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 6 주일 낮 예배(어린이주일)
'한 아이'의 신앙과 행동
요한복음 6장 1-15절(456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작년에는 ‘자녀 양육’을 주제로 말씀을 드렸는데, 올해에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4개의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사건인데, 특별히 요한만이 오병이어의 주인인 ‘한 아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 아이에 대해 다른 어떤 것도 이야기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도 그 아이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놀라운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나는 데 있어서 이 ‘한 아이’의 역할을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서 살펴본 후에, 이 아이의 믿음과 그에 근거한 행동에 대한 것을 살펴보려 합니다.
1. 큰 무리가 따르니(1-5a, 10v)
1-5a절입니다. “(1)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2)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3)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4)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병자들을 고치시는 표적을 구경하느라고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더구나 이때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몰려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산에 올라 앉으셨을 때에도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이때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의 수가 아주 많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천 명이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지만, 이 숫자는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숫자이기 때문에* 전체로 보면 2만 명 정도가 모였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숫자의 경우 보통 ‘곱하기 4’를 해야 전체 인원이 나온다. 그래서 출애굽 할 때도 장정이 60만이라고 하지만(출 12:37) 200만 명 정도가 출애굽 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5천도 같은 방법으로 계산하면 2만 명 정도가 모여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 하나는 본문이 말하는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이 어디냐 하는 것인데, 요한복음 5장이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그쪽을 기점으로 잡을 수는 있지만 막연히 ‘건너편’이라고만 하면 어디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9:10은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곳이 갈릴리 호수 동북쪽의 벳세다 가까운 곳이라고 기록합니다.
2.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하리이다(5-7v)
5-7절입니다.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신 것은 이곳이 벳세다 가까운 곳이었고 빌립이 벳세다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립만이 아니라 안드레와 베드로도 이곳 출신입니다(요 1:44*). 제가 볼 때에는 예수님께서 빌립만이 아니라 벳세다 출신의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수에 익숙한 사람이다 보니 그 자리에서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며, 그 돈을 어떻게 조달할지(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함)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안드레의 경우에는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를 수소문하고 다녔을 것이고, 베드로는 비록 성격은 급하지만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우왕좌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의 답변을 보고 흔히 그를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듯 말하지만 제가 볼 때 그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 가운데서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빌립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 시험이 제자들 전체에 대한 시험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험’이라는 단어의 의미들을 살펴본다면, 어려운 일의 해결을 시도하게 하심으로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사람들을 마을로 내려 보내서 각자 먹을 것을 사먹게 하자고 제안했고, 안드레는 어디선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얻어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른 한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했습니다. 그렇다면 각 사람에게 얼마씩 갹출하자는 구체적인 방법과 돈이 200데나리온은 더 있어야 한다고 답변한 빌립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이고 지혜로운 답변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요한이 빌립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다른 복음서들은 ‘빌립’에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 제자들 전체가 이 ‘시험’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먹을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마 14:15-16 (15)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16)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막 6:35-37 (35)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눅 9:12-13 (12)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1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 ‘시험코자’라고 번역된 ‘페이라조’(peiravzw)는 ‘(객관적으로) 시험하다, 인내하다, 자세히 조사하다, 유혹하다, 훈련하다, 가다, 증명하다, 시도하다, 노력하다’(to try, attempt, test)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이 ‘어디서’라는 장소와 ‘사서’라는 조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을 사서 먹이자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제의 자체가 실현 불가능했습니다. ① 일단 비용의 문제가 있는데, 빌립은 2만 명이 한 번 식사하려면 적어도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NIV] 성경은 그것을‘ Eight months' wages’ 즉, 8개월 치 임금이라고 번역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니까, 요즘 시세로 계산한다면 하루 임금 10만원으로 해서 200일이면 2천만 원입니다. 1달에 25일씩 일하면 8개월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액수입니다. 게다가 2천만 원이 적은 돈이 아니지만 그것을 2만 명이 나누어 먹으면 한 사람당 천원밖에 돌아가지 않습니다. ② 게다가 이들이 있는 곳은 도시나 성읍이 나이라 야트막한 ‘산’이 있는 빈 들판인데* 어디서 떡을 삽니까? ③ 그것도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의 식사를 어떻게 한꺼번에 조달합니까? 미리 예약을 한다고 해도 2만 명 분의 식사는 만만한 양이 아니지요.
* 다른 복음서들은 모두 동일하게 이곳을 ‘빈 들’이라고 부른다.
3. 얼마나 되겠삽나이까(8-9v)
이런 상황에서 안드레는 전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9-0절입니다.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매우 절망적입니다. 2만 명이나 모여 있었지만 안드레가 발견한 것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물고기 하면 고등어자반이나 큰 물고기를 떠올리지만 이것은 멸치와 같이 작은 고기로서, 소금을 쳐서 말려 떡을 먹을 때 목이 메지 않게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반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식사였고 어린 아이 한 명이나 먹을 수 있는 적은 양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고를 하는 안드레 자신도 그것 가지고 뭘 하겠느냐고, 흔히 하는 말로 누구 코에 붙이겠냐고 실망스럽게 말합니다.
* 한편 어떤 이들(Richardson)은 오병이어 사건을 열왕기하 4장에서 엘리사가 보리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로 백 명을 먹인 사건과 비교한다. 두 경우 모두 ‘보리떡’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에 근거하여 요한이 예수를 새로운 엘리사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 ‘옵사리온’(ojyavrion)은 원래 ‘작은 물고기’라는 뜻인데, 다른 음식에 넣는 ‘조미료’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작은 물고기에 조미료로 소금을 쳐서 말린 것으로서 빵을 먹을 때 같이 먹는 반찬을 가리키는 것이다(whatever is eaten with bread, small fish1).
우리는 빌립의 계산적인 답변에 비하여 안드레의 보고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가 마치 예수님께서 이 오병이어로 2만 명을 먹이실 것을 예상하고 이 말을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드레 자신도 자신의 보고 내용을 한심스럽게 여긴 것이 분명합니다. ‘계산’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안드레도 빌립과 마찬가지이고, 사실은 빌립보다 더 한심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한심스러워 보이는 보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이 보리떡과 반찬거리인 물고기가 바로 예수님이 원하셨던 답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 ‘어디서?’에 대한 답변이 바로 ‘한 아이’였던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고 그것을 내놓은 한 아이로부터 놀라운 오병이어 사건이 시작된 것입니다.
4. 원대로 주시다(10-13v)
10-13절입니다. “(10)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11)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12)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13)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제 제자들에 대한 test는 끝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는 제자들에게서 예수님께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식사 대형으로 자리에 앉게 하신 후에,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식사 기도를 하신 후에 나눠 주십니다. ‘어디서?’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한 아이’였던 것처럼, ‘사서’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축사하시고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떡을 사서 먹일 생각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조금씩 맛만 보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본문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으며 그들이 배부르게 먹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 후에 남은 조각을 거두게 하셨는데, 남은 것만으로도 열 두 바구니에 찼다고 합니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식사한 후의 남은 음식은 식사 때에 봉사한 사람들의 몫으로 주어집니다(Lightfoot).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열두 바구니의 음식을 식사를 위해 봉사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처음 음식 제공자인 아이에게도 무언가를 나누어 주셨을 것입니다.
5.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15v)
마지막의 14-15절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합니다. “(14)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5)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 선지자’는 모세가 신명기 18:15*에서 예언했던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당시에 ‘그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메시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로 2만 명을 먹일 수 있다면 경제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도 그 능력이 활용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되었고,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잡아서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급히 제자들을 떠나보내시고는 자신은 혼자서 산으로 떠나가십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 더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이것을 단정 지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지역적으로 또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메시아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의 메시아 사상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한 아이의 신앙과 행동
이렇게 해서 오병이어 사건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본문에 등장하는 ‘한 아이’의 신앙과 행동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 속의 한 아이 : 이 아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어린 소년’에서부터 ‘아이, 청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이를 가리키는 표현**보다 더 애정을 가지고 부르는 애칭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청년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소년’ 또는 ‘어린이’라고 이해해야 옳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이는 어떻게 해서 이 무리 가운데 섞여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 앞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른 주된 이유가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이적을 구경하기 위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이 아이도 신기한 ‘구경’을 위해 이곳에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의 ‘신앙’을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 ‘파이다리온’(paidavrion)은 ‘어린 소년, 아이, 청년’(little boy, lad)이라는 뜻이다.
** ‘피이스’(pai'")가 더 일반적인 표현이다.
② 자기 먹을 것을 내놓음 : 우리가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안드레가 이 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안드레가 사람들 사이를 다니면서 음식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 알아보았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도 안드레는 “여기 음식 가지고 오신 분 없습니까?”하고 큰 소리로 수소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안드레는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음식 외에는 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 음식을 가진 사람이 이 아이 하나뿐이었을까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이 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아이처럼 자기 먹을 도시락을 싸온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기 도시락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기가 먹으려고 가져온 도시락을 자발적으로 내놓았습니다. 아마도 어린 아이다운 순진한 모습으로 “저요!”하고 손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자기 것만 챙기는 어른들과 자기 몫을 내놓은 이 아이의 대조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③ 부족한 것이지만 기꺼이 내놓음 : 아이가 내놓은 도시락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보리떡에 작은 물고기 두 마리에 불과했습니다. 어쩌면 거기 모인 어른들 가운데는 부끄러워서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내놓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당히 내놓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고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것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아마 그것으로 2만 명이나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도 드시라고 내놓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아이의 순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순진하지는 않을지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보잘 것 없고 부족한 것, 부끄러운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리려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놓은 손이 부끄러울 정도라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④ 자기의 공을 내세우지 않음 : 이상한 것은 왜 이 아이에 대한 어떤 다른 기록이나, 예수님의 칭찬 한 마디조차 기록되지 않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오병이어를 제공하는 부분 이외에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또 이 아이가 예수님이나 제자들,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 그들이 먹은 것이 자기가 제공한 것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의 이름조차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섬김과 봉사가 어떠해야 함을 교훈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내놓고, 또는 우리가 생각할 때에 조금 무리해서라도 많이 드렸다고 생각할 때에 그 일로 인하여 인정받고 사람들 앞에 세움 받기를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내놓은 의견이 선택되었다고 우쭐해하고, 내가 내놓은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파업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섬김은 섬김으로 끝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수고에 대해 칭찬 한 마디 하지 않으셔도 그것 때문에 실족해서 교회를 나오느니 마느니 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섬김의 모습, 참 믿음의 행동이 어떤 것인지... 이 이름도 모르는 아이에게서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아이와 같은 신앙, 이 아이와 같은 섬김의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