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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일낮설교]뜨거운 감자, 마가 요한(행 15:37-41)

작성자自由魂|작성시간07.08.05|조회수1,444 목록 댓글 0

2007. 8 5 주일 낮 예배

뜨거운 감자, 마가 요한

사도행전 15장 37-41절(349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오늘은 마가라고도 하고 요한이라고 하는 인물, 마가 요한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마가 요한도 목사님들이 인물 설교를 할 때에 많이 소개하는 인물이어서, 아마도 그에 대한 설교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제가 오늘 마가 요한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뭔가 특별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가 요한의 변화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를 오늘 설교의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오늘은 한 개의 본문만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고 마가 요한과 관련된 성경 본문들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마가 요한의 생애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각 부분을 살펴보면서 마가 요한의 상태를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되는 표현들을 사용하여 대지의 제목을 잡았습니다.

 

1. 마마보이

 

제가 첫 번째 대지의 제목으로 잡은 것은 ‘마마보이’입니다. 마마보이는 다 커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어린 아이처럼 엄마의 품속에 머물면서 모든 것을 다 해주기를 바라는 심리상태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마마보이’라고 했다고 해서 마가 요한이 실제로 마마보이였다고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마가 요한이 어머니 치마폭에 휩쓸려 다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가 요한의 초기 생애를 살펴보면서 제 머리 속에 떠오른 단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도 마가 요한은 청년이 되어서도 매우 유약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는데, 이제 몇 개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살펴볼 본문은 사도행전 1:13입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기에 마가 요한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들이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본 제자들이 한 집의 다락방에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다락방이 있는 집, 이 다락방을 제자들에게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 합니다.

 

2) 두 번째 구절인 사도행전 12:12입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이 본문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서 다음 날이면 처형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천사에 의해 구출된 직후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출 당하는 과정에서도, 처음에는 꿈인지 환상인지 알지 못하고 멍해 있던 베드로가 드디어 자신이 구출되었다는 상황을 깨닫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곳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당시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던 그 집이고, 그 다락방입니다.

 

그런데 그 집은 마가의 집이 아니라 마가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가 아직 어머니 집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만 소개된 것으로 보아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초대 교회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120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다락방을 소유한 것으로 보아(행 1:15) 매우 부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보십시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매우 부자이고,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마가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을까요?

 

3) 마가 요한의 유약함을 보여주는 몇몇 구절 중에서 마가복음 14:51-52을 보겠습니다. “(51)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52)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여기 청년 하나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무리에게 체포되어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벌거벗은 몸에 베 홑이불 한 장만 몸에 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붙잡히자 그 홑이불마저 버리고는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을 했습니다. 이 청년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요한 자신의 이야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마가 요한은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일까요?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대강 추측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도 마가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지 다락방에서 가지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찬을 끝내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만찬 중간에 나온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신 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잡기 위해 군인들을 마가의 집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상황을 파악한 가룟 유다는 군인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떠났을 것이고, 마가는 어머니인 마리아의 말을 듣고 옷도 입지 못한 채 예수님께 위험을 알리려 달려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은 체포되었고, 그러자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마가는 홑이불은 쓴 채로 예수님을 뒤따라오다가 봉변을 당하게 되자 도망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마가의 모습을 보고 그가 유약하다고 말하기는 좀 어색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때의 상황이 워낙 살벌해서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쳤고, 다혈질인 베드로조차도 대제사장의 집에 가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마가 요한의 행동은 용감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에 비추어 보면,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살펴볼 내용까지 함께 볼 때에, 그는 유약한 청년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2. 뜨거운 감자

 

이제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뜨거운 감자’라는 표현을 떠올렸습니다. 뜨거운 감자라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 많이 먹는 것으로 겉은 식어 보이지만 여전히 뜨거워서 잘못하면 델 수 있는 음식,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문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몇몇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로 사도행전 12:25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이 부분은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를 돕는 일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왔다는 내용입니다. 이들이 왜 마가 요한을 데리고 왔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도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아마도 마가 요한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아들을 키우기 위해 바나바와 바울에게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바나바는 마가 요한의 삼촌입니다(골 4:10). 그러니 바나바도 흔쾌히 마가 요한을 일꾼으로 키워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2) 두 번째 구절인 사도행전 13:4-5을 봅니다. “(4)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5)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성령님께서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도록 명령하시자 안디옥 교회는 두 사람을 파송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선교 사역을 떠나면서 마가 요한을 수종자 즉, 조수로 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가 요한을 예루살렘에서 데려온 것이 선교 사역의 조수로 쓰기 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바나바가 안디옥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자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고자 했을 것입니다. 젊은 마가 요한으로서는 견문도 넓히고 경험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세 번째 구절인 사도행전 13:13을 봅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마가 요한은 밤빌리아 지역의 버가에 도착하자 선교팀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나바와 바울의 허락을 받은 귀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마가 요한이 갑작스럽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를 보통 두 가지 정도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부유한 집에서 유약하게 자람 마가 요한이 어려운 선교사역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삼촌이 바나바가 점차로 주도권을 잃고 바울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가 그것이 싫어서 무단이탈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어느 것이 진짜 이유인지 알 수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마가 요한이 선교팀의 일원으로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다하지 않고 중도 이탈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4) 그래서 네 번째 구절인 사도행전 15:37-41에서 마가 요한은 바나바와 바울의 뜨거운 감자가 됩니다.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두 번째 선교 여행을 계획하면서 바나바는 다시 마가를 데려가자고 제안합니다. 아마도 바나바의 성품 상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마가 요한이 이미 무책임하게 선교팀을 무단이탈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를 데려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누가 옳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을 생각한다면 바나바도 옳고, 사역을 생각한다면 바울도 옳습니다. 무책임한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한 번 실수했다고 낙인을 찍는 것도 지나쳐 보입니다. 결국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은 심하게 다투고 갈라섭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고향인 구브로로, 바울은 새로운 수종자인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갑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마지막으로 바나바는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그 이후로는 바울을 중심으로 사도행전이 기록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옳았고, 바나바가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후로 뜨문뜨문 마가 요한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결국 바나바가 옳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3. 와신상담(臥薪嘗膽)

 

세 번째 단락에서는 사도행전 이후, 서신서에 나타나는 마가와 관련된 기록 4곳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마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구절은 베드로전서 5:13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로마에 온 A.D. 63-64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그는 이곳에서 마가에 대해 언급합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는 마가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 디모데라는 것은 많이 알지만, 베드로에게도 영적인 아들이 있었고 그가 바로 마가 요한이라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난 후, 어떤 경로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마가는 베드로와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로서도 마가 요한을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니 그를 돌보아 달라는 바나바나,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이 되었고, 그러한 관계가 결국 그로 하여금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했을 것입니다.

 

2)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내용은 바울이 쓴 것으로, 골로새서와 빌레몬서 그리고 디모데후서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순서는 바울이 각각의 편지를 기록한 순서에 따른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바울이 마가 요한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골로새서 4:10입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바울은 여기에서 마가를 바나바의 생질(조카)라고 소개하고, 그를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제 마가 요한을 상대조차 할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 칭찬하지는 않지만, 골로새 교회에 그를 영접하라고 추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분위기에 비하면 한층 누그러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세 번째 구절에서 바울의 태도는 다시 변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라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인 빌레몬서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그는 여기에서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를 언급하는데, 그들을 모두 자신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마가의 이름을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진심으로 마가 요한을 소중한 동역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제 마가 요한은 바울에게 있어서 더 이상 실패자나 무책임한 사람이 아닙니다. 믿을 수 있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인 것입니다.

 

4) 네 번째 구절에서 바울은 더욱 더 적극적인 태도로 마가에 대해 언급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서와도 같은 편지인데, 그는 4:1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몇몇 사람들은 바울에 로마 감옥에 갇혀서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를 떠나버렸습니다. 또 바울은 교회를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 몇몇 사람들은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를 보기 원해서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가만 자신과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자신을 찾아올 때에 꼭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마가 요한이 자신의 사역에 유익하다고,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하고 소중한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선교 사역 중에 무책임하게 팀을 이탈했던 마가 요한이, 이제는 바울의 사역을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의 든든하고 믿음직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단락을 살피면서 ‘와신상담’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월나라 왕 구천에게 패하여 죽은 오나라 왕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섶나무(薪:섶나무 신 = 작은 나무 = 장작) 위에 누워(臥:엎드릴 와) 자면서 힘을 키워 구천을 패배시켰습니다. 구천은 다시금 부차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쓴 쓸개(膽:쓸개 담)를 매달아놓고 그것을 맛보면서(嘗:맛볼 상) 힘을 키워 다시 부차에게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뜻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견디고 또 견디며, 훈련하고 또 훈련하는 모습을 와신상담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유약한 실패자 마가 요한이 어떻게 베드로의 영적 아들이요, 그를 무시하고 멀리했던 바울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든든한 사역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가의 노력을 와신상담이라는 표현에 비추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가 복수를 위해 노력했거나 바울을 원수로 여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유약함을 깨우치고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그리하여 결국 대사도 베드로의 영적 아들이 될 수 있었고, 마가를 인정하기 가장 껄끄럽게 여겼을 바울의 인정마저도 받아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가 요한처럼 유약한 사람, 실패자, 도망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국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될 것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가기 위하여 노력하고 또 노력하십시오! 지금 뜨거운 감자와 같은 신세라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더욱 노력하십시오. 우리 앞에 놓여진 신앙의 경주를 힘을 다하여 달려야 합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도 많고, 그러다보니 교회적으로도 많이 다운down 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목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그 자리까지 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한 걸음씩 성큼 성큼 갈 수 없다면 반걸음씩이라도, 그것이 안 되면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라도 가야 합니다.

 

마가 요한에게 기대를 거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이 길을 힘을 모아서 함께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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