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7. 27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12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지난주에는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첫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방언을 말하는 사건은 그들이 술 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요엘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요엘의 예언과 베드로의 설교가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데, 그것은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이 이상과 꿈 등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보고 사람들 앞에 예언/대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대언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것이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심판 날을 위해 준비하는 유일한 방법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단지 구약의 예언을 해석한 것에 불과할 뿐, 이것만으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진정한 의미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거기에서 끝난다면 베드로의 설교는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지금 이 자리에서 성취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그를 당시에 무수히 많았던 이단 사이비의 두목 정도로 여겨지게 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요엘 예언의 해석에서 더 나아가 그 예언이 지시하고 있는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는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 증명해 보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와 다윗의 증거, 그리고 사도들의 증거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증거(22-24v)
본문 22-24절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증거 하신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나사렛 예수의 삶을 통한 증거(22v)와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증거(23-24v)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나사렛 예수의 삶을 통한 증거(22v)
먼저 22절입니다.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너희도 아는 바에”, “너희 가운데서”, 또 “너희 앞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베드로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부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그들 앞에서 행해졌고, 그들 모두가 아는 바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그들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나열만 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건 뒤에 숨어있는 의미를 끄집어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모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베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사렛 예수로 하여금 그러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한 간접적인 주체가 나사렛 예수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직접적인 주체로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하여금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하신 이유와 목적까지도 분명하게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 앞에서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내용만으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신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능력을 베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나사렛 예수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2)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증거(23-24v)
그러나 하나님의 나사렛 예수에 대한 증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계속됩니다. 23-24절입니다. “(23)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나사렛 예수가 행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분명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율)법 없는 자들’인 로마인의 손에 넘겨 주어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서 죽게 만든 것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것뿐 아니라 그분이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로마인들에게 내어 준 바 된 것과 못 박아 죽이는 이 모든 일들 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는 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더 들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손에 예수님을 넘겨주었다는 것과, 예수님이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소개하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24)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순순하게 베드로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도 나오지만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일직선상에 놓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행해진 것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논증이 필요한 ‘예수의 부활’에 대한 부분을 증명하기 위해 다윗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2. 다윗의 증거(25-31v)
본문 25-31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윗의 예언을 들어 증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나 십자가의 죽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이나 또 그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셨다는 것은 인정하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윗의 권위를 빌려 이 부분을 증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번에는 다윗의 예언을 먼저 인용합니다. 25-28절입니다. “(25)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이 말씀에서 ‘나’는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5절의 ‘저, 주, 그’와 27절의 ‘주의 거룩한 자’는 모두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28절의 ‘주’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27절에서 ‘나’와 ‘주의 거룩한 자’가 동일시된다는 것과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냐 하는 것입니다. ‘나/내’는 분명 다윗입니다. 그리고 ‘주의 거룩한 자’는 분명히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27절이 시라는 것과,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와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는 서로 대귀를 이루기 때문에 ‘내 영혼’은 ‘주의 거룩한 자’와, 그리고 ‘음부에 부리지 아니하시며’와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 서로 짝을 이룹니다.
①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와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두 가지를 보면서 우리는 단순하게 ‘부활’을 떠올리지만 구약의 여러 표현들과 사상들을 고려해볼 때 이것은 ‘부활’보다는 ‘불사不死’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죽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영혼’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단순하게 그 육신이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죽기는 죽었는데, 죽음 이후에 그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불사’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은 육신은 보통의 경우처럼 썩게 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육신은 썩지,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음부에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부분을 보충해주는 것이 “(28)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라는 28절 말씀입니다. 이 상태는 ‘생명의 길’로 ‘주의 앞에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는 상태로 이야기되어집니다. 마치 신학에서 말하는 죽음 이후에 들어가게 되는 ‘중간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부활과 관련된 논증을 하시는 중에 말씀하셨던 누가복음 20:37-38 말씀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7)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신 이유가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결국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모두 하나님에게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 즉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바로 다윗의 예언에 나와 있는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본문이 “(37)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의 길’,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는’ 상태는 곧 ‘죽은 자의 살아나는 것’ 즉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가 이어서 하는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29-31절입니다. “(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그는 먼저 이 예언을 한 다윗을 소개합니다. 다윗이 비록 죽어 장사되었지만 그의 묘가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권위를 모든 유대인들이 인정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예언이 틀리다면 유대인들이 이제까지 다윗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고 있지 선지자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윗에게 선지자의 직책이 주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메시야에 대해 예언을 했다는 면에서 본다면 그도 선지자로 불리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가 “미리 보는 고로... 말하”였다는 점에 근거하여 다윗을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미리 보았으며 무엇을 말하였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으로 세상에 올 그 메시야/그리스도가 결국 부활하실 것도 “미리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다윗의 예언이 곧 메시야/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라고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와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가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앞에서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에 나와 있는 하나님 이해와,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② 그리고 또 하나, 27절에서 다윗을 가리키는 ‘나’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주의 거룩한 자’가 동일시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를 살펴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이미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와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가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면서 나와 버렸습니다. ‘부활’하실 분과 관련하여, 그 주체를 31절은 정확하게 ‘그리스도’라고 밝힙니다. 또 30절은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27절은 ‘주의 거룩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본문들은 동일하게 메시야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왜 다윗을 가리키는 ‘나/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한다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부활하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의 ‘후손’은 곧 그의 ‘조상’인 다윗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그리스도’요 ‘주의 거룩한 자’임을 미리 알고 보았으며, 자신의 후손이기에 자신과 동일시 시켜서 그의 부활과 관련된 내용을 예언하면서 자신을 거기 포함시켰다는 것이 본문 주해와 주석을 통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인 면에서 더 확대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그에게 속한 모든 자의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것은 곧 다윗 자신의 부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의 부활이 거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도들의 증거(32v)
이렇게 해서 부활에 대한 베드로의 논증이 끝났습니다. 부활은 이미 다윗에 의해서 예언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메시아/그리스도의 부활이 이렇게 다윗에 의해서 예언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 역시 나사렛 예수에 의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예언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최종적인 증거가 부가됩니다. 그것은 32절의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이 다윗의 예언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일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베드로 자신도 ‘다윗이 예언했으니 맞지 않겠느냐?’는 말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고서 설교를 마쳤다면 그는 신학자는 될 수 있었겠지만 증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언을 풀어 설명할 뿐 아니라, 자신이 그리고 거기 모인 다른 사도들과 성령을 받은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이 일에 있어서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봤다고, 그것을 법정에 서서라도 증언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거기 모인 무리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이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 더욱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사도들이, 그리고 성령을 받은 120명 전체가 예수님이 약속하셨고 또 명령하셨던 것처럼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버린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학자나 변호사가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가치하다거나 쓸 데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을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자가 되려면 신학을 공부해야 하고, 변호사가 되려면 법을 공부해야 하듯이, 증인이 되려면 ‘목격’을 해야 합니다. 생생한 체험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어리벙벙한 사람,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 어떤 사람 앞에서도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내가 그 일에 증인입니다! 내가 목격했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라고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경험’이 ‘체험’이 필요합니다. ‘학문’과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