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3. 8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41
성령을 거스리는 인간
사도행전 7장 44-53절(334장)
(44)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45)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46)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47)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49)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50)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의 설교를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 순서에 따라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세세하게 살펴보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사건들을 세사하게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간단하게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로 세 번째 시간인데, 여기에서 스데반의 설교의 마지막 결론부분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은 모세의 시대를 ‘성막’을 지은 것으로 마무리하면서, ‘성막’이라는 주제를 다시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서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고, 성막과 성전까지 주신 그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었느냐는 부정적인 이야기로 구약 시대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약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은 현재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을 그대로 본받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악행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초대 교회를 박해하는 것, 그리고 무죄한 스데반을 성전 모독죄와 율법 모독죄로 모함하여 고소한 것은 모두 그들 조상의 악행과 동일선상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기에 대한 변호를 마친 것입니다.
1. 성소의 역사(44-47v)
저는 지난 수요일에 모세의 시대를 ‘하나님의 한없으신 은혜와 인간의 변함없는 반역’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이 두 주제 가운데 ‘하나님의 한없으신 은혜’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내는 기간 내내 하나님을 거약하고 우상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증거의 장막’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증거의 장막’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들고자 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모세의 아이디어도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의 조상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던 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증거의 장막’을 소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신 분이시고, 그 성막을 어떤 모습으로,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할 것까지도 직접 계시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것을 제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여기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막’이라고 알고 있는 그것을 ‘성막’이라고 부르지 않고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성막에는 여러 이름이 있었고, ‘증거의 장막’ 역시 그 많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스데반이 그것을 무엇보다도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그 ‘장막’이 있다는 것은, 그 장막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그 장막은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세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장막이 무엇을 증거하는 것일까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장막! 하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계속 들으면 비록 ‘성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별로 그 분위기가 밝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 지적한 것처럼, 스데반은 그의 설교를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로 결론짓지 않고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으로 결론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막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장막’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을 증거하는 장막’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느냐, 이스라엘의 반역을 증거하느냐 하는 부분에 있어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이 부분은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45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모세로부터 그 증거의 장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들어올 때에 그것도 함께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윗 왕의 통치 때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막’은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증거하고 이스라엘의 범죄를 증거하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윗이 자신은 궁궐에 거하는데 하나님은 천막에 거하는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여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6절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이렇게 보면 ‘성막’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모세를 시켜 그것을 건립하게 하셨지만, ‘성전’의 경우에는 다윗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졸라서 그것을 건설하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해달라고, 건축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성전 건축을 소원한 다윗에게는 성전을 건축할 자격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47절이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고 한 것처럼 그의 아들인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다윗은 안 되고 솔로몬이어야 하느냐 하는 부분은 사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마치 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모세는 안 되고 여호수아여야 하느냐 하는 질문과도 비슷한 부분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있어서,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어떤 이유로 한 사람에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을 소원한 다윗이 성전 건축을 허락받지 못한 것에는 여러 이유도 있지만, 그 중에 하나, 오늘 주제와 연결시켜서 본다면, 성전의 건축에 있어서도 성막 건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유언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성막을 건립한 것처럼,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보여주는 것은 뒤이어 나오는 48절 이하의 내용이 보여주는 성막과 성전이 가지는 부정적인 측면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처소(48-50v)
성막이든 성전이든, 또 모세이든 다윗이든 솔로몬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든 아니면 자발적인 것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고,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세를 통해서 지어진 ‘성막’과 솔로몬을 통해서 지어진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게 그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48절은 성막과 성전에 대한 충격적인 결론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성막이 지어졌고, 성전이 지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기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막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성전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요? 예! 본문은 분명이 계시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다윗을 통해서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1)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을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성막과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대상 28:19 “다윗이 가로되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기 거주하기 위해서 성막과 성전을 짓도록 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본문 48절 하반절부터 읽습니다. “선지자의 말한바(49)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50)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안식할 처소를 사람이 만들 수 있을까요? 사실... 지혜로운 솔로몬은 자신이 성전을 짓지만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역대하 6장 18-20절입니다. “(18)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전이오리이까(19)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20)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솔로몬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지은 성전이지만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곳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눈을 들어 주야로 보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성막과 성전은 무엇을 ‘증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반역’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끝없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과 눈을 두기로 하신 그 결단과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성전과 성막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이스라엘을 편들어 누가 와도 다 무찔러주시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신다는 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이름과 눈을 두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요구하고 지켜보신다는 표시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3. 항상 성령을 거스림(51-53v)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막과 성전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혜’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마음대로 행하면서,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거르려 행하면서도 성막이 있고 성전이 있기 때문에 어떤 해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패하거나 망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일방적인 믿음’이었을 뿐, 하나님의 의도하심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헛된 믿음이요 그들만의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목이 곧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교만하고 고집이 센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몸에는 할례를 받았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고,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거나 그분의 음성을 들을 귀조차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 일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란 선지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핍박했습니다. 의인이 오시리라고, 메시야가 오시리라고 예고한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실제로 그 의인, 메시아가 왔을 때에는 그를 잡아주었고, 살해했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율법을 가져다주면 무엇 합니까? 성막과 성전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율법을 줘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키지도 않고, 성막과 성전을 주어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려 행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성전 모독죄, 율법 모독죄로 잡아 죽이니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또한 그랬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성령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이었고 거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막과 성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과연 그들을 향하여 무엇을 증거하겠습니까? 율법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45절에서 “(45)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46)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율법을 모독하고, 율법의 전달자인 모세를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늘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단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예수님을 죽이고 초대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고소하여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 손가락질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조상들의 모습이 그들이 모습이듯, 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이런 어리석음, 이런 하나님에 대해 거스르는 모습과 태도가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데반의 아픈 지적을 우리를 향한 지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해야 합니다. ‘까불더니 잘 됐다. 못되게 굴더니 호되게 당하는구나’하고 고소해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을 모독하고, 말씀을 모독하고, 성전을, 교회를 모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던 것처럼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