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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일낮설교]보리떡 한 덩이(삿 7:9-14) - 맥추 감사절

작성자自由魂|작성시간07.07.04|조회수340 목록 댓글 0

2007. 7 1 주일 낮 예배(맥추 감사절)

보리떡 한 덩이

사사기 7장 9-14절(197장 이 세상 험하고)

 

1. 성령강림절과 맥추감사절

 

1) 맥추절

오늘은 한국교회가 ‘맥추 감사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날을 ‘맥추절’이라고 부르는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 하면 5월 말에서 6월에 지켜지는 절기로서, 비록 ‘보리’라는 뜻의 ‘맥(麥)’ 자를 쓰기는 했지만 사실 보리가 아니라 밀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출 23:16).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유월절로부터 7주 후에 지켰기 때문에 ‘칠칠절’(출 34:22; 신 16:9-11) 또는 ‘오순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날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주어진 날로 축하되었고, 기독교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관련하여 ‘성령 강림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2) 맥추 감사절과 오순절(성령강림절)

‘맥추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실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맥추절’이 ‘칠칠절’이고 ‘오순절’이며 기독교의 ‘성령 강림절’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이미 지난 5월 27일 주일을 ‘성령 강림절’로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실 날짜 계산상으로 보면 우리가 이미 지킨 ‘성령 강림절’이 ‘맥추절’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지키는 ‘맥추 감사절’은 뭡니까?

 

‘맥추 감사절’이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라는 점은 구약의 ‘맥추절’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7월 첫 주를 ‘맥추 감사절’로 지키는 것은 사실 ‘맥추절’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이모작을 할 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추수 감사절’이 가을의 ‘쌀 추수’와 관계되어 있다면, ‘맥추 감사절’은 봄의 ‘보리 추수’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한국 교회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이 사실은 성경의 절기가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 만든 절기라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가 있습니다.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라고도 불리는 절기가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들 형편에 맞추어 ‘추수 감사절’로 변형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미국 절기를 따라 지킬 것이 아니라 우리 형편에 맞춰서 ‘추석’ 때에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를 지키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미국 사라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맥추 감사절’을 지켜왔습니다. 이 절기의 이름이 성경의 ‘맥추절’과 비슷해서 그 절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경의 맥추절은 우리가 ‘성령 강림절’로 대체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맥추 감사절’ 아마도 초기의 선교사들이 한국의 ‘보릿고개’와 같은 어려운 형편에 맞추어서 ‘맥추절’을 변형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원래의 ‘맥추절’이나 ‘오순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국 교회만의 ‘보리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로 지켜져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농경 사회가 아닌 오늘날 ‘추수 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보리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를 지키는 것은 한층 더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어떤 교단에서는 이 절기를 농촌 교회들을 생각하고 함께 나누는 절기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또는 한 해의 절반이 지난 7월 첫 주에 이 절기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 해의 전반기에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로 생각하고 지키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 개인적으로는 별로 이런 절기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지만 - 이 절기에 지난 6개월 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보다 연약한 교회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것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절기를 지켰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사실 한국의 도시 교회의 성장에는 농촌 교회를 밑거름으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촌 교회에서 자란 성도들이 도시로 몰려오면서 도시 교회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시 교회는 농촌 교회에 대한 ‘빚진 심정’을 가지고 도와야 할 책임을 져야 한다.

 

2. 보리떡 한 덩이

 

그래서 저는 오늘 기드온에 대한 말씀을 절하려고 합니다. 사실 기드온과 ‘맥추 감사절’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오늘이 ‘맥추 감사절’이라는 점에서 ‘보리’를 떠올렸고, 기드온과 관련된 ‘보리떡’에 대한 기록을 함께 떠올렸습니다. 물론 ‘보리 추수’와 ‘보리떡’이라는 단순한 관계만 생각한 건 아닙니다. 오늘 주보 칼럼에도 썼지만, 저도 자칫하면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목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운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지금은 연약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시리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보리떡 한 덩이’ 같은 기드온을 사용하신 이 사건 속에서 우리 교회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서 본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1) 배경과 결과(before 9v & after 14v)

먼저 본문에 나오는 사건의 전후 배경을 간단하게 소개한 후에 본문의 ‘보리떡’과 관련된 부분만을 좀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사 기드온에 대한 이야기는 사사기 6장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7년 동안 미디안으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을 때(삿 6:1),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천사를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불러 주시지만(삿 6:12), 사실 기드온은 큰 용사는커녕 소심한 겁쟁이에 불과했습니다(삿 6:11).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시험한 후에야(삿 6:17-23),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목상을 찍습니다(삿 6:27). 미디안의 공격을 맞이하여 성령님의 감화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합시켜 놓고서도(삿 6:34-35) 안심이 되질 않아서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또 시험합니다(삿 6:36-40).

 

그런데 7장으로 넘어오면 하나님은 모인 이스라엘 사람의 숫자가 많다고 하시며 다수의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하십니다(삿 7:2-3). 그래서 3만 2천 명이 모였지만 결국 3백 명만 남겨 두십니다(삿 7:7-8). 그러니 겁쟁이인 기드온으로서는 아무 소리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에 적진을 기습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9절).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아무리 겁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3백 명만을 가지고 - 그들이 무슨 스파르타의 용사 3백 명도 아닌데! -, 그것도 변변한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이(12절) 많은, 최소한 13만 5천 명이 넘는(삿 8:10) 적군을 공격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기드온은 결코 용감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 전쟁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3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무기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삿 7:16)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커다란 승리를 얻었습니다. 적군은 혼란 중에 서로를 칼로 죽이고(삿 7:22) 도주했지만, 기드온과 3백 용사는 끝까지 추적하여 미디안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군대를 완전히 격파시켰던 것입니다(삿 8:12). 이 승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나아와 왕이 되어달라고 요구할 정도였고(삿 8:22), 미디안은 기드온이 살아 있는 이후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향하여 머리도 들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삿 8:28).

 

2) 과정(9-14v)

여기서 우리가 알고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전쟁을 치르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9-14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한 절씩 차근히 읽어가면서 필요한 부분은 더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9절입니다.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자, ‘이 밤’이 어느 밤입니까? 3만 2천 명이 모인 가운데 3만 천 7백 명을 돌려보내고 3백 명만 남게 한 바로 그날 밤입니다! 이제 그 3백 명을 데리고 13만 5천 명이 넘는 적진을 공격해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살 떨리는 명령입니까! 어쩌면 그 명령을 듣는 겁쟁이 기드온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명령을 내리십니다. 10-11a입니다. “(10)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11)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 가서 그 진을 치리라.”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이라니요! 기드온이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 하더라도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겁쟁이 기드온을 용감하게 만들 무언가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적진에 몰래 내려가서 적군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용기를 얻어 전투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의 부하인 부라를 데리고 적진으로 몰래 내려갑니다. 11b-12절을 보십시오! “(11)... 기드온이 이에 그 부하 부라를 데리고 군대가 있는 진 가에 내려간즉(12)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어떤 상황입니까?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작심을 하고 모두 몰려와 있습니다. 8:10에 의하면 그들의 숫자는 적어도, 최소한으로 잡아도 13만 5천 명이 넘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사람들이 골짜기에 진을 치고 누워 있는 모습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골짜기 전체가 메뚜기로 가득 차서 바글바글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고 합니다. 그들이 타고 온 약대/낙타의 숫자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변의 모래 같다고 했습니다. 아! 기드온이 이 장면을 보면 그의 용기가 더 꺾이지 않았을까요? 도대체 이렇게 많은 군대를 어떻게 3백 명을 가지고 대적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기드온이 적군의 장막 가까이 갔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13)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보초를 서고 있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몇 명의 적군이 서로 이야기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합니다.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이 미디안 진에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을 쳐서 무너뜨리니까 그 장막이 곧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꿈입니까? 갑자기 왠 보리떡이 나오고, 보리떡이 어떻게 군인들이 쓰는 천막을 쳐서 무너뜨립니까? 어쩌면 이 이야기를 듣는 기드온도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어리벙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꿈 이야기를 들은 다른 군인이 꿈 해몽을 합니다. “(14)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그 보리떡은 바로 기드온의 칼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모여 있는 미디안과 모든 군대를 기드온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기드온의 칼에 모두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붙이셨다’는 말은 ‘주셨다, 맡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모인 미디안 연합군 모두를 기드온의 손에 주셨다, 기드온이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그의 손에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미디안 연합군을 견고한 군용 천막으로 비유한다면, 기드온과 3백 명은 ‘보리떡 한 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기드온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로 군인들 막사를 아무리 힘껏 친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너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미디안 연합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어떻게요? 왜요? 기드온이 용사이고, 그와 함께 한 3백 명이 스타르타의 용사들처럼 용맹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드온의 손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 ‘나탄’(@t'n:)은 원래 ‘주다, 두다, 시키다, 첨가하다, 적용하다, 지정하다, ~탓으로 돌리다, 배당하다, 보복하다, 부여하다, 가져오다, 생기다, 던지다, 일어나게 하다, 맡기다, 오다, 허락하다, 세다, 울다, 구하다, 지도하다, 배포하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주다, 놓다, 두다, 허락하다, 봉헌하다, 생산하다, 언급하다, 만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 기드온이, 그리고 그와 함께 한 3백 명이, 그리고 그들의 칼날이 ‘보리떡 한 덩이’로 비유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보리를 재료로 해서 만든 떡 - 사실은 빵에 더 가깝지만 - 한 덩어립니다! ‘보리빵 한 개’ 말입니다. 지난번에 오병이어의 이적을 설명하면서 보리떡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것입니다. 형편이 웬만하기만 해도 보리떡은 잘 안 먹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요즘에는 별미라고 해서 먹지만 - 저도 그걸 좋아하지만 - 하층 사람들이나 아무렇게나 해서 먹는, 그래서 ‘음식’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던 ‘개떡’같은 종류입니다! 그렇습니다! 듣기 좀 뭣하시겠지만 -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더 정확한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 기드온은 ‘개떡’같은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한 3백 명도 ‘개떡’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개떡’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개떡’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못나고, 아무리 내세울 것이 없고,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개떡’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다윗에 의해 주어져서 물매에 채워졌을 때에 거인이요 용사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처럼(삼상 17:40, 49),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이 3백 개밖에 되지 않는 ‘개떡’과 ‘보리떡’들은 13만 5천이 넘는 대군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와 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본문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저는 기드온과 같은 겁쟁이고,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에 남은 3백 명과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드온과 3백 용사’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용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물가에 가서 물을 마실 때 한 손으로 물을 움켜 핥았다는 것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군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비록 적과 대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 것도 아니고 작전을 수행하는 중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군인 정신이 투철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이들 역시 기드온 못지않은 겁쟁이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용감하냐 겁쟁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었고, 많은 숫자가 전쟁에 나가서 이기면 그들이 스스로 자긍(自矜, 교만)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했다고 말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삿 7:2). 그러므로 이들이 용감하고, 군인 정신이 투철해서 뽑았다면 이런 하나님의 의도와 맞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행동한 사람이 소수였다는 것이 절대적인 이유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목사인 저부터 잘난 사람이 아니고, 개척 교회의 목사로는 맞지 않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제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목사 모임에 나오는 분 중에 개척 교회를 잘 할 것 같은 분이 있습니다. 지난주인가 대화하는 중에 자기는 사람들 만나는 게 너무 좋대요. 그래서 사모님이 책 좀 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자기는 그게 너무너무 싫다는 거예요. 저하고는 정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분이 개척교회를 잘합니다! 반면에, 저는 제가 봐도 참 개척교회와는 안 맞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만 그렇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동안도 그런 내용을 많이 나눴지만, 개척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열심을 내서 전도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희생하고 봉사할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 아, 여러분이 희생도 헌신도 안 하고 대충대충 한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 뭔가 좀 ‘으쌰! 으쌰!’하는 사람이 있어야 ‘뭔가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럴 텐데, 우리는 다 목사인 저를 닮아서 있는지 없는지, 하는지 마는지... 그러고 있으니 ‘도대체 이러다가 문 닫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만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우리가 비록 ‘개떡’ 같은 존재이고 ‘보리떡’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진리를 지키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기대합니다. 보리떡 한 덩이, 개떡 하나 같은 우리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어둠의 세계에 속한 거대한 세력도 너끈히 넘어뜨리고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그런 교회와 성도로 서게 될 것을 믿습니다! (Amen!) 이 소원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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