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2. 18 주일 낮 예배
사랑은... 허비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9절(87장)
(3)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4)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5)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6)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8)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주님 오심을 기념하는 날이 한 주 남았습니다. 뭔가 다른 내용을 전할까 하다가, 지난주에 이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한 번 더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사실 성탄과 전혀 관계없는 사건이지만, 성탄의 의미를 매우 정확하게 전달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1. 옥합을 깨뜨리고(3v)
3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동네에 머무실 때, 특히 문둥병자였던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는 문둥병이 걸리면 일반 사람들과는 격리시키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다고 하는 것, 제자들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거기 참석했다고 하는 것은 이 시몬이라는 사람이 이전에 문둥병을 앓았다가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예수님에 의해서 병이 나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6장과 요한복음 12장을 비교해보면 이 여자는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 향유(향기름)가 매우 값진 것이었다고 말하고 또 그것이 순전한 나드였다고 말합니다. ‘나드’향은 인도에서 자라는 나드라는 식물의 뿌리 부분에서 얻어지는 휘발성이 강한 향입니다. 그것은 아주 귀하고 값이 비싸서 주로 왕과 같은 고귀한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헤로도투스(Herodotus)라는 역사가는 페르시아 왕인 캄비세스가 에디오피아 왕에게 보낸 다섯 가지 선물 가운데 하나가 나드였다고 기록합니다. 본문 5절과 요한복음은 이 나드 한 옥합의 가격이 적어도 300데나리온이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1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니까, 300데나리온이면 1년 동안 모아야 되는 액수입니다. 대충 계산해서 하루 품삯이 5만원이라고 쳐도 1,500만원이 넘는 액수입니다.
이 향유는 ‘옥합’에 들어있었는데, 옥합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ajlavbastron, 아라바스트론) 원래 ‘연고를 보관하는 석고 상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라바스트로스라는 돌로 만들어진 용기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 돌은 ‘설화 석고’나 ‘설화석’으로 번역되거나 ‘줄 마노(瑪瑙)’ 즉 줄무늬가 들어가 있는 마노라고도 번역됩니다. 이것은 암염(巖鹽)이나 석회암 따위에 붙어 층을 이루는 반(半) 투명의 대리석 비슷한 광물로서 그 주산지인 애굽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질이 좋은 것은 장식용 조각재로도 쓰이기도 했지만, 고대 사람들은 이 아라바스트로스 돌로 만든 용기를 연고나 유향 같은 것을 보관하기에는 최고의 재료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옥합’을 둥글고 목이 긴 ‘병’의 모습으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꼭 병 모양만 했던 것은 아니고 상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은 아마도 밀봉해 놓은 것을 풀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옥합을 깨뜨려서 거기 담긴 값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원래 귀한 손님의 머리나 발에 향유를 바르거나 붓는 것은 중동 지방에 일반적인 관습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상대가 왕과 같은 존귀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붓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행동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이렇게 파격적인 행동은 곧바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2. 허비하였는가(4-5v)
4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분’을 내었다고 말합니다. 마태는 이렇게 분을 낸 사람들이 제자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요한은 더욱 구체적으로 가룟 유다가 이러한 불만의 주동자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이 화를 냈을까요? 그것은 그 행동이 분명 그 향유를 허비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5절입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 향유를 그렇게 부어 버리지(!) 말고 팔면 300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정도의 돈이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ajpwvleia, 아폴레이아)는 ‘완전한 파괴, 죽음, 파산, 멸망’이라는 뜻으로 값진 것을 무용(無用)하게 모두 소모해 버리는 완전한 낭비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가로채려고 그랬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 한 사람만 이 사건에 대해 분을 내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제자들과 그 자리에 참석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분을 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분을 내었던 이유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했겠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렇게 비싼 것을 예수님 한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머리에 부어드리는 정도의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지나치다는, 아깝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사건을 기록한 성경은, 특별히 이 일의 당사자가 되신 예수님은 마리아가 행한 행동을 책망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대놓고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리신 결론을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의 생각과 느낌을 말씀해 보십시오. 마리아가 한 일이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허비, 완전한 낭비로 보이십니까?
15-6년 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쓰신 책 가운데 어느 대형 교회에서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면서 값비싼 외국 대리석을 수입해서 쓰고, 특별히 몇 억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한다고 해서, 그거 설치하기만 하면 교회 청년들하고 도끼 들고 가서 다 뽀개 놓겠다고 그랬더니 설치를 안했더라...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성전 건축’에 열을 올립니다. 이것도 15-6년 전인 것 같은데, 기독신문인가에 광고 나왔던 것을 보고 기가 막혀서 오려놓았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건축 일을 하는 장로가 교계 신문에 ‘우리의 평생 사명은 성전 건축’이라는 식으로 광고를 낸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전 건축이 평생 사명일 수 있습니까? 왜 예배당을 짓는데 외제 대리석을 수입해야 하고 외제 카페트를 깔아야 합니까? 그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예로 드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사건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것, 가장 비싼 것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막 건축 때에도, 성전 건축 때에도 그러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목수’의 제자이지만 ‘집 짓기’를 평생 사명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최고급 재료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려하셨단 말입니까? 물론 저는 오늘 ‘사랑은 허비’라는 것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허비’이지만 ‘허비가 사랑’인 것은 아닙니다. 사랑과 허비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회들을 향해서 ‘건축물’에 ‘기도원’에 ‘교회 묘지’에 허비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바른 교회’이고 ‘바른 그리스도인’이지 ‘건축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야 하고 성도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세워야 하지만, 경치 좋은 곳에 ‘기도원’을 세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이 예비하신 집’에 가기를 소망하게 해야지 ‘교회 묘지에 묻히는 것’을 소망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전에도 잠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는 교회 건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교회가 ‘예배당’을 짓는 일도 해야 하겠지만, 저는 교회가 꼭 자체 건물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학교 강당을 빌린다든지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을 멋들어지게 지어놓아야 교인들이 몰린다고 말합니다. 저는 멋들어진 예배당을 보고 오는 사람들이 우리 교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성숙이 어떻게 건물에 달려있단 말입니까! 저는 ‘예수’의 제자이기를 원하지 ‘목수’의 제자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물론 허비입니다. 하지만 예배당을 호화찬란하게 꾸미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사치’이고 ‘허영’입니다. 예배당을 짓고 꾸민다고 해도 중간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소위 ‘믿음으로 성전 건축을 한다’는 사기성 짙은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6-9v)
우리는 진정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랑의 허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목회자는 그것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바르게 사랑하시고 바르게 허비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바른 사랑의 허비는 어떤 것입니까? 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일이 ‘허비’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굳이 ‘허비’라고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허비’요 ‘사랑의 허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녀를 괴롭게 하지 말고 가만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1,500만원이나 되는 향유를 한 번에 쏟아드리는 것이 어째서 예수님께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도에 지나치는 귀빈 대우를 받으시고 우쭐해져서 괜찮다고 무마시키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니요! 7-8절입니다. “(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8)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입니다. 계속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은 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이 있고 소원이 있다면 언제라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십자가에 죽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 얼마 전에 되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전에도 몇 번씩이나 자신이 체포되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 중 누구도 그 말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예루살렘을 향하시고, 십자가를 향해 가시지만 제자들 중 누구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누가 더 크냐는 논쟁만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베다니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이 시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랑의 허비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때만이, 지금만이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자기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섬겨드리고자 했습니다. 고민하고 알아보는 가운데 내린 결정이 곧 죽으실 예수님께 자기가 구할 수 있는 최고의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그 향유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가 팔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팔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끼고 아끼던 패물도, 시집갈 때 가져가려고 모아놓은 것들까지도 다 팔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야만 죽음을 향해 가시는 주님을 마지막 배웅해 드리는 최고의, 마리아의 마음에 그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겠지만... 최고의 선물을 드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을 위해 ‘허비’하기로 굳게 작정했습니다. 작정했을 뿐 아니라 행동했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다 팔아서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구했습니다. 남자들만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 여자가 불쑥 끼어들었다는 비난과 수치를 무릅쓰고 그 자리에 나갔습니다. 그 머리에, 그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장 3절에 의하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정결한 처녀가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뭐 하는 짓이냐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것도 예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떨리는 가슴을 안고 예수님의 뒤로 나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그 머리에 향유를 붓고 흘러내린 향유가 발을 적시자 그 발을 자기 머리털로 닦아드리는 마리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슬픔에 가득 차 있지 않았을까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분을 내는 사람들과 맞붙잡고 싸울 생각이 들었을까요?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이 곧 죽으실 것이라는 슬픈 사실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남은 일생을 후회하면서 살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에 일어난 이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할 것이라구요? 물론 비싼 것이기는 하지만, 비싼 것을 머리에 부어드린 그 행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라고 복음과 함께 그녀의 행동이 전해지고 기념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비싼 향 기름을 부어드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랑의 허비가... 예수님께는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마음과 희생의 행동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을 이토록 복된 것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저는 성탄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탄 사건의 가장 핵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허비’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요 허비의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까 87장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는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천한 세상에 오신 주 참 내 구주님.” 그렇습니다. 왜 주님이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천성을 떠나서 이 천한 세상에 오셨습니까? 왜 쓰라린 고통을 다 체엄하셨습니까?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의 허비가 아니라면 이 모든 행동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의 허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허비와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았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15)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주님께 사랑의 허비를 하십시오. 우리에게 허락하신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의 허비를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까지 허비하십시오!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우리 마음이 ‘사랑의 허비’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