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3. 5 주일 낮 예배
“샬롬!”을 말합시다
창세기 37장 1-5절, 고린도전서 11장 17-22절(278장)
(1)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2)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4)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5)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18)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19)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오늘은 3월 첫 주일입니다. 2월은 ‘믿음의 역사’와 연결시킨 달이어서 ‘도의 초보’와 관련된 말씀을 드렸고, 3월은 ‘사랑의 수고’와 연결시킨 달이어서 ‘사랑’을 주제로 한 말씀을 드리려고 생각 중입니다. 첫 주일이라서 성찬식이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성찬’에 대한 설교를 할까, 아니면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지난 달에 첫 주를 ‘성찬’ 설교를 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에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랑’을 주제로 한 내용을 첫주부터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전에 설교하려고 메모해 놓았던 창세기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을 선택하고나서 혹시 이 주제가 성찬과 관련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찾아보니 두 번째 본문으로 삼은 고린도전서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창세기 본문과 고린도전서 본문 두 개를 본문으로 삼아 ‘샬롬을 말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1. ‘샬롬!’을 말합시다(창 37:1-5)
1) 요셉과 그의 형제들(1-5v)
창세기 37장은 야곱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1절부터 읽습니다. “(1)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2)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야곱이 가나안 땅에 살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때 요셉은 17살 먹은 소년이었습니다. 본문이 요셉을 ‘소년’이라고 말하는데 이 히브리어 ‘나아르’(r['n")는 유년기에서 청년기까지를 포함하는 ‘소년, 젊은이, 종, 하인, 청년, 신하’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년들은 13살에 ‘바르 미츠바’라고 하는 성인식1)을 행하기 때문에 17세의 요셉은 마냥 어리기만 한 소년이 아니라, 그의 형들과 함께 양 치는 일을 할 정도의 ‘성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행동을 보면 전혀 성인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양을 치는 일을 하면서 형들의 실수를 야곱에게 고해 바칩니다. 다른 번역본들은 “고하더라”는 말을 “일러바쳤다”고 번역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은 요셉의 ‘정직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들을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거나 거기에 동의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뒤이어 나오는 내용들을 종합할 때 요셉은 형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동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4절입니다. “(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4)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야곱은 다른 형제들보다 요셉을 가장 많이, 깊이 사랑했는데, 그것은 야곱이 유일하게 사랑한 라헬이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요, 야곱의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야곱에게 일러바치므로 자기들 더욱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을 위해서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는 것을 볼 때 분명합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채색옷”이라고 번역하는데, [공동번역]은 “장신구를 단 옷”으로, [표준새번역]은 “화려한 옷”으로,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은 “화려하게 장식한 긴 겉옷”으로 번역합니. ‘채색옷’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케토네트 파심’(!ySiP' tn<toK])이라는 말인데, ‘케토네트’는 ‘겉옷, 외투, 의복, 옷, 속옷’이라는 뜻이고, ‘파심’은 ‘파스’(sP')의 복수형으로서 본래의 의미는 ‘(손/발)바닥’인데, 여기에서 ‘길고 소매달린/넓은 (속옷), (여러) 색깔들’이라는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현대인의 성경]의 번역이 가장 잘 되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만 이 ‘화려하게 장식한 긴 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냥 단순하게 ‘요셉을 가장 이뻐하니까 가장 좋은 옷을 만들어 입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조금 더 다른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화려하게 장식한 긴 겉옷’은 양을 치는 사람들이 입는 ‘작업복’과는 거리가 먼 옷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요셉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러 갔지만 일하러 간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 ‘화려하게 장식한 긴 겉옷’을 입고서, ‘일꾼’으로서가 아니라 형들의 ‘감독자’ 행세를 하면서 일터에 나갔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형들을 ‘감독’하듯 거기 머물렀다가, 돌아오면 형들의 잘잘못을 아버지에게 보고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 것은 5절에서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고 한 내용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에, 자신의 지나친 행동 때문에 형들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요셉이 조금이라도 철이 들었다면 형들이 자기를 향해 절을 했다는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이나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를 편애하는 아버지인 야곱이 볼 때에도 심하다고 생각해서 형들 앞에서 요셉을 야단치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져야 했던 것입니다.
2) 요셉에게 언사가 불평한 형제들(4b)
제가 이 본문을 선택한 것은 사실 요셉보다도 그의 형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4절 하반절은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사실 이제껏 설명한 것처럼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얻도록 행동합니다. 그래서 결국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로 팔리기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또 요셉과 그의 형들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서 부족함 없는 자들로 만들기 위해 오랜 기간 단련하시고 훈련시키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그의 형들이 그에게 ‘언사가 불평’했다고 한 말씀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요셉의 형들이 유대인들이 평상시에 쓰는 인사말인 “샬롬”조차 요셉에게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요셉을 보면 ‘샬롬’이라고, ‘평안하기를!’ 빌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샬롬!”을 말하지 않는 모습! 형제인데도 불구하고, 가족인데도 불구하고, 부모 자식이고, 남편과 아내인데도 서로에게 평안을 빌어주지 않는 강퍅한 모습을 여기서 발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언사가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서로에게 “샬롬!”을 말하기를 싫어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2. 서로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성찬?(고전 11:17-22)
1) 유익이 못되고 해로운 모임(17-19v)
두 번째 본문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대표적인 문제는 ‘당파’를 이루어 ‘분쟁’하는 것었는데,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지적합니다. 17절부터 읽습니다.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18)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19)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칭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칭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그들이 모임을 갖는데 그 모임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를 끼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모임이,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 교회에서 모이는 모임이 어떻게 유익이 아니라 해를 끼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첫째로, 그들이 교회에 모일 때에 그들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옳은지를 인정받기 위해서 ‘편당’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그것을 인정하거나 칭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되는 모습이 아닙니까? 편을 나누어서 다투는 것...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편을 나누어 다투는 그것이 꼭 나쁜 의도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옳다 인정함을 받’기 위해서 그것을 하는 겁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문제점, 옳지 못함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드러내어서 사람들이 그것에 공감하고 그것을 말하는 자기가 옳다고 이야기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것이 목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서 편당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당파끼리 분쟁하는 것은 결코 칭찬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가 편당을 이루고, 가정 안에서 가족과 가족이 편당을 이루고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고 주장하며 싸우는 것은 칭찬받을만한 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음(20-22v)
옳고 그른 것을 가르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창세기 본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 대해 ‘샬롬’이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형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요셉과 야곱의 잘못이 컸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셉의 형들이 ‘샬롬’이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2장 2-5절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옳고 그른 것을 밝힌 것은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라 사랑을 버린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칭찬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그들의 촛대를, 교회를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진리’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옳음’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지만 그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어쩌면 예수님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20절부터 봅니다.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전체 본문은 “칭찬하지 않노라”는 말로 시작해서 “칭찬하지 않노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것은 앞의 본문과 이 본문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얘깁니다. 어떤 밀접한 관곕니까? 그렇게 옳은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편당을 만들어 분쟁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편당을 나누어 분쟁하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편당과 분쟁이 성찬과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편당을 나누어 분쟁하는 성도들 사이에는 사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성찬에 참여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그 편당과 분쟁이 그대로 드러나, 같은 편끼리는 먼저 만찬을 갖다 먹고 누구는 배고픈 상태이고, 누구는 취할 정도로 마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실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자기 편에, 자기 당에 속하지 않았다고 업신여기고 부끄럽게 하여 배고프게 만드는 사람들! 의도적으로 배 터지게 먹고, 취하도록 마시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편을 나누어 싸우는 사람이 주의 살을 배터지게 먹고, 주의 피를 취하도록 마시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에도 형제와 불화한 가운데, 언사가 불평한 가운데, 편당을 나누어 싸우는 상태라면 그것을 받지 않으시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겠다고 하는 사람이 형제와 불화하고, ‘샬롬’조차 말하지 않으며, 편을 나누어 싸운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칭찬하시겠으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느냐는 것입니다!
3. 사랑의 수고를 한다는 것의 의미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평안, 샬롬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입니다. 가장 작은 것! 상대방을 바라보고 “샬롬!”이라고 말하는 것, “평안하세요!”하고 그의 평안을 빌어주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주는 것에 이르는...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은 수고하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4-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에게 말로만 “평안하세요, 따뜻하게 지내세요, 좀 배부르게 드시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가 평안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땔감도 주고 옷도 주면서, 배부르도록 먹을 것을 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샬롬!”을 말하는 사람은 형제의 “샬롬”을 위해서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수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요한이 요한일서 3장 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합니다. 행함으로도 해야 합니다. 진실함으로도 해야 합니다. 말로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오해해서 ‘말과 혀로는 하지 말자’고 결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말과 혀로도 해야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압니까? 조금 쑥스럽고 낮간지러울지라도 가장 먼저 서로에게 “샬롬!”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형제가, 자매가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말로 평안을 빌어주는 것에서 더 나가 그가 평안하도록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평안과 샬롬을 위해 살과 피를 다 주신 주님의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으면서, 서로에게 “샬롬”을 말하고 성찬을 받으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