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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요설교]건축자의 버린 돌과 모퉁이의 머릿돌(사도행전 강해 27)

작성자自由魂|작성시간05.12.09|조회수308 목록 댓글 0
 

2005. 11. 30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27

건축자의 버린 돌과 모퉁이의 머릿돌

사도행전 4장 8-12절(102장)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9)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지난주에는 베드로가 행한 이적과 설교에 대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과 베드로가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후에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은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심문 받던 베드로가 심문하는 이들에게 대답한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베드로의 두 설교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베드로의 답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 거지를 건강하게 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에서 시작하여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까지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8-10절에서는 ‘구원과 건강의 근원이신 예수’를, 11절에서는 ‘버린 돌로서 머릿돌이 되신 예수’를, 그리고 마지막 12절에서는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되시는 예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구원과 건강의 근원이신 예수(8-10v)

 

첫 번째로 ‘구원과 건강의 근원이신 예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8-10절을 읽겠습니다.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9)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로 태어난 거지가 치유함을 받은 것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9절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0절에서 ‘건강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앉은뱅이 거지가 걷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구원받은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병이 낫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기서 앉은뱅이 거지가 치유함을 받은 것을 건강하게 되었다고만 말하지 않고 구원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구원 얻었다는 말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8-26절에 나오는 중풍병자가 치유함을 받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조금 길지만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20)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2)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25)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예수님은 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수군거리는 이들을 향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일어나 걸어 가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고의적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 똑같은 경우가 베드로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앉은뱅이가 나은 것에 대하여 단순히 건강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구원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베드로의 답변 가운데서 앉은뱅이 거지가 걷게 된 것이 건강하게 된 것이냐 구원을 얻는 것이냐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더 강조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놀라운 일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께서 그 앉은뱅이 거지를 고쳐주셨고 그래서 그 앉은뱅이 거지가 건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병든 육신을 고치시는 분일뿐 아니라 병든 영혼을 고치시는 분,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했던 초기에 예수님이 왜 사람들을 고쳐주셨는가 하는 부분을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였고, 죄인을 구원한다는 목적만 놓고 본다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병든 것, 약한 것까지 고쳐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기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 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더 첨가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가서 영혼의 병을 고치는 일, 즉 죄를 사하시는 일,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도 하실 수 있다는 sample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육체를 고치시는 것은 그처럼 병든 영혼을 고치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예로 사용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앉은뱅이 거지가 걷게 된 것을 굳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11절과 12절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2. 버린 돌로서 머릿돌이 되신 예수(11v)

 

11절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그러면 앉은뱅이 거지를 건강하게 하신 분, 그를 구원하신 분이신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냐? 어떤 분이시기에 그런 일을 하신다는 말이냐?’하는 것을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앉은뱅이 거지가 치유함을 받았다고 말하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분을 조금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10절을 다시 읽어드립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사람, 앉은뱅이 거지가 건강하게 되어 그들 앞에 선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고 할 때에,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라고 꼭 집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11절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0절의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는 11절의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과, 또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와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11절에서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유대인들의 건축과 관련된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무슨 의미이고 집 모퉁이의 머릿돌은 또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건축은 우리의 건축과는 조금 다르게 행해집니다. 실제로 건축을 시작하고자 할 때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머릿돌을 세우는 일입니다. ‘머릿돌’이 무엇인지는 아실 겁니다. 큰 건축물을 세울 때면 그 건축물 앞에 ‘머릿돌’이라고 새겨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돌 뒤에는 건축자와 건축 연도를 새겨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건축에 있어서 ‘머릿돌’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냥 머릿돌이 아니라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건축할 때에는 한 모퉁이에 머릿돌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건축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머릿돌을 기준으로 해서 담을 쌓아 나가면서 건축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릿돌을 작은 것으로 놓느냐 큰 것으로 놓느냐에 따라 그 건축물이 작은 것이 될지 큰 것이 될지가 결정됩니다. 머릿돌을 보통 돌로 놓느냐 값비싼 것으로 놓느냐에 따라 그 건축물이 보통 건축물이 될 것인지 고급 건축물이 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그러면 ‘버린 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건축을 하는 전문가들이 볼 때에 그 돌은 건축물의 머릿돌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그 돌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대단한 건축가가 그 돌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돌을 머릿돌로 삼아 누구도 지을 수 없는 대단한 건축물을 짓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보통의 건축가들이라면 그 돌을 머릿돌로 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 돌이 쓸모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권력자들은 예수가 쓸모 없는 존재, 해로운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을 위한 머릿돌로 여기셨고, 그를 머릿돌로 삼아 커다란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서 그분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 아니 전문가들의 눈에 보기에도 예수님은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가치 없는 존재, 쓸모 없는 존재, 의미 없는 존재로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보였고’ 그래서 그렇게 대우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그때와 동일한 대우를 받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머릿돌로 세우셨습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집에 들어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도달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그렇고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렇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게 하셨고, 교회를 통해서만 세상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전에 했던 ‘세상에게 교회는 무엇인가?’하는 설교를 기억하십시오!).


3.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되시는 예수(12v)

 

그래서 이런 베드로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12절로 넘어가서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되시는 예수’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12절을 읽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세상의 건축가들은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버리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버렸고, 그렇게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요 잘못된 행동임을 하나님께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버려진 예수님을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고,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12절에서 다른 이를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방법이 전혀 없다고, 하나님께서 천하에 있는 인간들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단언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오후 모임에서 ‘구원 얻는 믿음’이 어떤 형태로 다양하게 나타나는가를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음A’, ‘믿음B’, 그리고 ‘믿음C’ 이런 식으로 설명했었는데...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 그 모든 유형의 믿음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고 다른 가능성들을 찾아본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위한 방법이 없습니다! 이전에 가르쳤던 성경공부 교재 가운데 하나는 구원과 관련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구원은 누가 주십니까?’ 그것에 대한 답은 ‘하나님’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고 인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는 많이들 놓치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 이외에 누구도 구원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과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받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부처를 믿어도 알라를 믿어도 결국 산을 올라가는 길은 다를지라도 모두 정상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구원을 주는 당사자냐고, 당신이 구원을 위한 기준을 정하고 구원을 위한 방법을 정할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구원의 기준과 방법을 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의 유일한 방법으로 구원의 유일한 근원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머릿돌로 삼으셨고 부활시키셨습니다. 구원을 위한 유일한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를,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고,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이 믿음, 이 복음, 이 그리스도가 널리 전파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헌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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