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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요설교]하나님의 말씀과 공궤(사도행전 강해 36)

작성자自由魂|작성시간06.02.01|조회수273 목록 댓글 0
 

2006. 2. 1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36

하나님의 말씀과 공궤

사도행전 6장 2절-4절(267장)

(2)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4)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지난 수요일에는 ‘사역의 분담’이라는 제목으로 사도행전 6장 1-7절까지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초대 교회에 발생한 문제를 사역의 분담이라는 방법, 즉 공궤를 전담할 집사들을 세우는 것을 통해 해결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렇게 간단하게 살피고 넘어가기에는 중요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과 다음 수요일, 두 번에 걸쳐 조금 더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과 공궤’라는 제목으로 교회 안에서의 사역이 어떻게 분담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 사역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1. 마땅한 것

 

저는 지난 수요일에 공궤로 인하여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도들은 사도들의 본연의 임무인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고, 공궤하는 일, 즉 구제하는 일들은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따로 세우자고”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공궤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자 사도들은 그 문제를 통하여 자신과 교회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 결과 2절에서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이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마땅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ajrestov". 아레스토스)는 ‘뜻에 맞는, 합하는, 기분좋은, 즐거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직면한 사도들은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합하는 것인지, 어느 것이 하나님을 기분 좋게/즐겁게 하는 것인지를 고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사도들이 무엇을 선택해서 행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느 것이냐? 이것이 사도들이 가진 최고의 관심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행해져야 하는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그리고 어떤 일들을 행하고자 할 때에 그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기쁨’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선언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역자들이 사람들에게 좋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좋게 하고자,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낮을 구하고, 사람에게 좋게 하고,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에서 관심을 돌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좋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쁨’을 최고로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마땅한 것과 마땅치 않은 것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것이 마땅하고 저것은 마땅치 않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은 중요하고 꼭 해야 하는 일이고 마땅치 않다고 말한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식의 흑백논리로 바라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애쓰던 마르다와 예수님의 말씀을 드고자 했던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쪽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42). 하지만 그것은 마리아만이 옳고 마르다는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초대 교회 이래로 카톨릭 쪽에서는 상반되어 보이는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결국 마리아의 영성은 수도 생활로 연결되면서, 수도사들은 마르다의 영성에 해당되는 일상적인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보다 하나님과 더 가깝다는 식으로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영성 둘 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다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하고 ‘공궤’는 마땅치 않다고 말한 것을 흑백으로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만 전념해야 하고, 공궤는 필요 없다고 한다면, 사도들이 굳이 집사들을 세워 공궤를 맡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으냐, 무엇이 필요하고 불필요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일의 순서와 질서에 있어서, 그리고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분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3. 공궤를 일삼는다는 것

 

그러면 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공궤’와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쳐 놓고.. 일삼는다’는 표현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으로 높여주고 공궤는 깎아 내린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제쳐 놓고’라고 번역된 헬라어(kataleivpw, 카타레이포)는 ‘두고 가다, 출발하다, 떠나다, 남겨지다, 저버리다’라는 뜻이고, 그것을 ‘제쳐 놓고’라고 번역한 것은 잘 된 번역으로 보입니다. 한 쪽으로 밀어 놓고, 남겨 놓고서 다른 것을 먼저 한다는 의미가 여기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삼는다’라는 번역은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디아코네오(diakonevw)인데 ‘종이 되다, 수행원이 되다, 길들여지다, 봉사하다,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디아코노스’(diavkono")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원래는 ‘시종, (식탁이나 다른 천한 일에) 시중드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기독교에서는 특별히 ‘선생, 목사’ 그리고 전문용어로 ‘집사’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공궤’라고 번역된 단어(travpeza, 트라페자)는 원래 ‘(네개의 다리를 가진) 식탁, 식사, (돈을 세기 위한) 계산인, 은행, 고기, 상’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이 점차 두 개의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는데, 하나는 ‘식탁, 진설병 상’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환전상 또는 환전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궤를 일삼는다’는 말은 첫째로는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시종’을 의미하고, 둘째로는 ‘테이블(환전대)에서 돈을 세거나 바꾸어 주는 계산원’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기독교로 넘어오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하거나, 교회의 재정 출납을 담당하는 ‘집사’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에 공궤하는 일이라는 말은 단순히 ‘구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교회 재정의 출납과 관련된 일을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음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게 되었습니까?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초대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숫자 또한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도들 가운데 부유한 사람들은 자기 소유의 땅이나 집을 팔아서 그 판 값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바친다’는 말을 누가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도들이 교회에 바쳐지는 헌금을 관리했다는 말입니다. 또 사도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공궤를 일삼았다는 것은 그들이 구제를 위한 재정 지출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도들은 초대 교회의 재정 출납까지도 전담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이들이 헌금을 했고, 또 그 헌금을 가지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날마다’ 구제하는 일이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의 재정 출납 업무만으로도 사도들은 녹초가 되어버렸던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5. 이 일을 맡기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제쳐 놓고서 재정 출납에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사도들의 입장이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하시겠습니까? 설교의 시작 부분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도들은 이 문제를 통하여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자기들이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교회의 재정 출납에 대해서는 손을 떼기로,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공궤는 불필요한 일이라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자기들의 일에 집중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정 출납과 관련해서는 믿을만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 사역을 위임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초대 교회 안에서 사도들의 위치는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어느 단체이든지 ‘재정’을 담당한 사람이 가장 입김이 세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재정’과 관련된 사역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정 출납 사역’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권력’까지도 포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사역을 축소하더라도 재정과 관련된 사역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떠맡아야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옳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관심은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것이 ‘권력’이나 권력을 줄 수 있는 ‘재정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재정 출납 사역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골치 아픈 문제를 남에게 떠맡기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재정 출납의 책임을 맡을 사람의 자격을 꼼꼼하게 제시합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개괄적으로 살펴보았고, 다음 주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재정 출납 사역을 전적으로 맡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과거, 출애굽 사건 이후 모세가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도맡아 처리하다가 장인인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여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등을 세웠던 사건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들은 재정에 관한 부분은 앞으로 세워질 집사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사도로서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6. 말씀과 기도에 전무함

 

그렇다면 사도에게 주어진 본연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지만, 4절로 넘어오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라고 번역된 단어는 ‘프로슈케(proseuchv)’인데 ‘기도, 예배, 기도처, 회당, 예배당’이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하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전혀 잘 된 번역이 아닌데, ‘디아코니아(diakoniva)’라는 단어는 앞에서 ‘공궤를 일삼는다’고 할 때의 ‘일삼는’으로 번역된 ‘디아코네오’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섬김, 집행, 직무, 구제, 공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가 보여주는 것은 ‘집사’가 물질을 가지고 성도들을 섬긴다면,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예배를 통해서 성도들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전무한다’고 번역된 단어(proskarterevw, 프로스카르테레오)는 ‘1)고집하다, 집착하다, 몰두하다, 계속하다 2)변함없이 상냥하다, 끊임없이 돌보다 3)한 장소에서 내내 계속하다 4)희미해지지 않고 계속하다 5)용기를 보여주다 6)변함없이 준비하다, 계속해서 기다리다’라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사도는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고 늘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고 변함 없이 게속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현대 사회가 다양화 되면서 목사에게 요구되는 것도 다양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심방에 상담에 행정에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이 요구됩니다. 어떤 분이 목사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세어보니 30가지가 넘는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이 본문의 사도들이 말한 것처럼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제일 처음 맞게되는 상황은 교회에서 나가라는 요구를 받게될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가 해야 하는, 목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말씀과 기도임을 기억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이런 저런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이 말씀과 기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교회와 성도는 목사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역을 분담해야 합니다. 무슨 사역을 분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 눈에는 보이는데, 다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문제들을 맡아주십시오. 이것만큼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그것을 무시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 일을 그 생각을 하시는 여러분이 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역할에 있어서 누가 더 중요하고, 누가 더 필요한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집사는 재정과 관련된 일을 통해 섬기는 것이고, 목사는 말씀과 관련된 일을 통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 어떤 일을 통해 섬기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교회를, 성도를, 그리고 세상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무엇 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실까? 이것을 가지고 고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을 하셔야 합니다. 말씀이든 공궤이든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그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세워지고, 그렇게 든든히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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