 일어나다, 서다  3) (~에 반대하여) 봉기하다, 나타나다, 나아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여러 곳에서 죽음에서의 부활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경우 두 가지만 예로 든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장면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눅 8: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예수님께서는 눅 18:33에서 자신의 부활을 가리킬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이 행 20:9-12에 기록되어 있다.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12)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9절은 죽었다고 하고, 12절은 살아났다고 되어 있지만, 바울은 10절에서 그에게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유두고가 죽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 있게 선고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죽음에서 일어난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죽은 자들을 찾아가서 ‘너희들이 나를 돌로 쳐서 죽였지만 나는 다시 살아났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조용히 성에 들어갔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는 하지만 상처 나고 다친 곳을 치료하기 위해서 쉬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는 무엇을 했을까요? 20절 하반절부터 봅니다. “(20)...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바로 다음 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내려갔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는 거기 가서도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바로 전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툭툭 털고 일어나서 또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까?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무 충격도 받지 않았다는 듯이 더베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내용들은 우리를 더 많이 놀라게 합니다. 21절 하반절부터 봅니다. “(21)...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더베에서의 성공적인 복음 전도를 마친 후에 이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거기서 동쪽으로 쭉 가면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나옵니다. 또는 거기서 서남쪽으로 내려오면 바보에서 배타고 와서 도착했던 버가가 나옵니다. 그런데도 바울 일행은 다시 루스드라로, 이고니온으로,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왜요? 자기가 얼마나 쎈 사람인지 보여주려고요? 자기는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기를 돌로 친 사람들 겁주려구요? 아니요!

거기에 있는 새로 믿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을 죽였다고 해서 의기양양해서 더 핍박을 받게 되었을 그들을 지지해주고 재건해서, 더욱 강화/확립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7) 그들을 소집한 후에 권하고, 위로하고, 가르쳐서8) 그들이 계속 그 믿음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그들의 자리를 고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9)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고 큰10) 환난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요!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환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것 외에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개역 성경이 ‘겪어야’라고 번역한 단어는 ‘통하여’라는 뜻입니다.1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환난’이라는 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큰 환난이고, 많은 환난이며, 자주 오는 환난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7) ‘에피스테리조’(ejpisthrivzw)는 원래 ‘더욱 지지하다, 재건하다, 힘 있게 해주다, 확고히 하다’(to give further support)이며, ‘1)그밖에 것을 확립하다, 더 강화시키다  2)더 확고하게 하다, 입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8) ‘권하고’라고 번역된 ‘페라카레오’(parakalevw)는 원래 ‘가까이서 부르다, 초청하다, 기원하다, 청하다, 요구하다, 위로하다, 욕망하다, 훈계하다, 부탁하다, 기도하다’(to call near, exhort, encourage)라는 뜻이며, ‘1)부르다, 소집하다  2)연설하다, 말하다, 훈계하다, 간청하다, 위로하다, 격려하다, 가르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9) ‘에메노’(ejmmevnw)는 원래 ‘(같은 곳에) 머무르다, (꾸준히) 인내하다, 계속하다’(to remain in)라는 뜻이며, ‘1) ~인 상태로 있다, 계속되다  2)유지하다  3)고수하다, 일치하다, 지키다, 보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0) ‘포루스’(poluv")는 ‘양이 많은, 수가 많은, 크게, 자주, 대부분’(many, much, large, greatly)이라는 뜻이다.

11) ‘디아’(diav)는 ‘통하여, 후에, 항상, 가운데, ~에, 피하다, 때문에, 간단히 ~에 의해서, 위해, …으로부터, 안에, 경우에 따라서, 그것, 그것에 의해, 그러므로, 비록, 통해서, ~에게’라는 뜻이다.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한 바울은 자기가 떠난 후에도 교회를 이끌어갈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택하여’라고 번역된 단어는 투표에 의해서 선출했다는 의미와 임명했다는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12) 아마도 그곳 교회 성도들의 추천과 투표, 그리고 사도인13) 바울과 바나바의 인정과 임명 과정을 통해서 각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장로들을 택한 후에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사명을 위임해14) 주었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초대 교회에서의 집사 임명, 바울과 바나나의 선교사로서의 임명, 바울과 바나바가 장로들을 세운 방식들은 오늘날의 ‘임직식’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 일행은 각 교회를 지도할 지도자를 세움으로써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루스드라 등에 새로 세워진 교회들을 더욱 굳게 한 후에 귀향길에 오릅니다.


12) ‘케이로토네오’(ceirotonevw)는 원래 ‘손을 뻗는 사람, 투표자, (손을 들어) 투표자가 되다, 선출하다, 임명하다, 택하다’(to choose by a show of hands)라는 뜻이며, ‘1)손을 뻗어 투표하다  2)투표로 임명하다  3)선출하다, 임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3) 14:3절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가리켜 ‘두 사도’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기에 바울은 사도이지만 바나바는 사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약이 ‘사도’라는 단어를 때로는 좁게, 때로는 넓게 사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좁은 의미에서의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울은 그 12제자에는 속하지 않지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맡기셨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에서의 사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더 넓은 의미에서는 사명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14:3의 ‘두 사도’는 마지막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용한 용례이다.

14) ‘파라디데미’(parativqhmi)는 원래 ‘나란히 놓다, (음식, 진리를) 제시하다, 저축하다, 진술하다, 명령하다, 위임하다, 제안하다, 제시하다’(to set before)라는 뜻이며, ‘1)옆이나 가까이 두다, 내놓다, 식탁을 차리다, 설명하다  2)내려놓다, 맡기다, 위탁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내려옵니다. “(24)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25)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그들은 비시디아 지역을 정 가운데로 통과합니다. ‘가운데로 지나가서’는 한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가로지르다, 횡단하다, 뚫고 나가다, 통과하다’라는 뜻입니다.15) 그들은 자신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돌로 쳤던 사람들의 도시와 지역을 정면 돌파합니다. 그래서 밤빌리아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의 버가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이전에 구브로 섬의 바보에서 배를 타고 이곳 버가에 내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조금 행로가 바뀌는데 버가에서 서쪽에 있는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를 탑니다. 이제까지는 처음 왔던 길 그대로 내려왔는데 왜 여기에서는 새로운 방향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앗달리아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15) ‘디에르코마이’(dievrcomai)는‘가로지르다, 오다, 떠나다, 돌아다니다, 해외로 가다, 어디든지 가다, 다른 곳으로 가다, 건너가다, 통과하다, 걸어 나가다, 빠져나가다, 지나가다, 횡단하다, 뚫고 지나가다, 여행하다’(go about)라는 뜻이다.


3. 1차 선교 여행의 끝(26-28v)


26절부터 봅니다. “(26)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27)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앗달리아에서 배를 탄 바울 일행은 처음 파송을 받았던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이로써 1차 선교 여행이 모두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 도착하자 교회와 성도를 모두 모아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들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것을 자세히 보고한16) 후에 꽤 오랜 기간을 안디옥에 머물게 됩니다.


16) 개역 성경은 ‘고하고’라고만 번역했지만 헬라어 ‘아낭게로’(ajnaggevllw)는 원래 ‘(자세히) 광고하다, 선언하다, 연습하다, 보고하다, 보여주다, 이야기하다, 말하다’(to report, announce)라는 뜻이며, ‘1)발표하다, 알리다  2)보고하다, 소식을 뒤로 전하다, 자세히 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에 있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무엇을 행했는지를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통해서 무슨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보고합니다. 복음 전파의 사역은 비록 교회가 파송하고 후원하며, 사역자들이 사역지에 가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이고 정확한’ 의미로 따진다면 조금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선교를 가리켜 말할 때에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라고 부르는 것입니다.17) 선교하는 데는 돈도 필요하고 선교사도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이 없어서 못하고, 사람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것은 바른 답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돈이 없고 사람이 없어도... 맨땅에 헤딩하듯이... 하나님의 도우심만 믿고 무조건 시작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교에 있어서도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하신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 이 표현은 진보주의 쪽에서 만들어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선교’를 하나님이 선교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사용하는 ‘통상적인 의미’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표현이 원래 사용된 의미는 그런 쪽이 아니다. 이 표현이 사용된 원래의 의미는... 기독교와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지역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먼저 가셔서 복음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뿌려놓으셨으므로... 현대의 선교는 그들에게 가서 일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보다는 ‘대화’할 것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선교관에서 나온 주장이다.

 

또 하나는 1차 선교 여행의 중대한 의미 가운데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열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차치(且置)하고... 이 1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시금 불씨가 되어서 15장으로 넘어가면 이방인들이 구원 받기 위해서 믿음으로 충분하냐, 아니면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이 유대인의 세계에서 이방인의 세계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째서 그것이 복음, ‘기쁜 소식’인지에 대한 충분하고도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요한 내용은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행을 계기로 해서 다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 보고는 안디옥 교회와 성도들에게 무척이나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환영을 받았고, 재충전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안디옥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개역 성경은 ‘오래’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오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즉, 2차 선교 여행을 떠나기 위해 충분히 준비하고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에 대한 내용을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를 말씀드렸지만... 저는 특히 바울이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변함없이 복음을 전했던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받은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지 않는다, 죽을 수 없다’는 것보다도... 우리가 우리의 삶과 죽음을 넘어서서라도 복음을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이면 어떻고 삶이면 어떻습니까? 돌에 맞아서 죽으면 어떻고, 다시 살아난들 또 뭐가 달라집니까!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충성하는 성도와 충성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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