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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일낮설교]예수님의 상함과 우리의 나음(사 53:5-11)

작성자自由魂|작성시간06.02.07|조회수754 목록 댓글 0
 

2006. 2. 5  주일 낮 예배

예수님의 상함과 우리의 나음

이사야 53장 5-11절(528장)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8)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9)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10)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11)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시간은 참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2006년도인가 했더니 벌써 1월이 훌쩍 지나가고 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들어서 두 번째로 성찬식을 행하면서, 오늘은 조금은 다른 쪽에서 성찬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보 칼럼에 그런 내용을 적었습니다만, 요즘에는 기도하고 있으면 무언가 좋은 생각들이 자꾸 떠올라서 그것 덕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무언가 성찬과 관련하여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중에 떠오른 생각은 ‘상처’라는 단어와 ‘치유’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오늘 본문 말씀, 특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5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성찬식 때에 받는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찔리고 상하시며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의 평화와 나음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찬을 받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상처가 나음을 입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이고, 이런 시각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의 상처와 예수님의 고난, 그리고 성찬과 치유가 오늘 설교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1.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님(6-9v)

 

순서를 조금 바꾸어서 먼저 오늘 본문의 중간 부분인 6-9절까지의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8)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9)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니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워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그런 곤욕과 괴로움을 당할 이유도 없었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도록 능력이 없으셨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것을 원하셨기에 곤욕과 괴로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곤욕과 괴로움 속에서도 입을 열어 저항하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죽임을 당하기 위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입조차 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해서 그분이 곤욕과 괴로움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저항하지 않은 채, 입을 열지 않은 채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고, 끌려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 이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9절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강포를 행치 않으셨고 그 입에 궤사도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겐가 폭력을 사용하시고, 또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시켰기에 그런 형벌을 받아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8절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이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이유가 있는 고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요, 마땅히 그 고난과 그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 죄악, 범죄 때문에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6절에서는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기 때문에, 또는 그렇게 제 마음대로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허물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죽으셔야 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의 치유(5v)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 받으셨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간단하게나마 그것을 다시 상기시켜 드리는 것은 그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5절 말씀 속에서 “왜?”라는 부분에서 예수님이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어떻게?”라는 부분에서는 그런 고난과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또 가져와야 하는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왜?(5a)

먼저 5절 상반절을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잘 알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6-9절까지의 내용을 아주 분명하게 요약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찔리셔야 했습니까? 왜 가시관에 머리가 찔리셔야 했고, 왜 커다란 못에 손과 발을 찔리셔야 했고, 왜 창으로 심장을 찔리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상하셔야 했습니까? 왜 병정들의 주먹질과 침 뱉음을 당하셔야 했고, 왜 채찍질에 온 몸이 상하셔야 했고, 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지도 못한 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번역은 그리 만족할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찔림, 허물, 상함, 죄악이라는 네 개의 단어가 히브리어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① ‘찔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ll'j;, 하랄)는 원래 ‘구멍을 뚫다’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상처를 입히다, 모독하다, (약속을) 어기다’와 같은 뜻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첫 번째로, ‘더럽히다, 오염시키다, 신성모독하다, 시작하다’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상처를 입히다, 구멍을 뚫다, 꿰찌르다, 관통하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상처를 입었고, 구멍이 났고, 꿰찌름과 관통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더럽혀졌고, 오염되었고, 모독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시관에, 못에, 창에 찔린 정도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모두 상처를 받았고 모욕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② ‘허물’이라고 번역된 단어([v'P,, 페솨)는 ‘(국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반역, 범죄, 위반’을 의미합니다. 사실 ‘허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죄와 관련된 단어라는 생각은 들지만, 자칫하면 ‘뱀이 벗어놓은 껍질’이라는 인상까지 떠오릅니다. 하지만 원문이 지시하는 것은 분명한데, 예수님의 육체가 찔려 관통을 당하시고 그분의 신성이 모독 당하신 것은 우리가 반역과 범죄와 위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인 우리를 위해서 모욕과 더럽힘 가운데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 10절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을 통해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셨다고 기록한 것처럼, 반역자인 우리를 위해 찔림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③ ‘상함’이라고 번역된 단어(ak;D;, 다카)는 조금 더 심합니다. 그것은 ‘부수러뜨리다, 상처를 입히다, 다져서 조각을 내다, 상처를 입히다, 으스러뜨리다, 으깨다, 박살나다, 깨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상처 받았어’라고 할 때의 상처 정도가 아니라 도자기가 깨져서 박살이 나듯이, 고개를 다져서 조각을 내듯이, 으스러뜨리고 부서뜨리른 것을 의미합니다. 몇 년 전에 예수님의 ‘상함’에만 초점을 맞춘 영화가 나왔지요.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가 그것입니다. 아마 거기 나오는 예수님의 ‘상함’은 이 히브리어 ‘다카’가 의미하는 것에 그나마 가까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④ ‘죄악’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wO[;, 아온)는 ‘사악함, 악, 과오, 범법, 타락, 불법’ 등을 뜻합니다. 우리의 사악함, 우리의 타락, 우리의 불법을 행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으스러뜨려지셨고, 박살이 나셨고, 고기처럼 잘게 다져지셨다는 것입니다.

반역한 것도 우리이고, 타락하여 사악하게 된 것도 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꿰뚫리어 관통되고, 모욕을 당하며, 부서뜨려지고, 다져서 조각이 나야 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해야 하는 그 찔림과 상함을 예수님이 당하시도록 예수님께 떠 넘기셨다는 것입니다. 불평할만 하지 않습니까? 입을 열어 불평의 말 한 마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런 일을 당하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든 곤욕과 괴로움을, 수치와 죽음을 고스란히 다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거나, 알기는 해도 사실 이하로 실제 상황을 찍어놓은 사진을 보듯이 보질 않고 만평을 보듯이 가볍게 쉽게 보고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래서?(5b)

이제 5절 하반절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찔리고 상하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서도 네 개의 단어를 원문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① 첫째가 ‘징계’(rs;Wm, 무사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징계, 책망, 경고, 교훈, 억제, 멍에, 견제, 교정, 훈련, 단련’ 등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와 책망, 교정, 단련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②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야 하는 징계와 책망, 교정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평화’(!/lv;, 솰롬)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많이 듣고 사용하는 단어입니다만 굉장이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힘듭니다. 대충 정리해 보면, ‘안전한, 완전한, 잘 있는, 행복한, 정다운, 안녕, 건강, 번창, 평안, 평화로운, 고요한, 평온한, 번영하다, 쉬다.’ 예수님이 우리가 징계 받을 것을 대신 받아 찔림과 상함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그 대신 평화와 안전, 행복과 건강, 번영과 쉼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③ ‘채찍에 맞음’이라고 번역된 단어(hr;WBj', 하부라)는 원래 ‘(줄로) 매었다’는 의미인데, 거기에서 ‘채찍 자국, 멍든, 상처, 타박상, 채찍, 채찍질, 상처, 구타, 상함’이라는 뜻이 파생되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구타를 당하셨고 채찍질을 당하여 멍들고 상처 입었고 그 몸에 채찍 자국이 남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④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 대신 맞으심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나음’(ap;r;, 라파)을 얻었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라파’라고 할 때의 ‘라파’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본래의 의미는 ‘(꿰매어서) 고친다’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치료하다, 낫다/낫게 하다, 의사, 수선하다, 온전하게 하다, 건강하게 하다’라는 뜻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했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찔리셨습니다. 우리가 타락하여 사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으스러뜨려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와 책망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평안함을 얻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질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치료받아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왜 우리가 반역하고 우리가 타락해서 사악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찔리시고 잘게 다져지셔야 합니까?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책망 당하시고 채찍질을 당하셨는데, 그 결과로 우리가 평안함과 건강을 얻게 되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3.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시는 예수님(10-11v)

 

10-11절입니다. “(10)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11)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 본문에서 저는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① 하나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상함을 받게 하기를 원하시고, 질고를 당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을 거치면서 많은 성도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은 엄격한 아버지와 같이 진노하시고 형벌하고자 하시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재하시고 희생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우리를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예수님을 상하게 하고 질고를 당하게 하겠다고 하는 계획... 이 모든 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하나님에게 악역을 맡겨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②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도 자원하여 그 상함과 질고를 당하고자 하셨다는 것과, 그렇게 우리를 위하여 찔림과 상함, 징계와 채찍질을 당하신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반역을 상쇄시키기 위한 것이요, 상함은 우리의 타락과 사악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징계 받으심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함이었고, 채찍질 당하심은 우리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는 “그 씨를 보게되며”라고, 11절에서는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5절 상반절이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신 ‘이유’를 보여준다면, 5절 하반절은 예수님이 징계와 채찍질을 당하신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이 찔림과 상함, 징계와 채찍질을 당하신 그 결과를 보기 원하시고, 그것을 통해 만족함을 얻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셨으며, 왜 징계와 채찍질을 당하셨습니까? 우리를 반역자에서 충성하는 자로, 사악한 자에서 의인으로, 불안하고 염려하는 자에서 평안과 안전을 누리는 자로, 상처받고 약한 자에서 건강하고 온전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역자처럼 사악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징계와 채찍질 당하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화 없이 염려하고 불안해 하는 삶, 여전히 상처 받아 쩔쩔매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받는 성찬은 우리를 위하여 찔리고 관통 당하고 으스러뜨려진, 징계와 책망을 당하시고 채찍질 당하신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반역자에서 충성하는 자로, 사악한 자에서 의인으로, 불안하고 염려하는 자에서 평안과 안전을 누리는 자로, 상처받고 약한 자에서 건강하고 온전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만족하실만한 삶을 사십시오! 건강하십시오! 평안하십시오! 충성하십시오! 의롭게 사십시오! 예수님께서 자신이 수고하신 결과를 보고 만족하시도록 그렇게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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